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차버린 소꿉친구와 전 여친이 같은 반이라 곤란하다-198화 (198/201)

〈 198화 〉 간과 (2)

* * *

#3

“이쪽입니다. 에지오 님께선 오늘 하루 여기서 주무시면 됩니다.”

왕궁의 손님용 침실은 오십 개가 넘는다.

그중 하나를 임시로 배정받은 에지오 크라닐이 열린 문 안쪽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잠시 뒤 그의 눈이 놀라운 듯 확장되었다.

에픽 클래스의 호화스런 기숙사에서 매일을 지내다 보니 웬만한 럭셔리 룸에는 내성이 생겼다 생각했는데, 막상 그런 것도 아닌 듯하다. 말인즉 ‘진짜’는 확실히 다르다 이 말이었다.

큼지막한 공간은 당연한 것이다. 넓게 깔린 와인색 가죽 카펫. 금박과 비단으로 장식된 퀸 사이즈 침대. 키가 원체 큰 에지오가 일자로 누워도 침대 끝과 발끝 사이의 공간이 적잖게 남을 것 같다.

보랏빛의 요사스런 기운을 내뿜는 마력석이 방사형으로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 하며, 침대 옆에서 은은한 빛을 비추는 조명 등…….

물론 왕족의 침실에 비하면 다소 퀄리티가 떨어지긴 하지만, 손님용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굉장히 부담스러울 정도로 귀한 대접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을 터였다.

“욕실 및 화장실은 바깥쪽 복도 왼쪽 끝에서 두 번째 방에 위치하여 있습니다. 불편한 점이 따로 있으시다면 언제든 저희를 부르십시오. ……그리고 지금 환복하시겠습니까? 손님분께 맞는 옷을 바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현재 에지오는 새벽부터 쭉 정장을 입고 있는 상태였다. 솔직히 말해서 불편한 건 명백한 사실이다. 뻣뻣한 정장을 입은 채로 잠을 정하는 것도 좀 그렇겠지.

“염치없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실례를 무릅쓰고 고개를 주억이니, 시종은 인사를 한 뒤 옷을 가지고 오기 위해 방을 나섰다.

끼익─ 쿵.

문이 닫히니, 남은 건 에지오 혼자였다.

‘……이제 어떡하지?’

에지오는 입맛을 다시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누워서 먼지 하나라도 묻히면 참 죄스러운 기분이 들 것 같은 침대가 먼저 시야에 들어온다.

─누워. 누워서 네 행복을 찾아.

적적하고 고요한 분위기에 잠기니, 침대 쪽에서 마치 에지오를 향해 이리로 오라고 손짓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하기사, 새벽부터 계속 몸이 긴장하고 있었다 보니 여간 피곤한 게 아니었다.

아무렴 아까 유리와 그런 일이 있었기도 하고.

뭔가…… 휴식이 필요했다.

“후우.”

일단 침대 끄트머리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말도 안 되게 푹신한 쿠션감에 놀라기도 잠시, 하마터면 몸이 뒤로 깜빡 넘어갈 뻔했다. 이대로 몸을 뉘이고 싶은 걸 꾹 참고서 탄력 있게 몸을 튕겼다.

‘눈 감으면 쥐도 새도 모르게 잠들겠네.’

겨우 앉은 자세를 유지한 에지오가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러자 자연스레 한숨이 흘러나온다.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다.

유리의 복귀 문제나, 자신의 자퇴 문제나. 향후 처신에 대한 문제라든지, 그 외로 부가적인 문제를 조목조목 짚어보자면…….

‘잘 지내고 있으려나.’

역시, 뮤와 관련한 이야기가 빠질 수 없다.

자신들이 없는 프론티어에서 뮤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늘 그랬듯 유난을 떠는 사샤를 무시하며 검을 닦고 있을까. 아니면…….

“하­.”

이번에도 까닭 없는 피식거림이 짧게 흘렀다. 내가 뭐라고 그 녀석 걱정을 하고 있는 건지. 기실 뮤와 단절하고자 했던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에지오 본인이 아니었던가. 그녀의 개인적인 사정을 신경 쓸 입장이 더 이상 아닌 셈이었다.

생각이 차츰 심해로 빠져든다.

쓰레기 같은 짓을 했다. 더할 나위 없이 심한 말과 행동을 했다. 그녀의 헌신적인 사랑을 구겨서 내던져 버리고, 발로 꾹꾹 눌러 짓밟기까지 했다. 당연히 용서받으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럴 생각도 없었다. 절대 용서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저지른 행동이었으니까.

에지오는 누구도 사랑할 생각이 없었다.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다. 누구도 사랑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그를 사랑하는 사람은 계속 상처만 받게 될 뿐이었다. 결코 닿지 못하는 사랑에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짝사랑. 혹은 일방적인 연심.

그 기대를 무참히 배반당하고 끝내 받아들여지지 못했을 때 돌아올 충격과 실망감을, 에지오는 아주 뼈저리게 잘 알고 있었다.

……뭐, 뮤와 자신의 관계는 또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케이스가 살짝 다를 수도 있겠지만, 골자는 변하지 않는다.

결국 큰 상처를 받고 끝나게 될 거라면, 일찍이 정리를 해두는 게 맞다. 이래도 저래도 똑같은 결과를 맞이하게 될 거라면, 에지오는 지난 선택을 한사코 후회하지 않을 터였다.

그러니 이게 맞는 거다.

이게…… 맞다.

‘……아니.’

……맞아야만 한다.

‘내가…… 틀렸던 건가?’

과연 누굴 위해서 행한 행동이었을까.

공허한 질문에는 아무도 해답을 주지 못했다.

이에 대해 누군가와 상담 정도는 해보아도 괜찮았을까. 에지오는 아직도 관계에 미숙하다. 그 사실을 본인도 나름 깨닫고 있었다.

제대로 된 친구 없이 보낸 세월이 한가득인데, 사람이 그렇게 쉽게 바뀔 리가 없지. 사람은 고쳐 쓰는 거 아니랬다.

에지오가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많이 변했다고들 주변인들이 평가하지만, 사실은 그렇지만도 않았다.

정신세계에서 아득한 세월을 보냈어도, 에지오는 여전히 열일곱의 청년이자 소년이다.

더 성장해야 하고,

성장하고 있는 청소년이다.

성년의 나이에 가깝지만, 어른은 아니었다.

‘모르겠어.’

자문자답으로 모든 일이 순탄하게 흘러갔다면, 본인이 이 지경 이 꼴까지 몰릴 일도 없었을 것이었다.

‘다른 생각을 해보자.’

여러 복잡한 고민들이 에지오의 머릿속을 빈틈없이 꽉꽉 채우고 있는 관계로, 우선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자신들이 왕국에 방문한 본질적인 이유.

유리를 프론티어로 복귀시키는 것.

일단.

‘국왕 전하의 뜻은 견고하시다.’

설득 아닌 설득을 시도는 해보았지만 과연 씨알도 먹히지 않은 듯하다. 유리의 말을 들어보면 별로 긍정적인 결과가 나오진 않았던 것 같으니. 그럼 유리가 백날 울고불고 떼를 쓴다고 해도 효과는 절대 없을…… 음, 차라리 이쪽이 제일 가능성 있을 수도 있겠는데.

딸을 위하는 마음이 누구보다 크다는 걸 역이용한다. 딸을 무척 사랑하니까, 그런 딸이 제 체면 전부 버려 가며 필사적으로 애걸복걸하면 한 번쯤은 귀를 기울여 들어주실 수도 있었다.

근데, 이 방법은 일단 유리 쪽에서 흔쾌히 해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그 성격에 그게 가능할까. 아마 아닐걸. 절대 아닐걸.

‘그래도, 이게 가장.’

여기서 에지오가 한 가지 간과한 점은, 이미 유리가 국왕의 앞에서 울기도 해보았으며, 국왕은 그런 딸의 모습을 보고서도 끝내 뜻을 굽히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하물며 에지오가 두 번째로 간과한 점은, 국왕은 설사 제 딸이 자살 시위를 벌인다고 하더라도 필사의 부탁을 들어주긴커녕­ 냉정히 밧줄을 끊고 다시는 그런 위험한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유리를 궁전에 가두다시피 하여 일거수일투족 감시할 것이란 점이었다…….

라는 건 얼마 전까지의 일.

기실 적잖은 시간이 흐르며 국왕도 차츰 변화해 나갔다. 극심할 정도로 마력을 억제하던 결계를 거둔 것과, 죽은 정원을 되살리기 시작한 것이 그 증거였다.

그런고로 아마 에지오의 생각은 능히 타당한 편에 속할지도 몰랐다. 그 방법이 통할지 안 통할지 역시 제대로 시험해 보기 전까진 모르는 일이겠지만…….

‘일단 후보에 두자.’

날 모욕하는 거냐며 싸대기 맞을 각오도 하고.

‘다음은…….’

자퇴 문제.

여기로 굴리고 저기로 굴려봐도,

답은 언제나 같았다.

‘안 해.’

절대 안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프론티어의 친구들도 친구들이지만, 에지오는 지금의 생활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거기서 벗어날 생각은 단 한 톨만큼도 없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자신의 존재가 프론티어에 큰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소중히 여기는 친구들이 자신 때문에 저번처럼 큰 피해를 입지 않을 거란 전제하에.

에지오는 프론티어에 남기를 꿋꿋하게 자처할 것이었다.

‘게다가 그 유리가 그렇게까지 했는데.’

다시 생각해도 꿈을 꿨던 건지 몽롱하기만 한 경험이었다. 워낙 솔직하지 못한 녀석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슬쩍슬쩍 진심을 드러낼 때 보이는 모습이 참으로 어색하고 귀여워서 깨물어주고 싶은 기분이다. 생각을 고쳐먹었으므로 여동생 같단 생각은 더 이상 하지 않는다.

놀리면 재밌는 귀여운 녀석.

딱 그 정도다.

아무튼……

‘노력은 해봐야지.’

자신을 노리는 악마들이 헤아릴 수도 없이 많다는 건 알고 있다. 이제는 확실하게 안다. 제국의 뒷면에 숨어 암약하고 있는 악마들이 아직 적잖게 남아 있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투명하게 공개한 적은 없지만, 엘레나 선배님은 아마 그렇게 숨어 있는 악마들을 색출하며 처리를 하고 다니는 듯했다.

다만 엘레나 선배님의 말과 행동을 돌이켜 보면, 그 짓거리도 본인이 하고 싶어서 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말인즉 엘레나 선배님과 테트라 크로울리 마탑주가 일찍이 설명했던 ‘화신의 운명’과 관련이 있는 것이겠지.

결국 누구보다 자유분방해 보였던 엘레나조차 피할 수 없는 운명에 묶여 있었다는 말일까…….

─후배. 에지오 크라닐. 이 불쌍한 새끼야.

문득 엘레나 선배님이 자길 측은하게 바라보던 눈빛이 망막에 스며들었다.

에지오 또한 자신과 똑같은 전철을 밟게 될 거란 생각에서 그런 눈빛을 내보였던 걸까.

어쩌면 에지오가 만에 하나 프론티어를 떠나게 된다면, 그는 엘레나처럼 대륙을 쏘다니는 악마 사냥꾼이 될 수도 있었다.

그리 됐을 때, 에지오는 분명 악마들 사이에서 그 위명(?名)을 널리 떨치게 될 것이었다.

그건 전혀 틀린 가정이 아니었다.

정말로.

‘십 년이라고 했나.’

본인은 전혀 모른다. 에지오가 가진 힘이 악마들에게 있어서 얼마나 치명적인지. 어줍잖은 소악마라면 빛을 품은 손길 한 번에 영()과 육(?)이 죄 불타 없어져 버릴 거라는 사실도…….

‘그 안에…… 마신을 죽일 수 있을까.’

어느새 생각은 흘러 흘러 마신에게로 닿았다.

아직도 맹한 의문이 남는 존재다.

그는 대체 어떤 존재이고, 어떠한 힘을 가졌으며,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자신들을 살려줬던 건지. 에지오는 아무것도 몰랐다.

‘셀레네. 셀레네라…….’

다만­ 무지막지하게 강하다는 것.

자신 같은 인간은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지 못할 높은 곳에 위치하여 있다는 것.

그것만큼은 몹시 잘 알고 있었다.

그때를 상기하면 아직도 손이 떨린다.

단지 영혼의 파편에 불과할 터인 마신의 조각이 내뿜던 사이(??)한 기운. 그건 절대 무시할 만한 게 못 되었다.

‘빛주먹도 전혀 반응을 못 했으니까.’

빛주먹은 작명 센스가 괴랄한 에지오가 임시로 붙인 이름이다. 말 그대로 정신을 집중하면 주먹에서 빛이 나기에. 위력이 향상되고 마족들과 마물들에겐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기술이 새로 생겼다.

기실 원래도 있었던 능력의 일부였지만, 이번에는 확실하게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깨달았다고나 할까.

지금도, 이렇게.

꽈아아악─

“윽.”

주먹을 쥐고 정신을 한 점에 집중하자, 머릿속에서 번갯불이 튀는 듯하며 순간 관자놀이가 아찔해진다.

파아아앗─

자그마한 현기증이 난 뒤엔 어느새 주먹 쥔 손이 찬란한 빛에 휘감겨 있다. 형체도 온기도 없는 순수한 빛이었다.

‘이젠 플래시(Flash) 마법도 필요 없겠네.’

빛주먹 상태를 해제하는 방법은 어렵지 않다.

다시 손바닥을 펴고, 의지의 벽을 와르르­ 허문다. 조금 추상적인 설명이지만 이보다 확실한 설명이 없었다.

빛주먹을 켤 때 정신을 집중하면 어느 무언가를 향한 갈망과 증오가 살짝 피어오르는데, 그 마음을 거두면 주먹에서 빛이 사그라드는 것이었다.

“으음.”

에지오는 재차 입맛을 다시며 주먹을 쥐락펴락했다. 사실 이 능력을 사용할 때마다 그닥 기분이 좋지 않다. 감정을 조종당하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근원을 알 수 없는 감정이 가슴 속에서 끓어오른다.

‘오래 유지하면 할수록 점점 이상해지는 느낌…….’

그때.

─에지오 님, 괜찮으십니까?

에지오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문밖에서 똑─ 똑─ 소리가 나고 있었다.

─갑자기 여기서 무슨 빛이…….

“아, 괜찮습니다. 별일 아니에요.”

─……예, 알겠습니다. 여기 환복하실 복장을 가져왔습니다. 실례지만 문을 열어도 되겠습니까?

“네, 그러세요.”

끼이익─

손님용 침실의 문이 열리고, 그 밖에서 편한 복장을 들고 온 시종이 모습을 드러냈다.

“옷은 여기 두시면 됩…….”

“죄송하지만, 에지오 님.”

“……예?”

시종이 살짝 걱정스러운 낯빛으로 에지오의 말을 끊었다. 우두커니 시종을 바라본 에지오가 의뭉스런 기색을 내보였다. 시종이 옷을 든 채로 방 안에 들어오려 하지 않았다. 문을 열기만 했을 뿐, 무언가 할 말이 있다는 듯 에지오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시죠?”

“그것이.”

입술을 떼었다 붙이기를 반복하던 시종은.

“시간이 많이 늦긴 했습니다만…… 드릴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환복은 나중에 하셔야 할 것 같은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결국 그런 말을 했다.

‘……뭐지?’

“예, 뭐. 괜찮습니다.”

그러자, 시종이 말을 이었다.

“사실은, 국왕 전하께서 에지오 님을 뵙길 원하십니다. 국왕 전하께서는 거절하셔도 괜찮다 하셨으나…… 만일 요청에 응하실 생각이라면, 잠시 그 복장으로 저를 따라와 주시겠습니까?”

에지오는 멈칫했다.

‘국왕 전하께서 나를 또 불렀다고?’

이번에는 무슨 일로?

하지만 곧장 묘한 느낌이 왔다. 방금 전까지 굴리던 생각의 연장선이 하나의 해답을 내놓는 듯했다.

‘어쩌면.’

어쩌면, 이게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다. 유리를 되도록 안전하게 프론티어로 복귀시킬 마지막 기회.

‘……정말, 될까?’

확실하진 않지만, 이걸로 설득이 될지도 모른다. 확실하지 않아도 어차피 부딪혀 볼 생각이긴 했다.

그게 에지오 크라닐이었으니까.

“예, 바로 가겠습니다.”

벌떡─

고개를 주억인 에지오가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4

“여기 있었구나. 뭐 하고 있었어? 응?”

“…….”

“왜 대답이 없어어어.”

“…….”

“뭐 해, 놀자! 주말이라구! 골든 위크!”

“…….”

“으응? 응? 놀자니까? 저기, 사샤 말 안 들려? 들리는 거 다 알아! 무시하고 있는 것도 다 알지만!”

“…….”

“으으으응. 일어나아아아아.”

“아, 좀. 진짜!”

“헉­.”

타다다닥─

위급함을 느낀 야생동물처럼 재빨리 뒷걸음질 치는 사샤 엘네. 하늘색 양갈래 머리가 생동감 있게 파닥거렸다.

“바, 반응했다……. 17시간 46분 만에…….”

이건 정말 기적이었다. 무슨 기적이냐면 감자칩에서 싹이 돋는 정도의 기적이었다…….

감격에 벅차 울먹거리던 사샤에게 툭 던지듯 눈길을 쏘아낸 검정 생머리의 소녀가, 연무장 바닥에 뉘인 몸을 움직일 기미도 보이지 않은 채 천장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런 것까지 세고 있었어? 너도 참 할 짓 없다.”

“할 짓 없다니! 실례네! 너에게 말을 거는 것쯤은 하루종일도 할 수 있어!”

“그리 자랑스럽게 말할 일도 아닌데 말이지.”

진짜 이상한 녀석이다. 딱히 상종하기도 싫을 만큼.

“사샤한테는 충분히 자랑스럽거든! 결국 너한테 반응을 얻어냈으니까! 이건 충분히 업적이라 칭할 만한걸! 안 그래?!”

“어, 안 그래.”

“헉­.”

“알았으면 이제 방해하지 말고 저리 꺼져. 옆에서 계속 지랄지랄을 해대니까 집중이 안 되잖아, 집중이.”

“집중? 무슨 집중? 그냥 누워서 쉬는 거 아니었어? 아니, 처음엔 죽은 줄 알았는데.”

“…….”

띨빵한 어린애에게 조목조목 설명해주기가 싫은 건지, 뮤는 아예 입을 닫아 버렸다. 아까처럼 반응 없는 목석으로 변해 버린 뮤의 옆에서 한참 방방 뛰던 사샤는, 결국 포기한 듯 녹초가 되어 헥헥거리더니──

“헥, 천장을, 보면, 헥, 뭐가, 있어……?”

뮤의 알 수 없는 행동을 이해라도 하겠다는 듯 그녀의 옆에 풀썩 주저앉아, 똑같이 연무장 바닥에 몸을 뉘이곤 천장을 가만 올려다본다. 부풀고 꺼지기를 반복하던 작은 가슴 위에 두 손을 겹쳐 놓는다.

그렇게 몇 분.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

또 몇 분.

“……여기서 왜 이러고 있었던 거야? 천장에 무슨 귀신이라도 있어? 사샤는 아무것도 안 보여. 뭐가 보이면 설명해 줘. 사샤는 멍청해서 네가 자세히 설명해주지 않으면 잘 모른다구. 응?”

“…….”

다시 몇 분.

“계속 보니까 뭔가 무섭네. 진짜 귀신 나올 것 같아. 예전에 아빠랑 언니가 그랬거든? 천장 모서리를 계속 보면 귀신이…….”

몇 분.

“……쿨.”

“…….”

결국 삼십 분을 채 넘기지 못하고 고요한 연무장 바닥 위에서 잠에 빠져 버린 사샤 엘네.

“…….”

그에 반해 처음부터 끝까지 어떠한 변화도 없이 눈을 뜨고 천장을 노려보던 뮤는, 옆에서 아주 조용한 코골이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완벽하게 무시하곤 상체를 비스듬히 일으켰다.

당연히 사샤는 잘 모르는 사실이겠지만, 뮤는 기본적으로 사차원이었다. 때문에 남들이 이해하지 못 하는 행동을 곧잘 벌이곤 했다. 오죽하면 중등부 신입생 시절부터 괴짜로 불렸겠는가.

이번에도 그런 괴짜 행동의 일부였다. 아무 생각도 없이, 아무 이유도 없이 그냥 연무장 바닥에 몸을 깔고 누웠다. 서늘한 흙과 모래의 감촉이 등을 딱딱하게 감싸니, 기분은 나름 좋은 편에 속했다.

……아니, 기실 아무 생각이 없는 건 아니었다. 일전 사샤에게 말했던 것처럼 뮤는 방금 전까지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는 채였으니까.

“하.”

그래서.

“……하필.”

뭐에 집중하고 있었냐면.

─이 반지, 네 거 맞지?

조금 엿 같은 일이 생겨서, 그 처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고민하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일부러 보려고 한 건 아닌데, 안쪽에 이름이 적혀 있더라고. 혹시나 잊어버린 거라면 너한테 돌려줄……

자신을 찾아온 2학년 선배. 그 손에는 일찍이 휴게실에서 모습을 감추었던 실버링 두 개가 쥐어져 있었다.

─……아, 네 거 아냐? 정말? ……그래?

내색하지 않았으나 당황했다. 제 것이 아니라고 부인했다. 이니셜과 이름을 보면 누가 봐도 에지오 크라닐과 뮤의 커플링이라는 걸 알 수 있었을 테지만, 뮤는 특유의 무표정으로 일관할 따름이었다.

어차피 이젠 의미 없는 물건이었으니까.

한편으론 남의 손에 쥐어져 있다는 게 몹시 화가 났지만, 뮤는 자기와 관련 없는 물건이니 버리든 녹여 팔든 알아서 하라고 했다.

물론, 진심은 아니었다.

진심은…….

─네 거 맞잖아. 돌려줄게. 손 떠는 거 다 보여.

그래.

돌려받고 싶었다.

가능하면 은밀하게.

─아, 지금은 말고.

뮤가 빤히 바라보자, 그 남자 선배는 웃으면서 반지를 쥔 손을 등 뒤로 숨겼다.

─이거에 대해선 비밀로 해줄게. 괜한 소문 나는 거 너도 싫을 것 같아서. 네 말처럼 사실이 아니라고 해도…… 뭐, 곤란하잖아?

맞는 말이다. 커플링의 존재를 들킨 이상 에지오 크라닐의 뮤 사이의 소문이 더더욱 골치 아파질 건 자명한 일이었다.

사실 뮤 본인은 자신에 대해 소문이 안 좋게 나는 걸 별로 상관하지 않는다. 그랬으면 진작 에픽 클래스를 뒤집어 엎었겠지.

문제는, 에지오 쪽이었다.

에지오가…… 불편해진다.

─대신, 나랑 이야기 한 번만 해줬으면 좋겠는데. 그 정도는 별로 어렵지 않지?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주말에 시간을 내주길 부탁한 남자 선배. 뮤는 그가 협박 아닌 협박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서 입술을 짓씹었다.

일이 귀찮아지는 건 가급적 피하고 싶었다. 이야기만 하는 거라면 괜찮지 않을까. 어차피 자긴 대충 흘려넘길 테고. 그렇지만 다른 꿍꿍이가 있을지 모른다. 뮤는 일단 답변 보류를 택했다.

그렇게 돌아간 2학년 남자 선배에게 대답을 들려주기로 한 시간까지 앞으로 삼십 분.

뮤는 여기서 계속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걸 또 하필이면…….’

눈을 감고 속으로 한숨을 쉰다.

십 초 정도를 세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잠이 든 사샤 엘네를 슬쩍 내려다보곤 휙─ 머리를 돌려 검을 챙겼다.

저벅, 저벅─

트레이닝복에 묻은 먼지들을 털어내고 연무장 밖을 향해 걸었다. 약속 장소로 향하기 위함이었다.

저벅, 저벅……

그런 뮤의 뒷모습을, 사샤는 힐끔─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바라보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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