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차버린 소꿉친구와 전 여친이 같은 반이라 곤란하다-180화 (180/201)

〈 180화 〉 막간

* * *

똑, 똑─

“부국장님.”

‘재실’이란 표시가 걸려 있는 것을 확인한 뒤, 보안국 요원은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안에서 누군가 응답했다.

“들어오게. 그리고 문서는 앞 탁자에 놔주겠나. 말로 할 필요 없으니 그냥 두고 가게.”

끼이이익─

요원이 문을 열자, 그 안에는 초로의 노인이 있었다.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부국장님.”

“말로 할 필요 없다고 했잖나. 그리고 날 더 이상 그 호칭으로 부르지 말게. 슬슬 익숙해져야 하니.”

아니, 단지 그렇게 보일 뿐이다.

며칠 사이에 폭삭 늙은 헤일로 스타이튼 부국장이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자네도 참…… 그래, 뭔가? 청문회 일정이 드디어 잡혔다던가? 내 준비는 얼마든지 되었다고 전하게.”

요원은 헤일로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린 뒤 말했다.

“아닙니다. 추적자들의 성과 보고입니다.”

“……계속 말해보게.”

헤일로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추적자들이 금일 오후 9시 35분경 타나델룸 산맥 초입 지역에서 로베르 길라이틴을 발견했습니다.”

“음.”

대략 한 시간 전인가.

타나델룸 산맥이라면, 솔라 제국에서 북부로 향하는 길목이다. 헤일로의 눈빛에 이채가 깃들었다.

“포획 혹은 사살도 아니고, ‘발견’이라.”

“예.”

요원은 헤일로의 예상이 맞다는 듯 답했다.

“발견 당시 로베르 길라이틴은 사망한 상태였습니다. 추정하건대 땅굴을 파다가 산 아래로 추락해 바위에 머리를.”

“아니, 됐네. 자세한 묘사까진 필요 없네. 결국 범인이 둘 다 죽었다는 말 아닌가. 취조할 기회도 없이.”

“그렇습니다.”

미간에 파인 주름이 더욱 자글해졌다. 헤일로는 눈을 감고 잠시 무언가를 심도 깊이 고민하는 듯하다가, 느릿하게 눈을 뜨고 말했다.

“알았으니 이만 나가보게.”

“부국장님.”

“또 뭔가. 그리고 그 호칭으로 부르지 말라니까.”

“하나 더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돌겠군.”

혀를 찬 헤일로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말하게.”

“로베르 길라이틴의 시신 부검 결과, 시신이 부패한 정도가 사망 이후 최소 3일은 지난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3일? 발견한 것은 오늘이라 하지 않았나.”

“그렇습니다.”

오늘은 4월 26일 화요일.

사건이 발생한 건 이틀 전, 일요일 새벽. 정확히는 사흘 전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넘어가던 때. 범행을 벌인 뒤 로베르 길라이틴은 프론티어 밖으로 도주했다. 그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한데, 도주할 당시부터 사망한 상태였다……?

“결과의 진정성을 의심해볼 필요가 있겠군.”

부검 결과가 잘못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혹은 누군가 도주하는 범인을 죽이고, 꽤나 먼 타나델룸 산맥 초입까지 그 시체를 운반했다든가.

……대체 무엇을 위해?

헤일로가 심각해진 사이.

요원은 다시 한번 말했다.

“부국장님.”

“자네는 내 말을 대체 뭘로 들었는가?”

“마지막으로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자네 마음대로 하게. 그래, 뭔가.”

처음부터 그랬듯, 요원은 담담히 사실만을 읊었다.

“주범 네비로스─ 진명 나베리우스가, 십 년 전 대전쟁에 마족 진영 군단장으로서 참전했던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프흡.”

생명을 커피로 겨우 연장하던 헤일로는, 그윽한 커피가 반쯤 들어 있던 머그컵을 미끌 떨어뜨릴 뻔했다.

마족 군단장.

그 호칭이 의미하는 바란…….

후룩.

가까스로 침착과 평정을 유지하며 커피를 홀짝인다.

탁─

손가락으로 이마를 두드리던 헤일로가 말했다.

“피해자 진술이 드디어 끝났나 보군.”

“그렇다고 합니다.”

마냥 수사로 이틀 만에 규명될 진상이 아니었다.

그렇다기엔 스케일과 무게가 너무나도 남다르다.

일전에 침입을 허용한 적 있던 마족의 경우, 참전하지 않고 인세로 몸을 피한 악마였다.

하지만 나베리우스는 다르다.

마족 군단장.

엄연한 피해자가 존재한다.

그것도 대륙 곳곳에…….

커튼 뒤의 사실이 공표된 이후의 파장은 더욱 컸으면 컸지, 결코 작을 수는 없을 것이었다.

더군다나 기밀사항도 아닌 듯하다. 직통 연결이 아닌 보안국 요원에게 시켜 보고하도록 만든 것이 그 증거였다. 말단 요원도 알고 있을 만한 정보였다.

프론티어의 이면에 숨어든 은밀하고 비밀스런 보안국이라곤 하나, 결국 진실은 머지않아 제국을 넘어서 온 대륙에 퍼져 나갈 것이었다…….

‘벌써부터 어지럽군.’

그가 마족일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만.

부디 아니길 바랐는데…….

로베르 길라이틴이 이미 사망한 상태였던 것도.

악마의 마법으로 인형처럼 겉껍데기만 뒤집어쓰고 있었던 건가. 그리 생각하면 로베르 그 교수가 썩 가엾게 느껴지고 만다. 결국 악마에게 희생되어 죽은 몸으로 꼭두각시처럼 부려졌을 뿐이니까.

“알겠네. 후우…… 더 보고할 게 있는가?”

“없습니다.”

요원은 자신에게 단계적으로 충격을 주고 있었다.

더 없다니 참으로 다행이다.

만일 있었으면 더 이상 버티지 못할지도 몰랐다.

“그래, 그럼 돌아가게. 문은 조용히 닫고.”

“알겠습니다. 수고하십시오. 부국장님.”

끼이이익─ 쿵.

요원이 떠나가고.

앉은 자리에서 머리를 쓸어넘기던 헤일로는…… 쓸어넘길 머리가 별로 없긴 했지만, 아무튼 맨질한 이마를 손으로 감싸며 탁자를 두드렸다.

‘…이번으로 벌써 두 번째인가.’

전쟁이 끝나고 십 년.

이제야 회복하여 제대로 굴러가기 시작한 세상이, 다시금 혼란에 휩싸일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돌연.

“……음?”

탁자 구석의 통신 수정구가 반짝였다.

‘이 시간에, 이 타이밍이라면.’

발신자가 누군지 알 것도 같다. 헤일로가 손을 든 채로 잠시 고민에 잠겼다. 이걸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분명 좋은 꼴은 못 볼 텐데. 하지만 아예 받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그녀의 도움이 필요했던 까닭이다…….

“나일세. 헤일로.”

결국 통신 요청을 수신했다.

그러자.

─야 이 씨발롬들아.

걸쭉한 욕설이 첫마디부터 작렬했다.

─내가 그 지랄을 떨면서까지 개고생을 했는데, 뭐? 또 박쥐 새끼들이 침입해? 니들 미쳤냐? 어? 진짜 다 뒤집어엎어? 확?

벌써 거기까지 소식이 흘러 들어간 건가…….

헤일로가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이래서 받지 않으려고 했던 건데. 그러나 응당 감내해야 할 일이었다. 명백한 프론티어의 실책이었기에.

“진정하게. 엘레나.”

─내 이름 친근하게 부르지 마라. 진짜 죽여 버리고 싶으니까. 그리고 지금 진정하게 생겼냐? 어? 내가 조심하라고 했어 안 했어?

“했지. 아주 확실하게.”

그래서 프론티어도 만반의 준비를 했었다.

결과는 실패였지만…….

─근데 뭐, 더 할 말 있냐?

“……면목이 없네.”

─쓰벌, 진짜. 미쳐 버리겠네.

헤일로 스타이튼과 엘레나 크라이모어의 나이는 꽤 차이가 난다. 당연히 헤일로가 연장자였다. 그러나 엘레나는 헤일로를 하대하는 것도 모자라 엄하게 혼을 내고 있었다.

과거의 인연이야 둘째치고, 엘레나가 워낙 안하무인인 탓도 있겠지만, 그녀에겐 헤일로와 말을 터놓을 자격 또한 있었다.

그녀는 위대한 전쟁 영웅이었으니까.

─니네 국장은 왜 또 연락 안 받는데.

“지금 많이 바쁘시다네. 나보다 더.”

사실이다. 안 받는 게 아니라 못 받는 거였다. 국장의 통신 수정구에서 빛이 꺼질 일은 당분간 없을 것이었다.

─그래, 그럼 네가 대신 침 튀기며 항변해 봐. 대체 뭘 했길래 박쥐 새끼들이 침입하는 걸 눈 크게 뜨고 머저리처럼 지켜보고 있었는지.

“계약을 맺었다고 했네.”

─얼씨구, 새끼 손가락에 걸고 약속이라도 했냐? 마족의 계약이랑 인간의 계약이랑 아주 똑같은 걸로 아나 봐?

“아닐세. 그 정도는 나도 알아.”

─그럼 뭔데. 한번 씨부려 봐.

“영()에 귀속되는 계약이었네.”

쩌렁쩌렁하던 수정구 안의 목소리가 일순 작아졌다. 낮게 기어오는 듯한 엘레나의 음성이 이어졌다.

─……자세히 말해봐.

“영()에 귀속되는 계약. 조항을 어기면 계약자의 심장이 터지게 되어 있지. 개중에는 계약자가 순수한 인간임을 증명해야 되는 조항도 명시되어 있었네.”

─계약 맺은 놈이랑 깽판 친 놈이랑 동일인물 맞냐?

“그건 틀림없네.”

─흠…….

엘레나도 납득한 걸까. 하면 자연스레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인간임을 증명했음에도 마족의 소행으로 드러났다, 라…….

─그 새끼 이름이 뭔데. 가명 말고.

엘레나의 날카로운 물음에, 방금 요원의 보고를 떠올린 헤일로가 답했다.

“들은 바로는…… 나베리우스라는 이름이었다네. 십 년 전 전쟁에 마족 군단장으로 참전했다더군. 들어본 적은 없네만.”

─나베리우스, 나베리우스…….

한참 말을 굴리던 엘레나는.

─아.

무언가 번쩍 생각났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틀인가 하루만에 서부 마계 전선에서 패배하고 도망쳤던 그 새끼인가……? 아니, 음…… 흐음, 그래. 아─ 땅속에서 존나 큰 구조물을 소환했다고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게 쓰벌, 너네가 빌렸던 미궁 그거 아냐? 맞는 거 같은데? 왜 대답이 없냐?

“거기까진 나도 잘 모른다네.”

서부 마계 전선.

그에 대해 헤일로가 아는 건 딱 하나뿐이었다.

하늘을 촘촘히 수놓았던 백열의 유성.

찬연하도록 아름다웠던 동시에, 무자비하도록 잔혹했던 연쇄 융단폭격.

천체의 힘을 빌려 악을 심판했던 백작.

아니, 지금은─ 공작.

인계 연합군의 원정대가 서부 마계를 정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공헌 중 하나.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대업이자 일화는 그로부터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전해지고 있다.

한데 말 그대로 영혼을 갈아 넣어 인류를 구원한 것인지, 전례 없는 대마법의 후유증으로 어떠한 가르침의 요청에도 응하지 않은 채, 펠트라인 공작령 저택에서 운신을 하고 있다는 소식밖에 들리지 않는다만…….

“허나… 연관이 아예 없다고 볼 수는 없겠군. 이번 사건의 주 피해자 중, 펠트라인 공작의 수양딸이 포함되어 있었으니 말일세.”

펠트라인 공작은 유성우가 쏟아진 하늘 아래 별의 선물처럼 떨어져 있던 여아(??)를 거두어 양녀로 들였으며, 그 아이는 펠트라인 공작가의 비호 아래­ 뭇 귀족들의 무수한 구애를 받는 기품 있고 우아한 귀족 영애로 자라나, 더없이 출중한 재능을 입증하여 현재 프론티어에 재학하고 있다.

역사에 기록된 사실보다는 마치 동화나 하나의 전설 같은 이야기였다…….

─그 애를 노리고 범행을 벌였다는 말? 자길 엿 먹인 놈의 자식을 죽이려고? …속이 좁아도 정도가 있어야지, 뭔.

“자세한 건 나한테 묻지 말게. 범인들은 이미 다 죽었고, 피해자들의 진술은 방금 확보되었네. 차차 진상을 규명해야겠지.”

─후, 아무튼. 이미 뒤졌다니 그나마 다행이네. 안 그랬으면 내가 또 전국 팔방으로 쏘다녀야 했을 뻔했잖아. 무슨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 놈이라길래 잡을 수 있을지 없을지도 잘 모르겠었는데, 거…….

일거리가 하나 덜어져서 그런 걸까. 엘레나는 수정구 너머에서 혀를 차며 치익─ 하는 소리를 내었다. 연초에 불을 붙이는 듯했다.

─인간인지 마족인지 이제 다 됐고, 내 후배들은.

“음?”

─피해자들, 멀쩡하냐고.

하루종일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헤일로 부국장은, 문득 입꼬리에 느슨한 웃음이 걸리는 것을 느꼈다.

한편으론 저리 쿨하게 안부를 묻는 엘레나의 태도에 닭살이 오소소 돋았다. 피해자 ‘들’ 이라니. 엘레나가 본인에게 진정으로 묻고 싶은 것은 단 한 명의 소식뿐일 터다…….

“아…… 그렇지. 다행스럽게도 다들 멀쩡하다네. 지금쯤 무사히 퇴원 절차를 밟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대악마 같은 놈 본거지로 들어가 놓고 잘도 살아있네. 징하다, 징해…… 뭐, 그 정돈 해야 내 후배 하지.

“아, 그러고 보니 그 학생이…….”

─걔는 또 왜. 뭔 일 있었냐?

헤일로의 말을 자르고 들어온 엘레나의 목소리.

언뜻 시큰둥해 보인다.

참으로 오묘한 기분을 느낀 헤일로가 말했다.

“아직 누구인지 말하지도 않았다네.”

─……이런 시발, 지금 나 놀리냐?

빠드득─

짐승 같은 으르렁거림과 함께 섬뜩한 소리가 들려오자, 헤일로는 재빨리 상황을 수습했다.

“에지오 크라닐 학생이 자네한테 요청을 하나 했다네. 자네와 내통할 수 있는 인물이 프론티어에 몇 없어서 말일세. 건너건너 나에게까지 그 소식이 흘러들어왔지. 마침 잘 되었군.”

─……후배 주제에 감히 하늘 같은 선배한테 원격으로 요청을 한다고? 제 발로 직접 찾아와서 예의 바르게 부탁하지 않고?

“연락 수단이 따로 없잖나. 일단 들어볼 텐가?”

─……씨부려 봐.

엘레나의 허락이 떨어졌다.

헤일로가 말을 읊었다.

“개인 면담 요청이라네. 자네한테 긴히 상담해야 할 문제가 생겼다는 모양이더군. 자세한 건 나도 모르니 그 이상 묻지 말게.”

─……흐음. 개인 면담이라.

보통은 다 듣기도 전에 거절의 의사를 내보이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왜냐면 귀찮으니까.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뭐 그런 이유. 하지만 지금의 엘레나는 후배의 면담 요청을 매우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었다.

“자네가 비는 일정을 고려해서 면담 약속을 잡아준다면, 내가 어떻게든 그 학생에게 장소와 시간을 전달해보도록 하지. 가능하면 지금 이 자리에서 말해줬으면 좋겠군. 며칠 뒤엔 내가 여기 더 이상 없을지도 모르니…….”

─후우­ 오케이. 알았어.

“음? 벌써 정해졌나?”

생각보다 훨씬 빨랐다.

엘레나는 꽤 바쁜 몸일 텐데.

─묻겠는데, 걔 아직 거기 있지? 그니까 프론티어.

“그야 그렇네만…….”

─그럼 됐네.

뭐가 됐다는 건지 모르겠다.

후우─

여기까지 매캐한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듯한 숨소리와 함께, 엘레나가 말을 이었다.

─나중에 알아서 찾아가겠다고 전해.

“나중……? 그게 끝인가?”

─어. 뭐. 왜. 꼬와? 너 요즘 탈모 심하다며? 자꾸 내 말에 토달면 얼마 안 남은 머리털까지 다 뽑아 버린다?

“…….”

이 서슴없는 말투는 정말이지…….

치명상에 버금가는 마음의 상처를 입은 헤일로가, 얼마 안 남은 머리털을 손으로 매만지며 말했다.

“……역시 면담 일정을 확실히 잡는 게 좋지 않겠나? 그 학생도 이번 사건 때문에 여간 혼란스러울 테고, 각자 생활 패턴이라는 게.”

─뭐? 그런 걸 왜 해?

엘레나는 치익─ 새로운 연초에 불을 붙이며 말했다.

─선배가 까라면 까야지. 내빼면 뒤지는 거야.

프론티어가 한바탕 뒤집어지긴 했지만, 우리들의 일상은 정작 변한 게 없었다.

나의 경우, 돌아오는 월요일에 바로 퇴원해서 제 2학구 에픽 클래스 기숙사로 향했다. 루비아나 뮤도 마찬가지였고, 스텔라는 의료원에 하루 더 있기로 했다. 휴식이 조금 더 필요할 것 같다고.

나는 어느 정도 이해했기 때문에, 스텔라에게 푹 쉬라는 말과 함께 의료원을 나섰다.

그런 다음 강의─휴강은 없었다─도 정상적으로 듣고, 밥도 잘 먹고, 잔뜩 눈을 빛내며 이것저것 물어오는 같은 반 애들이나 선배들한테 적당히 대답해주고, 기숙사로 돌아와서 씻고, 의자에 앉아 바로 금일 강의 내용 복습하고, 과제 처리하고, 훈련장 가서 검술 · 마법 훈련하고, 가브리엘이랑 체력단련실에서 덤벨 들어 올리고…….

이번 실습과 성적 처리 등에 관련해서 타일러 교수님의 호출을 받아 교수님한테 이런저런 소리도 들었다. 교수님은 내 존재의 근원에 의문을 품고 계시는 것 같았다.

뭐 하는 놈이길래 자꾸 마족들이 꼬이냐며…….

아무튼 마침 생각이 나서, 타일러 교수님께 혹시 엘레나 선배님과 접촉할 수 있는 방법이 따로 없는지 여쭤보았다. “뭐 때문에.” 라고 하시며 이유를 물어보시길래, 개인 면담을 원한다고 했다.

굉장히 귀찮은 듯한 태도로 일관하셨으나, 연락할 수 있는 사람한테 한번 전달은 해보겠다고 하셨다. 다행이었다.

아무튼 무척 성실한 하루를 보냈다.

월요일은 그렇게 마무리가 되었다.

화요일은, 하루 일과가 전부 끝나고 나서 루비아, 뮤, 그리고 퇴원한 스텔라와 함께 제 1학구에 있는 프론티어 보안국 본부로 향했다.

원래 우리가 처음 진술했던 건 수사국 요원들이었는데, 관할이 보안국으로 이관된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세간에 그냥 민낯으로 공개되기엔 너무 스케일이 거대한 이야기라 그랬던 걸까.

아무튼 부쩍 삼엄해진 경비 및 밀착 경호와 함께 보안국 지하 밀실로 내려갔다. 거기서 꽤 높은 직책으로 보이는 보안국 사람들에게 우리가 알고 있는 정보를 차례로 진술했다.

─……황실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겠군.

다 듣고 나서 그들은 체념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튼─ 마신교. 마신. 나베리우스. 네크로맨서. 절대 게이트. 그리고 유리의 오빠. 그런 핵심적인 것들만 콕 집어 말했다.

나베리우스가 정확히 뭘 노린 건지는 말하지 않고, 그냥 우리들을 제물 삼아 마신한테 바치려 했다고 말했다. 그는 마신교의 열렬한 신자였으니까. 참고로, 나베리우스는 마족이 아니라 인간이었다─ 하지만 반쯤은 마족이었다─ 그러한 사실도 말해주었다. 논스톱으로 세 시간을 넘긴 진술의 끝에서 공개한 사실이었다.

그런 다음 일단 풀려나긴 했는데, 이걸로 끝이 아닌 모양이었다. 후에 진행될 조사청문회에서 증인 참석 요청을 받을 수도 있다고…….

“으으으, 피곤해…….”

“그러게…….”

보안국 본부를 나서서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

밖은 벌써 어둑어둑했다.

가로변에 켜진 가스등 아래를 거닐며, 내 옆에 있던 루비아가 기지개를 쭉 켰다. 앉아서 계속 말만 하다 보니 목구멍도 거칠었고. 밀실 특유의 압박감 탓에 긴장했던 근육이 겨우 이완되는 중이었다.

길었던 진술이 끝나고 난 뒤 저녁 제공을 해준다 했는데, 우리는 정중하게 거절했다. 검은 선글라스와 제복 입은 요원들이 우릴 둘러싸고 있는 가운데서 편히 밥을 먹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이제 어떻게 할까요, 여러분?”

내 왼편에는 루비아가, 내 오른편에는 스텔라가 걷고 있는 중이었다. 오른편에서 문득 그런 물음이 들려왔다.

참고로 뮤는 먼저 돌아갔다. 뭐라 말할 새도 없이 그냥 휘잉­ 하고 가버렸다. 기숙사로 향하는 트램을 타러 간 건지, 뭔지. 알 수 없었다.

“뭘 어떻게 해?”

내가 슬쩍 반문하자, 주변을 돌아보던 스텔라가 말했다.

“다들 배고프실 거 아녜요. 밖에서 먹고 들어갈까요? 아니면…….”

“잠깐만, 스텔라.”

“…네?”

스텔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둠 속에서도 은은히 빛나는 백은색의 눈동자. 별빛처럼 반짝인다. 언제 봐도 참 신기한 눈이었다.

아무튼 내가 말했다.

“너 왜 계속 우리한테 존댓말 써?”

“……아.”

이미 스텔라의 본모습을 전부 알고 있다. 나도, 루비아도. 먼저 돌아간 뮤도. 왕국에 있을 유리도. 그런데 스텔라는 꿋꿋하게 컨셉을 유지하고 있었다. 다른 의미로 대단하다.

“맞아, 나도 존댓말 쓰는 것보다 반말 쓰는 편이 더 친근하고 좋았어. 이전에는 뭔가 넘을 수 없는 계단 위에 있었던 것 같다면, 지금은 손 뻗으면 닿을 수 있을 정도로 내려온 느낌? 생사의 고비를 함께 넘겨서 그런 걸 수도 있고. 아하하…….”

옆에서 루비아도 가만 동조해 주었다.

“것 봐, 루비아도 저렇게 말하는데. 처음 보는 사람한테는 몰라도 우리한텐 반말 쓸 수 있잖아. 그때는 잘만 써놓고 지금은 또 왜 그런대.”

“으, 으음…….”

스텔라는 어쩐지 곤란한 기색으로 어물정거렸다.

“스, 습관이랄…… 까요?”

“무슨 습관?”

“늘 격식과 체면을 지켜야 한다고 하셔서……. 밖에서는 조금 자제하게 되네요. 주위에 여러분들 말고 다른 분들이 안 계신다면, 아마 말씀대로 반말…… 쓸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아, 아마도요.”

격식과 체면을 지켜야 한다, 라.

보는 눈이 많으면 안 된다 이거지.

“그리고…….”

“응?”

스텔라가 무언가를 더 말하려 했다.

나는 가만 지켜보았다.

“제가, 음, 원래 한번 어긋나면 조금 자제하기 어려운 성격이라서요……. 여러분들께 해가 될 수도 있고……. 개, 개인적으로도 그렇게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라고 생각해서……. 네…….”

땅도 구르고 나무도 타고 풀숲도 뒹굴었던 알프렌의 모습을 기억하는 나로서는, 대강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일단 한 번 말을 놓으면서 편해졌다간 꽁꽁 숨겨왔던 본모습이 자기도 모르게 툭 나와 버릴 테고, 그건 지금 스텔라의 모습이랑은 다소 괴리감이 있을 터라는…… 그래서 좀 부끄럽단 얘기인 듯했다.

하기야, 나는 몰라도 루비아는 여기 와서 처음 인연을 맺은 친구였으니. 본모습을 보인다면 은연중에 환상을 깨뜨리며 루비아를 실망시킬지도 모르겠단 생각이었을까…….

“무슨 말이야? 우리한테 해가 왜 되는데?”

물론 루비아는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스텔라가 침음을 삼켰다.

“그건…….”

“아, 그건 말야. 얘가 사실 짜증나면 시니컬하게 욕도 엄청── 으븝.”

빛의 속도로 누군가가 내 입을 틀어막았다.

스텔라였다.

“욕도, 뭐……?”

루비아가 재차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아, 아! 아하! 아하하! 누가, 누가요?! 에, 에지오 씨가요? 에지오 씨, 그런 사람이었나요! 시, 실망이네요! 아하하하! 하, 하…….”

주변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스텔라는 까치발을 들어 내 입을 틀어막은 채로, 내게 힐난의 눈빛을 보내오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나는 스텔라의 손을 붙잡아 잠깐 떼어내곤.

“──브흡. 아니, 사람이 화나면 욕 좀 할 수 있지 왜 그렇── 아악!”

“……? 얘들아?”

내가 비명을 질렀다.

옆구리에 무언가 푹 찔러 들어왔기 때문이다.

시선을 오른편으로 급히 내리니, 아랫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도리도리 내젓는 스텔라가 보였다.

“지금은 전혀 안 그러거든요…….”

내 옆구리를 다시금 쿡─ 찌르며, 입술을 삐죽인다.

“……지금은?”

“어, 들렸어?”

그 작은 중얼거림이 기어코 닿았던 건지.

루비아가 다시금 갸웃거리며 우리를 바라본다.

물끄러미──.

두어 번 깜빡인 눈꺼풀은, 곧 실처럼 가늘어졌다.

“……너네, 전에도 많이 친해 보였지. 혹시 너희 둘이 나한테 뭐 숨기고 있는 거 있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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