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9화 〉 막간
* * *
후우우웅─
“흐앗, 바람이……”
내가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와 똑같이,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손등으로 앞머리를 고정시키는 환자복의 연분홍빛 소녀.
루비아였다.
잘 익은 복숭아처럼 풋풋한 색감의 머리칼은 반질하게 윤이 흘렀다. 어둑한 그림자와 대조되는 흰 살결이 은은한 광택을 흩뿌렸다. 보아하니, 이제는 어느 정도 예전의 모습을 찾아가고 있는 듯했다. 나로서는 그 변화가 썩 나쁘지만은 않았다.
“…어, 이, 있었네? 에지오?”
난간에 팔을 걸친 채 고개만 힐긋 뒤로 돌렸던 날 보더니 동그랗게 눈을 치뜨고, 내 존재에 당황했다는 듯 그리 더듬거리며 말했다.
“……”
“거, 거기서 뭐 하고 있었어? 난 그냥 산책 나왔는데.”
한데 묘하게 동작이 어색하고 걸음걸이도 부산스럽다. 내가 아무 말도 않고 가만 응시하자, 앵둣빛 입술을 앙다문 채 말없이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었다.
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따라왔어?”
우리들의 병실은 전부 같은 층에 있었다. 루비아의 병실은 아마 내 바로 옆 병실이었으니, 내가 문을 열고 나오는 소리를 듣고 따라 나온 걸까.
루비아는 비밀스러운 장난을 들킨 어린아이처럼 어깨를 들썩거리더니, 애써 바람을 즐기는 척하며 양팔을 살짝 벌렸다.
“아, 아닌, 아닌데? 그냥 바람이나 쐴까 해서.”
“거짓말할 거면 나 그냥 내려간다. 너는 여기서 바람 쐬고.”
멈칫.
루비아가 머쓱한 듯 볼을 긁적거린다.
“…드, 들켜 버렸네. 에헤헤.”
“에헤헤, 는 무슨.”
푹 자고 있을 줄 알았더니 잘도 깨어 있다.
슬쩍 이곳으로 다가오는 루비아를 향해 툭 물었다.
“무슨 일이야.”
“으, 응? 산책이라니까? 자다가 중간에 깨버려서, 다시 잠들기도 조금 그렇더라구. 병실에 계속 있기도 답답했구.”
“거기 엄청 넓은데다가 창문도 있는데.”
VIP들만 입원할 수 있는 호화스런 병실이라 그런지 웬만한 저택 거실만큼 크기가 널찍했다. 침대도 크고 창문도 크고 아무튼 다 컸다. 내부 설비의 훌륭함은 말할 것도 없고. 일반 가정집이랑 가구 구성에서 별 차이도 없을걸. 아마.
“그치만 혼자인걸.”
루비아가 그리 중얼거렸다.
“그렇게 넓은 데서 혼자 있으려니까, 뭔가…… 적적하더라구. 게다가 잠은 안 오는데 주변은 너무 조용해서 무섭기도 했구. 잠깐 눈을 돌린 사이에 소파에 누가 앉아 있을 것 같다거나… 왠지 천장 모서리를 바라보면 안 될 것 같은 기분…? 약간 그런 느낌…? 이, 이해돼?”
“…대충 무슨 느낌인지는 알겠어.”
한마디로 쫄려서 밖에 나왔다는 거다.
“내가 적적하다고 해서 잘 자고 있는 다른 애들을 깨울 수는 없잖아. 그래서 그냥 밖에 혼자 산책이라도 나갈까 했는데… 옆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리더라구. 왠지 에지오 너일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맞더라. 안 들키게 몰래 따라와 봤는데… 성공인 것 같네. 아하하.”
어느새 내 옆까지 다가와 조금 더 선명해진 목소리로 그리 말하는 루비아. 그녀의 음색은 어쩐지 숲속의 새소리처럼 들으면 들을수록 마음이 편안해지는 무언가가 있었다.
후우우웅……
또다시 바람이 불어왔다. 꽤나 차갑다. 앞머리가 걷혀 발랑 까진 이마가 서늘하도록 시원해졌다.
옆에 있던 루비아의 머리칼도 하늘하늘 휘날렸다. 볼에 달라붙으려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루비아가 날 힐긋 바라봤다.
“나 따라왔다며.”
“……응? 으, 응.”
내 옆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루비아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루비아가 황급히 정면으로 눈동자를 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할 말 있어서 온 거 아냐?”
“할 말? 음…… 그, 그러게?”
“그러게, 는 또 뭐야. 확실하게 말해.”
“음……”
루비아와 단둘이서만 있을 때 조금 진지한 분위기가 형성되면, 아무래도 주변 공기가 어색해지는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이래저래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마음을 완전히 터놓고 대화할 수 없게 되었다고나 할까. 사사로운 대화보다는 본론과 용건만, 이라는 느낌.
서로 언행에 있어 사소한 것 하나 조심하게 되고, 자못 민감한 주제가 될 수도 있는 말을 가급적 피하려고 한다.
……뭐가 됐든 좋은 관계는 절대 아니겠지.
한때 ‘오늘 하루 바보라는 말을 다섯 번 썼다’ 같은 굉장히 쓸데없고 하찮은 일까지 전부 공유하던 사이였는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원.
“…나도 잘 모르겠어. 할 말이 있는 걸까, 없는 걸까. 산책을 나간다고 해도 혼자 있긴 무서우니 누군가 내 옆에 있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건 맞는데, 마침 에지오 네가 보였고, 그래서 따라온 것… 뿐? 그거면, 괜찮지 않을까? 할 말이 꼭 있어야… 할까?”
루비아는 나처럼 난간에 양팔을 교차로 걸쳤다. 그리고는 중앙에 갸름한 턱을 살포시 올려놓았다. 오똑한 콧날을 따라 흐르는 누르스름한 달빛이 썩 인상적이었다.
“꼭 그럴 필요는 없지.”
내가 말했고.
“응, 그런 거야.”
루비아가 짤막이 동조했다.
“……”
“……”
뭐가 그런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는 납득했다. 의미를 더 확장시키지 않기로 했다. 굳이 장막을 들추려 하지 않았다.
“별도 잘 보이고, 바람도 시원하고 기분 좋다, 왠지.”
불현듯 루비아의 녹빛 눈동자가 하늘 위를 향했다. 곧이어 입가에도 부드러운 호선이 떠올랐다.
“도시는 다 척박한 줄 알았는데, 시골 하늘이랑 그렇게 큰 차이도 없는 것 같네. 물론 시골엔 게이트니 트램이니 열차니 같은 것들은 없지만, 이렇게 올려다보는 하늘만큼은 도시나 시골이나 똑같아.”
“그러게.”
“……으응, 여기서 이러고 있으니까 갑자기 옛날 생각도 막 나고 그러네. 그때는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깨어 있는 일이 엄청 적었는데. 너랑 밖에서 신나게 놀고 돌아오면 맨날 저녁 10시 전에 잠들었고. 그때까지 안 자면 부모님이 혼내기도 했고. 에지오 너희 집도 그러지 않았나?”
“그랬지.”
“맞다, 부모님 하니까 생각난 건데. 얼마 전에 너희 부모님 뵈었을 때 정말 예전이랑 달라진 거 하나 없으시더라. 아직도 다들 젊으시고 팔팔하시던데? 내가 다 안심이 되더라. 어디 아프신 데 없어서 정말 다행이었어~.”
“그렇구나.”
“아, 그리고 네 얘기도 많이 하셨다? 비싼 학비 들여서 멀리까지 보내줬는데 편지 한 통 없다고. 처음엔 자주 보내는가 싶다가 나중엔 석 달에 한 번 꼴이었다며? 진짜야?”
“그랬지.”
“너무하네에. 아카데미에서 잘 지내고 있는지 걱정 많이 하셨던데. …잘 지내고 있었다고 내가 말씀은 드렸지만. 아! 그래서 말인데, 너희 부모님께 안부 인사는 드렸어? 그러니까 마지막 편지 보내고 나서. 직접.”
“응.”
“그럼 알고 있겠구나, 내가 너 찾으려고 고향 들렀던 거.”
“그러게. ……아니, 뭐?”
어울려주기 힘든 화제에 대충 넋을 놓고 맞장구를 치던 중, 선명한 어조로 그리 툭 내뱉는 루비아의 말이, 불현듯 내 귓전에 날카로운 가시처럼 꽂혀왔다.
“내가 처음 찾아갔을 때, 네 부모님이 너는 아직 본가에 돌아온 적 없다고 하시더라구.”
루비아는 내 쪽을 보지 않고 말을 이었다.
“네 행방은 졸업 반년 전에 보냈던 편지가 마지막. 그마저도 딸랑 세 줄. 잘 지내고 있다, 밥 잘 먹고 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라. 이런 거였대. 그러고 작년 겨울 지나서도 본가에 안 돌아왔고. 당연히 걱정은 되긴 하는데, 은근 심지가 굳은 아들이니만큼 잘 지내고 있을 거라 하셨어. …대신 너랑 같은 아카데미 다니고 있었던 나한테 네 행방을 물어보셨지. 나는 뭐라고 답했는지 알아?”
알 턱이 없었다. 나는 침묵했다.
루비아가 자조하듯 입을 열었다.
“사실은 아버님과 어머님 아들이 실종됐어요. 어디 갔는지 저도 몰라요. 게다가 아마 죽었을 수도 있어요. 그래서 찾고 있어요. 죽을 힘을 다해서. ……라고 말할 수는 없잖아? 그러니까 적절히 대답했지.”
“……”
“에지오는 잘 지내고 있어요. 진학은 어떻게 할지 아직 잘 모르겠대요, 라고.”
“……”
“그 이상 그 이하의 말을 할 수가 없었어. 네가 잘 지내고 있다는 건… 사실은 내 바람에 가까웠지만 말야. 아하하.”
“……”
“네 부모님께서 말씀하시길, 돌아가면 너한테 언제 한번 본가에 내려오라고 한마디 해달라는데, 아니, 차라리 같이 내려오라고 하셨는데…… 그 말이…… 조금, 가슴을 쿡 찌르더라.”
저 너머 어둠에 잠긴 도시의 풍경을 바라보며, 루비아는 어설픈 웃음과 함께 볼을 긁적였다.
후우우웅─
바람이 불고, 우리 둘의 머리칼이 휘날렸다.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하던 와중, 루비아가 내 쪽으로 힐긋 시선을 던지며 물었다.
“네가 프론티어에 입학하게 된 거, 너희 부모님도 알고 계셔?”
“…아니. 모르실걸.”
아직 말한 적 없다.
이런 몸이 되고 나서 생존 신고 정도는 일전에 했지만, 프론티어에 진학하겠단 목표는 그 당시에 존재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그냥저냥 로르센 아카데미 고등부에 진학하지 않을까, 같은 말을 했다.
학비 문제 관련해선 장학금 받을 것 같다고… 그런 아무도 믿지 않을 새빨간 거짓말을 쳤지만 실제로 틀린 말은 아니게 되었다.
프론티어 에픽 클래스의 학생들은 모두 전액 장학생이었으니까. 평생 학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너희 부모님은?”
“알고 계셔.”
“…그렇구나.”
다만, 입학식에 루비아의 부모님은 불참이었다. 아마 사정이 있었겠지. 내가 상관할 문제는 아니었다.
“마을에는 벌써 다 소문이 난 모양이더라. 경사라나 뭐라나. 제르망 아저씨 알지? 그 아저씨가 이번에 기숙사로 입학 선물도 보내주셨어. 소포 크기가 꽤 컸는데, 열어 보니까 다른 마을 사람들 선물도 같이 들어 있더라구. 노트니 필기구니… 수제 곰돌이 인형도 들어 있더라. 내가 보기엔 디오니 걔가 만든 것 같아. 걔가 예전부터 인형 만들어서 나눠주고 그랬잖아. 실력 많이 늘었더라~.”
“그렇구나.”
“응, 그리고 에지오 네 부모님한테서 온 선물도 있었어. 아직 뜯어보진 못했지만.”
“……그래?”
“응.”
나한테 온 건 없었다. 그러니까, 마을 사람들은 내가 여기 입학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
전쟁이 한창일 때도 나름 평화로웠을 만큼 외지고 한적한 시골이었으니, 굳이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지 않으면 올해 에픽 클래스 신입생 명단 같은 걸 확인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근데 관심을 안 가졌을 리도 없단 말이지.
다만, 루비아도 내가 여기 입학했다는 걸 입학식 이후에 알았다. 애초에 뜬소문만 무성하지 정확한 신입생 명단 같은 건 세간에 공개된 적도 없었다. 그것들도 엄연한 개인 정보였으니까.
물론 귀족들의 경우 에픽 클래스 학생이란 그 자체가 굉장히 명예로운 꼬리표인지라, 알아서들 떠벌리고 다니는 경우가 잦다. 그러니 대부분은 알려졌을 거고… 아마 내가 입학한 사실에 대해선 루비아가 말하지만 않는다면 계속 모르고 계실 것 같은데.
아닌가. 요 근래 이런저런 사건 사고가 잦아서 신문 기사에 내 이름이 실리기도 하는 터라, 어찌어찌 그 외진 시골까지 내 소식이 흘러갈 수도 있겠다…….
“있잖아, 에지오.”
“어.”
“여기 입학한 거, 네 부모님이랑 마을 사람들한테 계속 비밀로 하고 있을 거야?”
“……글쎄.”
이제 와 딱히 숨길 생각은 아니었지만, 어쩌다 보니 숨기게 됐다. 뭔가… 새 출발 하는 기분으로 입학한 거였다 보니.
더군다나 말할 타이밍을 놓쳤다고 해야 할지. 밝혀도 딱히 상관은 없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지금은, 굳이? 라는 쪽이다.
무엇보다──.
일단 한번 말을 시작하면 어쩐지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해서도 전부 서슴없이 털어놓게 되어 버릴 것 같아서, 조금은 걱정스럽다.
그런 다음 부모님이 내보일 반응을 상상하기가 두렵다. 자기 아들이 당장 십 년 내로 죽을지도 모른다니. 그분들 성격에…… 절대 가만히는 있지 않을 거다. 안온하고 행복한 시골 생활을 즐기시는 부모님께 돌덩이처럼 무거운 마음의 짐을 얹혀드리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알리지 않아도, 언젠가는 알려지겠지.”
“그때까지 말 안 하게?”
“일단은. …그보다 내가 밝히든 안 밝히든 네가 뭔 상관이야.”
말해놓고 아차 싶었다. 당장 불어오는 바람보다 더 차가운 어조였다.
“…그렇지. 미안해. 옛날 생각이 나서 조금… 들떴나 봐.”
루비아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표정 관리를 하려는 것 같지만 여전히 미숙하다. 살짝 상처받은 듯한 얼굴이었다.
“……”
“……”
대화가 더 이어지지 않는다. 당연하다. 지금까지 대화의 물꼬를 튼 건 전부 루비아였으니, 정작 루비아가 침묵하자 우리 사이의 대화도 자연스레 끊기고 만 것이었다.
내가 먼저 입을 열었던 건 루비아에게 날 따라온 용건을 물었을 때밖에 없었다. 그 외에는 짧고 간결한 대답 혹은 되물음 뿐. 상황이 이렇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루비아와 단둘이서만 있는 상황을 불편해하기 때문이다.
“…춥다, 슬슬.”
나는 팔을 아래에서 위로 솔솔 쓸었다. 다음에 이어질 말은 루비아도 언뜻 예상하고 있을 것이었다.
이제 돌아가자──.
“이…”
“유리 말야.”
내 입이 살짝 벌려진 상태에서 다시 닫혔다.
“오빠를 엄청 잘 따랐다나 봐.”
“…그야 그렇겠지. 미궁에서 있던 일을 보면.”
하는 수 없이 난간에 도로 팔을 걸쳤다.
“유리가 맨날 머리에 묶고 다니는 리본, 유리 오빠분이 여섯 살 생일 선물로 준 거래.”
“여섯 살이면…… 십 년도 넘었네.”
“그치. 그런데 새것처럼 반질반질하고 멀쩡하잖아. 분명 매일 열심히 관리하고 있다는 증거일 거야.”
“많이 소중한가 보네.”
“응, 그렇게 보였어.”
루비아가 머리를 주억이는 한편, 내 머릿속에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 있었다.
─누가… 멋대로…
미궁에서의 일이었다.
유리가 정신을 잃은 사이 혹시라도 불편할까 싶어 머리끈을 풀어주었는데, 일어나자마자 자기 머리끈을 찾더니 그게 내 손에 들려 있는 걸 보자마자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었다.
척 봐도 소중한 물건인 것 같아서 다음부턴 함부로 안 만지겠다 했더니, 딱히 특별한 건 아니라면서 말을 흐렸었다.
…아니긴 뭐가 아니냐, 이 녀석아.
하여간 솔직하지 못하기는.
“그만큼 많이 좋아하고 의지하던 분이셨대. 그랬던 오빠분께서 덜컥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으셨으니… 그때 그 시절의 유리가 얼마나 상심이 컸을지 이해가 돼.”
문득 루비아가 중얼거렸다.
“나도 만일 에지오 네가 죽는다면…”
“따라 죽을 거란 소리는 하지 마.”
일전에 루비아와 잠시 벌였었던 짧은 말다툼이 떠올라, 그리 툭 잘라 말했다. 루비아가 내게 가지고 있는 부채감과 깊고 무거운 여러 감정들의 심도를 어렴풋이 체감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응, 알았어. 안 할게.”
루비아가 쓴웃음과 함께 그리 말했다.
그러나 뭔가 께름칙한 마음에 내가 입을 열었다.
“전혀 그런 표정이 아닌데.”
“아냐, 진짜야. 에지오 네가 세상을 떠난다고 해도… 나는 내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겠다고 약속할게.”
“…효력을 검증할 수가 없잖아.”
루비아의 약속이 충실하게 이행되었는지 내 쪽에서 확인할 방법은 없다. 그때 나는 이미 죽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죽은 뒤 루비아가 날 따라 죽을지 무슨 수로 알겠는가…….
“그건… 그렇네. 어떻게 하지. 계약서라도 쓰는 게 좋을까…?”
“…됐어. 넘어가. 뭘 계약까지.”
몹시 진지한 얼굴로 그리 고민하기 시작하던 루비아를 가만 보고 있자니, 내가 다 한숨이 나왔다.
“아무튼, 에지오 너도 알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유리는 사실 정도 많고, 내면도 무지 다정하면서 착한 친구야. 내 사소한 얘기 하나하나도 귀 기울여서 잘 들어주고, 그동안 내 걱정도 많이 해줬고… 내가 힘들어하는 것 같으면 옆에서 많이 챙겨주고. 무엇보다 예쁘고, 귀엽고, 다정하고. 정말 좋은 친구야.”
……뭐지.
내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유리랑, 루비아가 언급하고 있는 유리랑 서로 다른 사람인가?
예쁘고 귀엽게 생겼다는 건 인정하겠지만.
그 외론… 힐끔 쳐다만 봐도 온몸의 털을 곧추세우며 하악거리는 금색 고양이밖에 떠오르질 않는데.
다정? 착해?
…누가?
다음 순간.
“──그런 유리가 살면서 가장 의지했던 사람이 바로 자기 오빠였어. 그러니까, 가족 말이야.”
루비아의 눈이 나를 향했다. 은은한 녹빛으로 예쁘게 반짝인다.
“에지오 너에게도 가족이 있잖아.”
…무슨 말을 하는가 싶었더니, 마을 사람들 얘기를 했던 것도 이래서였나.
나는 잠자코 침묵했다.
“예전에는 나만큼 너를 잘 아는 사람이 없었는데, 지금은… 에지오 너에 대해서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아졌어.”
루비아는 자조하듯 픽 웃으며 그리 말했다.
그리고, 이어서.
“궁금한 것도 무지 많고, 사실 당장이라도 물어보고 싶지만… 에지오 네가 나한테 마음 편히 얘기해 줄 수 없다는 걸 나도 아니까. 더 이상 네가 날 의지할 수 없다는 걸, 나도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차마 네 비밀을 나한테도 알려달라고, 네가 어깨 위에 지고 있는 부담을 나한테도 나눠달라고 부탁하진 못 하겠어.”
그렇게 말하는 시점에서 은근한 압박이 들어온다는 걸 아는 걸까 모르는 걸까, 얘는…….
“그러니까… 나는 네가 가장 의지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의 자격이 더 이상 없지만, 에지오 너의 부모님들은 아니잖아.”
“……”
“그분들은 네가 아프거나 힘들면 무슨 일이 있어도 전부 내팽개치고 네 곁으로 한걸음에 달려와 주실 만큼, 널 많이 아끼고 사랑해주시는 분들이지?”
“……뭐, 그렇지.”
순순히 동의했다. 외동인 만큼 더 신경 써서 보살펴주신 것도 있고. 객관적으로도 참된 부모님들이라는 건 확실하다.
“내가 이런 말 해도 될 입장인진 잘 모르겠지만──”
“모르는 것도 참 많다. 정 힘들면 부모님한테라도 얘기해라, 대충 이런 뜻이지?”
“…어? 아… 음, 으, 으응.”
루비아가 떨떠름히 머리를 작게 끄덕였다.
무슨 의도로 한 말인지는 알겠다.
어쨌거나 당장 루비아는 내게 궁금한 점이 한가득일 터다. 미궁에서 마신과 나누었던 대화나.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이나. 내 몸이 이렇게 된 이유라든가. 앞으로 십 년밖에 남지 않았다든가…….
근데, 나도 아직 정리가 안 됐거든.
누구한테 털어놓고 자시고…… 애초에 뭘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다. 나조차 혼란스러운데 상대방은 오죽할까. 온통 뒤죽박죽인 이야기를 이해하는 것조차 한세월이 걸릴 거다. 이야기를 제대로 시작하기도 전에 내가 먼저 지치게 생겼다. 이걸 뭘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같은 생각으로 꽉 들어차서.
“딱히 너한테 말하기 곤란한 내용도 아니긴 해.”
“……어?”
설마 그런 말이 내 입에서 나올 줄은 몰랐다는 듯, 루비아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나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네 생각만큼 내가 널 의지하지 않는 것도 아냐. 나한테 네가 어떤 의미였는지 너도 잘 알고 있었잖아. 안 그래?”
내가 힐긋 돌아보며 그리 묻자,
“……나 안 불편해?”
루비아는 어쩐지 울 듯한 얼굴로 반문해 왔다.
미간을 검지로 꾹꾹 누르던 내가 말했다.
“불편하지. 당연히.”
“읏.”
루비아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아까에 이어 두 번째로 상처받은 듯한 기색이었다. 풀 죽은 듯 눈동자가 아래로 스르륵 내려간다.
저런 표정을 지어도 어쩔 수 없다. 날 더 이상 평범한 친구로 볼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한 녀석이랑 편하게 대화할 수 있을 리가 있나.
이렇게 된 거 조금 짓궂게 나가기로 했다.
“그냥 불편한 것도 아니고, 요즘 너랑 단둘이서 이렇게 대화할 때가 제일 곤란하고 불편해.”
“윽”
“네가 계속 내 눈치 보는 것도 불편하고, 딱 봐도 불편한 티 내고 있는데 자꾸 옆에서 말 거는 것도 불편해.”
“으읏”
“옛날 추억 얘기 같은 불편한 화제 꺼내서 자꾸 분위기 불편하게 만드는 것도 불편해. 나 몰래 옥상까지 따라온 것도 불편해. 허락도 안 했는데 내 옆에 바짝 붙으려고 하는 것도 불편해. 그냥 불편해. 다 불편해. 아무튼 불편해. 어쨌든 불편해.”
“……에지오, 나 울 것 같아.”
“울어도 돼. 내가 허락할게.”
“……너무해, 에지오.”
투정 부리듯 입술을 삐죽 내밀던 루비아의 눈가에는 정말로 눈물이 맺혀 있었다. 비록 흘러내릴 만큼 가득 차올라 있진 않았지만, 조금만 더 자극하면 속상한 마음에 펑펑 울어 버릴지도 몰랐다. 워낙 눈물이 많은 녀석이니까.
“그래도.”
“…으응.”
눈꺼풀 끝에서 그렁거리던 루비아의 눈물을 내 손가락으로 슥 닦아주었다. 루비아가 눈을 잠시 감았다가 도로 떴다. 자기 얼굴로 향하는 내 손길을 피하지 않고 얌전히 받아내는 모습이 무슨 강아지 같았다.
“네가 날 걱정해서 그런 말들을 하는 거라고 생각하면, 그렇게 불편하진 않아. 오히려 고맙지. 이건 진심이야.”
“……”
결국 루비아가 내게 하고자 했던 말도 전부 날 걱정한 까닭이었다. 내 안위가 걱정되었기 때문에. 내가 감당하고 있는 짐이 너무 많은 것 같아서. 조금이라도 덜어줄 수 없을까, 하고…… 그런 마음으로 내게 선뜻 말을 걸어온 것이었다.
뭣보다 미궁 밖을 나가면 그때 이런저런 얘기도 해주기로 했으니까. 조금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나 진짜 울 것 같은데, 어떡하지…? 히끅.”
“같은 게 아니라 이미 울고 있잖아…….”
어느 무엇에 그리 마음이 찡 한 건지, 루비아는 어느샌가 은구슬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손바닥 뒷부분으로 닦아내려는 듯 열심히 부벼보지만 축축한 물기가 군데군데로 번져 나갈 뿐이었다.
눈시울도 붉고 콧잔등도 붉었다. 히끅거리는 소리와 바람 빠지는 듯한 실없는 웃음소리가 겹쳐 들려왔다.
“아, 정말, 또, 울고 싶지, 끅, 않았는데…….”
울보 중의 울보였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눈물이 흐르는 건 멈췄지만 딸꾹질은 잔여물로 남았을 즈음, 대충 루비아가 진정되었다 싶었을 때 내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자세한 건 지금 말해주긴 어렵고… 궁금한 거 한 가지만 물어봐. 그건 대답해 줄 테니까.”
어차피 스텔라나 뮤에게도 설명해줘야 할 것들이었다. 나와 그들이 한자리에 모였을 때 이야기하는 게 더 나을 것이었다.
……유리는 잘 모르겠다. 프론티어로 돌아온다면 그때 말해줘도 되지 않을까. 일단은 프론티어에 돌아올 수 있길 바라고 있을 뿐이다.
“…고마워, 히끅. 에지오.”
고마울 일인지는 잘 모르겠네.
하여튼, 루비아가 말했다.
“에지오.”
“응.”
“…정말, 십 년 내로… 죽어?”
작고 힘없는 물음이었다.
“……가장 물어보고 싶었던 게 그거야?”
루비아는 말없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하기야, 아닌 밤중에 날벼락처럼 시한부 판정을 받은 셈이다. 더군다나 편안한 여생도 못 보낸단다. 하루가 멀다 하고 가증스러운 마족들과 뒤치락엎치락 하게 생겼으니. 계속 프론티어에 있어도 되는 거 맞나 하는 생각도 든다. 거기에 관해선 엘레나 선배님과 상담을 해봐야겠지.
좌우간──.
루비아의 질문에 대답해주는 건 어렵지 않았다.
고민도 없이 말했다.
“아니.”
칼같은 부정이었다.
“안 죽어. 절대로.”
나는 죽지 않는다.
어떻게든 살아 보일 것이다.
늘 그랬듯, 악착같이…… 포기하지 않겠다.
“그러니까 너도 걱정하지 마. 난 안 죽으니까.”
“……응, 믿을게.”
루비아가 안심이라는 듯 작게 웃으며 그리 말했다.
“루비아.”
“응?”
나는 옥상 난간에서 팔을 떼었다.
그리고 뒤를 보며 턱짓했다.
“돌아가자, 슬슬. 감기 걸리겠다. …아니면 넌 여기 더 있을래? 난 내려갈 건데.”
“……아, 아냐. 너랑 같이 갈래.”
“그래, 그럼.”
바깥바람은 여전히 차다. 루비아의 생활마법으로 몸을 따뜻하게 덥힐 수야 있겠지만, 그건 딱히 좋은 수가 아니었다.
저벅, 저벅.
옥상 문을 향해 걸어가면서.
“루비아.”
“…어?”
날 옆에서 힐긋 돌아보는 루비아에게 말했다.
“입학한 거 계속 숨길 거냐고 물었지.”
“아…… 그, 그건. 대답 안 해줘도 괜찮……”
“알릴 거야.”
“……응?”
“본가에 직접 내려가서 알릴 거라고. 아마 여름 방학에 한 번 들릴 것 같은데, 그때 말하는 게 좋아 보이네.”
경우에 따라선 이미 알고 계실 수도 있겠지만, 어차피 한 번쯤 내려가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기말고사가 끝나고 햇볕이 쨍쨍한 여름이 오면, 그때 부모님이 계실 마을로 돌아가서 잠깐 휴식을 취할 계획이었다. 물론 거기서도 훈련이나 운동은 단 하루도 쉬지 않을 테지만…….
아무튼 그런 내 말에, 루비아는 살짝 어두운 낯빛으로 볼을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아, 그러면…… 나도 가야 하니까, 어, 음…… 에지오 너 먼저 내려갔다 올래? 아, 아니면 내가 먼저 갔다 올까……?”
당연히 나와 따로 내려갈 거라 생각한 모양인지, 누가 먼저 본가에 방문할지를 물어보고 있었다. 이래저래 곤란한 상황이나 트러블이 생길까 봐 염려한 듯하다.
끼이이익─
옥상 문을 열면서 별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뭔 소리야. 너랑 나랑 같이 내려가야지.”
“……어?”
저벅, 탁.
루비아의 발걸음이 일순 정지했다.
“여름 방학 때, 본가에 같이 내려가자. 너네 부모님이나 우리 부모님이나, 겉으로 티는 크게 안 내셔도 우리한테 무슨 일 있던 건 아닌지 걱정하고 계시던 것 같은데. 그분들한테는 죄가 없잖아. 같이 가서 잘 지내는 모습 정도는 보여 드리자고.”
다음 순간.
“에지오랑… 같이… 고향에…?”
제자리에 멈춰 선 루비아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왜, 싫어?”
“──아, 아냐! 그럴 리가! 절대 안 그래! 응!”
툭 던지듯 한 물음에 거의 반사적으로 손사래를 휘휘 젓는다. 그리고는 내가 열어준 문 안쪽으로 성큼 들어온 뒤, 조그마한 주먹을 꾹 쥐었다. 한층 환해진 얼굴로 눈빛을 반짝이며 입을 연다.
“……꼭 같이 가자! 에지오!”
실로 오랜만에 보는 기운찬 웃음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