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차버린 소꿉친구와 전 여친이 같은 반이라 곤란하다-189화 (189/201)

〈 189화 〉 넋두리 (8)

* * *

#15

뮤에게 향하는 이유는 어렵지 않다.

서신 전달을 위해 우리를 찾아왔던 왕실 기사가, 전달을 마친 뒤 뮤의 행방 또한 찾았던 까닭이다.

분명 그녀 또한 초대를 받은 것이겠지.

참석할 건지 참석하지 않을 건지에 대한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일단 간다고 하면 우리와 함께 갈 것인지…… 솔직히 순순하게 그러리라 생각하진 않으나, 예의상 물어는 봐야 한다─ 같은 마음이었다.

잠시 후.

“안 가.”

3동 1학년 연무장에 있던 뮤를 발견한 지 5초 만에 받은 답변이었다.

“…같이 안 간다고?”

“아니, 안 간다고.”

“참석을 아예 안 하겠단 소리야?”

“…….”

후웅─

콱.

절도 있는 자세로 검을 내리그은 뮤가, 땀에 젖은 머리칼을 쓸면서 이쪽을 물끄러미 노려본다.

“가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꺼. 그딴 쓸데없는 질문이나 하려고 날 찾아와 방해한 거야?”

“쓸데없다니, 이건…….”

나는 말끝을 흐렸다. 뮤도 그 현장에 같이 있었을 터다. 유리와 그녀의 오라버니가 무슨 대화를 나눴고 어떤 작별의 인사를 마쳤는지, 직접 두 눈으로 보고 들었을 터다. 한데 정말로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는 듯 보였다. 다만 그녀의 성격으로 말미암아 이유는 짐작할 만하다.

뮤가 무심히 입을 열었다.

“쓸데없잖아. 왜 알지도 못하는 녀석의 가족의 장례식을 가야 하는 건데.”

뮤는 유리와 친하지 않다. 정확히는 유리 쪽에선 친해지려 했지만 뮤가 매번 거부하고 밀어냈다. 그 때문에 지금 뮤의 친구라 할 수 있는 1학년 동급생은, 뮤의 혐오스런 눈빛마저 꿋꿋이 감내─사실상 무시에 가까운─하고 끈덕지게 달라붙는 사샤 엘네밖에 없었다.

나는 뭐… 여전히 친구라 생각은 하지만.

뮤 쪽에서 날 어찌 여기고 있을지 모르니까.

“갈 이유가 없어. 가서 내가 뭘 해. 위로? 진심으로 슬퍼하지도 않는데 무슨 위로. 난 그런 거 못 해. 유족에겐 또 뭐라고 해. 유가족의 친구도 아니고, 그 오빠라는 사람과는 더더욱 연관이 없어. 애초에 왜 나한테 초대장이 온 건지도 의문이야.”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나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내 옆의 루비아는 아닌 듯했다.

“하지만…….”

“알았어. 네 뜻이 정 그러하다면.”

무어라 입을 열며 나서려는 루비아를 제지하고, 내가 선뜻 말했다. 뮤는 잠시 침묵한 뒤 나와 내 옆의 루비아를 번갈아 힐긋 보더니.

“알았으면 됐는데.”

실소를 흘리듯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굳이 둘씩이나 나한테 같이 올 필요가 있었나 싶네. 나 엿같으라고 일부러 그러는 건가? 그렇다면 성공이야. 지금 굉장히 엿같으니까.”

“……!”

“기분 잡쳤어. 너희들끼리 여기서 짝짜꿍하고 놀아. 방해 안 할 테니까. 그럼.”

사르릉─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검집에 칼자루를 납도한 뒤, 벙찐 우리들을 놔두고 검고 긴 머리칼을 휘날리며 연무장을 나섰다.

“…….”

뮤에게 모진 말을 들어보는 건 상당히 오랜만이다. 몹시 새삼스런 기분이었다.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을 정도로.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목덜미를 매만지고 있던 차, 루비아가 뻣뻣하게 굳은 몸으로 날 돌아보며 조심스레 묻는다.

“……에지오, 쟤 원래 너한테도 저랬었어?”

기본적으로 타인에게 냉담하지만 나한테만큼은 살갑게 굴었던 뮤였으니, 그런 말을 하는 것도 당연하다. 하물며 루비아와 뮤의 관계는 그리 좋지 않았었지. 루비아는 저런 뮤의 태도가 익숙한 듯하나, 지금은 내가 옆에 있었기에 의문을 표하고 있는 것이었다.

“원래는 안 그랬지.”

“…….”

그럼 왜 저러냐, 같은 말까지 하진 않았다. 그렇구나, 하는 얼굴로 가만 입을 다물 뿐이었다. 이런 데선 은근 눈치를 본다니까.

둘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기류와 분위기가 더 칙칙해지기 전에, 나는 루비아를 연무장 밖으로 이끌었다.

“나가서 스텔라 올 때까지 기다리자.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을 거라고 했으니까, 도서관에서 같이 과제라도 하고 있을래?”

“으, 으응. 그래…….”

……한편, 루비아는 에지오의 뒤를 졸래졸래 따르며 조용히 생각했다.

‘그게 그런 뜻이었구나.’

미궁에서 뮤가 했던 말.

─난 이쯤에서 포기할 생각이거든.

이제야,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헤어진 전 연인과 친한 듯 지내던 에지오를 알고 있었던 까닭에, 루비아는 지금 상황이 자신에게 가져다주는 감정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뭔가…

뭔가……

심란할 에지오를 생각하면 마음이 그리 편치는 않으나, 에지오에게 그렇게나 열띤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뮤의 현재 모습을 생각하면…….

……

역시나, 그리 편하지는 않다.

아무리 연적이자 싫어하는 대상이라고 해도.

내심 부러워했던 그 일편단심 같은 마음이 꺾일 때까지 어떤 과정을 겪었을까 몸소 대입하여 상상하는 순간, 그 비탄 어린 슬피우는 감정에 격렬히 공감해 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그게 루비아였다.

그런 루비아였을 텐데.

‘이런 마음이 들면…… 안 되는데…….’

마음속 아주 작은 한구석에서, 이상하게 들떠 있는 자신을 발견해 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16

본가로 외출을 나갔던 스텔라가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세 시간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수고했어요. 이제 돌아가 봐도 좋아요.”

“저, 아가씨. 당주님께서 아가씨가 다녀간 것을 아시곤 연락을…….”

“돌아가. 봐도. 좋아요.”

“……알겠습니다. 하지만─”

기숙사의 정거장 앞에서 제복을 입은 남성과 스텔라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나와 루비아는 스텔라를 맞이하기 위해 그쪽으로 함께 걸어가고 있었으나,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곤 잠깐 서로를 쳐다보며 발걸음을 멈추었다.

“제 짐을 들어주기 위해서 여기까지 따라오신 게 아니었나요? 외부인의 출입을 엄격히 금하는 와중에도 제가 직접 손을 써드리기까지 했는데, 이 이상의 뭔가를 저한테 요구하실 셈인가요?”

“……아닙니다, 아가씨. 그저.”

“아니라면 당장 돌아가세요. 아, 그 짐은 저 주시고요. 귀한 물건이니 조심히 건네주세요. 떨어뜨리지 않게.”

스텔라가 제 가문의 가신에게서 짐을 건네받는다. 고급진 종이 가방이 하나, 옷걸이에 걸려 고이 포장된 의복이 하나. 전자는 종이 가방일 뿐인데 몹시 고급지다. 어째서일까…….

“보다시피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아무런 문제도 없고, 당주님께서 요구하신 것도…… 최대한, 노력 중이랍니다. 그러니까.”

스텔라는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아 표정까진 확인할 수 없었으나, 목소리의 어조만 보면 굉장히 딱딱히 굳어 있을 것만 같았다.

“당주님께도 꼭 말씀드리세요. 배웅은 필요 없다고. 왕국까지는 저희가 알아서 가겠다고. 그러니 필요치 않은 원조를 해오신다면, 저 또한 약속한 바를 지키지 않겠다고. 그리 말씀드리세요. 잘 아시겠죠?”

“아, 아가씨…….”

“정확히 삼십 분 뒤에 출입 기록 확인을 요청하도록 할게요. 그때도 여기 남아 계신다면, 제가 어떻게 행동할진…… 저도 잘 모르겠네요. 그럼.”

그런 내 생각과는 다르게, 우리 쪽을 향해 몸을 돌린 스텔라의 얼굴은 싱긋­ 하는 미소를 짓고 있는 채였다.

곧내 어정쩡하게 서 있던 우리를 발견하곤 눈을 깜빡인다. 스텔라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어라, 나와 계셨네요?”

“아, 어. 기다리고 있었지.”

여전히 웃는 낯의 스텔라가 말을 잇는다.

“왜들 그러고 계세요? 어서 안으로 들어가요. 약속했던 물건, 제대로 가지고 왔답니다.”

“어, 어…….”

스텔라가 성큼 다가와 우리를 기숙사 부지 내로 이끈다. 굉장히 우아한 걸음걸이가 매우 빠른 속도로 이루어졌다. 자못 그녀를 놓치기 전에 황급히 등을 돌린 우리였으나, 찰나의 순간 정거장 앞에서 축 늘어진 채 한숨을 푹 내쉬던 제복의 남성과 내 눈이 마주쳤다.

날카로운 기감이 삽시간에 몸을 들어 올렸다. 맹금류의 그것을 닮은 눈빛이 날 훤히 꿰뚫는 듯했다. 이채를 띤 남성은 곧 구겼던 눈썹을 평이하게 펴며 몸을 반대로 돌렸다. 의중을 알 수 없는 행동이었다.

스텔라의 가문 사람인가.

과연, 녹록지 않은 모습이었다.

사람보단 하나의 철검 같은 느낌이랄까.

“…….”

저런 인물에게 단호히 축객령을 내리는 스텔라 역시, 황금보다 귀한 신분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해준 순간이었다…….

#17

“사이즈는 알려주신 대로 맞춰서 가져와 봤는데…… 혹시나 맞지 않을 수가 있으니까 지금 입어 보실래요?”

스텔라가 나와 루비아에게 각각 검은 정장과 구두, 검은 코트 드레스와 굽이 높은 구두를 건네며 한 말이었다.

은은하고 고급스러운 광택감. 원단이 무척 비싸 보인다. 뭘로 만들었는지 몰라도 일단 비싸 보인다. 칠흑처럼 검고 검은 자켓과 바지. 구두. 흰 셔츠와 검은 넥타이. 정말 정석 중의 정석이었다. 예법에 맞추어 과도한 무늬나 장식 같은 것이 따로 없는 검은색 일색의 복장.

“왜, 왠지 넘어질 것 같은데…….”

굽 높은 검은빛의 구두를 이모저모 둘러보던 루비아가 그리 중얼거렸다. 중등부 시절 파티라든가 공식적인 자리에서 몇 번 신어본 적이 있었을 테지만, 말 그대로 몇 번 되지 않아 그닥 익숙하진 않은 듯했다.

“빌려줘서 고마워, 스텔라. 잘 입을게.”

“별말씀을요.”

내 말에 스텔라가 싱긋 웃었다.

“근데, 스텔라 너는?”

“…저요? 저는 이미 있으니까요. 여러분만 확인하면 돼요. 어서 입고 와 보세요. 루비아 씨는 제가 옆에서 도와드릴 테니까, 같이 방으로 들어가요.”

“으, 응. 알았어….”

“에지오 씨는 다 입으셨으면 여기서 다시 만나요.”

“그래.”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머리를 작게 꾸벅인 스텔라는 루비아와 함께 옷을 가지고 2동 기숙사 입구로 향했다.

그렇게, 나는 종이 가방을 손에 든 채 1동 기숙사로 들어갔고.

“뭐냐, 그건?”

오늘도 헬스 서클 형님들에게 시달린 듯 보이는 반죽음 상태의 가브리엘로부터 그러한 질문을 받았다.

“상복.”

“…상복?”

“가야 할 장례식이 있어서.”

“…장례식? 누구?”

“유리 오빠분.”

“뭐? 그게 누구…… 아.”

프론티어로 복귀할 때 누군가의 시신을 들고나왔던 내 모습은 이미 에픽 클래스 내에 널리널리 퍼진 지 오래였다. 하물며 시신의 정체도. 가브리엘은 직접 목격하기까지 했으니 어련할까. 잘 알겠다는 듯 소파에서 반쯤 일으킨 몸을 다시 착석시킨다.

“근데 그걸 네가 왜 가냐.”

유가족이 내 친구니까, 라는 대답보다 더 확실한 게 있었다.

“초대받아서?”

“…? 초대를 받았다고?”

“어.”

고개를 주억이자 가브리엘이 손으로 자길 가리킨다.

“난 안 받았는데?”

“그럼 널 초대 안 한 거지.”

“…? 왜? 난 걔 친구 아냐?”

“아무래도 아닌가 봐.”

내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자.

“야, 그래도 걔랑 나랑 같은 반이잖아.”

“그냥 그뿐인가 봐.”

“…….”

할 말이 없는지 가브리엘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러더니 날 빤히 바라본다. 어쩐지 불퉁한 얼굴로 입술을 삐죽 내민다. 그 꼴이 몹시 보기 혐오스러운 광경인지라, 나도 모르게 주먹을 내뻗을 뻔했다.

“내가 이런 말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안 하려고 했으면 하질 마, 임마.”

대충 뭔 말을 하려고 하는지 알 것 같아서 중간에 끼어들었다. 가브리엘은 입맛을 쩝쩝 다시며 다시금 머리를 벅벅 긁었다. 소파 등받이 뒤로 쭉 꺾인 고개가 슬그머니 넘어간다.

“됐다. 잘 다녀와라. 가서 그 잘난 얼굴로 귀부인들 추파 좀 받으면 나한테도 몇 명 넘겨주고. 이 형님은 그걸로도 만족하마…….”

“나 장례식 가는 거야, 자식아.”

“그거랑 그거랑은 별개지. 사랑은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꽃피우는 거라고. 장례식 같은 데도 마찬가지야. 다들 얼마나 상실감이 크겠어? 그때 마음의 빈자리를 채워줄 운명의 사람이 옆에서 위로해 준다면…… 어라?”

불현듯 뭔가 깨달은 낯빛의 가브리엘이 말한다.

“……그러고 보니, 그 오빠라는 사람이랑 너랑.”

라는 말의 마무리를 다 듣기도 전에, 나는 이미 내 방의 문 손잡이를 붙잡고 열어젖히는 중이었다.

#18

“흐읏….”

“아, 괜찮으세요?”

“괘, 괜찮아…… 계속해.”

“안 괜찮으신 것 같은데…… 조금 풀어드릴게요. 잠시만요.”

“흐읏… 아….”

“어떠세요? 아직도 아프세요?”

“으, 으응. 아냐. 이제 안 아파…….”

내의 착용을 마치고 바깥에 걸친 코트 드레스의 허리끈을 조이는 과정에서, 루비아가 눈을 찡그리며 얕은 신음을 내었다.

“허리가 하도 얇으셔서, 너무 느슨하게 조이면 안 되니까 그랬던 건데… 어느 정도까지 조여야 할지 감이 잘 안 잡혔네요. 죄송해요.”

“아, 아냐. 괜찮대도.”

스륵, 스르륵─

“자, 됐어요. 거울 한번 보실래요?”

“으, 으응. 고마워…….”

뚜벅─

구두까지 착용을 마친 루비아가, 전신 거울 너머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여섯 개의 단추가 달린 칠흑의 코트 드레스. 허리에 벨트처럼 묶인 끈. 팔소매는 손목을 적당히 덮고 있었고, 전체적인 길이는 허벅지를 가린 뒤 백옥 같은 종아리를 드러낼 정도였다. 색 대비가 그야말로 극과 극이었다. 흑과 백. 가린 곳과 그렇지 않은 부위의 차이가 몹시 도드라졌다.

“길이는 적당한 것 같고…… 괜찮네요. 늘리거나 줄일 필요가 없어서 다행이에요. 루비아 씨가 보기에는 어떠세요?”

“……아, 응. 나도 괜찮은 것 같아.”

사실 루비아는 옷에 대해선 잘 모른다. 때문에 미용실 등지에서 ‘이 정도면 괜찮으신가요 고객님~?’ 하는 질문에 무조건 그렇다고 대답하는 사람처럼, 일단 고개를 끄덕이고 보는 것이었다.

기실 상복(??)을 입어보는 것인데 잘 어울리니 뭐니 꺄악거리며 칭찬일색을 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기에 싱긋 미소를 짓는 것으로 대신한 스텔라가 루비아의 모습을 쭉 훑어본 뒤,

“솔직히 말해봐요. 루비아 씨.”

“…뭐, 뭘?”

루비아의 등 뒤로 빙글 돌아가, 유난히 팽팽하게 당겨진 옷자락을 꽉 붙잡으며 슬쩍 말했다.

“여기, 조금 끼시죠?”

“흐앗­”

스텔라의 예상은 적중이었다. 거울 속의 루비아가 몸을 움츠리며 얕은 비명을 내질렀다. 스텔라의 웃음이 더욱 진해졌다.

“신기하네요~. 제가 입었을 땐 이런 적 없었는데.”

“스, 스텔라아…….”

유감스러우나, 이건 허리끈의 문제가 아니었다. 특정 부위가 꽉 조이는 답답함을 해소하려면 어쩔 수 없이 윗단추를 몇 개 풀어야만 한다. 단정함 포인트를 깎아야 하는 것이었다. 품행이 올바르지 않으면 그리 곱지 않은 눈길을 받을 수도 있었다.

하여, 스텔라는 잠시 고민하다가.

“많이 불편하시면 그냥 밖에 나가서…….”

“아, 아냐! 괜찮아! 응! 굳이 그럴 필요 없어! 이, 이 정도는 별로 불편하지 않으니까…….”

루비아가 손사래를 저으며 한사코 부정하는 바람에, 걱정스러운 눈길로 루비아를 바라보았다.

“정말 괜찮으세요?”

더 이상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은 마음에, 루비아는 고개를 여러 차례 끄덕였다. 괜찮은 것도 사실이었다. 딱 하루만 입고 다니는 건데 이 정도 불편함 정도야 충분히 감수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이제 나가자. 에지오 기다리겠어.”

기다리겠어가 아니라 이미 기다리고 있었지만, 어쨌거나 환복을 마친 루비아와 스텔라가 함께 밖으로 나섰다.

#19

“안녕? 어디 결혼식 가니?”

“아뇨, 장례식….”

“아….”

“어, 무슨 촬영 같은 거 하는 거야? 왜 그렇게 멋지게 빼입었어. …이야, 근데 너 에지오 크라닐? 맞지? 몇 번 본 적 있었는데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네. 내 친구가 너 엄청 잘생겼다고 얘기 많이 했거든. 근데 진짜 와… 언제 한번 내 친구랑 같이 밥 한번 먹을래? 당연히 우리가 사줄게.”

“아, 아하. 아하하…. 말씀은 감사합니다…. 말씀만….”

“와, 와아…… 미친, 후배야. 그 정장 어디서 났어? 그거 되게 비싼 원단인데. 근데 브랜드는 아닌 것 같고. 설마 수석 디자이너가 특별 제작한 물건…? 아니, 그것도 그건데! 후배야! 너 진짜 짱 멋지다! 역시 우리 서클에 꼭 필요한 인재다워!”

“이건 친구가 빌려줬어요. 그리고 제발 호들갑 떨지 말고 저리 가세요. 선배 때문에 괜히 시선 더 모이잖아요. 제발.”

“선배가 아니라 누나라니까!”

“아 좀!”

갑자기 생각난 건데.

……굳이 옷을 입어본 채로 여기서 다시 만날 필요가 있었을까.

“하아…….”

공터에 도착한 지 이십 분이 넘게 지났건만, 아직도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는 스텔라와 루비아를 하염없이 기다리며, 에지오는 때마침 주변을 지나는 학생들의 무수한 관심에 고초를 겪어야만 했다.

‘언제 오는 거야, 이 녀석들은.’

그냥 돌아갈까. 돌아가서 다시 환복하고 애들한테는 대충 잘 맞았다고. 아니, 실제로 사이즈가 딱 맞았으니 빌려줘서 고맙다고. 그냥 그렇게 하면 될 것 같은데. 에지오가 하늘로 고개를 꺾다가 다시 푹 숙이는 걸 반복하던 차에, 마침내 2동 기숙사의 문이 스르르 열렸다.

그들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저 멀리서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벤치에 앉아 있던 에지오 크라닐의 실루엣을 발견하고는.

“…어, 저거 에지오인가?”

“맞는 것 같은데요…? 어라.”

어딘가 익숙한 듯 어색한 느낌에 아리송한 낯빛을 띠며, 슬며시 그의 주변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늦었네, 얘들아. 뭐 하다 이제 왔어?”

넥타이를 잘못 맨 건지 자꾸만 그 부분을 손으로 매만지면서, 슬쩍 몸을 일으킨 에지오를 마주한 그들의 입이 살짝 벌려졌다.

의도한 건 절대 아니고,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경이로운 대자연의 경관을 한눈에 맞이하면 뇌가 탄성을 자아내는 것처럼…….

에픽 클래스의 유니폼도 그의 우월한 신체 조건을 충분히 도드라지도록 해주었으나, 확실히 정갈한 슈트를 쫙 빼입은 에지오의 태(?)는 현실에 실재한다기보단… 예술 전시회에 출품된 그림으로 걸려 있을 듯한 미려함을 극한까지 과시하고 있었다.

날카롭디 갸름한 턱선. 고고하게 드솟은 콧날. 차분하게 내려앉은 잿빛 머리칼 속으로 이지적인 푸른 눈동자가 요스럽게 빛난다.

그런 에지오의 신비로운 분위기와 더불어, 흑요석 같은 새까만 흑색의 정복이 보는 이로 하여금 자연히 엄숙함을 느끼도록 만든다.

굽 높은 구두를 신었음에도 한참 눈높이가 맞지 않을 위치에서 에지오가 자길 내려다보자, 루비아는 흡사 숨이 멎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두근─

심장이 고장 난 것 같았다. 대체 왜 이러는 걸까….

얼굴이 확 붉어진 루비아가 언어능력을 상실한 새, 그녀보다 한 발짝 먼저 제정신으로 돌아온 스텔라가 급히 고개를 꾸벅이며 말했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 착의에 사소한 문제가 하나 있었어서.”

“아, 괜찮아. 많이 기다리진 않았으니까. 그냥 좀, 밖에서 이러고 있으려니 창피했을 뿐이지…….”

그야, 저런 독보적인 모습이라면 주변의 관심이 죄 몰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스텔라는 은은한 미소를 띠었다.

“아무튼, 잘 맞아서 다행이네요, 에지오 씨.”

“아, 어. 너희도.”

너희라기엔 스텔라는 유니폼 차림이긴 했지만.

“루비아 너도 괜찮네. 품격이 안 맞니 뭐니 걱정할 필요는 없겠다.”

귀부인들이 시기하면 시기했지, 내일 있을 자리에서 그녀의 놀라운 미모와 복식에 관해 무어라 면박을 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었다.

한데.

“…….”

“……루비아?”

루비아의 대답이 없다. 선 채로 죽은 것 같다.

“아아, 아. 응!”

그제야 부활한 루비아가 선뜻 입을 열었다.

“이, 이런 말 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되게, 잘 어울린다. 에지오. 완전 깜짝 놀랐어. 아하하…….”

비록 장례식 때 입을 복장이었으나, 사실은 사실이었다. 노골적인 칭찬은 마음속에만 담아두려고 해도, 그리 어설픈 웃음을 지으며 기어코 한마디를 내뱉을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아, 그래? 고마워.”

“으, 으응…….”

“…….”

“…….”

원래라면 뒤에 이어져야 할 맞장구가 에지오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내심 뭔가 이상한 부분은 없나 자신의 옷차림을 점검하는 루비아. 옷자락 위에 사근하게 내려앉은 연분홍빛 머리칼을 배배 꼬면서 은근히 조이는 상체를 살짝 움츠린다. 너무 부각되면 부끄러우니까…….

그렇게 얼만큼의 시간이 흘렀을까.

사실 일 분도 채 지나지 않았지만.

“……이제 됐지? 나 갈아입는다. 너희도 어서 갈아입고 와.”

결국 에지오의 칭찬은 없었다. 루비아는 어쩐지 아쉬운 마음과, 묘하게 불만족스러운 기분이 합쳐져 입술을 살짝 삐죽 내밀고 말았다.

그 모습을 옆에서 빤­히 지켜보던 스텔라는.

“잠깐만요, 에지오 씨.”

“…응?”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한 발짝 다가섰다.

“넥타이, 제대로 안 매셨잖아요.”

“…아, 그랬나? 나도 좀 이상하긴 했는데. 이게 유니폼이랑 매는 방식이 다르다 보니까…….”

“제가 다시 해드릴게요.”

“…어?”

“가만히 계세요.”

스윽, 슥─

스텔라가 까치발을 든다. 목덜미에 닿는 차가운 손. 스텔라의 섬섬옥수 같은 손가락이 에지오의 넥타이를 살며시 붙잡았다.

“방식이 틀린 건 아닌데, 모양이 흐트러졌어요. 일단 이걸 풀고… 여기서 이렇게 당겨줘야… 각도가 비뚤어지지 않죠.”

“어, 어….”

능숙한 손놀림으로 매듭을 슬림하게 빙 둘러 묶는 동안, 에지오는 참으로 익숙하지 않은 느낌에 몸을 뻣뻣이 굳히고 있어야만 했다.

“자, 어때요. 이제 좀 단정해졌죠?”

꽉─ 마지막으로 고리에 집어넣은 끝부분을 아래로 당긴 스텔라가, 살짝 들었던 까치발을 도로 내린 채 의기양양한 낯빛으로 그리 말했다.

에지오는 떨떠름한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정말이네. 내가 묶은 거랑 아예 딴판인데.”

“에지오 씨도 부족한 점이 있으셨군요. 이렇게 되면… 내일도 저한테 맡기셔야겠네요. 출발하기 전에 제가 다시 매드릴게요.”

“그래주면 나야 고맙지. 부탁할게.”

“물론이죠. 후후.”

하하호호─ 출근 전의 남편과 부인 같은 모습을 잠시 연출한 에지오와 스텔라가, 어딘가 애틋하면서도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꽃피우는 새.

“……우으.”

한 발짝 멀리 떨어진 곳에서, 넥타이 매는 법을 알 리가 만무한 루비아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울상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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