〈 175화 〉 1학기 모의 실습_네비로스의 미궁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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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평원 위에 비가 내린다.
광활하디 푸르렀던 평원은 온통 새빨갛다.
핏물로 겉면이 끈덕진 창과 칼. 냉병기들. 이미 썩었거나, 썩어가는 중인 사체들. 그 위로 새로이 쌓여가는 고깃덩이.
인간의 팔뚝이기도 하고, 다리이기도 하다. 어느 때는 찢어진 날개. 부러진 뿔. 구분 없이 뒤엉킨다.
살을 에는 칼바람이 훅─ 불어오면, 누군가의 절삭된 경동맥에서 뿜어지는 피분수가 가늘게 흩날리며 빗줄기처럼 내린다.
우와아아─ 처절한 외침이 평원 위에 메아리친다. 끄아아악─ 연이어 외마디 비명이 울린다.
목이 댕겅─ 잘려 나간 동료 기사의 모습을, 축축한 잔디 위에 누워 죽어가던 기사가 고요히 지켜본다.
철퍽─ 철퍽─
갓 죽은 시체를 짓밟자 핏물이 울컥거린다. 평원은 발 디딜 틈도 없이, 잘게 저며진 고깃덩이와 차가운 금속으로 가득하다.
오늘이 몇날 며칠인지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동이 트고, 해가 진다. 그것의 무한한 반복이었다.
시력을 잃은 병사가 널따란 하늘로 고개를 돌린다. 그러자 서늘한 빛이 목덜미를 감싼다.
병사는 볼 수 없다. 허나 병사는 문득, 그것의 정체를 경험으로 알아채고 말았다.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왕국은 ‘경계’에서 가깝진 않았으나 그리 멀지도 않은 위치에 자리했다. 때문에 전쟁의 신호탄이 터졌을 당시, 왕국에 주둔한 병력과 연합군의 지원을 믿고서 왕태자는 연합군 소속의 장교로 참전했다.
장교. 왕태자에게는 그럴 만한 능력이 있었다.
그는, 열아홉의 나이로 소드마스터였다.
연합군이 주둔한 위치가 발각당했다. 늦은 밤 마족들의 습격이 지상과 공중을 가리지 않고 쏟아졌다.
사흘 밤낮을 사투하여 인간 측은 끝내 승리를 거두었다. 쾌거라 부를 수 있을 만한 승리였다.
왕태자는 연합군의 원정대에 합류하려 했지만, 이튿날 매의 다리에 묶인 전서가 날아왔다.
왕국에 마족의 군세가 처들어왔다.
그들은 대규모 전이(??) 마법을 이용하여 왕국의 변경 지역에 군대를 이끌고 나타났다.
다만 왕태자의 예상대로 왕국은 마족의 침략을 순조로이 방어해냈다. 형세는 좋았다.
좋았었다.
마족의 군단장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왕국의 변경백이 죽었다. 요새는 함락당했고, 방어선이 뚫렸다. 요충지는 점거당했다. 이제 천군과 만군을 얻은 마족의 군세는 로트힐드 평원을 가로질러 왕도로 진격할 것이다.
그 길목에서, 전세는 다시 한번 뒤집혔다.
왕태자는 전서를 보았을 때부터 연합군을 이탈한 상태였다. 마계 원정대의 상황이 순조로움에 따라, 본디 왕국 소속이었던 기사단과 연합군의 군대 일부를 이끌고 왕국으로 회군했다. 다만 군단장을 죽일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했다. 해서, 원군을 요청했다.
이제 이웃나라의 군대가 지원을 올 것이다. 어린 왕태자의 노력이 빛나는 순간이었다.
왕태자는 왕국을 수호하기 위해 평원으로 빠르게 향했다. 로트힐드 평원은 넓고 넓어서, 진출하는 데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왕태자는 그리하여 마족의 군세와 맞닥뜨렸다. 원군도 때마침 도착했다.
그들은 합류한 뒤 지축을 울리며 진격했다. 하나의 외침을 모아 하늘을 꽉 메웠다.
왕국을 지켜라─!
군대가 괴멸했다.
원군은 이미 왔다. 다 죽었다. 핏빛으로 물든 언덕 위에서 군단장 칼바로트는 기사의 목을 잡아 뜯었다. 투구를 우그러뜨렸다. 인간의 몸이 젖은 수건처럼 쭉 짜였다. 물이 뚝뚝 떨어졌다. 핏물이었다.
창은 박히지 않고, 철갑 안의 살갗은 갑옷보다 더 단단했다. 마법도 먹히지 않았다. 악마란 본디 마의 극한에 달한 이들이었던 까닭이다.
칼바로트의 날갯짓이 한 번 펄럭일 때마다 땅이 뒤집히고 칼바람이 상흔을 새겼다.
쿠오오오─
군단장이 포효하자 고막이 터져 나갔다.
가소롭구나─
소드마스터의 검기도 소용없었다. 작은 생채기만 날 뿐이었다. 군단장은 생채기를 힐긋 보며 광소를 흘렸다. 일 초도 지나지 않아 살이 재생되었다.
─저하. 저하께서는 반드시 살아남으셔야 합니다.
승산이 없다. 퇴각해야 한다.
퇴각하면, 최후의 방어선이 뚫린다.
이대로 군단장이 진격하면.
원군이 오기 전에, 왕국은 함락당할지 모른다.
군단장 단 한 명에 의해.
……왕태자는 결심을 했다.
─퇴각한다.
돌을 씹는 심정으로 퇴각을 결정했다. 다만 완전한 퇴각은 아니었다. 지원이 올 때까지 전선을 조금씩 후퇴하며 시간을 버는 것이다.
……마계 원정대에 인계의 최중요 자원들이 대거 투입된 바, 군단장이란 존재를 막을 수 있을 만한 원군이 와줄까.
왕태자는 상관하지 않았다. 이웃나라와 연합군 측에서 원군이 오려면 멀었다. 그때까지 버텨야 하는 건 자신들이었다.
이 몸,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왕국을 수호할 것이다. 반드시 지켜내고 말 것이다. 조국을. 백성을. 평화를.
그리고…… 가족을.
……원군은 오지 않았다.
오지 못한 건지. 상황을 알 수 없었다.
반면 전황은 확실하다. 밀리고 있다. 처참하게.
왕태자는 본인이 절대 죽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여, 어떻게든 살아남는 데 성공했으나, 그 길목에는 수십 수백의 목숨이 늘어서 있을 것이었다. 익숙한 낯의 기사들이 처음 보는 얼굴로 죽어 있는 모습을 보았다. 죽음은 단 한 번뿐인 까닭이다.
왕태자는 오늘이 몇 날 며칠인지 기억하지 못했다. 자세한 달과 일수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왕국을 떠난 이후로부터 몇 날이 지났는지는 익히 알고 있었다. 매일 밤마다 꾸준히 세고 있었다.
오늘은 서른 번째 날이었다.
왕태자가 죽었다.
군단장 칼바로트가 던진 창에 꿰뚫려 죽었다. 앞을 막는 방어막도, 무기도 전부 부수고 직격했다. 그동안 군단장은 제 힘을 전부 드러내지 않았던 것이었다.
죽어가면서, 왕태자는 어느덧 한 자릿수밖에 남지 않은 기사들에게 무어라 말했다. 말하려고 했다.
입이 열린 순간 피를 토하고 죽었다.
왕국의 별 하나가 그렇게 빛을 잃었다.
……왕태자가 부활했다.
죽음 직후의 순간이었다.
왕태자는 모든 순간을 기억하고, 곧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는 힘을 느꼈다. 대가로 받은 힘. 지켜야 하는 걸 지킬 수 있는 힘. 계약은 충실히 이행되었다.
왕태자는 일어서서 지축을 밟았다. 빛이 터지고 화염이 솟았다. 왕태자는 기사들에게 미처 전하지 못한 말을 끝마친 뒤, 평원을 쿵─ 쿵─ 울리며 진군하는 마족들의 군세를 향해 몸을 던졌다.
─할튼 경. 레이첼 경. 그리고, 자네들……
기사들은 살아남아 전장을 이탈했다. 왕태자의 마지막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낯짝을 비참함으로 일그러뜨리며 왕도로 달려갔다.
─내 누이동생을 지켜다오.
왕태자는 본인의 최후를 예감하고 있었다.
군단장은 쭉 지켜보았다. 어린 왕태자의 무위를. 단련된 일신을. 만용이 아닌 용맹을. 그리고, 군단장은 생각했다. 인간은 과연 성장이 빠르군.
하지만 부족하다. 그는 결국 죽었다.
─말도 안 되는.
죽음에서 돌아온 왕태자가 군단장의 앞에 섰다.
그의 앞을 막아선 마족떼를 전부 도륙하고서.
─……크하하하하하!
끝내 결연한 의지로 충만해진 왕태자의 진홍색 눈을 마주한 군단장 칼바로트가, 미친 듯 크게 웃어젖혔다. 뿔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다음 순간 콧김 새는 희열과 함께 날개를 펄럭였다.
─인간. 날 이겨 보아라. 그때 널 인정해주마.
─쿨럭, 컥… 어떻… 게……
군단장의 유언은 볼품없었다. 왕태자는 군단장의 목울대에 칼을 꽂고 비틀었다.
콰직─
살을 찢으며 뽑았다.
푸확─
피분수가 솟구쳐 나왔다. 끊임없이 콸콸 흘렀다.
그때, 후우웅─ 매서운 칼바람이 불었다.
푸른빛의 선혈이 후두둑 흩날려, 평원 위에 빗줄기처럼 내렸다……
……왕태자는 승리했다.
쿠웅─ 칼바로트의 거체가 무너지자 널따란 평원에 큰 진동이 두어 번 일어났다. 대량학살을 벌였던 무시무시한 괴물이 마침내 쓰러졌다.
남은 마족들은 발이 빠져라 도망쳤다. 왕태자는 그들을 모두 쫓아가 베어 죽였다. 그러자 주위에 왕태자를 제외한 생명체는 무엇 하나 남지 않게 되었다.
빛이 꺼지고 평원은 곧 어둠에 휩싸였다.
─……밤이구나.
서른 번째 밤이었다.
콱─ 콱─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걸음을 옮길 때마다 칼을 바닥에 꽂아 넣길 반복하며, 왕태자는 부러진 팔과 다리로 왕도를 향해 걸어갔다. 죽은 자의 시체만 남은 평원 위를 홀로 걸었다. 깊고 검은 장막이 너울거리는 하늘 아래로 향했다.
전부 끝났으니, 이제 돌아갈 일만 남았다.
왕태자는 문득 빙그레 미소 지었다.
아버님, 어머님. 그리고 나의 동생아.
제가, 지켜냈습니다.
제가……
콱─ 검을 바닥에 꽂았다.
그리고 뽑지 못했다.
……왕태자는 문득, 평원 위를 밝게 비추는 환한 보름달을 올려다보았다.
까만 하늘 가운데 오롯이 떠올라 있던 달은, 갑자기 왼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었다.
어느 순간 확─ 꺾였다.
노면에 꽂힌 칼자루에서 손이 떨어졌다.
철퍽─
왕태자의 바로 옆에 자리한 시체가 움찔거렸다. 끝내 왕태자는 고개를 들지 않아도 달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너무나 선명하고 구붓하게 떨어지는 달빛이, 왕태자의 창백한 얼굴을 포근하게 감싸주었다.
─이상, 하구나……
왕태자는 팔을 들려 했다. 들리지 않았다.
감각이 희미하다. 선명하던 달빛은 점점 엷어졌다.
지켜냈다. 전부 지켜냈으니.
이제 돌아가야 하는데……
─싫어어어… 오빠아아아……
왕태자는 느려지던 심장이 저미는 것을 느꼈다.
─가지 마아아…… 흐끅, 흑, 흐흑……
봐라…
누이동생이 서럽게 울고 있지 않나.
그 칠칠맞은 것이, 날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 텐데…… 그러니, 어서 돌아가야 한다……
평생토록…… 이 오라버니가 지켜주기로 했으니…… 그 어린 것…… 나의 하나뿐인…… 귀여운 누이동생을……
─음, 음. 역시 묶음머리가 잘 어울리는구나. 정말 예쁘다, 유리. 너도 마음에 들었다면, 오랜만에 오라버니라 불러주지 않으련…?
─싫거든, 오빠.
……하하.
다음에는……
조금 더…… 예쁜 리본을…… 사주도록 할까……
……
너에겐… 미안한 일이 많았구나……
하지만 이젠 괜찮다…… 전부 다 끝났으니…… 너와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도 많아질 터다……
좋아하는 간식도, 바깥 여행도, 마음껏……
……그러니까, 기다리거라……
이 오라버니가, 반드시……
……
……하하.
이렇게나 힘든데……
네 생각만 하면… 웃음이 나는구나……
……
……유리.
역시, 너는 나의……
가장 큰……
축복이란다……
……
………
……………
………………
돌아가지 못해서, 정말 미안하다.
……뒤늦게 원군이 도착했으나, 그들은 곧바로 돌아가야만 했다.
미소를 띤 채 잠든 아이델의 사체는, 하늘을 유영하던 한 마족이 내려와 조용히 아공간에 넣어 회수해갔으므로……
#59
“……오빠.”
아이델은 어쩐지 익숙한 부름을 들었다.
그러나, 음색은 조금 다르다……
새까만 밤. 깊고 어두운 밤. 사방이 까맣다. 온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무겁다. 그토록 처절한 전투를 치렀으니 당연한가……
돌아가야 한다. 지켜야 한다. 돌아가야 한다. 지켜야 한다── 동굴 속 메아리처럼 머릿속을 울리는 마음의 소리를 꺼뜨렸다.
왜냐하면, 지켜냈기 때문이다. 서른 번째 밤을 지나지 않고, 돌아왔기 때문이다.
“오빠.”
다시 한번,
짧은 부름이 이어진다.
……
아이델은 슬며시 눈을 떴다. 임시로 회복된 시력이 흐릿한 잔상을 잡아낸다. 세 개로 겹쳐 보이는 실루엣. 하나 줄어서, 두 개로. 눈꺼풀을 깜빡이며 차츰 시력을 되찾아간다. 다시, 깜빡.
그러자, 마침내── 하나로.
“오, 빠.”
세 번째 부름.
아이델은 비로소 앞을 보았다.
차가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오른 손목이 없는 자신 앞에, 일견 처음 보는 숙녀(??)가 조신히 눈높이를 맞추어 앉아 있었다.
……눈시울은 잔뜩 붉어져, 입술을 꾹 깨물고, 콧잔등을 구긴 채 눈썹과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헤진 복장. 먼지가 묻었으나 그럼에도 새하얀 피부. 작게 쥔 주먹은 자기 허벅지 위에 올라가 있고. 나머지 한 손은, 자신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그리고 아이델은 보았다. 이 숙녀의 얼굴을, 더욱 자세히 보았다. 충혈된 눈가보다도 더 붉고, 루비를 갖다 박은 듯 찬연히 빛나는 진홍색의 눈동자. 눈물로 축축한 볼에 달라붙은, 순금빛의 실가닥.
이렇게 아름다운 숙녀를, 아이델은 알지 못한다. 물론 다 큰 어른처럼 성숙하진 못해도…… 충분히 숙녀라 부를 만하다.
한데 왜 울고 있는 것일까. 이리도 서글피 울음을 참고 있는 이유가, 대체 무얼까……
“오, 라버니.”
마침내 그 목소리가 닿았을 때.
아이델은 그녀의 고개가 아래로 차츰 내려감에 따라, 뒷머리에 달린 머리장식을 더욱 확실히 볼 수 있었다.
다만… 그것이 없었더라도.
아이델은 이처럼, 빙그레 미소 지었을 것이다.
“……너무 잘 자랐지 않느냐, 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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