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화 〉 넋두리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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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오늘 우리는 아이델 폰 아르티나 왕자 저하의 영혼을 비로소 신의 손에 맡기기 위해 이곳, 르세르크 예배당에 모였습니다. 우리는 당신 앞에서 그날을 기억합니다. 아이델 왕자. 그의 확고한 신념과 충성심. 그리고 용기와 영감을 준 당신의 지도력에 깊은 감사를 표합니다. 모든 신실한 위령들과 함께 바라옵건대, 당신에게 영원한 평화를 내려…….”
왕실 예배당의 스테인드글라스가 프리즘처럼 다채롭디 성스러운 빛을 예배당 구석까지 흩뿌리는 가운데, 백색 제의를 입은 대신관이 집전하는 장례 미사가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거행되었다.
성수를 뿌리고 향을 피워낸 왕태자의 관이 제대 앞에 놓여 있었다. 그 주위론 왕태자의 유가족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들 침울한 듯 낯빛을 일그러뜨리고 있을 뿐, 실제로 눈물을 삼키고 있는 이들은 별로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가까스로 참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유리와 그의 부모를 제외한 이들의 경우, 장례식 참석에 있어 그리 애통한 마음은 가지고 있지 않은 까닭이다.
지난 슬픔은 십 년의 세월 동안 찬찬히 희석되어 갔다. 흘릴 눈물은 그때 다 흘린 지 오래다. 하물며 초상화와 동상으로만 남은 왕태자의 실제 존안을 기억하는 신민들도 그리 많지 않았다. 결국 과거의 인물인 것이다. 그의 죽음은 십 년 전에 이미 받아들여지고 말았던 것이었다.
약력 보고 및 예식이 거행되던 중간에, 유가족을 비롯한 참석자들은 한 명씩 왕태자의 관에 다가가 입맞춤을 했다.
제복 입은 기사, 할튼도 어느샌가 예배당에 들어와 왕태자의 관에 짧은 입맞춤을 했다.
그가 관 주위에 머무르던 시간은 다른 참석자들보다 아주 조금 더 길었다.
행렬이 거의 마지막에 이르렀을 즈음, 잿빛 머리의 청년 또한 왕태자의 관에 바짝 다가섰다. 곧이어 한쪽 무릎을 꿇고 묵묵한 눈으로 관을 바라본다.
순간, 색유리창 너머의 햇살이 가일층 선명해져 장내를 환하게 비추었다.
잿빛 머리가 하얗게 물드는 듯했다. 부서져 조각조각 나뉜 빛은 청년의 몸 구석구석으로 스며들었다. 언뜻 신성함마저 느껴지는 그 자태를, 예배당 내부의 모든 사람들은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제 네 차례야.
직후 자리로 돌아오며, 바로 다음 차례였던 루비아와 눈이 마주친 에지오는 그녀를 향해 작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왕성에 들어왔을 때부터 어쩐지 바짝 긴장한 듯했고, 혹여 자기가 무슨 실수라도 할까 계속 불안해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자신이 한 행동을 똑같이 따라하면 된다, 라는 뜻에서 이루어진 제스쳐였다.
하지만 루비아는 이제야 정신을 차렸을 따름이었다. 그렇기에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멀거니 서 있다가 가까스로 침착을 가장하며 왕태자의 관 앞으로 한 발짝 다가설 뿐이었다.
쿵, 쿵─
주위에서 울려 퍼지는 웅혼한 관현악 소리 따위, 커다란 북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남들에겐 절대 들리지 않고, 오직 루비아에게만 들리는 소리였다.
그 북소리는 에지오가 루비아 쪽으로 차츰 걸어옴에 따라 크기와 세기를 더해갔다. 루비아의 얼굴 근육이 긴장으로 빳빳하게 굳었다. 어느 순간부터 루비아는 에지오를 볼 때마다….
정갈하게 다듬어진 넥타이의 매무새를 때마침 눈여겨본 것도 그즈음이었다.
─알려드렸는데도 정말… 칠칠치 못하시네요. 이러면 제가 다시 해드려야 하잖아요. 넥타이 하나 제대로 맬 줄 모르셔서 어떻게 하실래요, 에지오 씨.
오늘 아침의 일이 떠올라, 루비아는 통제 불가능할 정도로 긴장했던 제 몸의 열이 한순간 싸늘하게 식는 것을 느꼈다.
…정말 오묘한 기분. 한편으론 다행이었을까. 여긴 변변찮은 실수 하나 용납되지 않을 터인 자리였음에. 허둥거리는 모습 보여주지 말자고 일찍이 다짐했지 않은가.
분명 그랬을진대, 자못 정신줄을 단단히 붙잡고 있지 않으면 그만 실수를 해버릴 것 같다…….
“…….”
다음 순간, 기억하는바 얼굴은 똑같지만 분위기는 전혀 다른 유리의 그늘진 낯빛과 숙연한 자세를 불현듯 보고선, 그제야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깨달은 루비아였다.
잠시 잃어버렸던 평정을 되찾자 금방이라도 발이 꼬여 넘어질 듯 불안불안했던 걸음걸이도 차츰 안정되어 간다. 그렇게 방금 에지오가 했던 것처럼, 친구의 오라버니에게 영원한 안식이 깃들기를 바라며 마음속으로 기도를 올렸다.
에지오, 그리고 스텔라 때와 마찬가지로 장내의 시선이 은연중에 루비아를 향해 집중되는 듯했다.
─…….
그런 루비아의 성스럽디 자애로운 성녀(??) 같은 모습을, 누군가 또한 곁눈질로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24
장례 예식이 마무리에 다다르자, 어느덧 시각은 저녁으로 기울었다. 불그스름한 노을이 슬슬 얼굴을 내밀던 사이, 예배당을 나선 왕태자의 관은 곧 묘비가 세워질 왕실 영묘로 운구되었다.
유족들, 참석자들을 포함하여 서른이 채 되지 않는 인원들이 깊게 파인 땅구덩이 주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유족들은 바람 불면 꺼질 듯 희미한 촛불을 든 채였다.
왕족들만 묻힌다는 성스러운 장지(??)에 깊은 땅구덩이 하나가 새로이 파였다. 왕태자의 시신이 그간 발견되지 않았음에 따라 그의 무덤은 조촐한 비석 하나만 달랑 세워져 있었다. 이제 그 비석 아래에 왕태자의 관이 놓일 땅구덩이가 생겨난 것이었다.
엄숙한 적막 속, 뚜껑 열린 왕태자의 관은 유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축축한 흙더미 위에 고스란히 놓였다.
한데 왕태자의 시신은 이상하게도 부패가 전혀 진행되지 않은 듯했다. 저대로 눈을 뜨고 벌떡 일어난다고 해도 거부감이 없을 만큼, 그의 시신은 자연의 법칙을 외면한 채 너무나도 잘 보존되어 있었다…….
“……이제 이 땅에서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그의 육신을 땅에 묻습니다. 비록 육신은 땅에 묻지만 그의 영혼은 영원한 천국에서 영원한 쉼을 얻게 될 것입니다.”
성수를 뿌린 왕태자의 관이 구덩이 속에 깊숙이 파묻힌 뒤, 태양의 교단의 대신관은 마지막 하관예배와 기도문을 나지막이 읊었다.
“주신이시여, 이제 다시는 아픔 없고 고통 없는 곳에서 영원토록 살게 된 그를 기억하게 하옵소서. 하늘의 평화로 그를 위로해 주오소서. 이제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지만 그의 헌신과 사랑을 부디 잊지 않게 하옵소서…….”
말을 마치며 대신관은 자글한 눈주름 속 눈동자를 얕게 치떴다. 그 시선은 곧 어딘가에 닿았다. 잿빛 머리 청년 에지오 크라닐이 위치한 방향이었다.
그러나 에지오는 아르티나 왕녀의 뒷모습을 힐긋 바라보고 있느라 그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다.
검은 드레스를 두르고 머리를 단정히 풀어 헤친 제 친구의 모습이 봐도 봐도 익숙해지질 않아서 그런 걸까. 아마 아닐 것이다. 에지오는 그녀의 겉면이 아닌 내면을 바라보고 있던 까닭이다.
그때 유리가 현장에서 보였던 눈물을 기억한다. 그렇기에, 그녀의 슬픔이 아직 완전히 가시질 않았을 거라는 것 역시 알고 있다. 저리 침착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속은 어떨지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러니, 에지오는 그녀가 지금 느끼고 있을 감정을 추측하고 공감을 시도하려 했다.
왕성에 막 들어왔을 때부터 그랬듯이.
……불가능했다.
무조건적으로 유족의 슬픔에 달리 공감할 필요도 없을 테지만, 에지오는 아예 입구 자체가 막혀버린 듯한 그 감각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침통한 감정의 편린조차 찾을 수 없는 것이 불만족스러웠다.
결여.
남들에게는 다 있는 것이 오직 자신에게만 없는 듯한 느낌. 그것은 마치 변변찮은 재능 하나 없었던 예전의 자신을 떠올리게 하는 것 같기도 했다.
기실 유리를 프론티어로 다시 데려온다는 목적 외에도, 상심에 빠져 있을 그녀를 위로하고자 이렇게 찾아온 것이건만. 진심이 아닌 위로에는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에지오였다.
그렇기에 유리를 볼 때마다 왠지 모를 죄책감이 들었다. 만일 그녀와 대화를 나누게 되면 어떤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괜스레 고민 걱정이 들었다. 때문에 종일 에지오의 낯빛은 좋지 않았다.
그러나, 에지오는 잘 몰랐다.
…가끔은,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는 사람이 존재한단 사실을.
#25
“…모두 수고했노라. 이만 왕성으로 돌아가도록 하지.”
이른 새벽부터 시작해서,
해가 뉘엿뉘엿한 저녁이 되기까지.
길었던 왕태자의 영결식이 끝을 고했다.
왕실 영묘는 왕성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자리했다. 때문에 구태여 마차를 끌고 올 필요도 딱히 없었던 까닭에, 비석을 세우는 이들을 뒤로하고 유족들은 왕성을 향한 길목에 발을 올렸다.
타박, 타박……
작은 언덕길을 밟고 내려간다. 에지오와 스텔라, 루비아도 그들을 뒤따랐다. 근엄한 풍채의 국왕과 그 뒤편의 유리. 별안간 고개만 살짝 돌려 뒤를 돌아본 유리와 그 친구들의 눈이 맞닿았다.
에지오를 제외하곤 전부 반가운 눈치를 보이긴 했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티낼 만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잠시 뒤.
“공주 전하의 친우분이라 하셨습니까.”
무거운 침묵에 젖은 하산길을 내리걷던 도중, 행렬의 맨 마지막에서 느릿하게 걸어가고 있던 에지오의 귓전에 갑작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
에지오는 어깨를 움찔 떨었다. 옆을 돌아보니, 백발이 듬성듬성 난 장년의 기사가 묵직한 음성으로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얼굴에 빗금처럼 사선으로 그인 흉터와 눈빛에 서린 관록. 한 치의 빈틈도 없는 철갑 같은 자세가 과연 대단한 수준의 무사(??)임을 명백히 시사해주고 있었다.
그에 에지오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예. 그… 성함이, 분명.”
“할튼 에이버노스입니다. 공주 전하의 친우분이라 하셨으니, 편하게 할튼이라 불러주셔도 됩니다.”
“그건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분명 처음 소개했을 때 왕실 기사단장이라고 했었지. 나라에 입국하고 나서도 그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보면, 무척 높은 사람이라는 건 틀림이 없을 터였다. 함부로 대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할튼은 쓴웃음을 짓더니 문득 그런 말을 했다.
“그렇다면 실례지만…… 귀하께선 공주 전하와 어떠한 관계이신지 감히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예?”
에지오는 반문한 뒤 당황하지 않고 답했다.
“유리… 아니, 공주 전하… 의 친우가 아니냐고 저에게 물어보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지요.”
“예, 말 그대로입니다. …그냥 친구입니다.”
“그렇습니까.”
할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한 시일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공주 전하께선 꽤 오랜 시간 동안 남성분의 접근을 허락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어떠한 식으로도 국왕 전하를 제외한 남성분과 손끝 하나 닿는 것을 한사코 거부하신 분이십니다. 타국의 높은 남성 귀족분께서 자국에 방문하셨을 때도, 얼굴 한 번 비춘 적이 없으셨습니다. 저 또한 예외가 아니었기에, 공주 전하에게서 한 발짝 떨어져 공주 전하의 주위를 사수하는 것만이 제 역할이었습니다.”
할튼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에지오는 좀처럼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문득 머릿속에 이러한 생각이 떠올랐다.
…혹시나 이 할튼이라는 기사도, 유리네 아버님처럼 유리를 지극히 아끼는 타입인 걸까. 그래서 유리가 유일하게 접근을 허락한 남자인 본인을 아니꼽게 보는 걸까. 사심 같은 건 아무것도 없는데. 더군다나, 따지자면 유리는 자신을 싫어하는 쪽에 가까운데. 그러니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다고 어떻게 돌려 말해야 할지 고민하던 찰나.
“그랬던 공주 전하께서 무언가 변하셨습니다.”
할튼이 말을 이었다.
“저는 공주 전하의 탄생을 직접 축복해드리진 못했으나, 그날부터 공주 전하의 곁을 쭉 지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공주 전하가 가장 소중히 여기셨던 분은 결국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 통한과 후회는 제 가슴속 깊숙이 남아 오늘까지도 저를 괴롭게 만들었습니다.”
언제적 이야기일까. 할튼은 자기가 아는 이야기만 하고 있었으므로 에지오는 잘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말의 흐름으로 보아할 때 할튼이 지칭한 대상이 누구인지는 어렴풋이 추측할 수 있었다.
“이대로 공주 전하께서 잘못된 길을 걸으신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무능했던 저의 탓일 거라고…… 그리 자책하고 있었습니다.”
할튼이 앞만 향하고 있던 고개를 슬쩍, 에지오 쪽으로 돌리며 말했다.
“그때 귀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
“…우연찮게 왕태자 저하의 존안을 몹시 닮으신 분께서 우연찮게 공주 전하의 벽을 허물고 친우가 되셨다는 건, 우연에 우연이 겹친 일이므로 더 이상 우연이 아닙니다.”
다시 앞을 멀거니 바라본 할튼이 말했다.
“운명이지요.”
그의 음성에는 담담한 울림이 있었다.
…이어서.
“귀하께선 어쩌면 공주 전하의…….”
직후 앞을 바라보던 할튼의 시야에 무언가가 잡혔다. 어느새 행렬에서 다소 거리가 떨어져 있던 할튼과 에지오를 이상한 눈치로 돌아보던 유리였다. 비교적 앞자리에 위치해 있어 자세한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영 탐탁지 않게 여기는 눈빛인 것 같기도 했다.
잠시 말을 멈춘 할튼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이 이상의 말씀을 드리는 건 삼가도록 하겠습니다. 만일 귀하와 제가 이러한 내용의 밀담을 나누었다는 걸 공주 전하께서 아시게 된다면, 아마 저희는 둘 다 좋은 형편을 맞이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를 테니 말입니다.”
…이 사람, 자신과 유리의 사이가 사실은 그닥 좋지 않다는 것까지 전부 다 알면서 이상한 말을 한 거였다. 아무튼 에지오는 고개를 마주 끄덕였다. 그의 예언 같은 말은 틀린 게 하나 없었으므로.
#26
“전하, 석찬이 준비되어 있사옵니다.”
“음.”
왕궁은 왕이 거처하는 궁전답게 웅장한 위엄을 자랑한다. 다만 강성한 국력─아르티나 왕국은 막강한 군사력으로 유명하다─에 비하면 조금 소탈해 보일지도 모른다. 황금으로 떡칠을 해놓진 않았으니.
─여기가…….
─응, 유리가 사는 곳이네…….
궁전에 처음 들어와 호기심이 어린 눈치지만, 예의상 크게 놀라움을 보이진 못하고 작은 목소리로 속닥거리는 그들을 잠시 흘겨본 국왕.
“시종장.”
“예, 전하.”
턱수염을 어루만지다 마침내 입을 연다.
“손님들의 인원을 나누어 응접실로 안내하라. 짐은 잠시 대전을 거쳐야 하노라.”
“명을 받들겠나이다, 전하.”
“그리고.”
“예, 전…… 하?”
마지막 말은 시종장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뚜벅, 뚜벅─
원래도 소음 같은 건 없었지만, 한순간에 주변이 싸늘해디 고요해진 느낌이 들었다. 국왕이 근엄한 풍채로 회랑을 가르며 어딘가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뚜벅, 탁─
국왕의 발걸음이 멈춘 그곳에는, 예의 잿빛 머리 청년이 굳은 얼굴로 서 있었다.
“그대는 짐을 따라와 줄 수 있겠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