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차버린 소꿉친구와 전 여친이 같은 반이라 곤란하다-192화 (192/201)

〈 192화 〉 넋두리 (11)

* * *

#27

“아빠, 잠깐…….”

“놀랄 것 없단다. 그저 짧은 이야기를 나눌 뿐이니.”

고운 눈썹을 모로 기울이며 성큼─ 한 발짝 나서는 유리에게, 국왕은 그리 차분한 투로 대응했다.

“……그게 전부가 아닐 것 같아서 이러는 거잖아.”

유리가 긴 금발을 찰랑이며 작은 목소리로 부언했다. 한사코 친구의 문턱에 간신히 발을 걸친 관계일 뿐이라 못 박아두었지만, 국왕이 또 이상한 오해를 하고 있을 수도 있다. 어쩌면 안부 인사차 대화 한마디 나누기도 전에 나라 밖으로 쫓겨날 가능성도 있다 이 말이다.

─…….

장내가 무척 조용해졌다. 비슷한 눈높이에서 서로를 마주 보는 에지오 크라닐과 지그리트 국왕, 유리 공주를 에워싼 시선들의 숫자는 대략 수십 쌍에 달했다. 침묵 속에 무게감이 깃들었다.

국왕은 제 딸을 돌아보며 입을 연다.

“유리, 이 아비를 믿어다오. 너와 네 친구들에게 해가 될 만한 일은 절대로 하지 않으마.”

“…….”

잠시 부녀의 눈초리가 허공에서 맞물리더니.

“……알았어. 대신 정말로 오래 걸리면 안 돼.”

“고맙구나.”

자기가 졌다는 듯 한숨을 폭 내쉰 유리를 끝으로, 느슨하게 미소 지은 국왕은 다시금 에지오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그대는 어찌하겠는가. 사양해도 좋다.”

“…….”

이 자리에서 당당히 거절의 의사를 표방할 만한 인물이 과연 얼마나 될까. 에지오는 잠시 그런 고민을 해보았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전하.”

아마 한 명도 없을 것이었다.

#28

“…사람을 물렸노라. 따라서 이 주변에는 당분간 아무도 오지 않을 터이니, 그대의 마음이 가는 대로 편히 얘기하여도 좋다. 아니, 외려 짐에게 너무 격식을 차리지 않았으면 좋겠군.”

국왕은 에지오를 왕궁 한켠의 회랑으로 이끌었다. 오른쪽은 벽면 대신 아치형 기둥이 규칙적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그 넓은 틈새로 따스하고 아련한 노을빛이 내려앉아 너른 회랑을 느슨하게 비추었다.

“성은이 망극하오나.”

뚜벅, 뚜벅─

에지오가 연이어 입을 연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전하.”

창 너머의 풍경은 정원이었다. 궁정의 안뜰. 짙푸른 풀떼기들이 조화롭게 자리한 장소. 제법 조경이 잘 되어 있었다.

하지만 어딘가 쓸쓸해 보이는 것은 왜일까. 저리 아름다운 정원 안에서 뛰노는 사람은 고사하고, 활짝 피어난 꽃 위를 날아다니는 나비 한 마리마저 보이지 않는 까닭일까.

“……그대도 고지식한 편인가?”

“예?”

“되었다. 딸아이가 대화를 길게 끌지 말라 하였으니, 괜한 고집을 꺾게 만들고 싶지도 않군. 그대 편한 대로 하거라.”

“성은이 망극­”

“아, 다른 건 괜찮으니 제발 그것만은 삼가줄 수 있겠나? 그대의 얼굴로 그런 말을 들으니 참으로 이상한 기분이 드는구나.”

“……알겠습니다. 전하.”

“음.”

뚜벅, 뚜벅─

“에지오 크라닐이라고 하였나.”

“맞습니다, 전하.”

“그대를 여기 부른 것은 딸아이가 아닌 짐이다. 알고 있었는가?”

국왕의 말에 에지오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예상은 했었습니다.”

“예상을 했다?”

“그렇습니다. 처음부터 공주 전하께서 저를 초대할 거라 생각하고 있지 않았기에…….”

“유리라 불러도 좋다. 친구라 하지 않았느냐.”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전하.”

“고지식한 편이 맞군.”

“예?”

“못 들은 척하지 말거라.”

“……송구합니다.”

에지오는 머쓱한 마음에 잠시 헛기침을 했다.

국왕이 손을 대충 휘적이며 입을 연다.

“되었다니까. …무튼, 그대에게는 일찍이 감사를 표하지 못했군. 이 자리를 빌어 아들의 장례를 치를 수 있게 도와준 그대에게 고맙단 말을 전하도록 하지. 그대들이 아니었다면 그 아이는 아마 영원토록 안식을 취할 수 없을지도 몰랐을 터이니…….”

“황송합니다, 전하. 그리고… 그곳에 공주 전하께서 계시지 않았다면 고인의 시신 수습은 물론, 저희들의 목숨까지도 불분명한 상황이었습니다. 저희들뿐만이 아닌 공주 전하의 덕도 분명하게 있었습니다.”

“짐도 알고 있노라. 허나, 가장 큰 공헌을 한 건 바로 그대라는 사실 또한 알고 있지. 따라서 그대에게는 짐이 직접 왕실의 이름으로 포상을 내릴 자격 또한 충분하노라.”

“……송구하오나.”

“충분하다고 했지, 정말 준다는 이야기는 아직 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송구하면 어찌하나?”

“……이 역시 송구합니다, 전하.”

“저런.”

국왕이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다음 순간, 에지오가 말했다.

“전하.”

“편히 말하라.”

“저 역시 늦은 감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만. 이번 일에 대해선 깊은 유감의 말씀을…….”

뚜벅, 뚜벅─

탁.

국왕은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는.

“말로 전하지 않아도 좋다. 그대는 여태 일면식도 없었을 터인 생면부지 타인의 장례식에 누구보다 진지한 태도로 임해주었음에. 무엇보다…….”

평온하게 뜨인 눈으로 궁정 안뜰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 아이를 처음 떠나보내고 난 뒤로, 이미 많은 유감을 겪었노라. 그러니 그대의 유감까지 받아들이긴 벅차다. …이제는 하늘 위에 있을 그 아이의 안식만을 빌어주거라.”

에지오는 순간 생각했다. 국왕은 진실을 알고 있을까. 아니면 모르고 있을까. 왕태자의 영혼은 더 이상 하늘 위에도 땅 아래에도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서 중얼거리는 말일까. 아마 모르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에지오도 굳이 부언할 수 없었다. 유리가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니까. 아이델과 유리 사이에 이루어졌던 마지막 해후의 내용마저도.

국왕을 따라 안뜰을 잠시 돌아본 에지오가 담백하게 말했다.

“……분명, 좋은 곳에 가셨을 겁니다.”

국왕은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그 아이라면.”

아이델 왕태자 정도 되는 위인이 천국에 가지 못한다면, 대체 그 어느 누구가 천국의 문을 두드릴 자격이 있다는 말인가…….

“그대여.”

“예, 전하.”

국왕이 불현듯 에지오를 불렀다. 그러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검은 정장의 잿빛 머리 청년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국왕은 숨을 삼키며 말했다.

“짐과 왕비는 그대를 딸아이의 입학 예식에서 처음 보았노라. 그때 짐이 어떤 기분을 느꼈는지 알고 있는가?”

“…….”

에지오는 침묵했고,국왕은 말을 이었다.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늙고 병든 몸이라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것 없었지. 짐은 그때 잠시 죽음을 경험하고 왔노라.”

“……전하.”

“하지만 결국 죽지 않을 수 있었다. 성장한 딸아이를 먼저 보았고, 그로부터 십 년이 흘렀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던 덕분이지. 만일 그 아이가 살아있었다면 지금쯤 삼십을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야. 고로 십 년 전의 그 아이를 닮은 그대는 짐의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의 방증이 될 테지…….”

“…….”

얼마나 걷고, 얼마나 대화를 했을까.

긴 회랑의 끝이 보였다.

“그대여.”

“……예, 전하.”

“딸아이, 유리와 친구 관계라 하였나.”

할튼과 똑같은 질문을 하고 있었다.

부정할 이유가 달리 없다. 에지오는 고민 없이 고개를 주억였다.

“그렇습니다.”

“음.”

묘한 침음성을 흘린 국왕이 다음 질문을 이었다.

“그렇다면.”

“예.”

“유리를 어떻게 생각하나.”

“……예?”

순간.

질문과 별개로 에지오가 흠칫했다.

‘……방금 뭐였지?’

고개를 갸웃하며 뒤를 돌아봤던 에지오는 곧 사람을 물렸다는 국왕의 말을 떠올리곤,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린 뒤 입속에서 말을 굴렸다.

‘……대답 잘해야 할 것 같은데.’

애가 무슨 싸가지가 없다느니, 뭐니.

함부로 입을 놀렸다간 그 자리에서 바로 참수당하는 수가 있다. 에지오는 헛기침을 하면서 등허리에 식은땀을 흘렸다.

“그냥 좋은 친…….”

정말 딸바보라면 자기 딸에 대해 뭐든지 좋게 말해주는 것만으로도 흡족해할 테지만, 기실 국왕은 입에 발린 말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 같은 맥락에서 무난한 칭찬도 불만족스러워할 테고. 그렇다면 조금은 진정성이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구라고 계속 생각했습니다만, 지금은 좀 다릅니다.”

“지금은?”

“예.”

고개를 주억인 에지오가 이어 말했다.

“처음 뵈었을 때부터 공주 전하께선 저와 눈만 마주쳐도 기겁하실 만큼 절 싫어하셨습니다.”

“…….”

“……그렇지만 저는 저를 그렇게나 싫어하시는 공주 전하와 친구가 되기를 꾸준히 바랐고, 결국 노력 끝에 친구가 될 수 있었습니다. 공주 전하께서 절 인정해주셨던 덕분입니다.”

“흐음, 딸아이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 같은데.”

“……공주 전하께서 워낙 솔직하지 못하시지 않습니까? 부끄럽거나 껄끄러운 일을 쉽게 인정하지 않으시려는 부분도 있고 말입니다.”

“하하. 유리가 그런 면이 있긴 하지. 반면…….”

허허 웃던 국왕이 문득 말했다.

“그대는 기분 나쁠 정도로 솔직하군.”

“……송구합니다, 전하.”

“기분 나쁠 정도라고 했지, 실제로 기분이 나쁘단 말은 하지 않았노라. 괜찮으니 계속 말해 보아라. 짐은 솔직한 자를 기꺼이 여기니.”

정말로 기분이 상한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에지오는 국왕의 수염 사이 입매가 느슨하게 올라가 있는 것을 언뜻 보았다.

“…….”

무어라 말을 찾던 에지오가 결국 입을 연다.

“저는 유리를 신뢰하고 있습니다.”

턱수염을 어루만지던 국왕의 손길이 뚝 멎었다.

에지오에게서 바랐던 대답이 아니라기보단, 예상하던 대답과 조금 동떨어진 대답이었던 까닭이다.

“유리는 강합니다. 약해 보여도 정말 강한 친구입니다. 사실 그렇게 약해 보이지도 않습니다. 유리는 늘 가시를 세우고 다니니까요. 때문에 남들도 유리를 함부로 대하지 못합니다. 그 반대의 경우는 있어도 말입니다…….”

“…저는 그렇게 까탈스러운 유리와 결국 친구가 된 사람입니다. 기실 친구가 되면 서로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되기 마련입니다. 그에 따라 저는 자연히 유리가 실은 정말로 강한 사람이라는 것 또한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껏 그녀가 강해지려는 노력 또한 한 번도 쉬지 않고 꾸준하게 해왔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습니다.”

“강한 사람은 믿음직스럽고, 믿음직한 사람에겐 신뢰가 생기는 법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유리를 몹시 신뢰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유리는 강합니다. 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나 강하고 멋진 친구인데…….”

“……지금은 많이 불안정해 보입니다. 전처럼 약해 보여도 강한 게 아닌, 강해 보여도 실은 약한 듯합니다. 때문에 유리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유리는 분명 제게 좋은 친구였습니다.”

“지금은─ 소중한 친구입니다.”

“……그런 친구가 이대로 무너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습니다. 저희가 유리의 친구가 아니었다면 모르겠지만, 유리의 친구인 이상 유리의 힘이 되어주고 싶습니다. 가급적 유리의 옆에 있어주고 싶습니다.”

“저희는 유리가 충분히 강하다는 것을 알고, 저희 또한 그녀를 믿고 있지만, 그럼에도 지금 같은 때엔­ 더더욱 저희 같은 친구들의 역할이 중요한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울러…… 아마 그 역할은 그중에서도 제가 가장 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감히 품어봅니다. 전하.”

뚜벅─ 발소리가 회랑의 끝에서 멎었다.

어느샌가 빛이 잘 들지 않는 그림자 아래까지 걸어와 있었다. 국왕의 낯빛은 그늘에 져서 잘 확인되지 않았다.

“결론이 무언가.”

“공주 전하께선 제 소중한 친구이십니다.”

거짓은 아니다. 에지오의 눈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참으로 영악한지고. 딸아이가 혹여 제국으로 돌아가지 못할까 싶어 짐에게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닌가.”

에지오는 예를 갖추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송구합니다.”

“부정도 하지 않는구나. 쯧.”

국왕이 가볍게 혀를 찼다.

그리고.

“이런 뻔뻔한 면까지 또 그 아이를 닮았단 말인가…….”

잠시간의 침묵 뒤, 입을 열어 말했다.

“유리는 짐의 하나뿐인 딸이노라.”

그늘 속에서 조용히 말을 잇는다.

“비교적 최근까지 그 아이와 편지를 주고받았지. 거기에 그대의 이야기가 섞여 있었다.”

“…….”

“대부분 험담이었노라. 짜증과 화가 가득하더군. 그대를 껄끄러이 여기는 마음이 여기까지 전해져 올 정도였노라.”

에지오는 어쩐지 떨떠름한 기분을 느꼈다.

과연, 그랬단 말이지…….

“동급생에 대해 그리 박한 평가도 처음이었으나.”

국왕은 턱 끝을 살짝 위로 치켰다.

“그리 기피하던 남자를 언급한 것도 처음이었다.”

“…….”

“부모로서 신경 쓰이지 않겠는가. 당연히 자세하게 알아볼 수밖에 없었노라. 딸아이가 매 편지마다 언급하는 그 ‘짜증나는 녀석’이 대체 누구인지. 그래서 친히 알아보았노라.”

그제야, 국왕은 에지오를 돌아보았다.

묵묵한 눈빛이었다.

“바로 그대였다. 에지오 크라닐.”

“…….”

“짐은 이번에 처음으로 그대와 이야기를 했다. 허나 몹시 이상한 기분이 드는구나. 그대가 무엇을 말하든 전적으로 신뢰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로다. 하여, 그대에게 있으면 안 될 호의가 자연히 생기는구나. 짐은 딸아이를 다시는 그 위험천만한 곳에 보내고 싶지 않을진저…….”

허심탄회한 목소리가 얕게 새어 나왔다.

“그대를 보며 짐이 느끼는 이 감정은, 왕비도, 짐의 딸아이도 마찬가지겠지…….”

국왕은 바로 옆의 에지오를 보고 있었지만 조금 더 먼 곳을 그리고 있었다. 시선 너머로 무언가를 투영하는 듯 보였다. 에지오는 그에 무어라 할 말을 찾지 못한 채로 가만 침묵할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대가 마지막에 한 말은──”

……그때.

저벅, 저벅─

“둘 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음?”

돌연 회랑의 모퉁이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내가 오래 걸리지 말라고 했잖아.”

“아, 벌써 시간이…….”

허리 부근에 양손을 얹은 드레스 차림의 유리였다.

“벌써는 무슨! 빨리 오기나 해. 아빠 때문에 다들 밥도 못 먹고 기다리고 있다구!”

소리를 치는 것 같지만 실제론 작은 목소리다. 복도를 잔잔하게 울리는 유리의 카랑카랑한 음성. 에지오의 입장에선 실로 오랜만에 들어서 그런지 반가움마저 들 정도였다.

국왕이 두 손을 천천히 들며 말했다.

“알았다, 알았어. 이제 가마.”

“하여간…….”

그렇게, 다음 순간.

“……너, 너도 빨리 와. 애들 기다려.”

“……?”

국왕을 사납게 흘기던 그 눈이 문득 에지오와 직선으로 마주치자, 유리는 답지 않게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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