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차버린 소꿉친구와 전 여친이 같은 반이라 곤란하다-183화 (183/201)

〈 183화 〉 넋두리 (2)

* * *

#4

슬슬 밥을 다 먹어가는 참이기도 했고, 계속 자리에 앉아 화기애애한 이야기꽃을 피울 분위기도 아닌 것 같아서 우리는 금방 식당을 나왔다.

“배, 배가 아프네. 갑자기…….”

루비아가 눈살을 찡그리며 제 복부를 찬찬히 쓰다듬었다. 그냥 배부른 것치곤 안색이 좀 파리해 보였다. 걸음걸이도 무겁고. 아까 있었던 일 때문에 음식을 잘못 삼키기라도 한 걸까.

“체했어?”

루비아는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었다.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잘 모르겠어…….”

“괜찮으세, 아니, 괜찮아?”

스텔라도 어째 걱정스러운 눈길이다.

“으응, 쉬면 괜찮아질 것 같은데…….”

“손 줘 봐.”

“……어?”

손을 줘보라고 해놓고 내가 덥석 루비아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루비아가 흠칫하며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나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얌전히 루비아의 손을 조물거렸다.

“음…….”

전체적으로 차갑다. 서늘하다.

그러나 이것만으론 알 수 없다.

진중한 얼굴의 나와 달리 루비아의 표정은 시시각각 다채롭게 일변하고 있었다.

“뭐, 뭐. 므어. 하는.”

“차갑네.”

“그야, 밖이 추우니까── 흐잇?!”

“여기도 차갑잖아.”

조물거리던 손을 놓고, 다시 냉큼 손을 뻗어 루비아의 귓불을 살포시 잡아 보았다.

“흐음.”

“…….”

루비아가 자리에서 감전이라도 된 듯 몸을 한 차례 떨더니, 곧 잠잠해졌다. 굳건한 바위 석상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루비아의 손과 귀가 유난히 차갑다는 것을 확인한 뒤 이마에도 손을 짚어 보았다.

“여긴 좀 뜨겁네. 식은땀도 나는 것 같고.”

“으아, 아, 아…….”

루비아의 눈이 핑글핑글 돌아간다.

“음.”

내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어지럼증도 느끼고 있던 건가.”

“그건 에지오 씨, 아니, 에지오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옆에서 스텔라가 무어라 중얼거렸지만 무시했다.

“내가 차마 네 배는 직접 못 만져 보겠다. 한번 이쪽 부근 꾹 눌러보고 아프다 싶으면 빨리 들어가 쉬어.”

“이미 귀까지 만져놓고서…….”

대충 명치와 배꼽 가운데를 가리키며 그리 말하자, 석상에서 인간으로 돌아온 루비아가 삐죽 튀어나온 입술을 우물거렸다.

“으윽.”

루비아는 내 말을 고분고분히 따랐다. 내가 가리킨 위치를 손으로 꾹 눌러 보더니 미간을 구기며 침음성을 내었다.

……아무래도 체증이 맞는 것 같네.

나는 작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그럴 줄 알았다. 소화가 잘 안 될 것 같은 분위기긴 했지. 물 많이 마시고, 몸 좀 따뜻하게 덥히고. 푹 자라. 괜히 뭐 하려 하지 말고.”

“으윽, 윽. 하윽.”

탁─ 탁─

스텔라가 옆에서 루비아의 등을 주먹으로 두드려주고 있었다. 한번 두드릴 때마다 루비아의 몸이 갈대처럼 휘청였다. 등까지 아픈 모양이다.

진짜 제대로 체했구만.

“나, 나 별로 괜찮은…….”

“시끄럽고. 빨랑 기숙사로 들어가.”

“으앙.”

루비아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쿡 찌르자 고개가 뒤로 넘어간다. 그쯤에서 그녀의 등을 두드려주던 스텔라의 움직임도 멈추었다.

이마를 문지르던 루비아를 향해, 내가 말했다.

“꾸준히 운동해야 할 필요가 더 늘었네, 미래의 대마법사님.”

몹시 건강한 몸이었다면 소화 불량에 걸릴 일도 없다. 아예 없진 않겠지만 그럴 확률이 현저히 낮아진다. 당장 나만 해도 그렇다. 이 우월한 육체는 잔병치레 같은 걸 일체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볼이 복숭아처럼 발갛게 물든 루비아가 중얼거렸다.

“……걱정해주는 건 무지 고마웠는데, 갑자기 그런 말 하면 나 상당히 부끄럽거든, 에지오.”

“틀린 말 했어? 너 곧 엑시 승급 시험도 본다며. 미쳤네 진짜. 그 속도면 조만간 진짜 대마법사 되는 거 아냐? 미리 싸인이라도 받아놔야 하나? 일단 열 장 정도만 받아놓으면 될 것 같은데. 보자, 한 장에 1천만 라트라고 쳐도 열 장이면 1억 라트…….”

“에, 에지오오오…….”

루비아가 날 흘기며 애원하듯 말끝을 늘였다. 안 그래도 체증 탓에 열이 올라 발개진 얼굴에서 증기까지 뿜어낼 기세였다.

농담조로 말하긴 했지만 딱히 진심이 아닌 것도 아니었다. 루비아의 재능은 진짜다. 괜히 에픽 클래스에 입학했겠나. 머지않은 미래에 테트라 크로울리 다음 가는 대마법사─ 10위계를 넘긴 아크 데카로서 위명을 널리 떨칠지도 모른다.

새삼, 이렇게 대단한 녀석이 내 소꿉친구라는 게 마냥 신기해졌다. 너 대체 왜 그런 시골에 살고 있었던 거냐. 역시 세상은 넓고 천재는 많다…….

“장난이고. …아이리스, 스텔라. 얘 좀 기숙사로 데려가서 쉬게 해줄래.”

“아, 네, 아니, 응. 알았어.”

스텔라가 대답했고, 아이리스가 머리를 끄덕였다.

각자 루비아의 팔을 하나씩 붙잡고 2동 기숙사로 향하려 한다. 그러자 루비아가 파리한 안색으로 버둥거리며 저항한다.

“저, 저기. 얘들아. 나 진짜 괜찮──”

“자꾸 고집부릴래, 너.”

단호한 내 어투에 루비아는 잠깐 입을 꾹 다문 채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가, 곧 슬며시 들어올리며 무어라 항변한다.

“아니,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라. 뭐.”

“나, 나 오늘 너희랑 얘기하려고 했단 말야…….”

“……무슨 얘기?”

그리 말하는 루비아의 눈은 나와 스텔라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그 눈길에 나와 스텔라는 서로를 쳐다보았다.

끄덕─

곧이어 루비아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건지 깨달은 듯, 서로를 마주 본 채로 동시에 고개를 주억인다.

아마, 미궁에서 벌어졌던 일의 연장선.

수많은 궁금증을 낳았으나, 아직 해소되지 못했던 우리들의 이야기를 오늘 시작하고자 한 것일 터였다…….

“꼭 오늘 할 필요는 없잖아, 그거.”

내가 당연한 사실이라는 듯 내뱉은 말이었다.

“그, 그치만…….”

“네 상태 괜찮아지면 그때 해도 늦지 않아. 당장 내일도 괜찮고. ……아, 금요일까진 좀 힘들 수도 있겠다. 마법 전공 과제 해야 돼서. 하루이틀로 끝날 과제가 아닌 것 같거든. 루비아 너는 괜찮겠지만…….”

오후에 있던 마법 전공 수업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그걸 피드백이라고 해야 했을까. ‘이렇게 어려운 걸 잘도 해냈다’ 라는 칭찬 러쉬를 배배 꼬아서 표현했던 것 같은데 말이지.

다만 제펠린 교수가 평가하기에 문제점이 아예 없진 않았으나, 루비아의 마법 시연에 대한 지적은 다른 수강생들─나와 스텔라를 포함해서─의 피드백에 비해 십분지 일 정도 되는 분량을 보여주었다…….

“맞아요, 아니, 맞아. 저도 너한테 해줄 이야기가 많은데요, 많은데. 지금은 에지오 말씀처럼…….”

“스텔라.”

정말 미안하지만, 나는 스텔라의 말을 도중에 끊었다. 반말과 존댓말이 괴상하게 혼합된 뒤틀린 반존대를 가만 듣고 있자니, 노력하고 있다는 모습이 보여서 좋긴 하지만…… 어쩐지 안쓰럽다고 해야 하나. 묘한 기분이 든다고 해야 하나. 괜한 걸 시켰나 하는 기분도 들고.

아무튼 스텔라가 날 돌아보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네, 응?”

“너 그냥 일단 평소처럼 존댓말 쓰고 있어. 생각해 보니까 억지로 시키는 것도 좀 아니다 싶다. 왠지 몹쓸 짓 하는 것 같고 그러네.”

“…….”

스텔라가 할 말을 잃었는지 어이없다는 듯 나를 빤히 바라본다. 언뜻 보면 ‘그렇게 반말 쓰라고 압박해 놓고?’ 라는 스텔라의 불만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도 같았다.

“……크흠, 여하튼. 오늘은 됐으니까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고. 루비아 넌 들어가서 푹 쉬고. 스텔라랑 아이리스도 나중에 보자.”

헛기침을 하며 그들에게서 등을 돌리려던 때, 문득 원래의 말투로 돌아온 스텔라가 내게 물어온다.

“에지오 씨는 어디 가시게요? 거긴 기숙사 방향이 아니잖아요.”

“나? 나는 당연히…….”

기숙사 쪽이 아닌 3동 건물을 향해 턱짓하며 답한다.

“운동 좀 하다 들어가려고. 의료원에서 하루 쉬었던 만큼 당분간 더 열심히 할 생각이야. 손실이 난다는 건 정말로 무서운 일이거든. 하루라도 거르면 몸에 막 식은땀이 나고 그런다니까. 게다가 격한 운동에 심취할 때만큼은 걱정 고민 없이…….”

“아, 네…….”

가엾게도 내 말의 참뜻을 헤아리지 못하는 듯, 스텔라가 아하─ 그렇구나─ 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리스와 함께 얌전히 루비아를 이끌고 나에게서 돌아선다.

“그럼, 나중에 봐요, 에지오 씨.”

“우, 운동 열심히 해…… 에지오…… 우욱.”

“어, 그래. 들어가고.”

직후 손을 흔들고 서로 인사를 나누었지만, 다음번엔 그들에게 강인한 육체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헬스를 적극 권장하기로 결심한 나였다…….

#5

……에지오 크라닐이 3동 건물로 들어와 승강기로 향하는 모습을, 누군가는 저 먼 구석에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

들키지 않게 기척을 차단한다.

그녀에게 있어선 매우 쉬운 일이었다.

우우우웅……

의도한 대로 에지오는 누군가의 존재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승강기를 통해 체력단련실이 있을 층으로 올라간다.

“…….”

그림자 속에서 빠져나와 승강기의 문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위로 올라가던 승강기는 곧 특정한 층에서 멈추었고, 한동안 변화 없이 그 층수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

그녀는 복도 끝에서 무언가 고민하는 듯싶더니, 결국 발걸음을 빙글 돌려 3동 건물 밖으로 향한다.

일부러 숨은 건 아니었다. 어쩌다 보니 에지오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습을 멀리서 목격했고, 혹시나 그와 마주치게 될까 봐 입술을 짓깨물며 그림자 속으로 피신한 것이었다.

……그게 그거 아닌가 싶을 순 있으나 본인은 전혀 의도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존재했다. 본능적으로 만남을 꺼려한 탓에 몸이 먼저 제멋대로 움직인 것이었다…….

“뭐 하는 거야.”

누군가는 누군가에게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본인이 본인에게. 언뜻 공허한 울림은 아무도 없는 복도 한가운데서 고요히 메아리쳤다.

“…….”

학생 식당에서 한바탕 일을 크게 저지른 뒤로 차오르는 감정에 그대로 몸을 맡겨 1학년 훈련장의 문을 열었다.

그러나, 왠지 동세가 마음에 들지 않아 오늘 훈련은 집어치우려고 했던 찰나, 복도 끝에서 에지오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었다.

이가 자연히 악물린다.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나머지, 주먹을 말아쥔 채 건물 내벽을 쿵─ 하고 강하게 쳤다.

적잖은 힘을 담았으나, 다행스럽게도 벽에 금이 가거나 하진 않았다. 그 결과가 자못 억울하여 벽을 다시 한번 더 치려다가, 곧 힘이 빠진 듯 스르륵─ 팔을 내리곤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는다.

“뭐 하는 거냐고.”

이런 짓 따위, 아무런 의미도 없다.

어린아이가 투정을 부리는 꼴이지 않은가…….

“…….”

지이익─

트레이닝복의 지퍼를 턱밑까지 올려서, 허리춤에 찬 검집을 정돈하곤 빠른 걸음으로 3동 건물 밖을 나선다.

휘이이잉─

찬바람이 그녀를 맞이했다.

후끈했던 훈련장의 열기가 단번에 빠져나가고, 차디찬 공기가 들어온다. 살짝 땀에 젖은 앞 머리칼이 불어오는 바람줄기에 나부낀다.

바람결에 상념을 흘려보내고, 트레이닝복 자켓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기숙사 쪽을 향해 터벅터벅 걷기 시작한다.

─어, 쟤 아까 걔 아냐? 식당에서. 1학년.

깊숙이 침잠한 의식은 주변의 소리를 전부 차단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를 보며 수군거리는 학생들의 잡음은 사라지지 않는다.

─맞네. 훈련하고 오는 길인가?

─얼굴은 진짜 예쁜데, 하는 짓은 진짜…….

─나 쟤 말하는 거 한 번도 본 적 없다? 가는 길에 대놓고 앞에 서봐도 그냥 밀치고 지나갈 것 같아.

─에지오 크라닐이었나? 그 신입생 남자애 있잖아. 재능 살인마. 걔랑은 대화하는 거 자주 봤던 거 같은데…….

무수한 군중의 수군거림 속, 오직 한 단어만이 귓전을 파고들어 그녀의 잠든 의식을 일깨웠다.

“…….”

살짝 아래로 내렸던 고개를 들어 올려, 얼음처럼 싸늘한 눈으로 선배 학생들을 바라본다.

─야, 야. 쟤 우리 본다.

─눈빛 한번 살벌하네……. 듣기론 겁나 세다는데. 한번 제대로 시비 붙으면 어디 뼈 하나 나가는 거 아냐?

─그래 봐야 1학년이지. 교류회 때 교육을 단단히 시켜줘야겠어. 그냥 사람 자체를 깔보고 다니잖아. 마음에 안 들어.

입을 닫고 제 갈 길을 가는 학생들도 있는 반면, 그렇게 노려보면 어쩔 거냐는 듯 코웃음을 치는 학생들도 몇 보인다.

“…….”

그 모든 풍경을 그저 배경으로 치부하고, 관심을 일절 꺼버린다.

터벅터벅─

그녀가 기숙사의 문을 열고 들어갈 때까지 잡음은 멈출 줄을 몰랐다…….

끼이이익─

쿵─

불 꺼진 기숙사 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문을 닫고 나서 한동안 현관에 가만히 멈춰 서 있었다.

“…….”

칠흑 같은 어둠 속을 멍하니 응시한다. 생각을 텅 비워 보려고 한 일이었는데, 오히려 주변이 고요해진 탓에 더더욱 잘 떠오르는 상념들이 그녀를 괴롭혔다.

휙─ 허리춤에 찬 검집을 신경질적으로 뽑아 들고, 그것을 저 방구석에 부웅─ 하고 내던진다. 두어 바퀴 회전하며 날아간 검집이 벽면에 부딪혀 큰 소리를 내었다.

그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던 그녀가 곧 천장으로 고개를 꺾더니, 몸에 힘을 빼고 현관문에 등을 기대었다.

……주르륵─

힘없이 무너지듯, 다리가 접히며 곧 엉덩이가 차가운 바닥에 닿는다.

그렇게 들었던 고개를 푹 떨구고, 일자로 앙다문 입술을 더 세게 깨물었다. 비릿한 혈향이 스멀거리며 피어오르지만, 그깟 고통은 그녀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그딴 것보다…… 더 괴롭고 아픈 감정이 지금 그녀의 심장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으니까.

“뭐 하는 건데…….”

이번에도, 본인이 본인에게 하는 말이었을까.

……아니었다.

그렇다면, 과연 누구에게 하는 말이었을까…….

“내가 진짜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거였냐고…….”

손으로 얼굴을 반쯤 감싼다. 손바닥이 곧 뜨듯해졌다. 입에서 스며나온 뜨거운 숨결 탓이다. 한숨을 삼키며 으득, 이를 씹는다.

……언제나, 먼저 찾는 건 자신이었다.

자신이 먼저 찾지 않으면…… 그는 자신을 찾지 않는다. 그의 인생에 더 이상 필수불가결한 존재가 아니게 되어 버렸단 뜻이다.

그게 뭐 어때서 말인가─

그가 원했고, 그녀 본인도 원하는 것일 텐데─

왜냐하면, 그를 포기하기로 했으니까─

포기라…….

이게 정녕 포기한 사람의 모습일까.

비웃음 같은 냉소를 픽 흘린다.

“나쁜 놈.”

자조적인 웃음과는 다르게, 그녀는 어느새 애증의 대상이 되어 버린 누군가를 떠올리며 그러한 말을 자그맣게 내뱉었다.

그렇게, 다시 한번.

“나쁜 놈…….”

정말로, 한 번쯤은 자신을 찾아와 대화를 시도해 볼 줄 알았는데. 만일 그랬다 하더라도 절대 대화를 받아주진 않았겠지만. 냉기를 풀풀 날리며 자리를 피했겠지만. 그의 손길을 두 번 다시 허용하려 하지 않았겠지만…….

이렇게 되어 버리면.

나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없으면 없는 대로 괜찮다는 식의 태도를 계속 보여주고 있으면.

“진짜, 나쁜 놈…….”

너무나 괘씸한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지 않은가…….

훌쩍.

억울하고, 답답한데, 이 기분을 도저히 해소할 방법이 없어서, 그만 눈물이 찔끔 나오고 말았다.

……그게 너무 어이가 없어서, 스스로도 창피한 나머지 피식거리며 눈가를 슥슥 닦는데.

그럴수록 더 비참해지는 신세에 다시금 차오르는 감정의 격류가 몸을 휩쓸고, 닦아도 닦아도 마르지 않는 눈물샘처럼 무던히 흘러 바닥에 뚝뚝 떨어지기 시작하자, 결국 손을 놔버렸다. 완전히 포기한 것이다. 이제 어쩔 수 없다…….

훌쩍…….

턱밑까지 올린 트레이닝복 옷깃 속에 얼굴을 묻고, 무릎을 끌어안은 채 발개진 코를 들이켜며 한동안 어깨를 들썩였다.

뮤의 외로운 밤은 그렇게 깊어져만 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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