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화 〉 넋두리 (12)
* * *
#29
한편, 왕궁의 1층 우측 회랑 중간의 대(大)응접실.
─나, 나 뭔가 실수한 건 아니었을까……?
─괜찮아요. 아무 문제 없으셨어요.
참석자들에게 위문 인사를 받던 유리가 상황을 좀 보고 오겠다며 자리를 떠나고, 엠브레히트 대군을 비롯한 왕족들마저 잠시 자리를 비운 가운데, 이 넓고 휘황찬란한 장소에 남은 인원은 얼마 되지 않았다.
─소식은 들었습니다, 레이디 베넛. 귀하께서 경영하시는 상회가 큰 이득을 보셨다고요. 축하드립니다.
─운이 좋았지요. 무역망에 설치되었던 게이트가 시기적절하게 오작동을 일으켰으니 말입니다. 덕분에 관광지로만 사용하고 있었던 소금길을 교통로로 활성화시킬 수 있었지요.
─하하, 알 만합니다. 상인조합에서 소속 행상인들에게 지원해줄 수 있는 인력에도 한계가 있을 테니…… 아 참, 베넛 공께선 평안하십니까? 저번 만남을 마지막으로 모습을 통 뵙질 못했군요.
─평안하고 말고요. 아주 건강하시답니다.
서로 면식이 있는 이들은 어느샌가 한자리에 모여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지만, 그들과 인연이 있을 리가 없는 외부인들은 손님용 소파에 앉아 조용히 차를 홀짝이는 중이었다.
─나 이제 어떻게 해야 돼……?
─에지오 씨랑 유리 씨가 오실 때까지 기다려 봐요. 아니면 이거 좀 드시고 계실래요? 남부에서 꽤 유명한 초콜릿 같은데…….
예컨대, 루비아나 스텔라라든가…….
“레이디 스텔라.”
아니,
정확히는 루비아 혼자였다.
“오랜만입니다. 당신도 초대를 받으셨군요.”
초콜릿의 향기를 조심스레 맡아보던 루비아는 흠칫 놀랐다. 가까운 곳에서 갑자기 목소리가 들려왔던 까닭이다. 양해를 구하고 무리에서 잠깐 빠져나온 귀족 남성이 스텔라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탁─ 들었던 찻잔을 도로 내려놓은 스텔라가 빙긋 웃으며, 앉은 자리에서 우아하게 인사를 건넸다.
“네, 오랜만이에요. 빈센트 경.”
“저를 기억하고 계시다니, 영광입니다.”
“한두 번 본 사이도 아닌데요. 기억하지 못하는 게 더 이상하죠. 후후. 무슨 일이신가요?”
빈센트 경이라 불린 남자는 선한 인상의 미남이었다. 눈매가 푸근하게 휘어져 내려와 지어지는 눈웃음이 썩 인상적이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검은 정장을 입은 빈센트가 대답했다.
“그저 안부 인사입니다. 이런 곳에서 또 뵙게 되어 반가운 마음이 들었을 뿐. 그리고…… 프론티어에서의 소식도 들었고 말입니다.”
그런 말을 건네던 빈센트의 눈이 순간적으로 스텔라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높고 높은 귀족들이 모인 자리에 몸이 뻣뻣하게 굳어 버린 루비아가 그 자리에 있었다.
“프론티어라면…….”
“예, 봉변을 당하셨단 얘기를 들었습니다. 겉으로는 무탈해 보이셔서 정말로 다행이지만…….”
벌써 사교계에 소문이 쫙 퍼진 걸까. 기실 벌써라기엔 시일이 꽤 지난 일이긴 하다. 여하튼 빈센트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건, 이 자리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 또한 매한가지라는 의미일 터다. 그러나 지금 스텔라에게 말을 걸어온 사람은 빈센트가 처음이었다.
스텔라는 한쪽 가슴에 손을 얹고 부드러이 답했다.
“그럼요, 보시다시피 아무 문제 없어요. 저는 이렇게 잘 살아 있답니다. 걱정해 주셔서 고마워요, 빈센트 경.”
용기를 내어 먼저 말을 건 보람이 있었다. 스텔라 특유의 미소와 분위기에는 가공할 파괴력이 존재했다. 예부터 그 아리따운 외모로 뭇 귀족 사내들의 가슴을 저리게 만들었던 스텔라다. 빈센트는 북받치듯 밀려오는 감동과 함께 살짝 붉어진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크흠, 아닙니다…… 저, 레이디 스텔라.”
“네, 말씀하세요.”
빈센트의 낯빛에 일순 고민의 기색이 깃들더니.
“펠트라인 공작께서는… 평안하십니까?”
결국 그런 질문을 나지막이 건넸고.
─…….
일순, 대응접실의 기류가 묘한 흐름으로 바뀌었다.
다들 하던 바와 같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듯하지만, 시선만큼은 어쩐지 전부 이곳을 향하기 시작한 것 같았다.
“…….”
덩달아 루비아의 어깨도 긴장으로 경직되었다. 포장지를 벗겨낸 초콜릿을 다람쥐처럼 입에 문 채였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온몸으로 그렇게 느꼈다.
삼 초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그럼요.”
스텔라는 이전과 똑같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전보다 많이 괜찮아지셨어요. 물론…… 지금은 제가 프론티어에 재학하고 있는 중이라 그렇게 자주 뵙진 못하지만요. 영지 사찰도 가끔 하시는 것 같고. 곧 열릴 대공회의에도 얼굴을 비출 수 있으실지도 모르겠네요. 당연히 확정은 아니랍니다.”
“아, 아……. 그렇군요. 제가 괜한 질문을 드린 건 아닌지 잠깐 걱정을 했는데, 정말 다행입니다…….”
그리 말하며 빈센트는 약간의 놀라움을 드러냈다.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주변인들의 눈에도 이채가 깃들었다.
방금 스텔라의 발언은 아주 귀중한 정보가 될 수도 있었다. 알다시피 귀족 사회에서는 정보의 빠른 선점이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므로…….
“괜한 질문이라니요, 전혀 그렇지 않아요. 빈센트 경은 요즘 어떠신가요?”
“저 말입니까? 저는 이번에…….”
그로부터 몇 마디 대화를 더 주고받은 빈센트와 스텔라. 그들의 담화는 물밑에서 펼쳐지는 살벌한 암투 같은 것도 없이 화기애애한 마무리를 지었다.
터벅─ 터벅─
그런 분위기에 자극과 용기를 받은 것인지, 뭉쳐 있던 귀족 남성들 몇 명이 스텔라와 루비아 쪽으로 서서히 걸어왔다.
“레이디 스텔라. 처음 뵙겠습니다. 제 이름은…….”
“일 년 전 수도에서 열린 전시회장에서 한 번 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만, 혹시나 기억하시지 못할까 싶어 말씀드립니다…….”
“그대가 그 유명한 「별의 성녀」인가? 처음 뵙겠네. 나는…….”
사실 대응접실의 모두가 스텔라를 알고 있었다. 모를 리가 없다. 제국의 공작 가문이란 위치는 바로 그런 것이었다. 제아무리 다섯 공작가 중 가장 열세하다 평가받는 펠트라인 가문이라곤 하나, 타국의 국왕마저 함부로 무시할 수 없을 만한 귀족가의 영애였다.
무엇보다 사교계 등지에서 「별의 성녀」라는 이명으로 불릴 만큼 아름다운 용모도 한몫했음에.
“……냠.”
졸지에 여럿을 상대하게 된 스텔라가 대응접실의 한켠에서 소담을 나누는 새, 혼자 남겨진 루비아는 초콜릿 한 조각을 베어 물고 있었다.
누군가 말을 전혀 걸어주지 않아 침울해진 것은 절대로 아니었고, 오히려 정말 그런다면 매우 불편할 것이 분명했다. 이런 자리는 영 체질과 맞지 않았으니까. 그냥 이대로 초콜릿을 깨물어 먹으며 유리와 에지오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
“레이디.”
“……!”
루비아가 어깨를 흠칫 떨었다.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올려보니, 그곳에는 부드럽게 웃음 짓는 빈센트가 있었다.
“켈록, 켈록. 네, 네?”
“아, 놀라셨습니까? 죄송합니다.”
“아뇨, 아뇨. 괜찮, 켈록. 아요……. 무, 무슨 일이세요?”
초콜릿이 조각째로 넘어갔다. 입을 가리고 기침을 해대던 루비아가 눈물을 그렁거리며 손으로 눈가를 슥 훑었다.
“하하, 그리 긴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레이디. 저를 편하게 대해주셔도 괜찮습니다. 레이디와도 꼭 말씀을 나누고 싶었을 뿐이니까요.”
남을 상대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모양인지, 행동과 몸짓 하나하나가 어설프고 귀여웠다. 빈센트는 문득 마음이 따스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울러─ 그녀의 모습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맥동했던 심장이 아주 조금 더, 간질거리는 것도 같았다.
“아, 아. 그렇군요. 음. 그게──”
“저는 빈센트 데르바인이라고 합니다. 제국 베리온 기사단 소속의 기사이고, 저 외딴 프사르라는 소영지를 하나 경영하고 있지요. 절 부르실 때는 빈센트 경이라고 해주셔도 충분합니다.”
“아, 아. 네. 빈센트 경…….”
“실례지만 레이디의 성함은 어떻게 되십니까?”
“네? 아, 저는…….”
빈센트는 그녀의 이름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잠자코 대답을 기다렸다. 어떻게 하지, 하고 잠깐 스텔라 쪽을 돌아봤던 루비아가 마침내 조심히 입을 열어 답했다.
“루비아, 라고 해요.”
“루비아…….”
빈센트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레이디처럼 아름다운 이름입니다. 정말로.”
“앗…….”
직설적인 칭찬이다. 루비아가 나지막이 침음성을 흘렸다. 성씨가 없는 평민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조금 어색한 반응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는데, 빈센트는 겉으론 전혀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아마 실제로도 별생각 없을 것이었다. 일단 빈센트도 과거에는 평민이었고, 지금은 기사 서훈을 받은 남작 정도의 소귀족일 뿐이었으니까.
말인즉, 오히려 스텔라와 같이 높고 높은 신분보다는 차라리 평민인 루비아 쪽이 훨씬 정감 있고 편한 느낌이 들었다…….
빈센트가 턱을 어루만지며 선한 미소를 띠었다.
“루비아, 루비아…… 몇 번을 불러도 계속 부르고 싶어질 만큼 좋은 어감입니다. 레이디의 부모님께선 이리 멋진 이름을 지어주신 것도 모자라, 레이디처럼 아름다운 분을 또 세상에 내려주시기까지 하셨군요. 오늘 같은 날에 기뻐해선 안 될 일이겠지만…… 레이디와의 만남은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아, 아하. 아하하… 말씀은 감사하지만, 계, 계속 그러시면 좀 부담스러운데…….”
“아, 그러셨습니까? 제가 거짓말은 잘 하지 못하는 성격이라서. 정말 죄송합니다, 레이디 루비아. 결례를 범했군요.”
“아, 아뇨. 죄송할 것까진 아니구…….”
각 잡고 고개를 꾸벅 숙여오는 것도 참 부담스러웠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대화를 거부하기도 뭣한 게, 그리 나쁜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던 까닭이다. 스텔라와도 면식이 있었던 것 같고. 착하고 다정한 친구인 스텔라가 알고 지내는 사람 중에 나쁜 사람이 있을 리 없다, 라는 판단하에 루비아는 어찌저찌 빈센트를 적당히 상대해주고 있었다.
“레이디께서도 프론티어에 다니시는 겁니까?”
“네, 맞아요. 스텔라랑 유리… 아니, 공주? 님이랑 친구…… 예요.”
“친구라… 역시 그러셨군요. 그렇다면 레이디 스텔라와 같은 에픽 클래스의 학생이실 테고요.”
“그것도… 그렇죠, 네.”
루비아의 긍정에 빈센트는 순수히 감탄했다.
“대단하십니다. 저 같은 기사 나부랭이는 평생을 수련한들 문턱조차 밟지 못할 곳이지 않습니까. 가히 최고의 재능을 가진 분들만 들어갈 수 있는 자리일 테니…….”
여기서 그렇지 않다, 자기는 평범하다 하는 것도 참 뭣한 일이다. 루비아는 머쓱해 하며 언제나처럼 어설프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비, 빈센트 경도 대단하신 분 같아요. 기사라는 건, 그거죠? 강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작위잖아요. 게다가 영지도 경영한다고 하셨구. 저같이 아직 아무것도 이룬 것 없는 사람보단 훨씬 대단하신걸요.”
“하하, 과찬이십니다. 하지만 레이디께 칭찬을 들으니 기분은 정말 좋습니다. 하물며 레이디의 목소리는 듣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묘한 힘이 있는 것 같군요. …혹시 물종새라고 아십니까? 전설 속의 새인데, 그 새의 조잘거림이 들려오면 그날 하루는 좋은 일이 가득하다고 합니다. 저는 아직 물종새의 소리를 들어본 적 없지만, 레이디의 목소리와 아주 비슷할 것 같단 느낌이 듭니다. 레이디 덕분에 오늘 제 하루도 좋은 일만 가득할 것 같은 기분입니다.”
“아, 아하. 아하하……. 그런, 가요오…….”
확실히 착한 사람인 것 같긴 한데,
너무 과하지 않나 싶다…….
“레이디.”
“네?”
그때, 빈센트가 진지하게 말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기회가 된다면 가끔 레이디와 친교를 나누고 싶은 마음입니다. 레이디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네, 네……?”
루비아가 눈을 깜빡였다. 이게 무슨 말일까.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레이디 스텔라처럼 저 또한 레이디의 친구가 되고 싶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되면 제 입장에선 정말로 영광일 것 같아서 말입니다. 비록 나이는 조금 차이가 있겠으나…… 우정에 나이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하하.”
빈센트는 넉살 좋게 웃음 지었다.
“치, 친구…… 으음…….”
“역시 안 되겠습니까?”
반면 곤란한 기색의 루비아.
“어, 그게…… 저는 아직 학생이고. 프론티어 밖으론 잘 나갈 수도 없고…… 아마 자주 뵐 수는 없을 텐데…….”
“아, 형식적인 사교를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연한 인연을 발판 삼아 친분을 서서히 쌓아 나가자는 것이지요. 저는 레이디와 오늘 이렇게 안면을 튼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지만, 다시 뵈었을 때 조금 더 반가운 관계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이런 말씀을 드린 겁니다.”
빈센트가 부담 갖지 말라는 듯 부드럽게 말했다. 유하고 선한 인상에 깃든 순수한 호의. 이럴 때 어떻게 딱 잘라 단호히 거절을 할 수 있을까. 루비아의 성격으론 턱도 없었다.
“그리고, 훗날 여유가 되실 때.”
빈센트의 말이 이어졌다.
“사정상 많은 걸 접대해 드릴 수는 없지만, 만일 마음 편히 쉴 곳이 필요하시다면 언제 한번 제 영지를 방문해 주시지요. 최선을 다해 레이디께서 휴식하실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생판 남이 기거하는 곳에서 어떻게 편히 쉬라는 건지, 루비아는 잘 몰랐지만 일단 호의에 감사하며 애써 웃어 보였다.
결국.
“마음은 정말 감사해요. 그치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평소의 루비아였다면 절대 하지 못했을 ‘순수한 호의에 대한 거절’을 입에 담으려던 순간.
탁─
“어맛!”
손을 잘못 옮긴 걸까. 찻잔 손잡이를 붙잡으려던 루비아의 손이 순간적으로 미끄러졌다. 탁자 위의 찻잔이 기우뚱, 옆으로 기울었다.
남은 차는 절반 정도. 적당히 식긴 했지만 미약한 온기가 남아 있다. 찻잔 속 내용물이 확 엎어졌다. 탁자 아래로 찻물이 뚝뚝 흘렀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탁자 모서리에 놓여 있던 찻잔이 엎어지자, 두어 바퀴쯤 구른 찻잔은 절벽에서 추락하듯 뚝 떨어진다.
타악─
가장 먼저 루비아가 반응했고, 뒤를 따라 빈센트가 손을 내뻗었다. 공중에서 추락하던 찻잔이 누군가의 손바닥에 아슬아슬하게 안착했다.
“아, 아. 이런…….”
루비아의 손이었다.
“조심하시지요, 레이디.”
그에 따라 찻잔 대신 루비아의 손등을 감싸듯 붙잡게 된 건, 빈센트의 큼지막한 손이었다.
─무슨 일이야?
─차를 엎은 것 같은데.
짧은 소란에 그쪽으로 시선이 죄 몰리고, 얼떨결에 허리를 굽힌 빈센트에게 손을 붙잡힌 모양새가 된 루비아가 당황하던 찰나.
똑, 똑─
덜컥─
노크 뒤,
대응접실의 문이 열렸다.
“국왕 전하께서 준비가 다 되었다 하십니다. 이제 만찬장으로 이동하시면 되겠습니다, 여러분……?”
문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지그리트 국왕과 시종장, 그리고 왜인지 차분하지 못한 얼굴의 유리와 에지오 크라닐이었다.
멀거니 선 국왕이 잠시 후 입을 연다.
“……무슨 소란이 있었는가?”
“아닙니다, 국왕 전하. 제가 잠시 차를 엎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금방 치우겠습니다.”
빈센트가 넙죽 허리를 숙였다. 붙잡았던 손은 놓은 지 오래였고, 루비아의 자그마한 실수를 덮으며 품속에서 손수건을 꺼내려 했다.
“……어.”
그러나 이미 루비아가 마법으로 물을 증발시킨 참이었다. 탁자 위에 깔린 천의 젖은 부분도 싹 말렸다. 매우 빠르고 세밀하게 이루어진 작업이었다. 이번에는 빈센트가 당황하던 새, 국왕이 머리를 주억이며 말했다.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군.”
국왕은 대충 정리하고 따라오란 말을 남긴 뒤 대응접실을 뒤돌아 나섰다. 시종장 또한 대응접실의 모두를 만찬장으로 인도했다. 그렇게 루비아와 스텔라도 밖을 향해 나서게 되었다.
“나가죠, 루비아 씨.”
“으, 응……. 잠깐만.”
“루비아 씨?”
겨우 해방되어 한숨 놓았던 스텔라가 루비아를 불렀지만, 루비아는 어느샌가 스텔라와 빈센트를 뒤로한 채 어딘가로 총총 걸어가고 있었다.
툭, 툭─
“저, 저기.”
“……?”
복도에서 당연히 뛰지는 않고, 빠른걸음으로 이동하여 상대의 옆에 기어코 도달한다. 루비아는 넥타이의 매무새를 점검하며 걸어가던 에지오에게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아, 맞아. 괜찮아? 손 데진 않았어?”
“어, 어? 아니, 안 데였는데…….”
에지오는 루비아에게 그리 태연한 투로 물어왔다. 하지만 루비아는 방금 그 말로 알 수 있었다. 빈센트의 변호가 통하지 않았다는 건, 에지오는 문이 열린 순간의 현장을 전부 목격했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 그럼 다행이고. 앞으론 조심해.”
“응. ……아니, 저기. 그게 아니라.”
“……응?”
에지오가 고개를 갸웃한다. 속닥거림이 너무 길게 이어지면 별로 보기 좋은 모양새가 되진 않을 것이었다.
입술을 오물거리던 루비아가 결국 말한다.
“그게…… 아냐. 진짜 아니야.”
“……?”
이게 뭔 소릴까.
에지오 쪽에서 전혀 이해 못 했다는 시선을 보내오지만, 루비아는 한사코 부정할 뿐이었다.
“……아무튼 아냐. 아무 일 없었어. 진짜야.”
“……??”
역시, 에지오는 의문을 표했다. 정말 대화의 맥락을 따라가지 못한 건지, 아니면 알고서도 모른 척한 건지, 그것도 아니면 알고 있지만 자신한테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서 그런 건지…….
“지, 진짠데…….”
에지오의 반응을 살피던 루비아 또한 아무것도 알 수 없었기에, 이상한 거부감만 남은 손등을 불안하게 만지작거리고만 있었다.
─…….
빈센트는 그런 루비아와 에지오의 나란한 뒷모습을, 저 멀리서 턱을 어루만지며 낮게 가라앉은 눈으로 조용히 지켜보았다.
#30
“우리 이제 슬슬 돌아가야 해, 얘들아.”
참석자들과 함께한 만찬 시간이 마무리되고 난 다음.
“경유 게이트가 있긴 하지만 돌아가는 시간도 있으니까…… 더 늦으면 여기서 하룻밤을 묵어야 할지도 몰라.”
어느덧 어둑어둑해진 창밖의 하늘을 바라보며, 대응접실로 돌아가던 회랑 위에서 루비아가 중얼거리듯 그리 말했다.
“우리가 밖에 있을 수 있는 시간도 얼마 안 되긴 하지. 프론티어에서 안 된다는 거 겨우 허락받고 나온 거잖아.”
“응, 그치… 그러니까 말하려면 되도록 빨리 말해야 해.”
국왕과의 접견을 마지막으로 떠날 이들은 이미 떠났다. 용건이 더 이상 없었던 까닭이다. 루비아와 스텔라, 에지오도 그리하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쉽게 떠나지 못했다. 아직 용건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유리는?”
“아마 부모님이랑 같이 계실 거야. 잠깐 대화를 한다고 하셨으니까. ……그러고 보니, 에지오 너 국왕 전하랑 무슨 얘기 했었어?”
루비아의 질문이었다.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고민하던 에지오는 으음─ 하다가 입을 열었다.
“굳이 꼽자면, 유리 얘기.”
“……유리 얘기?”
에지오는 고개를 주억였다.
“응. 나보고 유리를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으시더라.”
“……어, 어?”
그건 루비아와 스텔라의 입장에서도 여러모로 호기심이 가는 질문이었다. 그들이 은근하게 귀를 기울이자, 에지오는 별로 대단한 것도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소중한 친구라고 했지. 그런 친구가 지금 많이 힘들어 보이니 우리가 옆에 있어 줘야 할 것 같다고, 그러니까 유리를 프론티어에 돌려보내는 걸 한 번만 재고해 주시라고. 직접적으로 그렇게 말하진 않았는데 내 말의 의도를 잘 파악해 주신 것 같더라. 일부러 돌려 말한 거기도 했지만.”
그들이 사전에 세웠던 초기의 목적은 유리의 근황 파악과 위로도 있었으나, 결국 프론티어로의 복귀가 염려되는 유리를 다시 프론티어로 돌아올 수 있도록 그녀의 부모님에게 설득 아닌 설득을 하는 것이었다.
소중한 친구라. 정석이지만 애매모호한 대답이다. 살짝 긴장한 기색으로 다시금 루비아가 물어본다.
“……그, 그래?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대답은 못 들었어. 중간에 유리가 나타났거든.”
상황을 보고 오겠다며 나갔던 때 이후의 일이었을까. 그렇다면 썩 아쉽게 되었다. 만찬 이후 국왕이 유리를 따로 부른 것도 어쩌면 에지오와의 대화가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 또한 있었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라고 딱 못을 박아버리면 어떻게 하지. 루비아는 불안한 미래에 안절부절못하며 마음을 졸였다.
“너희는 유리랑 얘기 좀 했었지?”
“아, 응.”
에지오가 지그리트 국왕과 얘기를 나누는 새, 스텔라와 루비아는 오랜만에 유리와 짧은 대화를 했다.
“좀 어떻대?”
“그게…….”
이번에 대답한 건 스텔라였다.
“저희 예상대로였어요. 유리 씨는 고인 분의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만 여기 계시겠다는 것 같은데, 국왕 전하와 왕후께서 계속 반대하신 모양이에요. 그 때문에 이런저런 충돌이 있었나 봐요.”
“역시 그렇구만…….”
애지중지하는 딸을 먼 타지까지 보내놨더니 거기서 안전 부주의로 목숨을 잃을 뻔했다고 한다. 신뢰가 대폭 하락하는 것은 물론이고, 한 번 발생한 일 두 번 발생하지 못할까 하는 마음에 다시는 거기로 보내려 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하물며 하나뿐인 딸에 대한 사랑은 가히 집착 수준에 이르렀다고도 하니…… 안 봐도 알 만하다. 대판 싸웠을 것이다.
뚜벅─
회랑을 거닐며 에지오가 문득 말했다.
“국왕 전하와 얘기를 나누면서 잠깐 안뜰을 봤거든.”
연이어 말을 잇는다.
“마치 죽은 정원 같았어. 초목은 분명 싱그러운데 생명의 온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달까…….”
그것도 그렇고, 왕성에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은연중에 느껴졌던 폐쇄적인 분위기는 여전히 지워지지 않은 채 공중을 떠돌고 있었다.
“창문도 여럿 막혀 있었죠. 닫혀 있는 게 아니라.”
전체적으로 왕궁의 공간은 무척 넓지만, 왜인지 사방이 꽉 막혀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어째서였을까. 이유는 잘 모르겠다.
뉘앙스─ 분위기라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언어로 쉽게 설명할 수 있는 종류가 절대 아니었다…….
“왕성 입구의 중앙 정원도, 나무를 새로 심고 가꾼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였어요. 당연히 땅에 뿌리내린 마력의 순도 역시 낮았고…… 어딘가엔 마력을 억제하는 술식도 설치되어 있는 것 같네요. 왕궁이니까 아예 이상한 조치는 아니지만요. 당장은 효과가 희미한 것 같기도 하고…….”
“어, 스텔라 너도 알고 있었구나……?”
“후후, 그럼요.”
에지오는 거기까진 파악하지 못했다. 과연 마법에 일가견을 보이는 루비아와 스텔라다웠다. 여하튼 마력을 억제하는 술식은 제 기능을 완벽히 발휘하고 있진 않은 듯했다. 일전에 대응접실에서 루비아가 원활하게 마법을 사용한 전례가 있었으니.
“…….”
그들은 잠시간 말없이 걸었다. 그들의 앞에 손님을 인도하는 시종은 없었다. 길고 한적한 회랑에는 그들뿐이었다. 허나 듣는 귀가 아예 없진 않았던 까닭에, 더 이상 부정적인 의견을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유리, 예뻤지.”
그래서, 루비아는 그런 말을 중얼거렸다.
스텔라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러게요. 그동안 유리 씨가 머리를 푼 모습 정도야 여러 번 봤지만, 지금이 가장 공주님 같았어요.”
에지오는 별로 본 적 없다. 당연하다. 유리가 자의로 머리를 푸는 건 대부분 기숙사 안에서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응, 공주님……. 정말 높은 사람의 딸이구나, 하는 게 느껴졌어. 스텔라 너도 그렇구. 다들 되게 다른 세계 사람들 같았달까, 아하하.”
“왜 그러세요, 루비아 씨. 저희는 누가 뭐래도 친구예요. 국왕 전하께서도 공인하신 관계인걸요. 신분 같은 건 전혀 관계없어요.”
“그건 그렇지마안…… 으으, 한참 멀었다는 생각이 드네. 나는 왜 이렇게 뭐가 막 어설플까…….”
어깨를 축 늘어뜨리는 루비아.
그런 루비아에게, 스텔라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한다.
“아, 참. 루비아 씨.”
“……응?”
루비아가 갸웃하며 옆을 돌아보자.
“아까 빈센트 경과 오래 대화를 나누시던데. 두분이서 무슨 얘기를 하셨나요?”
“……!”
화들짝 놀라며 황급히 손을 내젓는다.
“벼, 별로 오래 얘기 안 했어! 무슨 얘기 한 것도 없구! 그게, 그냥… 이름 정도만 통성명한 게 끝이야. 진짜 그게 전부야. 응!”
“질문은 제가 드렸는데 왜 에지오 씨를 보고 말씀하시나요?”
역시,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아하, 아하하…… 나보다는 스텔라 네가 더 많이 얘기했었지. 알고 지내던 사이 같은데, 그 사람이랑 전에도 만난 적 있었어?”
“저요? 저는 그냥…….”
이번에도 뭔가를 부정하며 화제를 돌린 루비아.
그때.
“얘들아.”
어느샌가 창밖을 돌아보고 있던 에지오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그들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어?”
“네?”
창 너머의 전경을 한눈에 내려다보던 에지오는, 판단을 재빠르게 마친 뒤 어딘가 경직된 얼굴로 다시 한번 말했다.
“나 잠깐 나갔다 올게.”
루비아가 천진난만한 낯빛으로 되물었다.
“……? 어딜?”
“너희 먼저 응접실에 가 있어. 늦지 않게 올게.”
그러면서 에지오는 뒤돌아 뛰기 시작했다.
탁, 탁, 탁─
“……어, 어? 에지오? 에지오!”
“어, 어디 가세요! 에지오 씨!”
그를 붙잡는 소리가 뒤편에서 들려왔지만, 에지오는 멈추지 않고 오히려 속도를 높여 회랑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창밖에서 내려다봤기에 발견할 수 있었다. 구석진 곳에서 왕성 밖을 향해 몰래 빠져나가는, 드레스 차림의 누군가를.
……울고 있는 것 같았던 누군가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