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2화 〉 넋두리 (1)
* * *
#1
“……이처럼 마법사가 일정 위계를 넘어서면 적성에 따라 주(?) 계열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 적성을 판단하는 데 있어선 대부분 선천적 재능─ 고유 마력, 특화 속성 등의 영향을 크게 받습니다. 이를 무시하고 적성에 맞지 않는 계열의 마법을 연마한다면…… 특화 계열은 분명 존재하나 그 외 계열에도 출중한 적성을 보이는 루비아 양, 그리고 백색(白色) 고유 마력을 보유한 에지오 크라닐 군 같은 경우가 아닌 이상──”
제펠린 폰 어니스트 교수가 나와 저 옆자리의 루비아를 슬쩍 눈으로 훑었다. 그러자 강의실 내에 있던 동급생들의 시선이 따라붙는다. 그렇게 봐도 내가 달리 할 말은 없었다…….
“우리 인간들의 제한된 수명 아래, 본인이 원하는 성취를 이룩하기란 몹시 힘들 겁니다. 엑시(6) 등위 이후의 위계는 단순히 노력만으로 올라갈 수 있는 경지가 절대 아닌 까닭입니다.”
딱, 딱─
교수는 길다란 막대기로 칠판을 두드린다. 직사각형의 칠판은 기하학적이고 복잡한 술식들로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가령 「화염」 계열에 특화된 마법사와 그렇지 않은 마법사가 있다고 쳐봅시다. 전자의 마법사가 1년 수련한 성취도와, 후자의 마법사가 4년 수련한 성취도는 거의 동일한 수준일 겁니다. 하물며 특화된 정도에서 더욱 큰 격차가 난다면, 그 차이 또한 배로 늘어나겠지요.”
범재와 천재 사이의 간극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재능.
과거의 내겐 전혀 없었던 그것.
하고 싶은 것보다도 할 수 있는 것을 먼저 찾아야만 했었으나, 결국 아무런 재능도 찾지 못해 이를 악물고 절망 속에 빠져 살았던 나 자신.
그들은 알고 있을까.
제펠린 교수가 말했듯 전(?)속성에 적성을 가진 내가, 그리 머지않은 과거에는 전교 꼴찌에 버금갔던 무재능의 극치였다는 걸.
말한 적이 없었으니 알 리가 없겠지…….
“루비아 양?”
“네, 교수님.”
아니, 루비아는 알고 있을 거다.
그때의 나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봤던 사람 중 한 명이었으니까.
“루비아 양은 입학 이후로도 기록적인 성장세를 보이고 있지요.”
“아, 아하하…….”
“제 예상이 틀리지 않는다면 곧 엑시 승급 시험을 보게 될 것 같은데, 미리 생각해 놓은 진로는 따로 있습니까?”
엑시 승급.
벌써 거기까지 갔는가.
역시 루비아라고 해야 할지…….
“아, 음. 사실 잘 모르겠어요. 제가 공간 계열 마법을 많이 공부한 건 맞지만, 전 그냥 마법 자체가 다 좋은 거라서…….”
“흐음, 주 계열을 하나만 선택하고 싶지 않다는 말이군요.”
“그, 그렇게 되려나… 요?”
루비아가 어설프게 웃었다.
“그렇지요. 루비아 양은 확실히 공간 계열에 특화되어 있는 것은 맞습니다만, 다른 계열의 성취 역시 그렇게 낮은 편이 아닙니다. 오히려 동나이대 마법사들의 평균보다도 훨씬 높은 수준이지요. 과연 세기의 천재라 불릴 만합니다. 마법적 수준이 전체적으로 매우 훌륭해요. 저 또한 한 명의 마법사로서 루비아 양에게 거는 기대가 큽니다.”
“아, 아하, 아하하하……. 가, 감사합니다아.”
방긋 웃으며 루비아의 얼굴에 금칠을 한다.
멈출 줄 모르는 제펠린 교수의 칭찬 세례에 루비아는 발갛게 물든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저 옆의 헥토르는 언뜻 고까운 눈빛이었으나, 항상 그러던 것처럼 혀를 찬다거나 하진 않았다. 낮게 침잠한 눈으로 루비아를 바라볼 뿐. 그 시선이 썩 불편하여 헥토르 쪽으로 눈길을 주었다가, 문득.
─쯧.
나와 눈이 마주친 헥토르가 미간을 구기며 썩은 표정을 짓더니, 다시 칠판과 그 앞의 교수를 바라봤다. 왜 갑자기 시비래. 머리털 뽑아 버리고 싶게.
“따라서 루비아 양은 이례적으로 세 개 이상의 주 계열을 선택해도 괜찮을 거라 전망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리했을 때 루비아 양이 들여야 하는 노력의 정도도 지금보다 세 배 이상 늘어나겠지만요.”
“세, 세 배…….”
“그렇습니다.”
교수는 고개를 주억이며 말을 이었다.
“무엇보다, 루비아 양이 만일 세 개 이상의 주 계열을 선택하고 싶다면 가장 먼저 보충해야 할 능력이 바로 「체력」일 겁니다.”
“체력…….”
“때로는 강한 마력이 강한 육체를 만들어 주기도 합니다만, 그것에도 한계가 존재하기 때문에… 본인 스스로 단련하지 않는다면 마력 회로에 금방 과부하가 걸릴 겁니다. 실제로, 아카샤의 별에 입탑한 마법사들 중 절반 이상은 웬만한 기사만큼의 지구력을 갖추고 있다고들 하지요.”
“그럼 교수님도…….”
“예, 맞습니다. 저 또한 여러 신체 운동을 겸하고 있지요. 시간적 여유가 부족해도 늘 일정 횟수 이상의 루틴을 매일 반복하고 있답니다.”
“그, 그렇군요…….”
어쩐지 손등에 돋은 힘줄이 심상치 않다 했다.
“이는 다른 학생 여러분들께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지론입니다. 대다수의 초등부와 중등부 아카데미에서 괜히 체력 훈련 교과목을 편성하는 게 아니랍니다. 이제 아시겠죠?”
교수가 우리를 돌아보며 진지한 눈빛으로 말한다.
“명심하세요. 체력은 국력입니다.”
그 강렬한 눈빛을 마주하며, 나는 제펠린 교수와 묘한 정신적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2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입니다.”
제펠린 교수도 이러저러 바쁜 모양인지, 벽에 걸린 시계를 힐긋거리며 평소보다 대략 10분 정도 일찍 수업 종료를 알린다.
“제시했던 과제를 기한 내에 제출하실 수 있도록 하시고, 가급적이면 외부 활동을 삼가주시길 바랍니다. 여러분들의 학업 활동에 추가적인 지장이 생기지 않았으면 하는 저희 교수진들의 바램입니다.”
중간고사가 끝난 게 당장 저번 주인데, 제펠린 교수는 꿋꿋하게 웃는 낯으로 과제를 선뜻 얹어주고 있었다.
심지어 레포트 형식이다.
중간고사 때 학생들이 시연한 마법들의 피드백을 오늘 강의에서 진행했고, 간단한 개선 방향과 추가 적용이 필요한 이론 등의 개론만 알려준 뒤 나머지를 우리가 직접 고찰하여 완성해 와야 하는 것이었다…….
“교수님, 잠시만요.”
“예, 말씀하세요. 하티 군.”
안경을 쓴 남학생이 슬쩍 손을 들자, 제펠린 교수는 탁자 위를 정리하며 그리 대꾸했다.
“중간고사 성적은 언제 공시되나요?”
“아…….”
깜빡 잊었다는 듯한 얼굴이다.
“성적 자체는 입력이 끝났습니다. 평가에 문제가 없었는지 재검토하는 과정만 남았었는데…….”
다음에 이어질 말은 사뭇 예상이 될 것 같았다.
“저희 에픽 클래스 교수진들이 최근 불미스러운 사태로 말미암아 부쩍 바빠진 탓에, 성적 처리가 늦어지는 점 사과드리겠습니다.”
“아, 아뇨. 사과하실 건 아닌데…….”
“다음 수업 때까지는 공시해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이번 주 금요일이군요. 그때 중간고사 성적을 공시해드린 뒤, 이의신청을 따로 받도록 하겠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히 답변이 되었나요?”
“아, 네.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항상 수고하십니다…….”
“무얼요. 여러분들이 더 수고하시죠.”
옅은 미소를 띤 제펠린 교수가 강의실 문을 빠른 걸음으로 나서며, 우리들을 돌아본 뒤 마지막으로 인사했다.
“그럼 다음 강의 때 뵙도록 하겠습니다. ……아, 참. 시국이 시국이지만 과제는 잊지 말고 꼭 해오시길 바랍니다. 이상.”
#3
“유리 보고 싶다.”
오후 일과까지 전부 마무리하고, 학생 식당 테이블에 모여 앉은 자리에서 루비아가 침울한 얼굴로 내뱉은 말이었다.
“어제도 그 얘기 했었지.”
“응……. 지금 집에서 뭐 하고 있을까.”
루비아의 포크에는 아무렇게나 잘린 스테이크 조각이 푹 찍혀 있었다. 소스가 방울져 뚝뚝 떨어지고 있다. 평소에는 잘만 먹는 것 같더니 오늘은 별로 들어가지 않는 모양이다. 역시 유리가 걱정돼서 그런 걸까.
“의외로 잘 지내고 있을지도 몰라.”
접시 위의 스테이크를 나이프로 썰며 내가 말했다.
루비아가 턱을 괸 채 나를 힐긋 바라본다.
“……정말 그럴까?”
“유리네 부모님이 유리를 되게 아끼시잖아. 그만큼 아끼는 딸한테 해가 가는 일을 하실 리도 없고. 별 문제 없을 거야.”
사실 이번 일을 계기로 유리가 말했던 집착 혹은 과보호가 더 심해질 수도 있었으나, 굳이 그런 미래를 입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그거야 그렇겠지만…….”
내 맞은편에 앉은 루비아가 우울한 낯빛으로 중얼거렸다. 항상 자신들과 같이 밥을 먹곤 했던 유리의 빈자리가 유독 크게 느껴지는 듯했다. 지금은 그 자리를 내가 대신 채우고 있었다.
……한데, 문득.
‘뒤가 좀 시끄럽네.’
저녁 시간의 학생 식당이 원체 조용한 일은 잘 없지만, 유난히 뒤편의 소음이 심한 것 같았다.
루비아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건지, 자못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유리, 프론티어로 돌아오겠지?”
“그러길 바라야죠. 이대로 유리 씨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저도 많이 슬플 거예요.”
허공을 공연히 떠도는 루비아의 물음을 받은 건, 내 오른편에서 나처럼 스테이크를 썰고 있던 스텔라였다.
“……그치, 나도 그래. 계속 우울할 것 같아.”
“유리 씨는 그동안 저희들의 에너지원이나 다름이 없으셨으니까요. 그리 활발한 기운을 주위에 나눠주셨던 친구분이 갑자기 사라지셨으니,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는 것도 당연해요.”
“맞아, 재밌는 이야기도 많이 해줬었는데…….”
루비아는 폭─ 작은 한숨을 내쉬며 스텔라 쪽을 바라보았다.
“…….”
삐죽 튀어나왔던 입은 곧 다물리고, 시선은 잠자코 멍하니 침잠해간다.
슥, 슥─
직선으로 맞닿은 허벅지 위에 반 접은 냅킨이 위치하고 있다. 올곧게 허리를 쭉 펴고 앉은 상태로, 우아하게 잡은 나이프를 소리 없이 움직인다.
나이프의 위치는 귀족의 예법대로 가슴 높이를 벗어나는 일이 없다. 사뭇 가벼이 쥔 듯 보이나, 한번 동작할 때마다 두꺼운 고깃덩이가 손쉽게 잘려 나간다.
슥, 슥─
경망스레 큰 동작을 취하지도 않는다. 호수에 고요한 파문이 일듯 작고, 물 흐르듯 부드럽게. 어찌나 안정적인지 머리칼의 흔들림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달그락…… 달그락…….
으레 나이프와 접시가 맞닿아 스치며 발생하는 소음이, 스텔라의 접시 위에선 실처럼 얇고 희미하게 들릴 뿐이다.
탁─
접시 위에 나이프를 살포시 올려놓은 뒤, 정갈하게 잘라낸 등심 스테이크 조각을 끝부분만 포크로 살짝 찍는다. 발간 속살이 번들거리고 육즙이 기름져 흐른다.
은백색의 옆 머리칼을 귀 뒤로 쓸고, 몸만 슬쩍 앞으로 움직여, 한입 크기의 스테이크 조각을 입안으로 쏙 집어넣는다.
“음…….”
얌전히 오물거리며 고급진 풍미를 맛본다.
곧 냅킨을 입가에 가져가더니 톡톡 두들기듯 섭취의 흔적을 닦아낸다. 썩 만족스러운 한입이었는지 은은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분명 나와 같은 음식을 먹고 있을 텐데, 자기 혼자서만 한 차원 높은 수준의 음식을 먹고 있는 것 같았다.
“……?”
그제야 우리들의 빤한 시선을 눈치챈 듯, 나와 루비아를 번갈아 바라보던 스텔라가 눈을 깜빡이며 얼굴을 수줍게 붉혔다.
“왜, 왜 그렇게 보고 계세요, 다들…….”
꿀꺽─ 스텔라의 목울대가 미약한 고저를 그렸다. 미처 넘기지 못했던 고깃덩이가 마침내 목구멍 너머로 내려간 모양이었다.
나는 질린 듯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귀족 식사 예법 같은 건 이미 다 잊어버렸었는데, 네가 옆에 있으니까 나도 괜히 막 경건한 마음이 들고 그러네. 더럽게 손으로 집어 먹기라도 했다간 근위병이 무례하다며 날 의자에서 냅다 끌어낼 것 같은 기분이야.”
“네, 네? 그게 무슨…….”
누군가의 식사 과정을 이렇게 자세히 묘사하기란 쉽지 않다.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주시하고 있었단 얘기니까.
그런 행동은 일반적인 식사 예절에도 어긋나고, 굳이 그럴 이유도 없는 상식 밖의 행위였건만, 그럼에도 우리는 홀린 듯이 스텔라가 식사하는 모습을 멍하니 구경하고 있었다.
참고로 아주 만족스러운 이십 초였다. 만일 감상문을 쓰라고 한다면 그녀의 고상함에 대한 감탄과 경외심의 표현만으로도 수십 페이지 정도는 빼곡하게 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어제 같이 밥 먹었을 때도 생각했던 거지만 진짜 귀족 중의 귀족이다 싶어서. …아무래도 ‘밥을 먹는다’ 라는 행위에 대한 인식을 전면 수정해야 할 것 같아. 네 덕분에 밥을 먹는다는 게 얼마나 신성하고 아름다운 일인지 이제야 깨달았달까.”
“……지금 저 놀리시는 거죠?”
“아니, 진심인데. 네 옆에 앉아 있으니까 내가 무슨 정글 속 야만인이라도 된 것 같아. 우가우가.”
“역시 놀리는 거 맞잖아요!”
“아악!”
스텔라가 내 옆구리를 푹 찔렀고, 나는 어제처럼 비명을 질렀다.
“…….”
스텔라의 대각선에 위치하고 있던 루비아는 문득 제 손에 들린 포크와 거기 찍혀 있던 스테이크 비스무리한 것을 지그시 쳐다보다가, 갑자기 자괴감이 들었는지 입술을 인중 쪽으로 말아 올렸다.
결코 깨끗하지 못한 접시.
테이블 위에 몇 방울 흘린 스테이크 소스.
스프 접시에 푹 담가져 있는 스푼…….
스텔라의 식기 배치를 보며 접시 오른쪽에 나이프를, 왼쪽에 포크를 내려놓는다. 냅킨으로 흘린 흔적도 슥슥 닦는다. 스푼도 밖으로 빼놓는다.
“…….”
그래도 영 만족스럽지 않은 낯빛이었다. 말없이 입술을 삐죽인다. 그 틈새에서 낭패감 어린 목소리가 침울하게 흘러나왔다.
“……나도 제대로 배워야 할까? 예법 같은 거.”
“글쎄, 굳이…….”
옆구리를 손으로 문지르던 내가 입을 열었다.
정확히는, 반쯤 열다 말았다.
“귀족들의 사회는 예법과 예절 등의 교양을 매우 중요시한다. 귀족인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구분 짓기 위해 그어놓은 선인 셈이지. 따라서, 교양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 귀족은 다른 귀족들의 무시를 받게 된다. 동시에 상대방에 대한 무시와 모욕의 의미가 되기도 하고. 그것은 곧 귀족 간의 알력 다툼으로 직결되기도 한다.”
루비아의 옆자리에서 지금까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기계처럼 음식을 썰고 먹던 아이리스의 말이었다.
“그럼 역시…….”
“귀족 사회가 그렇다는 말이다. 여긴 귀족 사회가 아니지. 농민의 아들과 한 나라의 왕녀가 동등한 위치에서 우정을 약속할 수도 있는, 그런 이질적인 장소다.”
그리 말하는 아이리스도 예법을 착실히 지키고 있는 듯 보였다. 다만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던 스텔라보단 뭔가 조금 더 경직된 느낌이고, 우아함보단 잘 벼려진 철검 같은 절도(??)가 가장 부각되는 동세였다.
윤이 매끄럽게 나는 보랏빛의 긴 생머리를 늘어뜨린 아이리스가, 금속 나이프를 접시 위에 탁─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네가 귀족들의 예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널 대놓고 무시할 만한 사람들은 이 자리에, 아니, 프론티어에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해서도 안 되겠지. 그런 사람은 바깥에서의 규칙을 여기서도 강요하는 무례한 범법자일 뿐이다. 전혀 귀(?)하지 못한 행동이고. 그러니…….”
아이리스는 돌연 말을 멈추고 물끄러미 우리들을 바라봤다. 기사 가문의 따님이라 그런지 묵직한 무게감이 눈빛에서 느껴진다. 고개를 작게 끄덕인 아이리스가 담담한 투로 입을 열었다.
“편한 대로 하라는 말이다. 말이 너무 길었군. 미안하다.”
“아, 아냐. 미안하긴 왜. 무슨 뜻인지 이해했어! 네 말을 들어 보니까 굳이 배울 필요는 없는 것 같기도 하네…….”
아하하─ 루비아는 볼을 긁적이며 웃었다.
그렇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루비아의 저 표정은 그렇게 설득되진 못했단 의미라는 걸…….
“아이리스 씨의 말이 맞아요.”
스텔라가 은은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저는 그냥 몸에 배어서 습관이 되었을 뿐이지, 누가 이렇게 딱딱한 자세를 고집하고 싶겠어요. 사람은 다 똑같은걸요. 저도 가끔은 예법 같은 걸 의식하지 않고 편하게 먹고 싶을 때가 많아요.”
……글쎄, 먼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이건 그냥 먹어도 되는 풀떼기야.” 라며 질긴 풀을 질겅질겅 씹어대는 스텔라의 모습을 상상해 보면, 그건 좀 어떨까 싶기도 하고…….
뭐든지 적당히가 좋은 거겠지, 역시.
“무엇보다 생면부지 타인의 앞에서 너무 편히 행동한다면 무례한 일이 될 수도 있겠지만, 마음이 서로 잘 통하는 친구의 앞에서 편히 행동한다는 건 어쩌면 신뢰의 증거가 되기도 하겠죠. 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가장 편안함을 느낀다는 얘기가 될 테니까요.”
그때 내가 불쑥 끼어들며 말했다.
“우리랑은 마음이 아직 잘 안 통한다는 거네.”
“……네, 네?”
“우리랑 편하게 안 지내주잖아. 말도 안 놓고.”
“아, 아. 그건……. 으흠, 아무튼.”
당황하던 스텔라가 입을 가리며 헛기침을 하더니, 곧 나를 향해 찌릿하는 눈빛을 보내왔다.
어제 이미 끝낸 얘기인 건 둘째치고.
너랑 둘이 있을 때는 잘만 편하게 있는데, 왜 네가 나서서 나한테 태클을 거느냐는 의미 같았다.
하지만 그건 명백히 잘못된 대응이다. 내가 한 말의 주어는 나 개인이 아니라 루비아를 포함한 다수를 지칭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아무튼, 저도 루비아 씨가 억지로 귀족의 예법을 지킬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물론 예법과 예절은 상대방에 대한 존중을 의미하는 행동이기도 하지만, 친한 친구 사이에 그러면 너무 딱딱하잖아요. 안 그래요?”
“…….”
“……루비아 씨?”
“아, 아. 응. 그치, 맞지. 친한 친구끼리 너무 막 그러는 것도 좋지 않지. 응. 맞는 말이야…….”
어째서인지 루비아가 이전보다 더욱 침울해 보이는 얼굴로 대꾸했다. 으레 하던 것처럼 일부러 기운찬 목소리를 내지도 않았다. 상당히 복잡한 감정들이 혼합된 낯빛이다.
스텔라는 그에 살짝 가슴을 졸이며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 제, 제가 혹시 말실수를…… 했을까요? 아, 아니. 친구 사이에 예법을 지키면 너무 딱딱하단 말을 해놓고 정작 저는 편하게 하지 않아서, 어, 불편하셨을 수도 있겠…… 네요. 그러면 지, 지금부터라도 일단 여러분들이랑 말을 놓아볼까요……? 아니, 놓아볼, 까……?”
“그래, 스텔라. 이건 네가 잘못했어. 그 말은 우릴 친한 친구로 생각하지 않는단 의미나 마찬가지였잖아.”
“에지오 씨는 진짜 좀.”
이번에는 손가락 말고 눈빛으로 찔렸다. 짐짓 화난 투였다. 나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이제 긁지 말아야지. 반응이 재밌어서 나도 모르게 그만…….
“아냐, 별로 그런 게…….”
루비아가 무어라 입을 연 찰나.
──탕!
“꺄악!”
“!”
루비아의 몸이 한 차례 들썩였다. 나도 살짝 놀랐다. 반면 아이리스는 평화로웠다.
그리고 내 옆의 스텔라는, 잠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곧바로 뒤를 돌아보았다.
의문의 소리가 바로 뒤에서 들려왔던 까닭이다.
나 역시 스텔라를 따라 재빨리 뒤를 보았다.
“…….”
학생 식당 1층의 소음이 일제히 멎었다. 학생들이 나누던 잡담도, 달그락거리는 식기 소리도, 전부 얼음이 되어 녹지 않았다.
터벅, 터벅.
의자를 끌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트레이 위에 접시를 쾅─! 내리박은 누군가가, 그 싸늘하리만치 고요한 적막 속에서 홀로 바닥을 거닐었다.
달그락─
탁.
다 먹은 식기를 내놓고, 그렇게 자신을 향해 집중된 시선을 일체 신경 쓰지 않은 채, 식당 바깥으로 향하는 문을 확─ 열어젖힌다.
끼이이익……
쿵─
열었던 문은 닫지 않는다. 긴 머리칼을 찰랑이며 그냥 나간다. 문은 자동으로 닫혔다. 그러자 영원 같았던 찰나의 적막도 깨어졌다.
“……뭐, 뭐야, 갑자기.”
“깜짝 놀랐네…….”
“1학년인가? 걔 아냐?”
“소문이 맞긴 맞나 보네. 살짝 사이코 기질 있다는데…….”
와글와글─
다시금 웅성거리기 시작한 소음의 주된 화제는, 대부분 방금 문을 열고 나간 여학생에 대한 이야기였다.
우리 역시 제정신으로 돌아왔지만.
대화는 아직 없었다.
왜냐하면…….
“…….”
“…….”
“…….”
“……히끅.”
어느샌가 우리 테이블 바로 뒤편에 앉아 밥을 먹고 있었던 뮤가 급작스레 떠나자, 남은 건 맞은편에서 스푼을 든 채로 얼음처럼 굳어 버린 사샤 엘네뿐이었다.
뒤를 돌아본 우리는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사샤는 엄청 놀란 듯 간헐적으로 딸꾹질을 하고 있었다.
‘……뒤가 왜 시끄럽나 했더니.’
저 녀석이 끊임없이 말을 해대고 있었던 건가.
“사샤, 괜찮냐? 여기서 밥 같이 먹을래? 의자는 하나 새로 끌고 와야 하긴 하는데.”
“……히끅.”
대화가 안 되네.
“뭐, 뭐였나요, 깜짝 놀랐어요…….”
스텔라가 가슴에 두 손을 얹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
“…….”
나와 루비아는 언뜻 복잡미묘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순간 굉장히 많은 의미가 교차한 것 같았다.
“……하아.”
왠지 한숨이 나왔다.
이 역시, 여러 가지 의미를 담은 한숨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