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차버린 소꿉친구와 전 여친이 같은 반이라 곤란하다-184화 (184/201)

〈 184화 〉 넋두리 (3)

* * *

#5

왜 이렇게 가슴이 답답하지.

“나도 뭐 잘못 먹었나…….”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오자, 수증기가 흰 안개처럼 문 틈새로 피어올랐다. 뜨듯한 물로 샤워를 끝마친 뒤 수건으로 머리를 털면서 밖으로 나왔다. 탈탈탈─

“음.”

펌핑된 근육을 주무르며 목을 이리저리 꺾어본다. 팔뚝을 손바닥으로 탁탁 치자 무슨 돌 때리는 소리가 난다. 전신이 비명을 지르지만 그것은 기쁨의 비명이었다. 오늘도 만족스러운 운동이었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의자를 끌어 그 위에 착석했다. 그러던 내 미간이 급작스레 구겨졌다.

답답한 느낌이 좀처럼 가시질 않았다.

……남 말 할 처지가 아니었던 건가.

아리송한 얼굴로 주먹을 쥔 채 대흉근을 팡팡 쳐 보았다. 그제야 묵힌 것이 쑥 내려가듯 가슴팍이 시원해졌다.

속이 아니라 근육이 문제였나. 하기야, 오랜만이랍시고 너무 오버해서 달린 것 같기도 했지. 자세한 이유까진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목구멍이 턱 막힌 듯했던 답답함이 해소되었으니 만사 해결이었다.

목덜미에 젖은 수건을 두른 채 책상 위를 훑어보던 나는, 곧 구석에 놓여 있던 상자를 발견하곤 입을 작게 벌렸다.

“아…….”

맞다. 잊고 있었군.

다사다난했던 이번 실습에서 꽤 중요한 역할을 해주었던 팔찌 형태의 아티팩트─ 「이지스의 방패」와 함께, 프론티어 본부가 내게 보내온 물건이 아직 밀봉된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다.

상자 안의 내용물을 확인해보기 전, 슬쩍 시선을 내려 내 손목에 아직도 빙 둘러져 있는 팔찌를 바라보았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실감이 잘 안 난다. 그런 사지(死?)에서 겨우 탈출하여 이렇게 고요하고 평화로운 기숙사에 돌아와 있다는 게.

새삼스런 감회는 뒤로 하고.

이게 없었다면 스텔라를 살리지 못했을 거란 생각을 하니, 갑자기 등허리에 오싹한 소름이 우수수 돋았다.

만약 끼어드는 게 아주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단 일 초라도 늦었더라면…….

스텔라는 그 악마 자식의 가시에 목을 꿰뚫려, 달리 손쓸 방도도 없이 절명하고 말았겠지.

그 당시의 순간을 떠올리자 자연스레 치가 떨렸다. 역시, 마족이란 것들은 상종해선 안 될 종족들이다. 허나 나베리우스는 인간이다. 그 점에서 더더욱 악질이다. 나는 입을 다문 채 눈빛을 침잠시켰다.

나베리우스처럼 인간의 몸으로 악마의 힘을 빌려다 쓴다면, 그 또한 인간의 탈을 쓴 악마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

생각의 흐름은 더 멀리 나아가, 당시의 순간을 하나도 빠짐없이 되감는다. 온몸의 감각이 그 축축하고 습하며 어두운 공동 속에 있는 듯 삽시간에 무거워진다.

스텔라의 숨이 멎은 걸 확인했을 때, 내가 느꼈던 감정을 바로 십 분 전의 일처럼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부정. 공포. 분노.

마침내, 안도.

용암처럼 펄펄 들끓던 감정들. 스텔라를 이대로 떠나보낼 순 없다는 일념하에 이루어진 행동들. 그 모든 것들이 뭉치고 뭉쳐 내게 하나의 사실을 가르쳐주었다.

……나는 아직 망가지지 않았다는 것.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원초적인 본능과 감정들을, 아직은 느낄 수 있다는 것…….

─에지오 크라닐, 당신은 지금 이 시간에도 서서히 마모되어 가는 중일 겁니다. 종래에는 그 맑고 깨끗한 빛이 당신의 인격을 모조리 잡아먹겠지요.

이미 죽고 없어진 자의 목소리가 불현듯 찔러온다.

─그러면, 오로지 본능에만 따르는 한 마리 날짐승이 되는 겁니다. 평범한 인간의 사사로운 감정 따위 어느 무엇도 이해하지 못하고, 결국 인간으로부터 찬찬히 멀어져 갑니다.

“개소리.”

비웃듯 머리를 좌우로 털었다.

나베리우스의 모든 말은 거짓이고 기만이었다. 더군다나 인간을 포기한 주제에 인간을 잘 안다는 듯 지껄이는 꼴이라니. 광인의 헛소리로 치부하는 게 당연하다.

기실 나베리우스는 자타공인 광인이었고, 그의 소름 끼치는 광신과 기괴한 행동거지들로 말미암아, 나베리우스의 말들은 내게 단 한 톨만큼의 신뢰도 주지 못했다.

고로……

“나는 아직 인간이야.”

되뇌이듯 뇌까린 말을 정정한다.

아직, 이라니.

곧 인간이 아니게 된다는 것처럼 들리지 않는가.

“나는 인간이다.”

앞으로도 계속.

죽을 때까지 영원히.

인간으로 살다가, 인간으로 죽을 것이다.

“…….”

그리 다짐하다가.

돌연 어느 상념이 뇌리를 훅 밀치고 들어왔다.

가만…….

절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지만. 나베리우스의 말이 아니라, 그 마신이란 작자의 말을 떠올려 보았을 때, 만일 내가 정말로 인간의 감정을 하나씩 거세당하는 중이라면.

인간을 인간으로서 완전하게 만드는 이성이란 부분이 가장 먼저 마모될 터.

거미줄처럼 유연하고 넓게 뻗은 사고는 차츰 일자로 좁혀져 직선적인 통로가 될 것이고, 그것은 곧 생각을 통하지 않고 본능에만 따라 움직이는 한 마리 짐승 새끼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말인즉 종래에 남는 것은 오로지 인간의 원초적 욕구.

인간이란 동물이 가진 본능뿐이란 거다.

“본능…….”

이성이 거세당한 채 본능만 남아 버린 인간은 과연 어떤 행동양식을 보일까.

기실 사사로운 감정이라는 건 이성이 아니라 오히려 본능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뭐든지 상황과 때라는 게 있는 법이다. 논리와 지성을 죄 무시하고서 감정이 이끄는 대로 살면 그게 인간이 아니고 짐승이지 뭐겠는가.

하면 인간에서 멀어진다는 건 슬픔과 사랑 등 섬세한 감정의 거세를 일컫는 것이 아니라, 감정은 유지하되 그것을 통제하고 제어할 수단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리 되면……..

아니, 이건 너무 철학적인 문제로 넘어가게 생겼다. 당장 해야 할 일도 많은데 복잡한 생각에 빠져 하루 날밤을 꼬박 새는 건 지극히 사양하고 싶다. 그러니까 조금 더 생각을 단순화한다.

하여간에 결국 본능만 남는다고 치자.

인간의 본능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것저것 차치하고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역시나 생존과 종(?)의 유지를 위한 번식 욕구일 것이다.

전자는 딱히 문제없다. 운동하는 만큼 먹기도 잘 먹고, 잠도 잘 잔다. 꿈자리가 가끔 사납다는 것을 빼고는 하등 걱정할 게 없었다.

그렇다면 후자는 어떨까.

번식 욕구.

조금 더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성욕.

돌연 내 눈빛이 번뜩였다.

……최근 성욕을 강하게 느낀 적이 있던가?

“…….”

나는 턱을 어루만지며 작은 침음성을 내었다.

남성이라면. 하물며 나처럼 건강하고 건강한 남성이라면. 마음에 드는 이성을 보았을 때 성욕이 동하지 않을 리가 없다. 몸 한구석이 간지럽지 않을 수가 없다.

구태여 이성을 눈앞에 두지 않더라도 어느 순간 불쑥 그런 기분이 들 때가 있을 터다.

하물며 내 나이가 열일곱이다.

한창 젊은 피가 들끓 때인 것이다…….

한편, 내 하루 일과는 매우 단조롭다.

운동. 훈련. 밥. 공부. 취침.

이 다섯 가지의 무한한 반복이다.

변화가 있다고 해도 순서만 바뀔 뿐이다.

그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다.

몸을 꾸준히 움직이긴 하지만 이따금 사색에 잠길 때도 있다. 바로 지금처럼.

다만 이럴 때도 내 동물적 욕구는 고개를 들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동안 이러저러 바빴던 탓에 그럴 여유가 없었다, 라고 보기엔 너무 갈 데까지 간 게 아닌가…….

물론 수치심과 부끄러움 정도는 느낀다.

당장 미궁에서 스텔라를 구하기 위해 고민도 없이 저질렀던 행위도, 이제 와서 상기해 보면 서로 언급만 안 하고 있을 뿐이지, 아까처럼 태연히 얼굴 맞대고 얘기를 나눴던 게 신기할 정도다.

생존 앞에서 대체 뭐가 수치스럽겠냐만은…… 상황이 괜찮아진 지금, 참으로 몹쓸 생각이지만 당시의 스텔라는 정말 예쁜 몸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

예쁘다.

그것뿐이다…….

“…….”

스텔라는 친구니까. 그런 쪽으로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그럴 수도 있지. 그럴 수 있다. 라고 생각은 하지만.

……루비아는?

……뮤는?

안 그래도 최근 나를 어지럽게 만드는 주범들이다. 특히나 뮤의 생각을 하면 머리가 다 지끈거리지만, 일단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였기 때문에 한숨을 삼키며 얌전히 과거를 되뇌어 보았다.

가슴에 손을 얹고 양심껏 말한다. 이런 몸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그녀들 생각에 밤잠을 설친 적이 있다.

뮤의 경우는 연인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뮤의 호기심이 아주 왕성했던 덕분에, 날 가끔 성적으로 놀리기도 했었다.

그 성적 말고.

일단 필기 시험은 내가 더 잘 봤거든.

“……으음.”

그쯤에서 나는 손으로 얼굴 전체를 감싸듯 덮었다.

……내가 그녀들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서, 라고 판단하기엔 영 탐탁지 않은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다시금 가슴에 손을 얹고 양심껏 말한다. 지금까지 보아왔던 여성들 중 루비아와 뮤는 단연코 피라미드 꼭대기에 있는 존재들이다. 그들에게 이성적 매력이 없다는 말은 결코 성립이 될 수가 없다.

얼마 전 산책로의 오두막에서, 루비아와 진솔한 얘기를 나누며 그녀와 얼굴을 매우 가까이 했던 적이 있었다. 맨들거리는 앵둣빛 입술이 바로 코앞에 있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그때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예전에는 그렇게나 맞닿고 싶어 했던 입술이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드디어 루비아를 포기할 수 있게 된 것 같아 다행이라고…….

그러자 이번에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나, 어쩌면.

판단의 근거가 잘못된 게 아닐까 하는…….

“…….”

분명 수건으로 물기를 닦은 지 오래일 텐데, 등짝이 어느샌가 축축해져 있었다.

아니, 딱히 엄청 필요하다는 건 아닌데. 오히려 성욕 때문에 일을 망치는 경우도 허다하니 차라리 없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는데.

추잡한 본능을 멀리하며 절제된 생활을 하는 교단의 사람들을 보아라. 그들도 잘만 살고 있지 않은가. 나라고 해서 그리 못할 이유도 없다.

아니 이런 생각이 든다는 것부터가 이상한 건가.

대체 뭐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으으으음.”

신음이 깊어졌다.

나베리우스는 거짓과 기만을 밥 먹듯 일삼았다. 소망 실현은 개뿔. 결국은 우리를 제물로 바칠 셈이었다. 그러니까 그 녀석의 말은 믿을 게 못 된다. 다시 말해 내가 본능만 남은 짐승이 된다는 건 거짓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뭔가 아귀가 딱 맞아떨어지는 것도 같다.

본능만 남는 게 아니라.

본능만 거세당하는 것이었나……?

뭐 그따위 저주가 다 있어.

애당초 말이 안 된다. 욕구니 본능이니 감정이니 전부 텅텅 빈 채로 빈껍데기만 남는다고 하면, 그건 완전 인형이나 다름없는.

생각의 흐름이 뚝 멎었다.

……인형.

의지나 자의는 일절 허용하지 않으며, 오로지 타의에만 영향을 받아 움직이는 꼭두각시.

내가 죽은 것은 운명이었다. 되살아난 것도 운명이었다. 화신으로 계약하길 점지받은 것도 운명이었다. 전쟁에서 잔존한 마족을 처죽이고 마신의 목을 베어야 하는 것도 운명이었다.

전부, 내 의지가 아니었다.

─화신이란, 저 하늘 위 주신의 의지에 따라 원치도 않은 힘과 운명을 부여받은 자들. 제 피조물이 낳은 굴레의 혼란을 잠재우고자 제 피조물에게 다시금 부여한 속박이자 또 다른 굴레.

멍해진 뇌리에 파문처럼 똑 떨어지는 테트라의 말.

생각은 점점 깊은 수면 아래로 빠져든다.

나 자신을 잃어간다는 것. 내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게 된다는 것. 당장 미궁에서 마족의 날개와 뿔을 보았을 때, 눈앞이 시뻘겋게 물들고 오로지 저 마족을 처죽여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게 되었던 일. 내가 더 이상 내가 아니게 된다는 것…….

근원적 고찰에 도달하자, 나는 내가 비로소 어떤 처지에 놓여 있었는지 선명하게 깨달을 수 있는 것도 같았다.

이대로 가다가는.

말 그대로 인형이 되어 버릴 것이다.

다만, 모든 화신이 나 같은 경우인 건 아닌 듯하다. 당장 엘레나와 테트라만 봐도 멀쩡히 잘 살고 있지 않은가.

물론 둘 다 평범한 인간처럼 보이진 않았지만…… 적어도 이성이라는 게 존재는 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오직 나뿐이라는 건가.

내가 그렇게나 특별하고 중요한 존재였던 건가.

……대체 왜?

몰락한 남작 가문의 외동아들일 뿐이었던 내가, 도대체 무슨 이유로 신의 선택을 받았다는 말인가.

루비아를 구하기 위해, 생을 누구보다 간절히 바라서?

영혼이 편육처럼 잘게 부서지고 다시 복구되는 걸 수백 수천 번 반복한 고행을 기어코 버텨서?

이제 그 기억은 잘 나지도 않는다. 꿈의 형태로 가끔 날 괴롭히긴 하지만, 선명해지진 않고 갈수록 흐릿해지고 있을 뿐이다.

“모르겠다.”

머리를 벅벅 긁자 미처 털어내지 못한 물기가 후두둑 흩날렸다. 얼굴을 덮었던 손으로 이마를 쓸어올리며,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혼자서 끙끙 앓듯 고민해 봐야 해답이 나올 리가 만무하다. 엘레나 선배님과의 상담 시간을 기다리는 수밖에. 그때까지 복잡한 근심 걱정 같은 건 잠시 묻어두기로 했다.

뺨을 착착 때리며 상념을 쫓아내고, 책상 위의 상자를 집어 들었다. 팔찌가 들어 있던 상자보단 조금 더 무겁고 크다. 한참 안에서 달그락거리던 묵직한 무언가를 느껴보던 내가 문득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도 이런 걸 피해 보상이란 명목으로 지급해줬는데, 이번에도 왠지 본부 측에서 이것저것 보내올 것 같단 예상이 들었다. 물론 상황이 상황인 만큼 시끌벅적한 소음이 잦아들었을 때의 일이겠지만.

프론티어 본부장이 직접 사과를 하러 에픽 클래스까지 찾아올 거란 소문이 돌 정도이니, 절대 그냥 넘기진 않을 터다.

기실 금전적 보상 같은 건 그리 필요치 않다. 차라리 억만금으로도 살 수 없는 이 팔찌 같은 아티팩트 하나만 더 줬으면 좋겠네. 아니면 보상 줄 예산으로 안전 설비나 더 강화하든가.

덜컥─

아무튼 가타부타 상자를 개봉해 보았다.

그리고.

“……뭐지, 이건.”

그 안에 들어 있던 물건과 동봉된 종이를 확인한 뒤, 눈을 가늘이며 물건의 용도를 가늠해 본 내가 마침내 흥미로운 미소를 지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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