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5화 〉 넋두리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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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다음 날.
오전부터 교양 강의에 출석해서 오랜만에 보는 듯한 알프리스와 레니의 질문 공세를 듬뿍 받고, 저 멀리서 책상에 이마를 딱 붙인 채 퍼질러 자고 있던 유스필 데리아와도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 잘난 면상은 보존해서 다행이네. 대형 사고 났다길래 얼굴 반쪽 뭉개지기라도 했으면 어쩌나 싶었지.”
수업이 다 끝난 뒤에야 비척거리며 일어나, 침침한 눈으로 나와 내 옆에 있던 루비아를 번갈아 보더니 픽 웃으며 그런 말을 했다.
“근데 말야. 아래쪽은 멀쩡하냐? 얼굴도 중요하지만 너한텐 그게 더 중요할 거 아냐. 큭큭.”
여전히 껄렁거리는 투였고, 여전히 앙칼진 목소리였다. 극심한 피로와 피곤에 찌든 눈과 지독한 향수 냄새 밑에 숨어 있는 은은한 소독약 냄새도 여전했다.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며 자신한테 더 이상 말 걸지 말라는 듯, 어깨를 한 차례 으쓱인 뒤 떠나가려는 유스필에게 짤막이 물었다.
“오늘도 가냐?”
유스필은 뭘 묻냐는 듯 기가 찬 웃음을 지었다.
“그래, 새끼야. 이 누님 존나 바쁘시다. …왜, 그때처럼 나랑 한 판 하고 싶냐? 근데 네 옆에 있는 여성분께서 자꾸 날 꼬라보시네. 여친은 아니지? 너 저번에 나한테 여친 없다고 했잖아. …뭐야, 그럼 괜찮네? 저번에 온 적 있으니까 주소 알고 있지? 주말 저녁 6시 전까지 와. 그땐 잠깐 일정 비니까 너 한 명 정돈 상대해 줄 수…….”
“얘 순진해서 그런 농담 잘 믿는다고. 장난하지 마라. 화내기 전에. 그리고 내가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말라 했지.”
“뭐야, 진짜 여친이야? 진지 빠는 거 보면 딱 그 모양인데.”
“아냐.”
“그럼 얘 혼자 사귀고 있던 거네. 나 꼬라보는 눈이랑 방금 표정 보면 안 봐도 견적 나오는.”
“됐고, 가라. 내가 잘못했다. 네가 이겼어.”
“…그래, 말 걸지 말라 했는데 말 걸고 자빠진 네 잘못이지. 사고 당했다니까 불쌍해서 이 정도만 해준다. 다음부턴 얄짤 없어. 알아들었으면 이제 꺼져.”
꺼지는 건 유스필 본인이었다. 얄짤 없을 거라는 게 뭘 암시하는 건진 몰라도, 낄낄거리며 강의실 밖으로 사라진 유스필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던 루비아가 조심스레 내뱉은 한마디.
“……한 판 떴다는 게 무슨 말.”
“아냐.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냥 무시해. 이해하려고 하지도 말고. 쟤가 하는 말의 대부분은 쓸데없거나 질 나쁜 농담이야. 귀담아들을 필요 없어.”
“으, 으응…….”
순진한 루비아는 유스필이 무슨 의미로 그런 농담을 던졌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오후에 있던 검술 강의와 새로운 교수님이 담당하게 된 초감각특론 강의─유리가 빠져 있는─까지 전부 마치고 나서, 어제와 같은 멤버로 저녁을 먹은 뒤 3동 체력단련실을 방문했다.
“야, 에지오.”
그 옆에는 가브리엘도 함께 있었다.
“어?”
“그건 뭐냐?”
본격적인 운동을 시작하기 전, 내가 기구 옆에 놓아둔 무언가를 가리키며 가브리엘이 의문을 표했다.
“아, 이거. 음…….”
덜컹─
바벨을 잠깐 들어올렸다 내린 내가 말끝을 흐렸다.
가브리엘과 내 시선의 끝에는, 휘황찬란한 금빛으로 번쩍이는 조각상이 하나 놓여 있었다.
도금인지 순금인지는 잘 모른다. 일단 전자일 가능성이 높다고는 생각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 조각상은 단순한 황금만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었으니까. 말인즉 다른 광물도 섞여 있을 거란 뜻이었다.
빛을 받아 번쩍거리는 금빛 조각상. 외형 자체는 그리 특별하지 않다. 콸콸 흐르는 계곡 폭포의 모습을 조각했다. 생동감 넘치는 황금빛 폭포수가 정지하여 있고, 그 주위론 울퉁불퉁한 바위 절벽과 그 위의 나무들까지 매우 디테일한 모양으로 세밀하게 깎아져 있었다.
잔가지는 물론이고 잎사귀 하나하나까지 공들여 신경 썼을 정도이니, 조각사가 누군진 몰라도 굉장한 실력자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겁나 비싸 보이는데.”
가브리엘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이대로 가져다 팔아도 최소 3천만 라트 이상은 가볍게 호가할 터다. 오직 멋들어진 조각상으로서의 가치만을 따진다고 해도 그렇다. 하물며 순금으로만 만들어졌다고 하면 1억 라트 이상은 무조건 받아낼 수 있겠지…….
만일 순금보다도 더 비싼 광물로 만들어졌다고 하면…… 아니, 그런 가정 따위는 사실 필요 없다. 이건 시중에 통상적인 시세와 가치가 형성되어 있는 물건 같은 게 아니었으니까.
“비싸긴 하겠지. 아티팩트거든.”
“아티팩트…… 뭐?”
내 말을 따라 고개를 끄덕이던 가브리엘의 턱이 일순간 정지했다. 당최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단 표정이다.
“성스러운 축복이 깃들어 있는 아티팩트래. 그냥 갖다 놓는 것만으로도 효과가 있다나 뭐라나. …나도 잘은 몰라. 오늘 처음 시험해보는 거라서.”
설치하면 일정 반경 내의 공간에 축복을 부여한다.
그렇게 축복의 효과를 받는 대상은 피로 회복, 마력 회복, 훈련 효과 상승 등 갖가지 축복을 받는다.
하여, 결코 쉽게 지치지 않고, 마력을 평소보다 더 오래 쓸 수 있으며, 그로 말미암아 훈련 시간을 대폭 늘릴 수 있는 것은 물론, 신체 등을 이용한 모든 훈련에 있어 효과 상승 보정을 부여한다고 한다.
“…우리 아버지가 아신다면 널 죽여서라도 빼앗을 만한 물건이군.”
내 간략한 설명을 들은 가브리엘의 반응이었다.
“어쩐지 묘하게 오늘은 널 이길 수 있을 것 같더라니.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너도 강화된 거였구만. 이게 좋은 건지 안 좋은 건지.”
“좋은 거지, 임마. 바벨 열 번 들 거 다섯 번 들게 해준다는데.”
확실히 효과는 탁월한 것 같다. 몸으로 느낌이 바로 전해져 온다. 들이마시는 공기도 한층 상쾌해진 것 같고, 무엇보다 마력의 체내 순환이 평소보다 곱절은 빠르게 회전하는 듯하다. 피로 회복은 아직 잘 모르겠지만 이제부터 효능을 시험해 보면 되겠지.
“그래서, 이건 또 어디서 난 건데.”
“받았지.”
“또? 이번엔 어떤 년이야. 아니면 저번이랑 똑같은 년이냐? 대체 얼마나 널 좋아하길래 자꾸 이런 조공을 보내오는 거냐?”
“그런 게 아니라, 저번에 말했잖아. 본부에서 준 물건이라고. 이것도 마찬가지야. 팔찌랑 이거. 총 두 개 받았어.”
가브리엘이 고개를 갸웃하며 턱을 어루만진다.
“……허, 나도 한번 자살쇼 해야 하나? 죽다 살아나면 아티팩트를 퍼준단 말이지? 진지하게 고민되네. 씁.”
나는 가브리엘을 냉큼 쏘아붙였다.
“농담으로라도 그런 소리 하지 마라. 죽다 살아나는 게 쉬운 일인 줄 아냐? 죽은 사람 목숨은 무슨 아티팩트로도 되살릴 수 없어.”
안 그래도 얼마 전에 있었던 사건을 떠올린 모양인지, 가브리엘은 머쓱하며 목덜미를 벅벅 긁었다.
“아, 뭐. 하긴 그렇지. 미안하다. …근데 그럼 이번엔 대체 뭐 얼마나 대단한 걸 줄까 궁금하기도 하네. 무슨 고대 유물이라도 줄 셈인가. 것보다 나도 피해자인데 뭐 주지 않을까?”
“글쎄, 나중에 정리가 되어 봐야 알겠지. …일단 빨리 시작하자고. 효과 테스트해 보고 싶어서 죽겠으니까.”
고대 유물이라는 말에 잠깐 성유물이란 단어가 떠올랐던 나였으나, 곧 머리를 털고는 벤치에 누워 바벨의 봉을 단단히 꽉 붙잡았다.
근육도 내심 기대하고 있었는지 기쁘게 꿈틀거린다. 최상의 컨디션이다. 온몸에 활력이 샘솟는다. 자연스레 환한 미소가 지어진다.
내가 훈련과 운동에 미쳐 있다는 걸 알고 이런 아티팩트를 보내온 걸까. 그렇다면 나름 센스가 좋다. 안전 관리가 부실했던 점에 대해선 지금만큼은 잊어주도록 하겠다…….
“흐으으으읍.”
“그이아아아아앗.”
체력단련실은 금방 두 사람의 기합으로 들썩였다.
…그날, 우리는 세 배의 훈련량을 달성했다.
#7
……야심한 밤.
고요하디 싸늘한 침묵이 낮게 깔린 식탁 위, 상다리가 휘어질 만큼 푸짐하게 차려진 최고급 궁정 요리가 코스 형식으로 리필되고 있었다.
드르르륵─
달그락─
궁정 요리사는 식은땀을 흘리며 직사각형의 너른 테이블 위로 은쟁반 접시를 천천히 옮겨 놓는다.
“…….”
어쩐지 한껏 긴장한 듯한 기색이다.
경직된 자세로 실수하지 않게 음식을 배치하는 데 성공하고, 비워진 접시 등을 도로 거둔 뒤 예를 갖추어 머리와 허리를 굽힌다. 묵례한다.
드르르륵─
직후 침을 꿀꺽 삼키며 운반 기구를 끌고 아주 조용히 밖을 나선다. 그때까지도 사람의 목소리는 일절 들리지 않았다. 바퀴 굴러가는 소리, 식기 움직이는 소리, 얕게 호흡하는 소리 등. 식탁에 둘러앉은 사람은 세 명이나 있는데, 그중 아무도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적막 속에서 식사하길 십 분 즈음.
“잘 먹었어.”
마침내 누군가 입을 열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고 일어선다. 워낙 크고 우람하며 높은 의자였는지라, 살짝 점프하듯 내려와야 했다.
아직 상석에 앉은 사람이 일어서지 않았다. 명백히 예법에 어긋나는 행동이다.
그러나 주위에 있는 어느 누구도 제지하지 못했다. 심지어 식탁 상석에 앉은 국왕마저도.
“후식은 먹고 가지 않겠니.”
국왕의 왼쪽 자리에 앉은 왕후가 말했다.
“네가 예전에 맛있게 먹었다던 푸딩을…….”
“생각 없어.”
언뜻 애처로워 보이는 듯한 눈빛으로 그리 권했으나, 칼같은 거절이 대답으로 돌아올 뿐이었다.
“안녕히 주무세요. 어머님, 아버님.”
엄마, 아빠에서.
어머님, 아버님으로.
상당히 냉담한 호칭이었다. 그만큼 마음의 거리가 멀어져 있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왕후의 눈썹이 풀 죽은 듯 휘어졌고, 그 모습을 본 국왕이 수염에 묻은 흔적을 슥슥─ 닦아내며 근엄하게 말했다.
“딸아. 아직 얘기 안 끝났다. 앉거라.”
비록 노쇠했으나 그 안에 깃든 불씨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말 한마디에 실체화된 듯한 육중한 무게감이 실려 있었다. 그 때문에 장내의 공기가 한층 내려앉는 것도 같았다. 잠깐의 적막이 다시금 일대를 꽉 메웠다.
금빛의 턱수염과 머리카락을 가진 국왕의 말에, 금빛의 머리카락을 가진 왕녀가 대답한다.
“난 더 이상 할 얘기 없어.”
“유리.”
이름이 불리자 유리는 슬쩍 그들을 돌아본다.
실크 레이스가 옷단에서 나풀거리는 검은 드레스를 두르고, 고귀한 신분에 걸맞은 휘황찬란한 장신구들이 귓불이나 목덜미 등에 걸려 청명한 은색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다만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는 찬연한 금발은 평소처럼 하나로 묶어 내린 모양새가 아니었다. 윤기 나는 머릿결은 공들여 빗으니 더욱 매끄러운 광택을 발했다. 마치 순금을 녹여 짠 비단 같다.
단아하게 치장한 왕녀의 모습은 성숙한 여인보단 어여쁜 소녀에 가까우나, 눈부실 정도로 아름답다는 점에선 어느 누구도 이견이 없을 터였다. 조금의 시일만 지나도 그녀의 앳됨은 분명 더없이 찬란하게 개화하리라…….
“난 이미 말했어.”
유리는 국왕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해볼 테면 해보라는 듯 오기까지 품고 있는 듯한 눈빛이다. 일국의 왕녀이자 공주인 그녀를 뒤따르는 시녀와 함께, 왕가의 문양이 음각된 문을 끼익─ 열고 나서며.
“…오라버니의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만 여기 있겠다고.”
고개를 홱, 돌린 채 한 걸음 옮긴 순간.
“그렇게 돌아가려고 하는 이유가 대체 무엇이냐.”
국왕의 목소리가 발을 잡아 끌었다.
유리는 잠시 동작을 멈추었다. 그러나 시선은 밖을 향한 채였다. 돌아보지 않는다. 탁─ 국왕이 식기를 내려놓은 채 한마디를 더 잇는다.
“역시, 그 친구 때문이냐.”
……그 친구?
“아닌 척해도 소용없단다.”
국왕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 건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을 때, 이어진 국왕의 말에 유리는 잠시 눈썹을 구기고 말았다.
“외간 남성을 그리도 기피하던 네가, 그 친구와는 이례적으로 어울린단 얘기를 들었다. 그 이유가 짐작이 가지 않는 것도 아니지.”
그제야 유리가 짐짓 깨달은 투로 아연하게 묻는다.
“…설마, 나 감시하라고 누구한테 시켰어?”
국왕은 고개를 내젓는다.
“그렇지 않단다. 내 소중한 딸아이가 먼 타지에서 고생하고 있다면 이 아비와 어미의 마음은 결코 편치 않을 테니, 만에 하나 불편을 겪고 있을까 싶어 그쪽에 간단한 소식을 물어보았을 뿐이란다.”
“……하, 하. 진짜.”
유리는 기가 찬 헛웃음을 흘렸다.
매주 보내주는 편지로도 부족하냔 말은 감히 꺼낼 수가 없었다. 따지듯 말해봤자 씨알도 먹히지 않을 거란 걸 아주 잘 알고 있던 까닭이다.
“각설, 그 친구 때문인 것이냐 물었다.”
무어라 더 할 말이 없었다. 정확히는 입이 벙긋거려 말이 나오지 않았다. 부모의 걱정을 이해는 하지만, 고작 한 달이 조금 넘게 지났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벌써 이런 식의 감시를 붙여 놓았다면, 앞으로 얼마나 더 간섭을 해올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
그러나 화내지 않는다.
꾹 눌러 참는다.
“……무슨 친구.”
겨우 목소리를 쥐어 짜내었다.
국왕은 어쩐지 침통한 얼굴로 답한다.
“네 오빠를 닮은 그 친구 말이다. 입학식 때 딱 한 번 본 적이 있을 뿐이건만, 아직도 기억에 남는구나. 체통도 잊고 그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뻔했지 뭔가.”
체통은 그때 이미 죽 쒀서 개 줬던 것 같은데요. 유리의 이름을 연호하며 열렬히 환영하던 국왕과 왕후의 모습을 떠올리며, 유리는 지끈거리기 시작한 이마를 손으로 꾹꾹 눌렀다.
“아냐.”
좌우간.
유리는 짧게 부정했다.
“절대 아냐.”
다시 한번 더, 강하게 말한다.
“…….”
잠시 후.
국왕이 눈을 느슨하게 들어 올린다.
“아닌 척해도 소용없다고 했을 텐”
“그게 아니라고.”
유리가 마지막으로, 부정한다.
이윽고 한숨을 흘리며.
“아닌 척한 적 없어.”
그러자.
“……무어라?”
국왕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제 딸아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유리는 국왕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국왕은 제 딸아이의 눈에서 사뭇 어색한 느낌을 받았다. 익숙하지 않은 눈빛이었다. 꼭 처음 보는 것도 같다. 아니, 확신한다. 지금까지 딸아이에게선 본 적 없었다.
저렇게 어른스러운 눈은.
“걔 한 명 때문만이 아니라고.”
왕후마저 살짝 입을 벌린 채 유리를 보고 있다.
“날 기다리고 있는 친구들이 있어. 걔도 그렇고, 다른 친구들도. 아마 전부 날 기다리고 있을 거야.”
유리는 담담히 말을 끝마친다.
“그러니까 돌아가야 해. 학교로.”
“…….”
그녀를 잠자코 응시하던 국왕은.
“…내일 다시 얘기하자꾸나.”
결국 조용히 눈을 감았다.
유리가 자리를 떠나가고.
“…내 딸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이군.”
국왕이 중얼거리자, 왕후가 머리를 끄덕였다.
“저리 솔직한 모습은 처음 봐요.”
외간 남자와 어울렸다는 걸 인정하는 것도 모자라, 화조차 내지 않다니. 짜증 정도는 보인 것 같았지만 그뿐이었다. 으레 그랬듯 말다툼으로 번질 기미는 일말도 드러내지 않았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나.”
“우리 품에서 정말 벗어나려 하는 것 같아 조금 슬프네요.”
그 말은 거짓이 아니었으나, 슬픔이 전부는 아니었다. 왕후의 그런 묘한 기분을 국왕 역시 동일하게 느끼고 있었다.
큰일을 겪으면 사람은 성장한다. 혹은 그 반대가 되기도 한다. 그동안 유리는 성장이 막혀 있었다. 감당하기엔 너무 벅찼던 까닭이다. 하면 지금은, 감당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일까.
아마 그렇겠지.
그동안 유리를 족쇄처럼 옭아매고 있던 오라버니라는 존재가, 비로소 떠나갔으니…….
하지만 그 상실감을 이겨내는 건 또 다른 문제다. 그 공백을 버티게 해주었던 고마운 존재들이, 저 먼 제국의 중심부에 여럿 있다.
그중 가장 큰 역할을 해주었을 것으로 예상가는 누군가의 익숙한 얼굴을, 국왕은 가만 머릿속에 떠올려 보았다.
그러고는 곧 한 가지 결심을 품었다.
“…….”
아들의 시체를 수습하는 데 크게 일조했다고 듣기도 했다. 직접 만나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국왕의 결심은 더더욱 확고해져 갔다.
탁. 탁. 탁─
한참 눈을 감은 채 식탁보를 두드리던 국왕은, 마침내 눈꺼풀을 열고 조용히 목소리를 내었다.
“…정식으로 초대를 하지. 그 친구들도 같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