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화 〉 넋두리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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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처음에는 어이가 없었다.
전혀 생뚱맞은 얼굴이 나타났으니까.
다음으론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묘비 앞에 앉아 궁상을 떨고 있던 모습을 전부 이 녀석이 보고 있던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 목덜미에 화끈한 열이 올라왔다.
“네가 왜 여기에…….”
목소리를 가다듬고 내뱉은 중얼거림에.
“늦은 시간에 저희에게 말씀 한마디도 없이 밖으로 나가시길래, 몰래 따라와 봤습니다.”
“……내 말은, 네가 왜 아직도 여기 남아 있냐는 거야. 너희들 전부 돌아간 거 아니었어? 그리고 그 존댓말 좀 집어넣어. 소름 돋잖아.”
유리가 어깨를 쓸면서 천천히 일어선다. 우산을 들고 있던 에지오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투로 반박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공주 전하. 저희는 돌아간 적 없습니다. 루비아도 스텔라도 아직 왕성에 남아 있어요.”
유리의 몸이 멈칫 굳더니.
곧장 깊은 한숨을 토한다.
“……거짓말을 한 거구나. 하아.”
“거짓말?”
“아냐, 됐어. ……그보다 내가 한 말 제대로 안 들었지? 존댓말 그만두라니까?”
“알았어.”
오글거려서 더 못 들어주겠다 싶었던 찰나, 에지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원래 말투로 돌아왔다.
“뭐야 진짜…….”
역시 이상한 녀석이다. 비록 말투는 교정했지만 묘하게 자길 놀리는 것 같은 저 얼굴은 고칠 생각이 없어 보인다.
“……왜 그렇게 보는데.”
“여기서 혼자 뭘 하고 있었나 싶어서.”
“……딱히 상관없잖아. 내가 뭘 하든.”
“비 오잖아. 감기 걸린다니까.”
“……내 몸이야. 신경 꺼.”
“나는 몰라도 너희 부모님이 크게 걱정하실걸.”
“알 게 뭐야.”
유리는 거기서 기분이 팍 상했다. 안 그래도 부모님 때문에 불만이 쌓여 있는 상태였는데. 직접적인 언급까지 나와 버리니 자연스레 날카로운 투로 쏘아붙이듯 입을 열게 되었다.
“그리고 네가 뭔데 내 사정에 참견이야? 우리 부모님이 걱정하든 말든…….”
“뭐긴. 친구잖아.”
“…….”
“친구가 아프면 걱정이 되는 게 당연하지.”
유리는 할 말을 겨우 찾았다.
“지금은 안 아파.”
“내가 안 왔으면 비에 쫄딱 젖은 채로 돌아갔을 거면서.”
“……고작 비에 맞은 정도로 감기 안 걸려. 네가 걱정할 정도로 내 몸은 그렇게 약하지 않아.”
“너 진짜 고집 세다.”
“흥, 이제 알았어?”
팔짱을 낀 채로 고개를 새침하게 돌리는 유리를 내려다보면서, 에지오가 가볍게 머리를 내저었다.
“아니. 이래야 너답지.”
오늘 하루 유리의 모습은 에지오가 아는 유리와 정말로 달랐었다. 모두의 극진한 대접을 받는 일국의 왕녀. 존귀한 몸. 비단 분위기뿐만 아니라, 프론티어에서 빽빽 소리 지르기만 할 줄 알았던 모습은 완전히 사라져 온데간데 보이지 않았다고 해야 할까.
지금은 또 익숙한 모습이지만.
에지오의 말에 ‘나다운 게 뭔데’, 라고 반박하려던 유리는 뭔가 어색한 대사라는 걸 깨닫곤 그 말을 도로 집어삼켰다.
“애들은?”
“너 기다리는 중. 네가 진짜 프론티어로 돌아올 수 있는 건지 아닌 건지 알아야 한다고 해서…… 국왕 전하랑은 무슨 얘기 했었어?”
“그냥, 오늘 바로 돌아가겠다고 했다가 안 된다는 말만 듣고 답답해서 나왔지.”
왕궁에서 뛰쳐나온 경위가 그거였던 건가. 얼마나 답답했었기에 눈물까지…… 아니, 에지오가 잘못 본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눈물샘이 자극받을 만큼 억울해서 분통이 터졌던 건 맞는 듯하다.
“네가 오늘 바로 돌아가겠다고 해서 문제였던 거 아냐? 그분들 입장에서도 준비라는 게 조금 더 필요하지 않았을까.”
“그럴 리가. 그냥 날 보내줄 생각이 없는 거야. 거기 갔다가 저번처럼 큰일 하나 터질까봐…….”
그리 말하면서도 유리는 나름 부모님의 입장을 이해하고 있었다. 한 번 터진 거 두 번 터지지 않으리란 법도 없다. 오히려 자꾸만 그곳으로 돌아가려는 유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기도 했다. 크나큰 봉변을 당해놓고 무섭지도 않나 싶은 마음일 터.
사실 유리 자신도 아예 걱정스럽지 않냐고 묻는다면── 결국은 부정의 뜻을 내보일 것이었다.
살면서 악마라는 존재를 처음 보았다.
정말로 죽을 뻔한, 생명의 위기를 겪었다.
전설 속에나 등장할 법한 마신이란 존재를 직접 두 눈으로 본 것도 처음이었고…… 그렇게 분노한 것도 처음이었다.
솔직히 많이 힘들었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극한까지 몰린 상황이란 게 흔한 일은 아니지 않은가. 하물며 유리 같은 공주님의 경우엔 그 충격이 배로 늘어날 터였다.
그럼에도 버틸 수 있었던 건 친구들 덕분이었다. 위험을 감수하고서도 반드시 돌아가고자 하는 건 친구들 때문이었다. 그들이 없었다면 유리도 프론티어에 돌아가는 걸 신중하게 재고했을지 모른다.
다만 그곳에 친구들이 있으니, 유리는 프론티어로 돌아가야만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떻게든.
“저번 일 하니까 생각난 건데.”
문득 유리가 입을 열었다. 부스스한 빗방울이 그들 위의 우산을 한껏 적시며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너는 대체…… 뭐야?”
제 오빠를 닮은 얼굴로 자꾸만 자길 혼란스럽게 만드는 주범을 올려다보면서, 유리가 불안히 말했다.
“무슨 질문이 그래.”
“맞잖아. 네 존재 자체가 이상하다구. 막 알지도 못하는 이상한 힘 쓰고. 마신인가 뭔가한테 이상한 말도 잔뜩 듣고. 비밀이 너무 많아. 그것 말고도 처음부터 넌 이상했어.”
“뭐가?”
“……우리 오빠 닮은 거 말야. 우리 부모님까지 인정했을 정도면 정말 수상할 정도로 닮은 거잖아. 너 혹시…….”
“무슨 무시무시한 음모론을 생각하는 건진 몰라도, 아마 아닐걸. 그리고 네 의문에 나도 명쾌하게 답해줄 순 없어.”
“……왜?”
“나도 모르거든. 내가 정확히 뭔지.”
유리의 눈썹이 기이하게 어긋났다.
가끔 자신의 자아 정체성을 제대로 확립하지 못해 방황하는 어린아이들이 있는데, 그들의 특성을 뭉뚱그려 표현하는 단어가 하나 있었다. 설마 에지오도 그런 경우일까. 그렇게 생각하기엔 여간 진지한 표정이었어야지…….
“그래서, 알아가려고 하는 중이야. 내가 나에 대해 제대로 알게 되면 너한테도 말해줄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줘라.”
이게 대체 무슨 말이람.
“……역시 이상하다니까, 너.”
“그리고.”
“……?”
“네 오빠랑 내 얼굴이 닮은 거에 대해선 내가 확실하게 말해줄 수 있는 부분이 하나 있는데.”
무슨 비밀이 숨겨져 있던 걸까.
유리가 아리송한 얼굴로 에지오를 올려다본다.
에지오는 방금까지 유리가 보고 있던 묘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 아래 잠들어 있을 아이델에게 잠시 묵념을 한 뒤, 느릿하게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난 원래 이렇게 생기지 않았어.”
쏴아아아……
빗소리에 그 음성이 씻겨 내려갔다.
“키도 엄청 작았고, 얼굴도 전혀 달랐던 데다가 못나기까지 했었지. ……그렇다고 지금이 잘났단 얘기는 아냐. 한참 나 자신에 대해 컴플렉스가 있었는데,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거든. 아직 모든 방면에서 부족하다고 생각해. 나는.”
여태 에지오에게선 전혀 들은 적 없는 얘기였다. 그러니까, 유리는 지금 에지오의 과거를 듣고 있었다.
언제나 우등생에 일견 짜증이 날 정도로 완벽해 보였던 에지오 크라닐이, 열등생이었던 시절을 말하고 있었다.
“장점보단 단점이 훨씬 많았지. ……아니, 장점이랄 것도 없었어. 그때의 나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전교 꼴찌에, 틈만 나면 실수나 하고…… 당연히 친구도 없고. 나 따위가 계속 이렇게 살아서 뭐 하나, 공기만 낭비하지. 같은 생각을 매일매일 했었어.”
유리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과거를 돌아보는 에지오의 눈이 어딘가 슬퍼 보인다고. 심하게 자조하는 듯한 투에 저도 모르게 그렇지 않다는 말을 목구멍까지 끌어올렸다가, 곧 입을 닫고 침묵했다.
속으론 작고 큰 충격의 연속이었다.
전교 꼴찌였다니? 프론티어 에픽 클래스 재학생이?
틈만 나면 실수나 저지르고 다녔다니? 질릴 정도로 부지런하고 기계 같은 훈련만 온종일 반복하던 녀석이?
친구도 한 명 없었다고? 그건…… 자기도 마찬가지였지만. 에지오의 성격이나 겉면만 보았을 땐 알아서 친구가 생겼을 것 같은데…….
“거짓말하는 거 아냐.”
“……뭐, 그렇게 보이네.”
말만 들어선 전혀 안 믿기는 얘기들이었지만, 어째서인지 유리는 에지오의 말을 믿고 있었다. 이런 걸로 장난을 칠 이유가 달리 없기도 했고, 일단은, 진지할 땐 진지한 녀석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그보다.
마신에게 자기 정신과 몸을 원래대로 돌려줄 수 있겠냐고 했던 에지오의 말. 이제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원래는 이렇게 생기지 않았다니. 중간에 무슨 변화가 있었던 걸까. 그렇다면 지금의 이 녀석은 뭐지? 누군가랑 몸이 바뀌었다는 건가? 아니면…….
모르겠다. 역시 알 수가 없다. 본인이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는 한.
“아무튼 그랬었어. 루비아한테 내 과거 얘기를 들었을진 모르겠지만, 아마 이런 것까지 말해주진 않았겠지.”
이런 게 뭔진 몰라도…… 에지오의 말은 일부 옳았다. 루비아는 에지오에 대해 험담 같은 걸 한 적이 없었으니까.
다른 얘기들은 해주었지만.
중간 시험을 치르기 전 루비아의 방을 찾아갔을 때, 루비아에게서 들은 얘기들을 유리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다. 에지오와 루비아의 과거에 대해. 그들 사이에 얽힌 인연에 대해…….
“내가 이렇게 변한 건 얼마 안 된 일이야. 나도 아는 게 별로 없어서 너한테 뭔가를 확실히 말해줄 수 없어. 지금의 내가 네 오빠분의 얼굴을 닮은 이유도, 마찬가지의 맥락에서 답해줄 수 없어. 나도 모르니까.”
“……우연이라는 거네, 그럼.”
“그래, 아마도.”
이런 말도 안 되는 우연이 다 있나 싶지만, 이번에 일어난 일을 보면 마냥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도 아니었다. 마신 같은 존재도 버젓이 등장하는데 그깟 우연이 뭐 대수라고.
“뭐 됐어. 이유 따위 알 게 뭐야.”
유리는 한숨을 쉬었다. 과연 그 말대로였다. 이유 따위 알 게 뭔가. 중요한 건 눈앞의 현실이다.
“……야.”
“왜.”
“나 슬슬 팔 아픈데.”
“그래서 뭐, 어쩌라고.”
“이제 돌아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애들도 기다리고 있을 텐데. 그리고 저희 더 늦으면 큰일 나요.”
“존대.”
“돌아가는 게 좋지 않을까.”
“흐음.”
“뭐가 흐음, 이야. 너 결국 어쩔 건데.”
“어쩔 거냐니?”
“프론티어에 돌아갈 수 있는 거, 맞아?”
유리는 고개를 살짝 옆으로 비틀었다.
“내가 아까 뭐라고 말했어? 아빠가 반대한다니까. 아무리 말해도 들을 기미가 안 보여. 돌아갈 수 있을지 없을지 나도 몰라.”
“……너는 어떤데?”
“뭐가.”
“네 마음이 어떠냐고. 돌아가고 싶은 거야?”
“당연한 걸 왜 묻고 자빠졌어? 안 돌아가고 싶었으면 아빠랑 그렇게 싸우지도 않았겠지. 바보야.”
“하긴…….”
“진짜 바보네.”
“그런가 봐.”
에지오는 어깨를 으쓱였다. 유리가 기가 찬 웃음을 지었다. 시답잖은 농이나 나누고 있을 때인가 싶기도 하지만, 마냥 발걸음이 쉽게 떼어지진 않았다.
“있잖냐.”
“또 왜. 슬슬 돌아가야 한다며.”
“그것도 그런데. 네 부모님이 반대하시는 이유는 네가 다시 위험한 상황에 빠질까봐 걱정하셔서 그런 거지?”
“…….”
뭐라 긍정하기가 좀 그래서, 유리는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자 에지오가 이어 말했다.
“그럼 네가 위험할 이유가 더 이상 없으면, 너는 프론티어로 돌아올 수 있는 거네?”
“……그렇게 되겠지. 뭘 말하고 싶은 건데.”
“아니, 사고의 원인을 제거하면 되지 않나 싶어서. 그럼 너희 부모님도 납득해주실 것 같단 말이지. 프론티어에 관해 신뢰가 박살난 부분은 어떻게 잘 회복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원인을 제거해?”
“응.”
에지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 사고도, 저저번에 4학구에서 있었던 사고도 전부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일 거야. 아마.”
“이건 또 뭔…….”
“4학구에서 있었던 일은 확실하게 날 노렸던 게 맞아. 미궁에서 있었던 일도…… 결과적으로 내 존재가 원인이 된 거야. 그 악마는 처음부터 날 눈여겨보고 있었어. 내가 그 악마의 눈에 띄어서…… 너희들까지 같이 휘말리게 된 셈이야.”
이런 걸로 책임을 질 이유는 없다. 에지오는 피해자일 뿐이다. 그러나 이유가 어찌 되었든 에지오의 존재 탓에 벌어진 일들이다. 만일 에지오가 없었다면…… 불필요한 혼란이 생겨나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한편, 대화의 맥락을 따라가던 유리의 머릿속에 한 가지 결론이 떠올랐다. 에지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본능적으로 알아채고 말았다.
‘……설마?’
그러자 유리의 눈동자 깊숙한 곳에 기묘한 감정이 깃들었다. 본인도 잘 헤아릴 수 없는 감정이었다.
“그러니까, 나중에 달리 마땅한 방법이 없다 여겨지면 그때 나는…… 프론티어를 떠나야겠지.”
프론티어를 떠난다.
그 말이 내리꽂힌 순간, 유리는 입을 작게 벌렸다.
“……그럼 너는 프론티어로 돌아갈 수 있을 거야. 자세한 건 내가 국왕 전하께 설명을 드릴 거고. 그렇게 하면 확실하진 않아도 네가 복귀할 수 있는 가능성은 높아지겠지.”
에지오 자신만 없다면.
유리는 안전히 복귀할 수 있다.
바라던 삶을 영위할 수 있다.
그 논리에, 유리는 슬며시 입을 연다.
“자퇴…… 하겠다는 거야?”
살짝 떨리는 목소리였다.
곧 대답이 돌아온다.
“필요하다면.”
“…….”
왜 입이 잘 열리질 않을까. 목이 바싹바싹 마르는 느낌이다. 아직 확정이 난 것도 아닌데, 정말 에지오가 프론티어를 떠난다고 생각하니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루비아가 슬퍼할 거야.”
결국 내뱉은 말은 조잡했다.
“어쩔 수 없어. 너뿐만이 아니라 루비아를 위해서라도 내가 프론티어를 떠나는 게 맞아. 더 이상 너희들까지 위험에 처하게 만들 수는 없으니까.”
“자의식 과잉이야. 왜 너 하나 때문에 그런 일들이 벌어졌다고 생각하는 건데.”
“그게 사실이니까. 사건의 원인에 내가 어떤 식으로든 크게 연관되어 있는 건 확실해. 너도 대충은 알고 있지 않아?”
“난…… 몰라. 내가 그런 걸 어떻게 알아.”
유리는 투정을 부리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너.”
눈썹을 누그러뜨린 에지오가 이어 말한다.
“솔직히 나 별로 안 좋아하잖아. 내가 없는 편이 너한테도 더 이로울 테고, 괜히 성질부릴 시간도 적어지겠지.”
그때.
유리의 얼굴이 살짝 굳는 것을, 에지오는 눈치채지 못했다. 마냥 자연스레 말끝을 올리며 묻는다.
“매번 나 때문에 이러저러 불편했을 거고…… 안 그래?”
“어, 안 그래.”
“그래, 그러니까…….”
말을 잇던 에지오가 문득 눈을 깜빡인다.
“……뭐?”
엉뚱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우산 위로 튀기는 빗방울 소리가 한참 귀를 시끄럽게 울린다. 그 사이로 차가운 음성이 스며들었다.
“누가 그러는데.”
“……어?”
“누가 그러냐고.”
“……무슨.”
유리는 짐짓 노기가 어린 투로 말했다.
“솔직히, 라며. 네가 왜 내 솔직한 생각을 멋대로 정하는데. 웃기는 소리 하지 마. 네가 나에 대해 뭘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어째서 화가 난 건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에지오도, 유리 자신마저도.
“그야, 네가 평소에 날 대하던 걸 보면…….”
“그건 행동일 뿐이잖아.”
행동이 곧 마음의 표현 아닌가? 싶지만 세상에는 마음과 행동이 따로 노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굉장히 피곤한 인간 군상이다. 솔직하지 못하다는 뜻이니까.
“너, 내 친구라면서. 네가 먼저 나랑 친하게 지내고 싶어 했잖아. 나한테 멋대로 다가와 놓고 멋대로 떠나겠다는 게, 말이 돼? 이런 비겁한 방식, 나는 절대 용납 못 해.”
할 말을 잊은 에지오를 향해 힐난 아닌 힐난을 퍼붓는다.
“나 믿고 있다며. 소중한 친구라며. 내가 막 힘들어 보인다며.”
에지오는 지금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가, 국왕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리곤 아차 싶었다.
설마 전부 들었던 건가.
주변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던 것도…….
“그래, 나 힘들어. 힘들어 죽겠어 아주. 오빠도 죽었고, 이제 더는 못 만나고. 거기다가 친구들까지 못 보게 생겼어. 프론티어로 못 돌아가게 생겼다고. 난 거기가 진짜 좋은데…… 이런 식으로 친구들이랑 헤어지는 거, 절대 싫단 말이야.”
우울한 티를 으레 성숙한 듯 포장해서 덮는 것도 이젠 힘들다. 버티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어도 친구들은 이미 유리의 일부가 되었다. 그들과 영영 헤어지는 건 아닐 테지만, 오랜 시간 못 보게 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우울하다.
하물며, 에지오 역시──
“……내 옆에 네가 있어 줘야 할 것 같다며. 힘이 되어줘야 할 것 같다면서.”
기가 차서 웃기지도 않는다. 누가 부탁한 적도 없는데. 남의 부모님 앞에서 부끄럽지도 않을까. 자신의 존재가 누군가의 힘이 될 수 있을 거란 생각, 지극히 오만하며 가소롭다…….
그러니까 너 같은 건 필요 없어.
“그럼 계속 있어 주란 말이야.”
생각과 말이 반대로 나왔다. 유리의 여전한 버릇이었다. 생각과 행동이 전혀 다른 것. 이번에도 똑같이 했을 뿐이다.
“멋대로 떠나지 말고. 멍청아…….”
말을 마친 뒤.
……차마 고개를 들어 얼굴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억울한 감정이 북받쳐 오른 것도 오른 거지만, 그리 말한 뒤에 확 밀려오는 화끈거림을 감당할 여유가 없었던 탓이 가장 컸다.
‘내가 미쳤나?’
급기야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닫곤 뒤늦게 후회하기 시작한 유리였으나, 이제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순 없었다.
“…….”
고개를 푹 숙여서 그런지 에지오의 표정을 볼 수가 없다. 유리의 심장이 드물게 쿵쿵거렸다. 대부분 부끄러움 탓이다.
그냥 이대로 모르는 척하고 등을 밀어 버릴까. 아니면 이대로 먼저 왕궁으로 돌아갈까. 일 초가 흘러갈 때마다 수만 번씩 고민하던 사이, 바로 위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좀 혼란스러운데. 너 나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
“뭘 묻는 거야. 싫어. 진짜 싫어. 나한테 이런 말 하게 만든 네가 제일 나빠. ……근데 죽을 만큼 싫었으면.”
투둑, 투두둑─
얕은 빗소리에 묻혀 들려오는 음성.
“너랑 친구 안 했어…….”
그 작은 목소리를, 에지오는 똑똑히 들었다.
……잠시 뒤.
“야, 나 팔에 소름 돋았어.”
고개를 푹 숙인 유리가 멈칫했다.
“너 갑자기 왜 이러냐. 오빠분 앞이라고 막…… 착한 모습만 보여주려고 그런 거야? 나한테 이러는 거 안 쪽팔려?”
으득, 유리의 어금니가 작게 부딪혔다.
사람이 기껏 진심을 보였는데.
용기도 이런 용기가 없었는데…….
“안 쪽팔리냐고?”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화가 났다. 어깨가 부들부들 떨리고, 당장이라도 주먹으로 명치를 세게 후리고 싶은데, 가까스로 참았다.
그러나 유리의 이성은 반쯤 날아간 뒤였다.
그래서, 저질러 버렸다.
“더럽게 쪽팔리지. 죽을 맛이야. 내가 살면서 너 같은 남자한테…… 하, 아니다. 됐어. 이젠 다 필요없어.”
뭐 어떤가.
쪽팔리든 말든.
“됐으니까, 애들한테 돌아가기 전에.”
어차피 지금부터 더 쪽팔릴 예정인데.
저벅─
한 걸음 앞으로 움직였다.
펼쳐진 우산 안으로 더 깊숙이 들어온다.
툭─
지금이 아니면 언제 기회가 있을지 모른다. 에지오의 말대로 그가 프론티어를 떠나게 된다면 더 이상 받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무엇을?
그건 유리 자신도 몰랐다. 머리로 생각하기도 전에 행동이 먼저 나가고 있었다. 완전히 저질러 버렸다는 느낌이다.
이미 자신의 이마가 어딘가에 기대어 있는 채였다. 이제 되돌릴 수 없다. 유리는 귓불까지 발갛게 물들어선 눈을 질끈 감았다. 눈꺼풀을 닫기 전 마지막으로 에지오의 넥타이가 보였다.
……대체재라도 상관없다. 안심과 위로를 받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자격은 충분했다. 자길 지켜줬고, 구해줬고, 챙겨줬고,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지는 얼굴이니까.
축축한 공기 속 에지오의 냄새가 섞여든다. 유리는 자신이 미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 녀석의 냄새가, 싫지 않다.
그렇게.
가슴팍에 이마를 살포시 기대며, 차마 안을 수는 없던 손을 어색하게 내린 채로 자신 없게 응석을 부린다.
“머리… 쓰다듬어줘.”
밑도 끝도 없는 부탁에, 잠깐 귀를 의심했던 에지오가 유리의 정수리를 천천히 내려다보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