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차버린 소꿉친구와 전 여친이 같은 반이라 곤란하다-197화 (197/201)

〈 197화 〉 간과 (1)

* * *

#1

그들이 정문 앞으로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루비아는 어딘가 흐리멍덩한 눈으로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다녀왔어.”

에지오의 목소리가 들리자,

루비아는 정신을 차린다.

스윽─

탁, 탁.

빗방울이 닿지 않는 영역으로 진입하여 들고 있던 우산을 접고는 가볍게 턴다. 한쪽 어깨 부근이 축축하다.

반면 그 옆의 유리는 몇 방울 맞지 않은 것 같았다.

에지오의 배려 아닌 배려였겠지.

“아… 음.”

주변 공기가 차서 그런지, 살짝 발그스름한 얼굴의 유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구나…? 갔다 왔어… 라고 말해야 할진 모르겠는데, 일단 안녕. 얘들아.”

살짝 어색한 미소를 띠며 인사를 건넸다.

방금 전 그렇고 그런 일이 있어서인지, 아니면 그제야 수치심이라는 게 부활한 것인지 친구들의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할지 잘 모르겠다.

덜컹거렸던 심장은 아직도 미약하게 두근거리고…… 정면의 루비아를 볼 때마다 더더욱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 기분은 대체 무얼까.

“응, 안녕.”

아무튼 유리의 말에 루비아가 반응했다.

그리고는 에지오를 돌아보며.

“……갑자기 뛰쳐나가길래 깜짝 놀랐어. 유리한테 갔었구나.”

“어, 응.”

“우리랑 같이 갔어도 괜찮았을 텐데.”

“미안. 빨리 안 나가면 놓칠 거 같아서.”

루비아는 머리를 가볍게 내저었다.

“으응, 아냐, 이해해. 어쨌든 우리도 마지막엔 유리랑 얘기를 하고 돌아가야 했으니까…… 어디 갔다 온 거야?”

“왕실 묘지.”

“아…….”

그 이상 말하지 않아도 대략적인 가늠을 할 수 있었다. 왕태자가 묻힌 영묘를 다녀온 거다. 상황을 파악한 루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무슨 일 없었어?”

“글쎄, 딱히 없었어. 얘가 묘지 앞에서 궁상 좀 떨고 있길래 후딱 가서 데려왔지. 너희들이 먼저 돌아간 줄 알고 있더라.”

“야, 뭐라는 거야. 궁상은 누가….”

“아니야? 그대로 가만 놔두면 앞에서 아예 대성통곡을 할 기세던데. 혼잣말 같은 푸념도 막 중얼중얼…….”

“아, 시끄러워! 누가 그랬다고 그래?! 조용히 해!”

그럴 수도 있지­ 싶지만 정작 본인은 창피한 모양이다. 바락 성을 내며 에지오의 입을 막으려 들었다. 당연하게도 유리의 짧은 손이 에지오의 입까지 닿는 일은 없었다.

“이이이익!”

펄쩍 펄쩍─ 열심히 뜀뛰기를 한다.

에지오는 능수능란하게 공격을 피해냈다.

“아니, 왜. 사실이잖아? 난 네가 뭐라고 했는지도 다 들었는데? 세상 다 산 듯한 얼굴로 한숨 푹푹 쉬면서 조금 외롭다니 뭐라니──”

“아아아악! 안 들려! 닥쳐! 닥치라고!”

그렇게 에지오와 유리가 작은 실랑이를 벌이는 새, 아리송한 얼굴의 루비아는 머리를 갸웃하며 의문을 표했다.

“……우리가 돌아간 줄 알았다고?”

“응. 국왕 전하께서 유리한테 거짓말을 하신 모양이야.”

유리의 손이 닿지 않도록 턱을 치켜들며 요리조리 몸을 움직이던 에지오가 대답했다.

“거짓말이요?”

“응.”

루비아와 스텔라는 잘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그러자 에지오가 나름의 추측성 설명을 시작했다.

“우리는 이제 곧 돌아갈 거였으니까, 유리가 우리랑 더 얘기를 하지 못하도록 최대한 시간을 끌어보려 하신 것 같은데…… 보다시피 유리가 도망치는 바람에.”

“아, 그러니까. 저희가 유리 씨를 프론티어로 다시 데려가려는 걸 알고서 유리 씨를 묶어두셨단 말씀이시군요? 저희랑 얘기하다가 유리 씨의 마음이 한쪽으로 더 강하게 굳어지면 안 되니까…….”

“음, 아마도. 자세한 건 모르지만.”

이에 대해선 유리가 더 상세한 내막을 설명해줄 수 있을 것이었다.

“하악, 하악…… 후우.”

에지오의 아래에서 숨을 몰아쉬던 유리가 분한 눈으로 에지오를 노려보더니, 곧 작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아까 아빠한테 얘기했거든. 오늘 밤에 너희랑 같이 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그런데 몇 번을 얘기해도 단호하게 안 된다는 거야. 게다가 애들도 이미 돌아갔을 테니까 오늘은 여기서 이만 얘기 끝내고 내일 다시 얘기하자고. …알잖아? 딱 봐도 같은 패턴 반복될 기미가 보이길래 그냥 답답해 죽을 것 같아서 밖으로 나왔지. 그러다가…… 이 녀석이 날 따라왔고.”

말을 멈춘 뒤 에지오를 향해 눈을 흘긴다. 그러자 묘지에서 나눴던 대화의 내용과 이런저런 일들이 한꺼번에 밀려와, 이루 말할 수 없는 기분이 된 유리는 괘씸한 마음에 손바닥을 날렸다.

짝─ 에지오의 등짝에서 찰진 소리가 났다.

“악! 갑자기 왜 때려!”

“네가 맞을 짓을 하니까!”

툭하면 장난을 치려고 하는 게 문제다. 이 녀석은.

오늘은 조금 진지한 줄 알았더니… 역시 사람은 변하질 않는다. 이런 녀석한테 자신이 대체 무슨 미친 부탁을 했던 걸까.

아무리 오빠의 묘비 앞에서 감수성이 풍부해졌다고 해도 그렇지, 진짜 평생 갈 만한 약점이 잡힌 거나 다름이 없었다…….

“아무튼, 늦어서 미안해. 지금 가면 안 늦나?”

“아마 늦었을 거예요. 그래도 빨리 준비해서 출발한다면 어떻게 잘 아침까지는 도착할 수 있을지도…….”

스텔라의 말에 유리가 고개를 내젓는다.

“아냐, 너희 다 여기서 하루 자고 가. 그러고 너희가 우리 아빠한테 대신 말 좀 해줘. 내 말은 진짜 죽어도 들을 생각을 안 하셔. 얘는 몰라도 너희 말은 귀 기울여 들어주실 것 같아. 왠지.”

“…너 나 묘하게 무시한다? 국왕 전하가 나만 따로 불러서 얘기하길 원하셨던 거 몰라?”

“결국 아무 효과도 없었잖아, 그거. 네가 잘 말했으면 아까 아빠랑 나랑 얘기할 때 좋은 쪽으로 결론이 났겠지.”

“……그런가? 듣고 보니 막상 할 말이 없네.”

하지만 분명 대화 자체는 긍정적인 흐름이었던 거 같은데. 중간에 대화가 잘린 게 문제였나. 유리가 난입해서 그런 거였다면 결국 에지오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유리의 잘못이 가장 크지 않나 싶다.

물론 입밖으로 그러한 사족을 꺼낼 일은 없었다.

등짝 한 대 더 맞을 것 같았으니까.

“배려는 정말 감사하지만… 수업 시간에 맞출 수 있을까요…. 교수님한테도 연락을 드려야 할 텐데.”

“괜찮지 않아? 하루 빠지는 것 정도야.”

“누구보다 성적에 진심이셨던 에지오 씨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살짝 이상한 기분이 드네요….”

“난 일단 거하게 말아먹었거든. 하루 결석한다고 해서 내 성적표에 유의미한 변화가 생길 것 같지도 않고.”

“죄송한데 저희는 아직 관리가 필요하거든요?”

물론 에지오도 포기한 건 아니다. 가능하면 성적을 챙기고 싶다. 그렇지만 이대로 여길 떠나기엔 아쉬운 마음도 조금 있어서 그렇다.

복귀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않은 채 여길 떠나면 왠지 평생 유리를 프론티어에서 못 보게 될 것 같은 기분도 들고.

……뭐, 에지오 자신이 정말 프론티어를 떠나게 된다면 그 문제는 별로 상관이 없어지겠지만은.

루비아와 스텔라를 위해서라도 유리는 프론티어에 확실히 돌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편이 좋겠지.

“꼭 오늘이 아니어도 되긴 해. 나중에 다시 와도 괜찮고. 정 너희가 빨리 돌아가야 한다면 지금 가는 게 좋을 거야. 아빠랑은 내가 어떻게든 담판을 지어볼 테니까…….”

“으음…….”

스텔라는 고민하는 듯했다.

그러다가 옆을 돌아보며.

“루비아 씨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나? 나는…….”

성적도 중요하긴 하지만, 내일 있을 마법 전공 수업엔 잘만 하면 안 늦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낯선 왕국에서의 하룻밤이라니.

그것도 호화스런 궁전이다. 살면서 이런 경험은 좀처럼 쉽게 해볼 수 있는 게 아닐 터다. 물론 조금은 부담스럽긴 하지만, 정말 싫으냐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었다.

루비아가 조심스레 시선을 어딘가로 옮겼다.

“…? 왜?”

“……아냐.”

에지오였다.

…그와 함께라면, 어쩐지 두근거리는 하룻밤이 될지도 몰랐다. 새벽부터 돌아다니느라 몸이 피로하긴 한데, 조금의 여유라면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아니, 불순한 마음으로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건 절대 아니지만서도. 막상 이런 상황이 닥쳐오니 싱숭생숭한 마음이었다.

“나는… 괜찮아. 될 수 있으면 나도 국왕님께 말씀을 드려보고 싶어. 제대로 설득할 수 있을진 몰라도 효과는 없지 않을 거라 생각해. 진심은 통하는 법이니까…. 그리고.”

루비아는 작게 미소 지으며 유리에게 말했다.

“유리 네가 못 돌아온다면 나 정말 슬플 것 같거든. 너는 내가 프론티어에 와서 처음으로 사귄 친구잖아. 졸업 때까지 쭉 함께하고 싶은걸.”

“루비아……. 흐잉.”

감동을 받은 건지 울먹거리며 루비아의 허리에 바짝 달라붙는 유리. 루비아는 그런 유리의 머리를 가만 쓸어주었다.

누구의 접근도 거부했던 전적이 무색하도록 너무나 쉽게 쓰다듬을 허락하는 그 모습은, 지켜보던 에지오의 입장에서 차별받는단 인식을 좀처럼 떨칠 수 없게 했다.

…라는 건 얼마 전까지의 생각일 뿐이었다.

─머리… 쓰다듬어줘.

두고두고 회자될 명장면을 떠올리자, 에지오는 자신의 마음이 만족감으로 충만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번 일로 유리를 놀릴 생각을 하면 몹시 기대가 되고 마는 것이었다. 물론 그에 따른 뒷감당도 응당 각오해야겠지만. 한 번쯤은 유리의 반응을 꼭 보고 싶었다. 과연 얼마나 수치스러워할까.

뭐, 사람의 진심을 가지고 놀리는 건 그닥 좋지 않다. 그러니까 에지오도 이번에 한해선 자중할 터였다. 유리와 어색해지기 전에 분위기를 환기할 용도로 가볍게 농담을 던지듯 언급하는 걸로 끝이겠지.

“루비아는 그렇다는데, 스텔라 너는?”

“저는…….”

결국 스텔라도 결심한 듯.

“……교수님께 따로 연락을 드려봐야겠네요. 저도 유리 씨가 없으면 많이 허전할 테니까요. 시간을 오래 끌수록 국왕 전하의 마음을 돌리기 어려워질 수도 있으니……. 하루만 신세를 져도 될까요?”

미안한 듯 쓰게 웃으며 그리 말한다.

“흐이잉…….”

루비아의 품에 엉기듯 달라붙었던 유리가 이동하여 이번에는 스텔라의 품에 폭 안긴다.

“응, 응. 당연하지. 너희라면 언제든 환영이야. 고마워, 스텔라.”

“별말씀을요.”

눈을 동그랗게 떴던 스텔라가 이윽고 루비아처럼 유리의 등을 찬찬히 다독여주었다.

그렇게 잠시간 훈훈한 분위기가 연출되는 듯싶더니.

“야, 나는? 나는 왜 안 안아줘? 나도 널 위해서 여기 남는 건데?”

홀로 동떨어진 에지오가 자길 가리킨다.

그러자.

“넌 제발 닥치고 있어.”

“아니, 너무하네…. 아까는.”

“악! 아악! 아무것도 말하지 마! 닥쳐! 시끄러워! 너 싫어! 취소! 다 취소야!”

슬쩍 아까 일을 떠보려 하자 발작하듯 바로 스텔라의 품에서 떨어져 에지오의 명치로 주먹을 내지르는 유리. 다만 에지오는 그런 허접한 일격에 당해줄 만한 위인이 아니었다. 애초에 명치는 위험하잖아.

터억─

“우습구나. 더 강해져서 돌아와라.”

“이으이이익! 넌 좀 맞아야 돼! 진짜!”

한 손으로 가볍게 막아내곤 이를 바득 가는 유리와 다시금 실랑이를 벌이다가, 결국 어깨를 으쓱이며 포기의 의사를 내비친다.

“알았어, 그만할게. 됐으니까 목소리 좀 낮춰. 공주란 사람이 왕궁에서 품위를 안 지키면 어떡하니.”

“뭐, 뭐?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그때.

“…공주 전하?”

저벅, 저벅─

회랑으로부터 누군가 걸어 나왔다.

“거기서 무얼 하고 계십니까?”

중갑을 걸친 장년의 기사,

할튼이었다.

“아, 할튼 경. 그게.”

마지막으로 에지오를 향해 ‘말하면 죽인다 반드시 죽인다’ 같은 눈빛으로 일갈한 뒤, 흥 하고 고개를 돌린 유리가 상황 설명을 위해 할튼 쪽으로 다가갔다. 일이 그렇게 되었으니 일행을 하룻밤 묵게 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남은 건 셋이었다.

“이제… 어떻게 될까요.”

스텔라의 중얼거림을 에지오가 받았다.

“글쎄, 국왕 전하께 말씀을 드려봐야 알겠지.”

“가능성이 있을까요? 이미 뜻을 굳히신 것 같은데….”

“뭐든지 해보기 전에는 모르는 거야. 안 된다고 하셔도 끝까지 밀어붙여 봐야지. 혹시 모르잖아, 우리한테 질려서 마지못해 허락하실지.”

“아하하… 그런데, 에지오 씨는 의외로 엄청 필사적이시네요. 제 생각보다 유리 씨를 많이 아끼시는 것 같아요.”

“어, 그런가?”

“네.”

의외라면 의외가 맞다. 당장 유리만 해도 에지오에 대해선 험담에 가까운 말밖에 한 적이 없고, 평소 그들의 관계 역시 이렇다 할 정도로 친밀한 듯 보인 건 아니었으니까. 서로 싸우기만 했지…….

“뭐… 네 생각이 아예 틀리진 않았을 거야.”

“……그래요?”

“어. 무엇보다 할 수 있는 건 끝까지 해보는 게 원래 내 성격이기도 하고. 저 녀석이 얼마나 너희를 소중히 여기고 있으며­ 얼마나 프론티어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지 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 가급적이면 곱게 도와주고 싶다는 거지. 아마 못 돌아가면 여기서 혼자 많이 힘들어할 거야, 저 녀석.”

“…….”

스텔라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일 뿐이었다. 에지오의 말을 납득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잠시 뒤.

“있잖아, 에지오.”

“응?”

그들과 저 멀리의 유리를 번갈아 바라보던 루비아는, 이윽고 아까부터 가슴 한켠에 담아두던 의문을 슬며시 꺼내었다.

“왜 불러?”

“그게…….”

“응.”

“정말… 아무 일 없었어?”

“……? 무슨?”

에지오가 고개를 갸웃한다. 루비아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둘 사이에 뭔가 일이 있었다는 건 확실한데, 스스로 더 캐물을 용기가 없었다.

그랬다가는,

이 불안한 마음이 말투에 묻어날 것만 같아서.

“아, 아냐. 아무것도.”

…그럴 리 없잖아.

유리와 에지오가 그럴 리 없다는 걸.

그런 두 사람을 자기가 ‘질투’할 리 없다는 걸.

전부 알고 있으니까.

“아, 묘지에서 있었던 일?”

“……!”

그렇지만, 반응해 버렸다. 흠칫했다.

그러나.

“아무 일 없었대도. 정말로.”

“……그, 그래?”

“그렇다니까.”

에지오가 태연히 어깨를 으쓱인다.

루비아는 쓰게 웃었다.

“응.”

‘거짓말.’

“믿을게.”

거짓말이어도, 믿는다.

에지오가 하는 말이라면.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고.

아무 일 없을 거라고.

…믿고 있으니까.

에지오의 무결한 얼굴을 보며, 루비아는 안심한다.

안심하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만, 루비아는 그것을 마음의 저편으로 대충 흘려 넘겼다.

“얘들아.”

그때, 할튼과 얘기를 끝마친 유리가 말해왔다.

“일단 따라와. 너희가 지낼 만한 방을 내줄 테니까.”

루비아와 스텔라, 에지오는 각자 머리를 끄덕이며 그들이 들어간 정문을 지나 회랑 위에 발을 올렸다.

#2

달밤의 수련은 언제나 옳다.

“후우…….”

정명한 기운을 갈무리하며 오늘 하루를 마무리하던 청년은, 죽은 정원의 흙바닥 위로 검 끝을 늘어뜨렸다.

아주 약간의 땀방울이 흘렀다. 차가운 공기와 반대되는 열띤 숨을 내쉰 청년이 문득 어딘가로 고개를 돌렸다.

“……아.”

시선 끝에 그 모습이 닿았다.

연분홍의 머리카락.

순수하고 풋풋하며 가련한 소녀.

처음 보았을 때부터 완전히 빼앗겨 버린 마음.

빈센트 데르바인. 그의 눈에는 오직 연분홍빛 소녀의 모습만이 보일 뿐이었다. 주변에 누가 있든 전혀 상관하지 않고…….

“이런.”

그랬을 터인데. 빈센트는 가슴 한켠이 욱신거림과 동시에, 불편한 감정을 함께 느껴 버리고 만다.

……지그리트 국왕이 인가했음에 따라 빈센트는 잠시 이곳에 몸을 의탁하고 있었다. 돌아갈 곳이 왕국으로부터 꽤 먼 곳에 위치한 까닭이다. 내일 새벽 닭이 울 때 바로 출발할 터였지만, 경우를 따져 더 오래 머물 생각도 하고 있었다. 염치가 닳아 없어진다 하더라도 어떻게든.

저 소녀가 여기 더 오래 머문다면.

자신 또한 그러할 생각이었기에…….

하지만.

빈센트는 검의 손잡이를 꽉 움켜쥐었다. 그의 눈빛은 사뭇 날카로운 예기를 띠는 듯했다.

‘오늘 밤에는 반드시.’

만난 지 고작 하루밖에 되지 않았으나,

연적(?)이 생겼다.

그것도 아주 강한.

‘오늘이 아니면 기회가 없다.’

스르릉─

빈센트는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짧은 훈련으로 땀내가 나는 체취를 인지하고는, 몸을 정갈히 씻기 위해서 발걸음을 돌렸다.

저벅, 저벅.

걸어가면서, 끝까지 소녀의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녀가 어디로 가는지 알아야만 했으니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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