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차버린 소꿉친구와 전 여친이 같은 반이라 곤란하다-194화 (194/201)

〈 194화 〉 넋두리 (13)

* * *

#31

왕궁의 1층 회랑.

“…신 할튼. 명령만 내리신다면 공주 전하를.”

“아니.”

뒷짐을 진 국왕이 고개를 내젓는다.

“놔두거라.”

“…시간이 많이 늦었습니다. 공주 전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럴 리 없다. 이제는 제 한 몸 지킬 줄 아는 아이고, 겁도 없이 누가 왕궁의 주변에서 왕가의 핏줄을 건드리려 들겠는가. 무엇보다 그 아이의 힘을 생각해 본다면 호위는 외려 방해만 될 뿐이다.”

사용처에 따라서 누구보다 암살(??)이란 것에 최적화될 수도 있는 능력이 바로 염력이었다. 생각만으로 사람을 능히 찢어 죽일 수 있다. 목 졸라 죽일 수도 있고. 어쭙잖은 살수들은 그 자리에서 불가해한 힘에 의해 능지처참을 당할 터.

물론 왕가의 인물이 밖을 행차할 때 호위가 따라붙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만에 하나라도 일이 잘못될 수가 있었으니까. 더군다나 자기 딸을 지극히 아끼는 국왕이 구태여 호위를 붙일 필요도 없다, 라고 말하는 모습은 할튼의 입장에서 썩 받아들이기 어려운 장면이었다.

“전하의 뜻이 정말 그러하시다면…….”

“그리고.”

“……?”

국왕은 회랑 너머에 안력을 집중시켰다. 우중충한 하늘.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듯 그늘진 날씨. 슬슬 모여드는 먹구름.

……그 아래를 걸어가고 있는 한 남자.

“지금 그 아이에게 필요한 건 우리가 아니다.”

국왕을 따라 저편으로 시선을 옮긴 할튼은, 잠시 침묵하더니 곧 알겠다는 듯 머리를 굳게 주억인다.

“예. 전하.”

창문이 덜덜 떨렸다. 센 바람이 불었다. 투둑, 투두둑─ 몇 가닥의 빗줄기가 창문을 미약하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

국왕은 등을 돌렸다.

“멀리 나가지도 않았을 테니, 이만 돌아가지.”

할튼도 그 뒤를 따랐다.

“예, 전하.”

쏴아아아……

늦은 저녁에 비가 내렸다.

#32

“후우, 후욱.”

숨을 몰아쉬며 무릎 위에 손을 얹었다.

……어디로 간 거지?

혹시라도 놓칠세라 예의를 밥말아 먹으면서까지 급하게 밖으로 뛰쳐나왔는데, 이미 그늘막이 드리운 시야 속엔 찾던 대상의 모습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왕성은 무척 크고 넓다. 하지만 출구는 한정되어 있다. 여기서 가장 가까운 출구라면, 아까 들어올 때 이용했던 남문인가.

정문을 통해 정정당당히 나갈 거라면 왜 그리 구석진 곳에서 은밀하게 움직였는지 잘 모르겠지만, 일단 목적지를 정한 뒤 그곳으로 뜀박질을 시작했다.

탁탁탁탁─

루비아나 스텔라와 같이 나왔어도 괜찮았겠지만, 이건 순전히 내 독단으로 이루어진 찰나의 판단에 가까웠다.

……나였다면, 아니, 내가 그 녀석이었다면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을 것 같았거든.

차라리 혼자 놔두는 방법도 있었겠으나, 그건 안 된다. 우린 이제 슬슬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빠르게 결론을 내거나 담판을 지어야 했다. 그러니까 대표로 내가 나선 거다.

대체 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있어서 네가 대표로 나선다는 거냐, 라는 의문이 뒤따라올 수도 있지만 아주 올바른 지적이다.

탁탁탁탁─

근거 따윈 없다.

당연히 자신감도 없다.

왜 따라온 거냐며 나한테 화를 낼 수도 있다. 혼자만의 시간을 방해했다는 이유로.

그런데, 보통 그럴 때야말로 가장 외로울 때다. 자신의 마음을 백분 십분 이해해주고 공감해주는 이해자가 필요할 때다.

물론 내가 그 녀석의 이해자라는 건 아니다만…….

탁, 탁탁, 탁─

“허억, 허억.”

투둑, 투두두둑─

“……어.”

축축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땀을 손으로 쓸어내고 있자, 문득 올려다본 하늘로부터 물방울이 뚝 떨어져 내 콧잔등을 차갑게 적셨다.

“…….”

다시.

내가 그 녀석의 이해자라는 건 아니다만.

“저기, 잠시만요.”

“무슨 일이십니까?”

“그게…… 죄송한데.”

감기에 걸리지 않게 해주는 것 정도는…….

“우산 좀 빌릴 수 있을까요?”

나 같은 사람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33

거리는 그닥 멀지 않았다. 위치 역시 외우고 있었던 까닭에 별 어려움 없이 목적지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정확히 어디에 있었더라……. 알음알음 자리를 되새긴다. 물안개가 낀 웅대한 영묘를 천천히 걸어 다닌다.

“아.”

찾았다.

뛰듯 걷느라 한층 흥분했던 가슴 위에 손을 얹은 채 차분하게 몸을 진정시킨다.

떼었다, 붙였다, 오므렸다를 반복하던 입술은 곧 희미한 미소를 머금는다.

천천히, 발을 앞으로 내뻗는다.

매장 작업은 이미 다 끝났다. 근처의 흙을 파낸 흔적이 아직 남아 있긴 하지만, 크게 거슬릴 정도는 아니었다.

보통 영묘라 함은 신성한 건물 아래 묘비가 세워지는 것이 맞지만, 아르티나 왕실의 영묘는 그 개념에서 조금 차이가 있었다. 이 일대 전체가 축복을 받았다 여겨지는 신성한 땅이다. 그러니 영험한 능묘였다.

“…….”

묘비 앞에 선다. 검고 단단한 돌이다.

순간, 묘비에 새겨진 글귀를 보자마자 온 세상이 무채색으로 물드는 듯한 기분이 들고, 바람에 쓸리던 풀소리마저 귓전에서 차차 멀어져 갔다. 외딴 세상에 홀로 남겨진 느낌이다.

여기 깊숙한 곳에 왕태자가 잠들어 있다.

아니, 오빠가.

……그래도, 찾을 수 있었네. 정말 편히 쉴 수 있게 된 것 같아서 다행이야.

……그렇지?

“나 또 왔어, 오빠.”

유리는 묘비 앞에 한 발짝 다가섰다.

“오늘 많이 시끄러웠지? 피곤도 했겠다. 그렇게 먼 거리를 몇 시간 동안이나 돌아다녀야 했으니까…….”

드레스 끝자락이 더러워지는 건 상관도 앉은 채, 오금을 굽혀 천천히 쪼그려 앉는다. 다만 나풀거리던 금발은 땅바닥에 닿지 않는다. 유리의 머리칼은 언제나처럼 큼지막한 검은 리본으로 잘 묶여 있었던 까닭이다.

“내 친구들도 여기 같이 왔어. 그때 오빠도 봤었으려나? 그럼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네. 다들 고마운 친구들이야. 바쁠 텐데 시간 내서 멀리까지 직접 와주고…….”

팔꿈치를 무릎 위에 얹고, 깍지 낀 두 손 위에 턱을 올린다. 묘비를 바라보던 유리의 입가에 다시금 엷은 웃음이 깃들었다.

“그 친구들이 말이야, 날 많이 보고 싶어 했나 봐.”

장례식이 끝나고 대화를 나눌 여유가 간신히 생겼을 때, 루비아 그리고 스텔라와 짧다면 짧은 해후의 장면을 연출했다. 무지무지 보고 싶었다고. 빨리 돌아가서 같이 밥 먹자고…….

“왠지 기뻤어.”

자연스레 들뜬 목소리가 이어진다.

“실은 나도 내 친구들이 뭘 하고 있는지 계속 궁금했는데, 소식을 알 수가 없어서 혹시 내가 이대로 돌아가지 못해도 상관없는 건 아닌가 싶었거든. 물론 걔네들이 그럴 린 없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말야, 또래 친구를 대하는 게 아직도 서투르니까.”

“툭하면 화도 잘 내고, 성격도 전혀 귀엽지 않고. 솔직히 철없이 행동하는 부분도 많이 있었고. 이런 내가 친구를 사귀는 게 정말로 가능할까? 같은 생각도 되게 많이 했거든.”

“그런데…… 생겨 버렸네. 그것도 엄청 좋은 친구들이.”

“……나는 그 친구들이 정말 좋아. 여러모로 부족한 나한테 베풀어 준 호의에 그만큼 보답해주고 싶어. 오빠가 살아 있었다면…… 나는 꼭 내 소중한 친구들을 오빠한테 소개시켜 줬을 거야.”

“그 정도로 좋아하는 친구들이니까, 이대로 헤어지고 싶지 않아. 그 친구들 옆에 어울리면서 계속 인연을 쌓아 나가고 싶어. 그런데…….”

“엄마 아빠가 자꾸 안 된다고 하잖아.”

“오빠 장례식도 끝났으니까, 될 수 있으면 오늘 저녁에 바로 친구들 따라서 프론티어로 가겠다고 했어. 어차피 거기 기숙사에 짐도 그대로 남아 있는 상태거든. 유니폼도 아마 여벌이 있을 테니까 그냥 몸만 가면 되는 상황이었는데…….”

“계속, 안 된다고 해. 위험하대.”

“……거기다가 프론티어랑 대판 싸울 생각인 것 같아. 처음 나라로 돌아왔을 때 아빠 엄청 화나 계셨거든. 그렇게 화난 아빠는 정말 오랜만에 봤어. 진짜로 무서웠어.”

“결과적으로 나는 지금 이렇게 멀쩡하다곤 해도, 죽을 뻔했던 건 사실이니까. 아빠나 엄마 마음이 아예 이해 안 가는 것도 아냐.”

“그치만.”

“……나는 거기로 돌아가고 싶어. 친구들이랑 평소처럼 수업 듣고, 같이 밥 먹고, 놀고, 웃으며 떠들고 싶어.”

“아빠도 엄마도 전보다 많이 나아지셨다곤 생각하지만, 여긴 솔직히…… 아직 나에겐 변함없이 어려운 장소야.”

“오빠가 떠난 뒤로 내가 무슨 일들을 겪었는지, 오빠는 알고 있어? ……날 계속 지켜보고 있을 거라 했으니까 알고 있으려나.”

“사는 즐거움을 완전히 잊어버렸었어.”

“……그래도, 지금은 행복해. 친구들이 있어서 그런가 봐.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걔네들이 날 구한 게 되려나, 아하하. 아하. 아하, 하…….”

“……응, 맞을지도.”

“…….”

“……프론티어로 돌아가고 싶은데, 방법을 잘 모르겠네. 아빠 엄마 몰래 나가면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것 같고. 방금도 한참 얘기하다가 도저히 결론이 안 나서 그냥 뛰쳐나왔어. 답답하잖아. 게다가 애들은 나랑 아빠가 얘기하는 사이에 이미 먼저 돌아갔다고 하고.”

“그래서 오빠한테 왔어. 오빠한테라면 내가 하고 싶었던 말 전부 부담 없이 쏟아낼 수 있으니까…….”

“…….”

“……정말 이제 안 돌아오는 거지, 오빠.”

“오빠도 그렇고, 이대로 친구들도 오랫동안 못 보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까…….”

“……조금, 외롭네.”

“……안 울어. 외롭다고 울다니, 내가 무슨 어린애야? 그리고 울 만큼 울어서 이제 눈물도 안 나와. 진짜, 안 운다구.”

“크응…… 아무튼, 오빠. 난 돌아가고 싶어.”

“……그 녀석도 말하더라. 내가 힘들어 보이니까 자기들이 옆에 있이 줘야 할 것 같다고.”

“웃겨, 진짜.”

“왜 자연스럽게 자기까지 포함시키는 건데? 내가 필요한 건 그 녀석을 제외한 모든 친구들이거든? 그런 주제에 자만심으로 똘똘 뭉쳐서는 마치 내 옆에 자기가 없으면 안 될 것처럼 말하잖아. 으으, 짜증나…….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아빠한테 그렇게 말하는 거야?”

“게다가 신뢰하고 있다느니, 소중한 친구라느니, 내 앞에선 한 번도 그런 말 한 적 없으면서…… 믿을 것 같냐구. 그런 녀석.”

“오빠, 방금 외롭다고 한 말 취소할게. 그 녀석 생각하니까 갑자기 짜증이 나기 시작했어. 나만 보면 장난치는 주제에 엄숙한 척하면서 진지한 모습 보여주는 것도 그렇고,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안 들…….”

“…….”

“진짜 쉽지 않네. 솔직해지는 거.”

“오빠 앞에서까지 이러면 안 되는데, 그치……?”

“……그래도 짜증 나는 건 진심이야. 화를 내게 만들잖아, 자꾸. 내가 원래 화가 좀 많긴 해도 대부분은 그 녀석 자업자득이야. 진짜.”

“진짜라구…….”

처연한 중얼거림이 바람을 타고 흩어졌다.

괜히 툴툴거리듯 입술을 삐죽 내밀었던 유리가, 문득 밀어닥친 불안한 미래에 잠깐 눈빛을 침잠시켰다.

정말 이대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면 어쩌지.

친구들을 만나지 못하게 되면 어쩌지.

전처럼 아예 외출을 막는 것까진 아니겠지만, 그래도 그런 일이 있었던 만큼 당분간 아빠의 보호도 심해질 텐데.

또…….

외로워지는 걸까.

부드러운 입술을 작게 깨물며, 쪼그려 앉은 자세로 자기 자신의 어깨를 살포시 감싸 안았을 때.

툭─

“……어라.”

유리의 턱 끝이 살짝 위로 치켜졌다.

투둑─

먹구름이 짙은 하늘이 눈물을 흘릴 준비를 마쳤다.

투둑, 투두두둑─

가늘게 내리던 빗줄기는 유리의 새하얀 뺨과 턱 끝을 타고 흘러내려, 그녀의 드레스와 쇄골을 가볍게 적셨다.

그때,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던 유리의 진홍빛 동공에도 한 방울 떨어졌다. 반사적으로 눈을 감은 유리가 “앗, 차가.” 하면서 손으로 눈가를 슥슥 훑었다. 연이어 내린 빗방울이 다시 한번 눈가를 두드리자, 그것은 곧 눈물처럼 흘러 유리의 뺨에 투명히 번졌다.

“비 내리네…….”

다시 고개를 아래로 내리니, 오빠의 비석도 비를 맞고 있었다. 줄기차게 내리기 시작한 비가 일대를 습하게 만들고, 유리의 몸도 축축히 적시기 시작했다.

얼른 돌아가야 한다. 여기서 이렇게 계속 있으면 비를 쫄딱 맞고 말 터였다. 비석 앞에 우두커니 앉아 있던 유리는.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해 버렸다.

투둑, 투두두둑─

쏴아아아……

“…….”

축축한 땅을 내려다본다. 검은 드레스를 입은 금발의 소녀가 누군가의 비석 앞에 앉아 궁상을 떨고 있다. 하물며 그 정체는 일국의 왕녀. 그리 이상할 건 없지만 쉽사리 보기 힘든 모습인 건 확실했다.

밤새 내리는 폭우인지 금세 지나갈 소나기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유리는 한동안 이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을 것이었다. 이제는 영영 볼 수 없게 된 오빠의 비석 앞을 지키듯 그저 망연히.

……그때.

저벅─

저벅─

오빠와 나누었던 마지막 해후의 순간을 떠올리고 있던 유리의 의식 속을, 무엇인가 멋대로 헤집고 들어왔다.

먹구름에 빛이 가려져 생긴 그늘보다 더욱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전체적으로 원형의 그림자였다. 유리의 몸을 다 덮고도 한참 남을 만큼 너른.

쏴아아아……

목덜미에 머리카락을 달라붙게 하던 빗줄기가 어느샌가 내리지 않았다. 역시 소나기였던 걸까. 금세 비가 멈추었다.

하지만 빗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쏴아아아……

씌워진 우산의 밖에서 여전히, 비는 내리고 있다.

“…….”

누구인지, 유리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가장 가능성 높은 사람은…….

“감기 걸리십니다, 공주 전하.”

역시, 할튼──

옆을 돌아보려던 유리의 움직임이 턱 멎었다.

……아니, 잠깐.

‘목소리가 달라.’

슬그머니 고개를 들자.

“여기서 뭐 하고 계십니까, 공주 전하.”

이미 떠났다고 들었던 익숙한 얼굴이, 익숙한 목소리로 언제나처럼 묘하게 장난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그리 말하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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