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화 〉 넋두리 (9)
* * *
#20
“전하, 참석을 일러두신 자들로부터 답신이 도착했사옵니다.”
왕궁의 대전(大?).
중후한 신하의 한마디가 장내를 고요히 울리자, 옥좌에 등을 뉘었던 국왕이 턱을 치켜들며 고개를 까닥였다.
“내놓거라.”
“예, 전하.”
금빛 머리칼 위에 금빛 왕관을 얹은 금빛 턱수염의 아르티나 국왕, 지그리트 폰 로하울 아르티나.
재위한 지 족히 수십 년은 지난 듯하나, 자글한 눈주름 끝에 자리한 불꽃 같은 정열은 희미해지긴커녕, 외려 연륜이 깃듦에 따라 한낱 칼바람 따위에도 쉬이 꺼지지 않을 듯 보였다.
“음…… 세 장뿐인가.”
앉은 자리에서 신하가 공손히 건넨 서신의 내용을 훑어본 국왕은, 턱수염을 어루만지며 곧바로 어명을 내렸다.
“할튼을 불러오라.”
신하는 다시금 허리를 꺾듯 숙였다.
“명을 받들겠나이다, 전하.”
몇 분 뒤.
대전의 문이 열리고, 머리를 제외한 전신에 육중한 백금의 중갑을 걸친 기사가 들어오더니 대뜸 한쪽 무릎을 꿇었다.
“신 할튼, 전하의 부름에…….”
“귀찮군, 귀찮아. 되었다. 일어나거라.”
옥좌에 앉은 국왕이 손을 휘젓자, 할튼이라 불린 장년의 기사는 갑옷을 절그럭거리며 각 잡아 굽혔던 무릎을 도로 편다.
“명을 받들겠…….”
“되었다니까.”
국왕의 눈썹이 구겨졌다. 그제야 할튼도 입을 다물며 자세를 편히 했다. 그래 봐야 기사답게 딱딱한 바위 같은 동세였지만.
“할튼 경.”
“예, 전하.”
“내일이 무슨 날인지 알고 있는가.”
모를 리가 없다.
할튼은 자못 침통한 심정으로 입을 연다.
“……고(?) 왕태자 저하의 영결식 당일입니다.”
이미 십 년 전에 시신 없는 장례식을 치른 전적이 있었으나, 십 년이라는 오랜 시간을 거슬러 왕태자의 시신을 수습하게 된 이상, 그때보다도 더욱 엄숙하고 완전한 장례식을 치를 예정이었다.
말인즉, 이번에야말로 구국의 영웅이자 수호신이었던 아이델 폰 아르티나를 왕국이 진정으로 떠나 보내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하다.”
국왕은 머리를 주억였다.
“경은 그 아이와 같은 때 같은 전장에서 나라를 수호하였노라. 경과 레이첼 경이 없었다면 그 아이의 마지막 전언을 전달받을 일도 없었을 테지. 하여, 짐은 그대들에게 예나 지금이나 기꺼운 마음을 가지고 있으나…… 당시 그대들의 추모를 허하지 않은 일 또한 후회하고 있노라.”
허심탄회한 투에, 할튼은 고개를 내리 숙일 뿐이었다.
왕태자는 죽었다. 적진으로 홀로 들어가 나라를 구하고 죽었다. 그러기 전에 퇴각 명령을 내렸다. 현(?) 혈장미 기사단의 단장인 할튼 에이버노스와 삼 년 전 불의의 사고로 사망한 레이첼 이티세, 단 둘에게. 누이동생을 지켜달란 말을 남기고 한 줄기 바람이 되어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대전에 벼락이 떨어진 날, 국왕은 조용히 분노했다. 제 아들을 잃은 슬픔과, 아들을 죽게 놔두고 버젓이 생환한 그들에 대한 원망으로.
다만 왕태자의 퇴각 명령이 떨어졌고, 또한 상급자의 명령이었다곤 하나, 생환자는 그들뿐이었기에 달리 현장 속 사실을 증언할 수 있는 자가 어디에도 없었다. 막말로 왕태자를 미끼로 내던진 뒤 자신들의 안위만 챙겼을 줄 누가 알겠는가…….
당시 그들의 몸에 새겨진 상흔을 보면 필시 녹록지 않은 분투와 노고를 벌였음이 분명했겠으나, 제왕의 혼으로도 헤아릴 수 없는 슬픔을 막아낼 수 없었던 국왕은 그들의 근위 기사 직위를 해제하고, 종전 뒤 치러진 시신 없는 장례식에서 그들을 강제 불참시켰다.
추모할 자격이 없다는 이유였다.
대전쟁의 여파로 기존의 상비군은 물론이고 왕실 근위 기사단마저 조직이 궤멸된 수준에 이르렀기에, 결국 아르티나 왕실은 근위 기사단을 뿌리부터 뒤바꾸어 새로이 재정립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탄생하게 된 것이 바로 혈장미 기사단.
명실상부 아르티나 왕국 최강의 기사단이자, 왕국을 넘어 제국의 오성(五?)에도 비견될 만하다 평가받는 정예 무력집단이었다.
한편, 이번 대 혈장미 기사단의 단장은 할튼 에이버노스였다. 단장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알 수 있듯, 할튼은 나락까지 떨어졌던 국왕의 신뢰를 평생에 걸친 충성과 헌신, 신의로써 회복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되기까지 정말 많고 많은 시행착오들이 있었지만…… 왕태자가 제 몸을 바쳐 나라를 지키지 않았다면 할튼은 그 전장에서 이미 죽었을 것이었다. 이미 한 번 구해진 목숨, 왕태자가 죽어서도 지키고자 했던 나라를 위해 바치는 것이 어찌 기껍지 않을까.
“신 할튼, 전하의 성심을 단 한 순간도 불순히 여긴 적 없나이다. 신은 그저, 전하께서 이 한낱 칼잡이가 나라를 위해 다시 한번 목숨을 바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것을 망극히…….”
“짐은 그대의 충의를 불순히 여긴 적 있었노라.”
“……전하.”
“허나, 먼 과거의 참회를 하고자 경을 부른 것이 아니다. 긴히 부탁할 것이 있어서지.”
“신 할튼, 전하의 명을 받들…….”
“글쎄, 경은 참으로 고지식하군. 되었다는데 언제까지 그럴 셈인가? 경은 짐의 앞에서 경칭을 삼가도 좋다고 했을 텐데.”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전하. 신하 된 도리로 어찌 기군망상의 대죄를 범할 수 있겠습니까. 차라리 제 혀를 자르시옵소서.”
“거, 참…….”
어명을 내리면 불응하진 않을 테지만, 그리하면 할튼은 아마 스스로 혀를 뽑을지도 몰랐다. 장난이 아니라 진짜로. 국왕은 굳이 그런 꼴을 보고 싶진 않았다.
“할튼 경.”
“예, 전하.”
“이 서신에 적힌 이들을 찾아가 명일 영결식 전까지 본국으로 최대한 안전하게 데려오라. 경이라면 불의의 사태에도 유연히 대처할 수 있을 것이라 믿노라.”
할튼은 예를 갖추어 국왕이 건넨 서신을 받았다. 총 세 장의 초대장. 겉면에 쓰인 수신자의 이름. 할튼이 작게 중얼거렸다.
“이분들은…….”
“딸아이의 친우들.”
“……!”
할튼의 눈이 크게 뜨였다.
국왕의 딸이라면, 역시나 올해부터 프론티어에 재학하게 된 유리 폰 아르티나 공주 전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공주 전하의 친우분들이란 말인가.
오랜만에 뵙는 공주 전하께서 묘하게 변화하신 듯한 이유도, 어쩌면…….
“도착하는 대로 성내에 들일 것이다.”
영결식에 참석시키겠단 뜻이었다.
할튼은 의문 없이 고개를 숙였다.
“전하의 명을 받들겠나이다.”
“그리고.”
“……?”
국왕이 근엄하게 말했다.
“경 또한 그 아이의 관에 입맞춤을 해야 할 것이다. 미사 집전이 끝나는 대로 예배당에 속히 들어오도록 하라.”
#21
“설마, 정말로 올 줄이야.”
제 몸집의 다섯 배가 족히 넘는 듯한 침대 위에서, 풍성한 금발을 풀어헤친 채 실크 잠옷 하나만을 걸치고 있던 유리가 중얼거렸다.
“벌써 며칠 동안 못 봤으니까, 기쁘지 않다는 건 아냐. 엄청 보고 싶었는걸, 내 친구들. 초대에 응해줘서 고맙기도 하고. 그렇지만…….”
공주의 처소에는 당연히 유리밖에 없었다. 하면 누구에게 말하는 것일까. 그건 유리 자신도 잘 몰랐다.
“……그 녀석은 안 불렀는걸. 왜 오는 거람.”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창문 밖으로 몽연한 달빛이 잿빛 구름 속에 뒤엉켜 있었다. 불도 켜지 않은 탓에 새까만 어둠 속에서 다리를 쭉 뻗고 앉아 있다.
슬그머니 올라간 다리의 오금이 접히더니 곧 종아리를 살포시 껴안는다. 작고 여린 손끝에는 검은 리본이 붙들려 있었다.
품질 관리를 아무리 잘했다곤 하나, 낡고 헤지는 것까지 막을 순 없다. 실금 같은 세월의 흔적이 새겨지기 마련이다. 낡은 천을 습관처럼 매만지던 유리가 다시금 입술을 달싹인다.
“…오지 말라고 했던 건 아냐. 초대를 안 했을 뿐이지.”
초대를 안 하면 못 온다는 사실을 보아 그거나 그거나 다름이 없었지만, 유리에겐 사뭇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있었나 보다. 초대하진 않았지만 막상 왔으면 바로 돌려보내진 않았을 거란 느낌일까.
“…왜 그렇게 싫어하냐고? 그야 당연하잖아. 그 녀석은 오빠를 닮았는걸. 그런 주제에 첫만남부터 날 여동생 같다고 말하질 않나. 귀엽다고 하질 않나. 사사건건 마음에 안 드는 행동만 골라 하질 않나…….”
툴툴거리는 어조가 더욱 진해진다.
“내 진짜 오빠도 아니면서, 그 얼굴로 나한테 오빠 같은 행동을 하면, 내 기분이 어떻겠어. 진짜 짜증밖에 안 난단 말야. …그렇다고 너무 심하게 대할 수도 없어. 기분 이상해지잖아. 진짜 짜증나. 다시 생각해도 짜증나네. 왜 그런 녀석이 나랑 같은 반이 된 거람…….”
심하게 대할 수 없었다, 라는 말에 동의할 사람이 에픽 클래스에 과연 몇이나 있을지 모르겠다만. 유리 본인만큼은 양심에 손을 얹고 당당히 에지오 크라닐을 모질게 대하지 않았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여태 유리를 욕보이거나 일선을 넘었던 남성들의 경우, 지독한 혐오를 초월하여 아예 존재하지 않는 사람인 것처럼 인식에서 배제했었으니까.
고로 에지오 크라닐의 형편은 몹시 좋은 축에 속했다. 하물며 유리에게 직접 친구라는 인정까지 받아내었으니, 지금에 이르러 유리 폰 아르티나의 가장 가까운 이성이라 칭해도 부족함이 없을 만한 인물이 된 것이었다…….
“짜증나. 짜증나. 짜증나…….”
괜히 투덜거리며 같은 중얼거림을 연달아 반복하던 유리가, 이윽고 미끄러지듯 몸을 일자로 침대 위에 뉘었다.
“…그래도 걔가 없었으면 그때 우린 다 죽었겠지. 나도 그 정도 눈치는 있는걸.”
자기는 숨도 못 쉬었을 정도로 강력했던 마기의 압박을 스스로 풀어 던지고, 대악마라는 말도 안 되는 존재에 단신으로 대항했던 그 녀석.
물론 뮤도 적잖은 시간을 벌어주었긴 했지만…… 결국 대악마가 본신의 힘을 발휘하자 뮤 역시 항거할 수 없는 힘에 짓눌려 제압당하고 말았다. 그틈에 활약을 펼쳤던 건 에지오 크라닐이었다. 다만 이지를 잃어버린 짐승처럼 사납게 폭주했었다.
인간이 아닌 듯했던 서슬퍼런 눈빛을 떠올리자 순간 피부 위로 소슬한 소름이 돋는 듯했으나, 곧 머리를 털곤 그 녀석의 평소 모습을 떠올렸다.
유들한 웃음. 유독 나한테만 하는 듯한 장난질. 이쪽에선 매번 불퉁하게 받아치는데도 호의적인 태도를 꿋꿋하게 일관하는 녀석. 싫다는데도 자꾸 친구가 되고 싶다 하고, 억지로 날 밀어붙여 결국 친구라는 관계를 제 입으로 인정하도록 만든 질 나쁜 녀석.
…막심한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날 도와주려 하고, 지켜주려 하고, 이것저것 핑계를 대면서도 결국 날 위한 행동이었고, 그래서 더 이해가 안 돼.
숨기고 있는 비밀도 많아. 자기에 대해선 하나도 알려주지 않으면서 나에 대해 자세하게 파고들려고 하는 부분이 괘씸해.
뭐야, 대체.
뭘 위해서 이렇게 성격 나쁜 나랑 그렇게까지 친구가 되고 싶었던 건데….
“……어라.”
한참 에지오 크라닐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들어찼던 유리의 마음 한구석에, 기묘한 의문이 하나 두둥실 떠올랐다.
“어, 어라…?”
아닌 밤중에 정신이 확 깨는 것만 같다. 유리의 눈이 똘망해졌다. 이상하게 간지러운 기분이 들고, 오감이 잠깐 어색해졌다. 이 느낌을 무어라 설명할 길이 없는데, 일단 이대로 계속 느끼고 싶은 감정은 아니란 건 확실했다.
싫다는데도 계속 장난치고, 그러면서 친구는 되고 싶다 하고, 어떨 때는 남이 수치스러울 정도로 칭찬하고, 진지할 때는 진지하고, 자꾸 귀여운 여동생 같단 말을 강조하고, 그게 전부 본심을 숨기기 위한 위장이자 연막에 불과했던 거라면…….
──허업.
“아니, 겠지?”
“설마, 에이. 설마…….”
“그럴 리가.”
“말도 안 돼.”
“극혐이야. 진짜.”
“…설마, 그럴 리가 없다니까….”
얌전히 손으로 입을 막으며.
“……그 녀석이 날, 좋아한다고?”
붉게 빛나는 눈을 부릅떴다가, 입을 막았던 손을 도로 치웠다. 비틀려 올라간 입꼬리가 내려갈 생각을 않고 있었다.
“뭐래. 잠이나 자자…. 내일 일찍 일어나야지.”
자기가 말해놓고도 어이가 없어서, 유리는 실소를 피식─ 흘린 뒤 폭신한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는 고른 숨을 쉬며 금세 잠들었다.
“…진짜 아니겠지?”
아무튼 잠들었다.
#22
날이 밝았다.
여명이 아직 채 걷히지 않은 시기, 어스름한 햇빛이 지평선 너머로부터 잔잔한 파도처럼 밀려올 즈음.
댕─ 댕─……
첨탑 위의 거대한 종이 울고, 일찍이 고인을 실은 장례 마차의 바퀴가 느릿하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덜덜덜덜─
아르티나 왕국의 수도, 베르갈크.
그곳의 왕성을 출발점으로 왕태자가 전사한 로트힐드 평원을 거쳐 다시 왕성으로 돌아올 예정인 운구 행렬은, 왕국의 모든 관공서가 문을 닫고 음주가무를 삼가는 신민들이 밖으로 나와 일동 묵념하는 가운데, 비로소 왕태자의 넋을 기리기 위해 활주를 개시했다.
종소리가 울린 뒤 나라는 1분간 침묵에 젖었다. 낮게 깔린 엄숙함 속 무채색의 가로를 구르며 나아가던 장례 마차는, 아르티나 왕실 근위 기사단인 혈장미 기사단원들이 감싸듯 호위하며 나아가고 있었다.
덜덜덜덜─
왕태자의 관을 실은 마차 뒤로, 또 하나의 마차가 뒤따르고 있었다. 마차의 좌석에는 국왕과 왕후, 공주를 포함한 왕족들이 자리를 점한 채였다. 하나같이 부동의 자세였다. 허여멀건한 낯빛에는 그늘이 가득했으며, 그보다 더 짙은 색채의 복식을 모두 차려입고 있었다.
마차가 수도의 성문을 통과하던 길. 국왕의 손위 형제, 엠브레히트 폰 로하울 아르티나는 맞은편에 앉은 제 조카딸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작고 가녀린 어깨선이 드러나는 검은색의 슬림한 드레스. 왕실의 혈통임을 증명하는 황금의 머리칼과 홍보석(???)의 눈.
염습을 마친 왕태자가 입관했을 때부터 유의미한 변화를 보이지 않던 얼굴은, 십 년 전의 모습과는 결부터 다른 침착한 어른스러움을 머금고 있는 듯 보였다.
앙다문 입술. 평이한 눈썹. 낮게 뜨인 눈과, 마차 밖을 멍하니 향한 시선. 떨림 없이 가지런한 호흡.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울고 불다가 마침내 텅 비어 버렸던 그때와는 근본부터 다르다. 포기와 수용은 엄연히 다르기에.
비단 적잖은 시일이 지났기 때문은 아니었다. 얼마 전만 해도 조카딸은 아직 어리디어린 외관을 벗어나지 못했다. 단지 성숙을 흉내 내는 수준에 그쳤다. 일곱 살 아이의 잔향이 아직도 곳곳에 남아 있었다. 몹시 엄격하게 말하자면, 왕위 계승의 여지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엠브레히트는 창밖에서 마차 내부로 시선을 돌린 유리와 문득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동공 속에 어린 수심과 슬픔 또한 가까스로 읽어냈다. 긴가민가할 정도로 얕은 감정이었다. 그만큼 잘 숨기었다 봐야겠지.
곧내 엠브레히트가 놀라움을 말끔히 감추었다. 절제였다. 유리 또한 절제하고 있었다. 그녀의 성숙은 참으로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두 살 아래의 형제인 지그리트 국왕과는 그닥 사이가 좋지 않은 편에 속했지만, 조카딸에게까지 앙심을 품진 않았다. 그 반대라면 그 반대였지.
섭정이 불가피할 정도로 아이를 망가뜨려 놓은 지그리트를 개탄했을 뿐, 안타깝고 불쌍한 처지에 놓인 아이를 그 누가 힐난하겠는가.
다만, 무릇 제왕의 자질이 충분하다면 친지의 죽음 정도야…… 라는 생각을 하기엔 그 나이가 너무나도 어렸으며, 선왕을 포함한 아르티나 왕국의 역대 군주들은 가감 없이 성군으로 평가받았음에.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 아니라는 것이다. 균형의 수호를 의해 인정을 절제할 뿐, 인정 자체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대로면 유리가 왕위를 계승하는 데 있어 이런저런 차질과 잡음이 빚어질 것은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일. 하여, 섭정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을 것이라 여겼건만.
‘네 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지그리트….’
조카딸과 한 마디 대화를 더 나누지 않고도 충분했는지, 엠브레히트 대군은 참으로 오랜만에 형제와 이야기를 나눠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장장 다섯 시간 이십 오 분에 이르는 운구 행렬이 끝났다. 활짝 열린 왕성의 문을 통과해 들어온 마차가 활주를 드디어 멈추었다.
이제부터는 왕국 신민들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예식이 진행된다. 성내에서 치러지는 왕실장(王??)이었다.
탁─ 탁─
마차의 문이 열리자 왕족들이 하나둘씩 내려와 바닥을 밟았다. 유리는 가장 마지막에 내려왔다.
앞선에 자리한 또 다른 마차의 문이 열리고, 그 속에서 왕태자의 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복 입은 여섯 명의 기사들이 왕태자의 관을 조심히 들었다. 어깨 위로 올리고, 왕실 예배당을 향해 내걷기 시작했다.
펑─ 펑─ 펑─……
근위 마법사들이 세 번의 예포를 발사했다.
둥… 둥…
죽은 자의 넋을 기리는 진혼곡이 성벽을 울리고 하늘로 고요히 뻗어 나갔다. 성내에 위치한 이들은 모두 숙연한 낯빛을 띠었다.
왕족들이 지나는 길 주위로 혈장미 기사단원들이 쭉 늘어선 가운데, 왕태자의 관을 짊어진 기사들이 예배당의 계단을 오르던 순간.
절대적으로 엄숙해야 할 장례식의 분위기가, 묘하게 술렁이는 듯한 기색을 내보였다.
아무도 티를 내지 않으려 하고 있으나, 분명 왕성의 어느 한 군데서 굴곡이 도드라지고 있었다.
행렬의 끝을 걷고 있던 유리 또한 그 기묘한 분위기를 느꼈다. 다만 돌아보지 않으려 했다. 예법에 맞지 않으니까. 그리 다스리며 올곧게 한 걸음 내디딘 찰나.
너무나도 확 튀는 실루엣인지라, 고개를 돌리지 않고서도 눈길이 자연스레 갈 수밖에 없었다.
검은 정장을 입은 청년이었다.
관 속에 몸을 뉘인 인물과 너무나도 똑닮은.
그 옆에는 절세의 규수가 둘 있었다. 봄과 겨울처럼 산뜻한 연분홍빛과 시리디시린 은빛의 소녀들. 청년을 중심으로 각각 왼쪽과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저 중 한 명만 있다 하더라도 괄목할 만한 존재감을 과시했을 텐데, 셋이 전부 모여 있으니 결코 무시할 수 없을 만큼의 비대한 존재감이 뿜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개중 가장 많은 관심을 받는 건, 역시나 잿빛 머리의 청년 쪽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왕족들은 물론이고 성내에서 왕태자의 존안을 직접 마주한 적 있었던 이들의 묘한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었으니…….
그를 호송하기 위해 프론티어까지 찾아갔던 혈장미 기사단장 할튼 에이버노스는 물론이고, 엠브레히트마저 겨우 평정을 유지하고 있는 게 참으로 다행일 노릇이었다.
─…….
다만 왕태자의 관이 왕실 예배당 계단을 넘어서 문 안쪽으로 들어갈 때까지, 본인만큼은 어떠한 상황에도 부동을 유지하고 있었다. 침묵을 지키며 표정과 입술을 딱딱히 굳혔다. 낮게 침잠한 푸른 눈빛이 흔들리는 일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다.
그래, 거의….
이상한 기분에 감싸인 유리가 예배당의 계단을 오르기 전 마지막으로 청년과 눈이 마주쳤을 때, 청년은 유리와 달리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듯했다. 아는 척도 일절 없었다.그로 말미암아 청년이 장례식에 임하고 있는 자세를 확인할 수 있었으나.
단 한 번.
─유감이다.
낮게 내리깐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고, 동공을 올려 유리를 한번 바라보고, 다시 눈을 내리깔며 저만의 애도를 표현했다.
그러자.
죽은 오라버니를 닮은 청년을 낯선 장소가 아닌 익숙한 장소에서 처음 보았다는 점과, 그 장소에 녹아든 진한 추억의 향수가 문득 그리운 감정을 떠올리게 만들어, 유리는 잠깐 입술 밖으로 빠져나오려던 뜨거운 숨을 도로 삼켜야만 했다…….
댕─ 댕─
첨탑 위 종소리가 망연히 울렸다.
유리는 아주 살짝 촉촉해진 눈시울을 깜빡이며, 왕태자의 관이 들어선 예배당 안으로 차분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죽은 자의 넋이 기려졌으니, 이제 산 자의 넋두리가 거두어져야 하는 시간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