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차버린 소꿉친구와 전 여친이 같은 반이라 곤란하다-196화 (196/201)

〈 196화 〉 넋두리 (15)

* * *

#35

“…….”

“……”

그런 날이 있다.

술 한 방울 입에 대지도 않았는데, 말끔한 제정신으로 평소엔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을 지성 없이 질러 버리는 때가 있다.

물론 주로 분위기나 흐름이 사람을 그런 쪽으로 이끌거나, 혹은 어떠한 계기에 의하여 절제심이 단번에 탁 풀려 버린다든지. 실질적으로 온전한 제정신까진 아닐 테지만, 아무튼.

자물쇠의 잠금이 와장창 부서지고, 그 안에 숨겨져 있던 무언가가 부왁─ 하고 튀어나오는 경우라고 할까.

일단 급발진을 하고 나면 사람은 곧 냉정 침착해진다. 자기가 얼마나 갑작스러운 행동을 했는지, 그리고 그 행동이 어떠한 파장을 불러일으킬 것인지 머릿속에서 아주 빠르게 계산을 끝마친다.

납득하고, 절망한다.

‘미, 미, 미, 미친, 미친… 년아……!’

입꼬리를 어떤 모양으로 놔두어야 할지 모르겠다. 목덜미와 얼굴부터 화끈한 열기가 쭉 뻗어 나가 온몸을 뒤덮는다.

반면 피는 싸늘하게 식는다. 비스듬히 서 있는 자세를 더 이상 유지하지 못하고 다리가 파들파들 떨린다.

‘미쳤어, 미쳤어, 미쳤어, 미쳤어….’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한 거지?

아무리 외로웠고, 위로가 필요했고, 분위기에 휩쓸렸다고 했지만 그런 말을 해야 할 대상과 하지 말아야 할 대상이 따로 있지…….

유리는 에지오의 가슴팍에 이마를 기댄 채로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어서, 곧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인간의 이지를 상실한 인형이 되어 도망치지도 못한 채 그저 목석처럼 굳어 있을 뿐이었다.

문득 까닭 없는 웃음이 내부서부터 울리는 것을 느꼈다. 자포자기의 웃음이었다.

‘……이제 절대 프론티어로 못 돌아가.’

이런 부끄러운 행동을 해놓고 어떻게 이 녀석의 얼굴을 다시 봐…? 이성이 제대로 박혀 있는 사람이라면 그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장난 아니고 치사량에 버금가는 수치심에 폭사하기 직전이었던 유리는, 가까스로 그 수치심을 분노와 원망으로 치환하는 것에 성공했다.

내가 이 정도까지 해줬는데.

누구한테도 보여준 적 없었던 진심을 본인에게 보여줬는데, 떨떠름한 반응으로 받아친 이 녀석이 나쁜 거다.

전부 이 녀석의 잘못이다.

이 녀석이 오빠를 닮은 게 잘못됐다.

그 손으로 위로를 받고 싶었던 자신에겐 아무런 잘못도 없고, 오로지 그 원인이 된 이 녀석의 잘못이다.

그러니까 잘못한 녀석이 나한테 보상을 해줘야 하는 게 당연하다. 호의를 주었다면 그만큼의 호의로 보답해야 하는 게 응당 맞는 일이 아니겠는가.

응, 전부 이 녀석 때문이야. 나는 급발진하지 않았어. 예컨대 마법을 쓴 사람은 잘못이 없다. 마법의 사정거리 안에 있었던 그 사람이 잘못인 거지…….

뒤틀린 보상심리와 기적의 논리를 동반하며 점차 수렁으로 빠지던 유리의 앞에서, 자신의 귀를 의심하고 있던 에지오가 생각했다.

‘…어느 쪽이든 큰일은 확정이군.’

여기서 유리가 원하는 대로 머리 위에 손을 얹어주든, 그러지 않든 파멸은 이미 예정되어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전자는 나중에 서로 얼굴 보기 민망해질 테고. 특히 본인은 괜찮아도 유리 쪽에서 난리를 칠 게 분명하다.

이대로 에지오가 프론티어를 떠나게 된다면 상관이 없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엔, 음.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유리만큼 당황한 건 에지오도 마찬가지였던 까닭이다.

후자는 더 큰 문제다.

유리가 수치심에 죽어 버릴 거다.

말하는 분위기만 봐선 무슨 고백이라도 하나 싶을 정도였다. 고백이라면 고백인가. 자길 싫어하는 줄 알고 있었던 상대에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뜻을 정면에서 내비친 셈이니까.

처음 그 소리를 듣고 얼이 나간 나머지 소름 돋았단 표현을 쓰긴 했지만…… 그건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괜히 더 부끄럽게 만든 것 같아서 미안하네.

무엇보다.

─머리… 쓰다듬어줘.

자기 머리에 멋대로 손 대는 걸 몹시 싫어하다 못해 혐오하기까지 했던 유리 쪽에서, 먼저 그런 부탁을 해왔다는 사실이… 에지오에게 아주 충격적인 울림을 선사했다.

반대로 그런 생각도 해본다.

얼마나 위로의 손길을 원했으면.

혹은 얼마나 힘들었으면.

나한테까지 이럴까.

유리가 지금 느끼고 있을 종합적인 감정에 공감을 시도해본다. 역시나 잘 되지 않았다. 본인이 아니니까 어쩔 수 없나….

그렇다면 경험에 빗대어.

외롭고 힘들 때 누군가 위로해줬으면 좋겠단 생각을 중등부 시절에 참 많이도 해보았지만, 안타깝게도 그때의 자신은──

─오늘도 수고하셨어요, 선배. 힘냈네요!

외로움에…

─선배는 지켜보는 제가 다 질릴 정도로 매일 꾸준하게 노력하시네요. 저는 선배의 그런 점을 좋아한다는 거, 아시죠?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뭐든지 잘 안 풀릴 때도 있는 거죠. 기운 차려요, 선배. 선배 잘못이 아니에요. ……으음, 정 기운 차리기 힘드시면… 만지실래요? ……물론 제 볼이요. 말랑말랑해서 기분 좋을지도 몰라요?

위로 같은 건 필요 없었을 텐데……

……

여기서도 떠오르는 건가.

……짜증나게 만든다, 정말로.

이러저러 빈도가 잦아졌다. 상념을 털어내고 과거를 지운다. 그러자 우중충한 일대가 다시금 시야에 들어온다. 가까스로 평정을 되찾는다.

가슴팍에 이마를 기댄 작은 금발 꼬맹이를 내려다본다. 유리는 집행을 기다리는 죄수처럼 몸을 얕게 발발 떨고 있었다.

스윽─

다른 선택지는 없을까, 고민하던 에지오가 결국 한 손을 들었다. 나머지 한 손은 우산의 손잡이를 붙잡고 있었다.

그러자.

“호, 혹, 혹시나 해서 말해두는 건데.”

“……?”

“착각하지 마. 이건…….”

턱─

“……흐얏?!”

“뭘 그리 길게 변명하려고 그러냐. 알았으니까 몸에 힘이나 빼. 너무 긴장한 거 티 나잖아.”

유리는 자신의 몸에 에지오의 손이 닿자 알 수 없는 느낌에 작은 비명을 질렀다. 그러면서 시선을 살짝 옆으로 돌렸다.

에지오가 유리의 왼쪽 어깨에 손을 얹고 있었다. 그 상태로 부하의 노고를 치하하듯 몇 번 두드려준다.

탁, 탁─

“고생했다.”

머리가 아니라 어깨다.

“뭐, 뭔…….”

당초 부탁했던 건 아니지만.

“…….”

그래도 그 목소리와 포근한 토닥거림을 느끼고 있자면, 금방이라도 터질 듯 두근거리던 심장이 점차 느려지는 것 같다.

탁… 탁…

왜인지 편안하다. 주위에서 쏟아지는 빗소리가 마음을 더욱 잔잔하게 만들어준다. 유리는 이마를 떼지 않은 채로 눈을 감았다.

남자의 손길을 자의로 허락한 게 도대체 얼마 만인가. 이미 버릇이나 습관이 되어 버린 혐오는 유리의 몸 구석구석 스며들어 있었기에, 에지오의 손길이 닿았을 때도 잠깐 멈칫거렸다.

하지만 그뿐이다.

찰나의 순간, 거부감은 사라졌다.

……어깨도 나쁘지 않지만, 만일 눈앞에 있는 게 진짜 유리의 오빠였다면 여기서 더 응석을 부렸을지도 몰랐다.

조금 아쉬운 느낌이 들었으니까.

그래도, 뭐…….

이 정도라면…….

“아…?”

무심코 소리를 내 버렸다.

텁─

어느새 정수리에 무게감이 얹혔다. 뒤쪽으로 당겨진 머리칼들이 부드럽게 쓸렸다. 세심하게 한 올 한 올 매만지던 손길은 유리의 정수리를 거의 다 덮을 만큼 크고 넓었다.

어깨를 두드리던 손이 어느샌가 머리 위로 올라가 있던 것이었다.

“……읏.”

유리는 아무 반응도 하지 못하고 그저 입술을 깨물 뿐이었다. 어깨를 가련하게 떨었다.

생각보다 훨씬 안심이 돼서.

자칫 참지 않으면 꼴사납게 울 것 같아서.

많은 기억들이 교차했다. 힘들었던 일, 기뻤던 일, 슬펐던 일. 위로를 받는 거라면 힘들었던 기억만이 떠올라야 할 텐데, 이런저런 인생의 한 장면들이 잔뜩 뒤엉켜 뒤죽박죽인 감정을 만들어 내었다.

그러니, 이 마음을 정의할 수 없다.

에지오의 쓰다듬은, 루비아에게서 받았던 편안함과 따뜻함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이상하게 간질거리고 더 뭉클거리는 느낌. 심장을 손으로 직접 건드리는 것처럼 민감한 기분이 만연하게 피어올랐다.

‘…참아야 해.’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온몸을 꽉 채웠던 뭉클거림이 밖으로 분출되기 직전, 유리는 눈을 더욱 질끈 감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누가 울지 말라도 한 것도 아닌데 스스로 눈물을 참았다.

─사랑한다, 내 동생.

거기서 하필이면 얼마 전 아이델과의 마지막 만남이 떠오르는 바람에, 목울대가 울컥거렸다.

……한편.

‘진짜 묘하네, 이거.’

평소처럼 손만 대도 발작하며 그르렁거리던 고양이가 아닌, 차분한 강아지가 되어 손길을 받아들이는 유리의 모습은 에지오의 입장에선 참으로 까무러칠 장면이었다. 아마 기억 속에 길이길이 저장되겠지….

스윽… 스윽…

그쯤, 에지오는 생각했다.

새삼 머리가 엄청 작다는 것도 알겠고, 제대로 만져본 유리의 머리카락은 비단 부럽지 않은 머릿결을 자랑한다는 것도 알겠는데…….

‘언제까지 해야 하지, 이거.’

손을 뗄 타이밍을 쉽사리 잡을 수가 없다.

어련히 유리 쪽에서 손을 쳐내지 않을까 싶었는데, 일 분 넘게 매만지고 있어도 고른 호흡을 할 뿐 미동조차 없는 움직임.

쏴아아아……

그 사이에 비는 더 거세졌다.

언제까지 내릴 작정인지, 곧 그칠 소나기에 불과하나 마지막 힘을 담아 줄기차게 퍼붓는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발밑이 찰박거렸다. 둘의 구둣발이 차가워졌다.

어느 순간.

“네가 나한테 네 오빠를 많이 겹쳐봤다는 건 알고 있어.”

“……?”

“솔직히 나도 꽤 놀랐거든. 얼굴을 보고 나서야 네 반응이 이해가 되더라고. 근데.”

슥슥슥.

“──!?”

“나는 네 오빠가 아냐.”

유리가 눈을 번쩍 뜨고 반사적으로 손을 올려 자신의 머리를 감쌌다. 정확히는 그 위에 얹어진 손을 쳐내려 한 것이었다.

“머, 뭐 하는 거야악!”

그리고 짧은 비명을 질렀다.

부드럽게 쓸어주고 있던 손이 동세를 바꾸어, 의식이 잠겼던 유리의 정수리를 거칠게 헝클어뜨린 것이었다.

“이걸로 알겠지?”

단순히 아이델을 닮았다고 해서 에지오 자신에게 의지하려 든다면, 그건 그거대로 살짝 곤란한 미래가 될 가능성이 있었다.

두 번이나 상실을 겪게 만들긴 싫으니까.

……절대 죽지 않을 거라고 자신 있게 말하긴 했지만, 미래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스텔라마저도 예측할 수 없다. 에지오의 미래만큼은 결코 엿볼 수 없다고 했기에.

그러니 알아야 한다. 아이델 폰 아르티나와 에지오 크라닐은 엄연히 별개의 존재라는 걸. 제 오빠의 대체품으로 생각하게 두어선 안 된다.

유리와 너무 지나치게 가까워지는 것도…… 애당초 에지오 쪽에서부터 그리 선호하질 않는다.

“너, 너어…….”

“이제 진짜 돌아가자. 애들 기다려. 우리 오늘 안에 제국으로 못 돌아가면 교수님한테 혼나.”

벌써 삼십 분은 지났을까. 걱정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비도 한참 내리는 중이니. 우산을 들고 있어서 먼저 등을 돌릴 수도 없다.

결과적으로 같이 돌아가야 하는데, 괜히 어색해지는 상황을 피하고 싶었던 에지오가 나름 분위기 전환을 위해 선택한 방법이었다.

“……하아. 그래. 이게 너지.”

주섬주섬 머리를 매만진다. 제대로 헝클어졌다. 머리끈을 다시 풀고 정돈하려 하다가, 다 됐다 싶어서 그냥 그대로 놔두었다.

찰박, 찰박─

비가 진탕 내려서 그런지 발소리가 달라졌다.

둘은 우산 속에서 나란히 걸었다.

“맞다, 유리.”

“뭐.”

“나도 자퇴하고 싶은 거 아냐. 최대한 안 그러는 방향으로 방법을 찾아볼 거야.”

“…….”

“겸사겸사 네 복귀 방법도 생각해 보겠지만…… 거기까진 나도 잘 모르겠다. 네가 부모님이랑 다시 한번 얘기를 해보는 편이 더 좋을 것 같은데.”

“……그래. 내가 알아서 할게.”

기운이 쭉 빠진 건지 축 늘어진 채 대답하는 유리.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빠.”

묘비를 돌아보며 마지막 인사를 건넨다.

“다음에 또 올게.”

“저도요. 기회가 된다면.”

에지오의 음성에 유리는 의문을 드러낸다.

“너는 왜 오는데…?”

“장례식에도 참석했는데 못 올 이유까지야.”

“……그건 그렇네. 마음대로 해.”

한숨 섞인 목소리가 물안개 속으로 퍼졌다.

찰박, 찰박…….

에지오의 옆에서 걸으며 영묘를 빠져 나간다.

……그러던 어느 순간, 문득 곁눈질한 에지오의 오른쪽 어깨가 우산 밖으로 빠져나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우산이 그리 크지 않은 탓이다. 원체 몸집이 큰 편에 속하는 에지오 한 명이 쓰기에도 아슬아슬하다. 유리가 차지하는 공간이 작긴 해도 결국 누군가는 비를 조금이나마 맞게 되어 있었다.

“……음?”

에지오가 왼쪽 어깨에 닿는 이물감에 반응했다. 한 발짝, 자신의 옆으로 바짝 다가온 유리의 머리가 닿고 있었다.

“뭐야, 갑자기.”

“…….”

유리가 말없이 손을 위로 뻗었다. 에지오가 붙잡고 있던 우산의 손잡이를 오른쪽으로 살짝 밀었다. 그러자 적당히 아슬아슬하게, 에지오의 어깨를 적시던 빗줄기가 약해졌다.

완전히 피하는 건 불가능했지만…….

잠깐 말을 아끼던 에지오는 픽 웃었다.

“고마워.”

“뭐래.”

그들은 우산 속에서 바짝 붙은 채 언덕을 내려갔다. 시간이 촉박했으니 걸음은 조금 빨랐다.

#36

금방 다녀오겠다고 말한 지,

사십하고도 오 분째.

“늦었네요.”

“응. 늦었네.”

에지오가 늦었다는 게 아니라, 자신들이 늦었다는 말이었다. 염치도 없이 여기서 하루 묵고 가게 생겼다. 제때 못 돌아가면 교수님한테 혼날 텐데. 그들은 멀거니 에지오를 기다렸다.

회랑에서 멀뚱히 서 있는 루비아와 스텔라를 응접실로 안내하려던 시종의 인도도 거절한 채, 왕궁 1층 정문에서 에지오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쏴아아아──

“비도 이렇게 오는데…… 어딜 간 걸까.”

“글쎄요…….”

그때.

“……어? 저거…….”

루비아가 눈을 조금 크게 떴다. 그러다 더욱 자세히 보기 위해 눈을 가늘이니, 곧 저 멀리서 정원을 가로지르며 걸어오는 우산 아래의 두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라, 에지오 씨네요?”

익숙한 실루엣이다. 저건 에지오였다.

그 옆에는…….

“……유리?”

국왕과 아직까지도 함께 있는 줄 알았던 유리가, 에지오의 옆에서 살짝 떨어져 걷고 있었다. 괜한 오해라도 생길까봐 어쩔 수 없이 에지오가 전처럼 어깨 위로 비를 맞고 있는 채였다.

일단은 그랬을 텐데.

“아, 음. 유리 씨를 데리러 가셨던 거군요….”

“…….”

“……루비아 씨?”

저쪽에서 자신들을 발견하고 늦어서 미안한 듯 살짝 고개 숙이는 에지오와 유리를 바라보면서, 루비아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한참이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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