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차버린 소꿉친구와 전 여친이 같은 반이라 곤란하다-200화 (200/201)

〈 200화 〉 간과 (4)

* * *

#6

“왔는가, 그대여.”

“국왕 전하를 뵙습니다.”

늦은 밤, 왕궁의 대전.

국왕의 호출을 받아, 옥좌에서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에지오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에 국왕이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음. 부름에 흔쾌히 응해주어 고맙군. 그대의 휴식을 방해할 생각은 없었네만…….”

“아닙니다. 전하께서 부르셨는데 제가 어찌.”

“예를 정도 이상으로 차릴 필요 없노라. 이렇게나 늦은 시각이지 않은가. 보는 이 없고, 듣는 이 하나 없으니 긴장을 풀어도 괜찮겠지. 짐이 그대를 부른 이유는 아무렴… 더욱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함이기도 하니.”

보는 눈과 듣는 귀 하나 없다기엔 옥좌 옆의 존재가 거슬린다. 은제 바스타드 소드 끝을 바닥으로 향하고, 폼멜 위에 두 손을 겹쳐 올려놓은 기사­ 할튼이었다.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국왕이 이어 말한다.

“그래, 짐을 이 나라의 국왕으로 생각하지 말고, 딸아이의 아비 되는 사람이라 생각하거라. 친한 벗의 아버지. 이 정도면 짐과 그대 사이의 심리적 거리감도 조금은 줄어들지 않겠는가.”

“…노력해 보겠습니다.”

“마음에 드는 대답은 아니나, 그렇다고 마음에 들지 않는 대답도 아니로군.”

국왕은 근엄하게 턱을 치켰다.

“그만 일어나서 짐에게 세 발자국 더 가까이 오거라.”

“예, 전하.”

에지오는 국왕의 말을 착실히 따랐다.

저벅, 저벅─

저벅.

“그대여.”

“예, 국왕 전하.”

“전하라는 호칭은 되도록 삼가거라. 짐이 방금 그대에게 했던 말을 잊었는가?”

“외람되오나 전하께서도 짐이라 자칭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검의 폼멜을 붙잡고 있던 할튼의 손이 꿈틀거렸다. 국왕은 그럴 줄 알고 미리 손을 옆으로 뻗어 할튼을 제지한 참이었다.

“…듣고 보니 지당한 말이군. 정정하도록 하지.”

스윽─

두 손에 깍지를 낀 국왕이 말했다.

“짐은, 아니. 나는… 한 나라의 국왕으로서가 아닌, 내 딸 유리의 아비로서 그대와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네.”

이어 이른 저녁의 일을 언급한다.

“일전에 미처 끝내지 못한 이야기도 있고 말이지.”

유리의 갑작스런 등장으로 흐지부지한 결말을 맞이했던 대화. 국왕은 그에 대해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대여. 질문 하나 하도록 하지.”

“말씀하십시오.”

무슨 질문일까.

의문을 품던 에지오에게 국왕이 말을 던졌다.

“그대는 내 딸 유리에 대해 잘 알고 있는가?”

“……무슨 의미이신지.”

“큰 뜻은 없다네. 작게는 내 딸이 어떤 입맛을 가지고 있고, 무슨 꽃을 좋아하고, 어떤 버릇을 가지고 있고, 어느 음유시인의 가락을 좋아하고… 뭐 그런 취향들을 일컫는다면, 크게는.”

국왕은 어쩐지 씁쓸한 웃음을 입가에 그렸다.

“내 딸이 무엇을 해주면 가장 기뻐하는지, 어떨 때 가장 행복한 표정을 보이는지, 무엇을 가장 싫어하는지, 내 딸이 특수한 상황에 놓였을 때 어떤 반응을 보여줄 것인지, 내 딸이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솔직하지 못한 내 딸이 사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깍지 낀 두 손 위에 놓인 고개가 작게 끄덕여진다.

“그런 것들.”

국왕은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그대는, 내 딸 유리를 몹시 신뢰한다고 했지.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을 마음 깊이 신뢰할 수는 없는 법이고. 하여 물어보는 것이다.”

아니, 에지오 자신에게 어떤 대답을 바라고 있는 걸까.

“저는…….”

에지오는 국왕의 앞에서 우두커니 선 채로 한참이나 고민하다가.

“잘 알지 못한다는 대답을 드리겠습니다.”

“흐음… 그런가.”

그리 모난 답변은 아니었다. 솔직하게 답했을 뿐이니까. 하지만 국왕이 마음속으로 원하던 답변 또한 아니었다.

“하면, 어째서 내 딸을 신뢰한다고 그리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던 건가?”

하지만.

“제가 아는 유리라면, 방금 제가 자기에 대해 잘 안다고 대답했을 때, 네가 뭔데 나에 대해 잘 안다고 말하는 거냐며 화를 낼 겁니다.”

“…….”

“사람을 잘 안다는 기준이 정확히 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유리의 주변 사람들 중에서, 저는 아마 남들이 쉽게 보지 못했을 유리의 모습을 꽤 많이 봐왔다고 생각합니다.”

비밀이라는 개념은 그런 거다.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면 곤란한 것.

에지오와 유리 사이에는 그런 비밀들이 적잖게 쌓인 상태였다.

“무엇보다, 한 사람을 전부 아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당장 자기 자신의 앞날도 제대로 예측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의 미래를 그릴 수 있겠습니까.”

지긋한 국왕보다 새파랗게 어린 청년이 자신만의 철학을 늘어놓는 모습이 영 미덥잖게 보일 수는 있다.

그러나 국왕은 에지오의 말을 유심히 듣고 있었다. 눈빛도 한층 더 침잠하여 진중해진 듯했다.

“하물며 개개인의 취향 정도는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것이고, 때와 상황에 따라 기분과 마음 또한 형태를 매번 달리하니, ‘그 사람은 만일 이러하면 이러할 것이다’ 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없습니다.”

“음….”

“일부를 가지고 단지 추측할 뿐이지요. 추측은 불확실한 결과를 놓고 얘기할 때 쓰는 말이고, 불확실하다는 말은 언제든지 결과가 뒤바뀔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저는 유리 폰 아르티나라는 사람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단언할 수 없습니다. 모든 마법에 예외가 존재하듯, 모든 사람에게도 예외라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 심오한 구석까지 파고들 줄은 몰랐다만…… 그대의 말도 틀린 건 아니로군. 당장 딸아이를 가장 잘 알고 있어야 할 아비라는 사람이, 딸을 위한 최선의 선택도 쉬이 하지 못하고 있으니.”

게다가 이번 일을 거치면서 행동양식이 일부 변화한 유리를 상대하느라 여간 곤란한 국왕이었다.

내 딸이 내 딸이 아닌 것 같다.

그런 생각이 드는 요즘이었다.

“말하는 도중에 미안하군. 계속하거라.”

“예, 전하.”

국왕은 전하라는 호칭을 빼라고 다시 한번 얘기하려 했지만, 그리 큰 효용을 보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깨닫곤 입 열기를 그만두었다.

“결정적으로… 사람을 잘 아는 것과 사람을 신뢰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잘 아는 사람의 질 나쁜 습성을 알기에 신뢰하지 않을 수도 있고, 비록 초면이나 믿음직한 리더를 믿고 따르는 것과 같이 처음 보는 사람을 신뢰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그렇군.”

깍지를 풀고 옥좌의 팔걸이를 두드리던 국왕은.

“그대는 내 딸이 강한 사람이기에 믿음직스럽다, 라는 말을 했지.”

“예, 전하.”

이어서 에지오에게 질문을 던졌다.

“하면 내 딸이 강한 사람이라는 걸… 그대는 어떻게 확신하여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는가? 그대의 말에 따르면, 내 딸이 사실은 강한 사람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은가.”

“저는 변하지 않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변하지 않는 것?”

“예.”

에지오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말씀드렸듯, 저는 다른 사람들이 쉽게 보지 못했을 유리의 면면을 곁에서 봐왔습니다.”

미궁에서 단둘이 고립됐을 때의 일이라든가.

오늘 영묘에서의 일이라든가….

“…짧으면 짧고, 길다면 길다고 할 수 있는 시간 동안, 유리는 제게 아주 많은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국왕은 전혀 모르는, 프론티어에서의 유리.

에지오는 잠시 목소리를 줄였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신뢰는커녕, 있던 정도 떨어질 만한 모습도 가끔 보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국왕의 앞에서 공주의 험담을 하다니….

지극히 무엄한 언사가 아닐 수 없었으나, 국왕은 옥좌 옆에서 움찔하려는 할튼을 또다시 막아 세웠다.

그리고, 에지오는 다시 허리를 펴며 말했다.

“지나간 과거의 유리가 제게 보여준 모습들은… 제게 믿음과 확신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변하지 않는 것은­ 과거다.

“그것이 바로.”

에지오는.

“제가 유리를 신뢰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강직한 의지가 깃든 눈으로 말을 마쳤다.

“…….”

잠시 뒤.

“……그대는 그렇게나 내 딸을…….”

감명을 받은 건지. 국왕의 눈썹이 위로 살짝 올라갔다. 눈꺼풀도 느릿하게 두어 번 깜빡였다.

“흐으음.”

애매모호한 낯빛의 국왕은 옥좌 팔걸이에 팔꿈치를 놓고 비스듬히 턱을 괸 채, 코로 숨을 깊게 들이마시더니.

“그런가, 후우우우….”

이내 길게 숨을 내뱉으며.

“에지오 크라닐. 그대여.”

“예, 전하.”

“에지오 크라닐. 크라닐… 크라닐인가. 그대에게 심히 무례한 말일 수도 있으나, 나는 그대의 가문명을 들어본 적이 없다. 어느 나라의 어느 영지를 소유한 가문인가?”

단순한 질문이었다.

“…….”

에지오는 잠깐 침묵을 지키다가.

“저희 일가는… 제국 어느 한적한 시골에 터를 잡은 평민 일가입니다.”

“……음.”

그럼에도 귀족을 상징하는 성씨가 그대로 남아 있다는 건, 허울뿐인 성씨라는 의미다. 이름뿐인 귀족이라면 그래도 귀족이기에 스스로를 평민이라 칭할 수는 없을 터.

에지오의 말뜻을 이해한 국왕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때.

“전하. 잠시….”

석상 혹은 장식처럼 가만히 서 있기만 하던 할튼이, 무례를 감수하고 국왕의 귀를 빌렸다.

“…때……했던….”

“……인가?…”

“…추방……재….”

“과연……이….”

국왕의 미간이 좁혀졌다가, 다시 펴지는가 하면, 놀라운 듯 눈이 커졌다가, 다시 가늘게 좁혀지기도 했다.

그렇게 작은 목소리로 무언가 말을 주고받는가 싶더니.

“명맥은 유지하고 있다 이건가.”

국왕의 그 말을 끝으로, 속닥거림이 멈추었다.

“해서, 내가 그대에게 질문을 했던 건….”

“예, 전하.”

큼, 큼─

짧게 헛기침을 한 국왕이 근엄한 투로 입을 연다.

“내 딸과 혼약할 수 있을지를 일차적으로 검토하기 위해서였다.”

“…….”

에지오가 눈을 지그시 깜빡이더니.

“……예?”

곧 크게 확대된 동공이 미친듯이 흔들렸다.

“그게 무슨 말씀….”

에지오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니 분명 알고 있을 테지만, 국왕은 담담하게 말을 잇는다.

“아직 부족한 내 딸의 정신적 지주 말고도, 옆에서 내 딸을 든든하게 지탱해 줄 배우자 후보가 필요한 참이었지.”

아무래도….

오해를 단단히 한 것 같다.

“그대가 내 딸에게 그 정도로 진심일 줄은 몰랐노라.”

“저­.”

“비록 내 딸이지만 성질이 성질인 탓에 그간 내 딸에게 진심을 보인 자가 없었지. 당연한 일이나 내 딸이 진심을 보이지도 않았고.”

“아니, 그것이. 국왕 전하­.”

“그러나 그대는 다르다. 그대라면 내 딸을 능히 포용할 수 있겠지. 아울러, 내 딸이 그대를 특별히 여기고 있음을 나 또한 알고 있노라.”

“전하­. 잠시 제 말을­.”

“본래라면 내 딸의 혼약은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딸을 감히 어떤 도둑놈이 채간단 말인가? 가당치도 않은 일! …하지만 그대라면, 필요한 조건을 만족한다는 전제하에 내 딸과 혼약하게 해줄 수도 있노라. 아니, 그대밖에 없는 것 같군.”

“전하…….”

“그대는 내 딸을 무척 소중히 여긴다고 했지. 무얼, 그대의 말이 거짓 하나 없는 진심임을 이미 확인한바, 그대가 내 딸에게 깊은 정을 품었다는 사실 정도는 익히 알고 있노라. …아니면 내 말이 틀렸는가? 그대는 내 딸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건가?”

“그렇진 않사오나, 사랑이라는 감정과는­.”

“숨길 필요 없다. 나도 한 명의 사람이자 남자로서 연정을 숨기고 싶은 그대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있으니. 허나 때로는 방금 그대가 진심을 내비친 것처럼, 용맹하게 뜻을 밀고 나아가야 할 필요가 있노라. 무얼, 그런 말도 있지 않은가. 사랑은 쟁취하는 것이라고.”

“저어언하아아…….”

에지오가 식은땀을 비 오듯 흘리고 있을 때.

“하하하하!”

문득 국왕이 큰 웃음을 터트렸다.

“잠시 농을 해보았다. 그대의 반응은 재밌는 편이군.”

“그, 그렇습니까. 다행입니다…….”

딸바보 아버지가 딸의 결혼 문제를 놓고 농담을 할 리는 없다. 반쯤은 진담일 터다. 유리와 결혼이라니. 단 일초라도 상상해본 적 없는 일이었으므로, 에지오는 더 이상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그때 국왕이 사납게 눈썹을 치켜며.

“다행? 지금 내 딸이 배우자로서 불충분하다는 말인가?”

“…아, 아닙니다. 그런 뜻이 아니­.”

“이것도 농이었다.”

재차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튼.”

얼마 지나지 않아 분위기는 다시 가라앉았다.

“그대를 불러 내 딸에 대해 질문한 이유는… 그대의 생각을 듣기 위함도 있었으나, 그대의 조언을 구하기 위함이기도 했노라.”

“……조언, 말입니까?”

국왕이 고개를 주억였다.

“그대들은 내 딸 유리가 그 위험천만한 프론티어로 다시 돌아가길 바라고 있지 않은가. 내 딸 또한 그러기를 원하고.”

“…맞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내 딸과 계속 함께하기 위함이겠지.”

“그 또한 맞습니다.”

금빛 턱수염을 쓰다듬던 국왕이 말한다.

“하면 그대는 내 딸과 혼약한다면 내 딸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게 될 텐데, 어째서 뜻을 굽히지 않는 건가?”

“……전하.”

이젠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다. 영 진지하고 부담스러운 농담이라 반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하하….”

그리고­.

“……나와 왕비는.”

웃음을 거둔 국왕이 어느 순간 입을 열었다.

“유리의 부모로서 유리를 십 칠 년간 키워왔다.”

그의 눈이 회한으로 조금씩 젖어 들었다.

“어릴 때의 유리는 참으로 명석하고 밝은 아이였다. 심지어 행동과 언사 하나하나가 기특하고 어여쁘기까지 했지. 유리는 주변에 그 사랑스러움을 널리 알려, 왕궁의 축복이라 불리기도 했다.”

국왕은 무심한 듯 시선을 내려 에지오의 모습을 눈으로 훑었다. 에지오는 아직 검은 정장을 입고 있었다.

누군가를 추모하기 위한.

“그랬던 내 딸을… 나와 왕비가 망쳐놓았어.”

국왕은 씁쓸히 중얼거렸다. 주름 가득한 눈가에서 침통한 듯 후회스런 감정의 편린이 엿보였다.

“아들에 이어 내 딸까지 잃기 싫었다. 나와 왕비 사이에선 두 번 다시 새로운 아이가 태어나지 못할 것이었고, 하나뿐인 딸마저 영영 잃어버린다면 이 나라에 희망은 더 이상 없었으니.”

적통이 모두 사라지면 다른 혈족이 왕위를 계승하겠지만, 그러기 전까지 딸의 죽음으로 미쳐버린 국왕과 왕비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자신들조차 예측하지 못했을 터다.

“당시에는 그게 유리를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었지. 나는 내 딸을 새장 안에 가둔 셈이었어.”

“유리가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지면 누군가에게 반드시 암살당할 거라는 피해망상에 시달려, 유리의 독방에 항시 활성화되는 감시 수정구를 달아놓기도 하고… 유리의 자립을 억제하고,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를 통제하고, 내 딸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환기라는 명목으로 취미 시간을 마련해주기도 했지. 당연한 수순이나 유리는 전혀 즐거워하지 않았고.”

“자칫하면 크게 다칠 수도 있는 마법 같은 건 손에 대지도 못하게 했다. 시간이 흘러 입문 정도는 하게 해주었으나, 마법에 그리 큰 흥미를 보이지는 않았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유리는 마법 전공을 신청하지 않았다.

“그대여. 내 딸이 그대에게 가끔 철없거나 예민하거나 어린아이 같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던가?”

“……그것이.”

에지오가 대답을 아끼자, 알 만하다는 듯 국왕이 쓴웃음과 함께 입을 연다.

“나이에 맞는 성장을 하지 못한 것도 당연해. 유리의 시간은 오랫동안 한 시점에 머물러 있었다. 우리가 그곳에 억지로 붙잡아 두었지.”

“…….”

“유리는 그런 환경에서 자라왔다. 왕궁이 넓다곤 하나 세계만큼 넓지는 못하지. 유리는 왕궁 밖의 세계를 동경한 모양이야.”

언젠가, 여행 서클 가입 의사를 제일 먼저 표명했던 사람은 유리였다.

“하지만 방 침대에 앉아 창문도 없는 하얀 벽을 멍하니 바라볼 뿐인 유리가 무엇을 할 수 있었겠나.”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는, 유리가 더욱 바깥으로 나가고 싶어 할까 우려하는 마음에 도서관의 출입도 제한했다. 가령 들릴 일이 있더라도 소설 같은 건 한 권도 읽지 못하게 했지.”

그쯤에서.

에지오는 어렴풋이 누군가를 떠올렸다.

…세상 밖을 동경한 어떤 소녀를.

“…내 딸에게 친구는 없었다. 아니, 만들지 못하게 했다. 예전처럼 기사들과 어울리는 것도 허하지 않았다. 그들은 강할뿐더러, 날붙이를 항시 몸에 지니고 다녔기 때문이다. 사고의 위험은 제하고서도 유리가 그들의 손에 죽을까 두려워 모든 기사들과 거리를 두게 했다.”

먼 곳을 바라보던 국왕의 눈이 에지오를 향했다.

“지금은 좋은 친구들이 많이 생겼더군.”

“….”

“이 기회에 감사를 표하노라. 내 딸과 어울려주어서 고맙다. 내 딸을 구해줘서도 고맙고. 그대 덕분에 내 딸이 안전할 수 있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국왕은 별다른 딴지를 걸지 않았다.

“음… 무언가 필요치 않은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은 기분이군. 그대와는 오늘 처음 보는 사이일진저. 딸아이의 속얘기를 이리 많이 털어놓을 줄은 몰랐다. 혹 부담스럽지는 않은가?”

“저는 괜찮습니다. 오히려 유리를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어 기쁜 마음도 가지고 있습니다.”

“음, 그래야지. 그대는 내 딸의 배우자가 될 남자니까.”

“…….”

“농으로 들렸나?”

“……아닙니까?”

“당연히 농이다.”

“…….”

말을 잃은 에지오를 보며 코웃음을 흘리던 국왕이 입을 연다.

“하여, 나와 왕비는… 내 딸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내 딸의 자유를 앗아갔다. 아들의 죽음 이후 나름 밝은 모습을 보여주던 딸아이도 결국 말수가 극히 적어졌지. 그래서는 안 되었는데. 그때 그런 선택을 해서는 안 되었는데….”

국왕이 슬며시 눈을 감았다. 그의 입에서 음울한 목소리가 흘렀다.

“이제야 후회하며 진정으로 딸아이를 위한 선택을 하고자 했다. 그간 성장하지 못한 건 딸아이뿐만 아니라 우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만한 나이를 먹고도 한심한 부모이자 어른이었다. 자식의 귀감이 되지 못하는 부모는, 부모 자격이 없는 것이나 다름이 없을 테지….”

“전하.”

할튼의 목소리였다.

느리게 눈꺼풀을 들어 올린 국왕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무얼, 사실이지 않은가.”

“…공주 전하께서 들으신다면 마음이 저밀 것입니다.”

“그럴지도 모르지. 내 딸은 그런 환경 속에서 자랐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다정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으니….”

이어 국왕이 깊은 한숨을 흘리고는.

“허나 부모로서 몹쓸 짓을 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노라. 지금도 그러하고.”

“전하….”

“되었다. 그만.”

“……예.”

할튼은 다시 석상으로 돌아갔다.

“…마침내 딸아이를 밖으로 보내었다. 한편으론 몹시 걱정이 되었다. 국정이 손에 잡히지 않을 정도로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국왕은 살짝 갈라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 딸은 그곳에서 더할 나위 없이 즐거워했다. 행복해했다. 둥근 필체로 쓴 편지를 보면 알 수 있었다. 딸아이는 분명 이 편지를 쓰면서 행복하게 웃고 있었을 거라는 사실을.”

“불안했으나, 이대로만 가면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제야 딸아이가 진정으로 웃음을 되찾은 것 같았기에, 우리 또한 웃을 수 있었다.”

“이미 많이 늦었으나… 이제부터라도 내 딸을 위한 삶을 살고자 했다. 아니, 내 딸이 스스로 삶을 만들어나가게끔 했다.”

“그랬을진저.”

국왕의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 확고해졌다.

“나는 이제, 프론티어를 신뢰하지 않는다.”

뜻을 절대 굽히지 않으리란 의지가 깃든 음성이다.

“내 딸이 다시 그 위기에 빠지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진실만을 이야기하자면, 어디에도 보내고 싶지 않다.”

“내 딸의 자유를 허하고, 내 딸이 우리의 시야에서 보이지 않게 되자마자 죽음의 위기를 겪었다. 어찌 불안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허나 내 딸은 살아 돌아왔으니 된 거 아니냐는 말을 했다. 그 말을 듣고… 머리가 아찔해졌다. 생사의 기로에 한번 서놓고서도, 다시 그 갈림길 앞에 서겠다고 한다.”

“부모로서… 나는 어찌하면 좋겠는가.”

“내 딸을 위한 선택이 과연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하여 그대의 조언을 구하고자 한 것이다.”

“내 딸은 최근 변화를 겪었다. 아무래도 그대의 영향이 큰 듯하다. 변화한 딸에 대해 더 잘 아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그대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대는, 내 딸을 위한 선택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국왕의 뜻은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이 없다. 어쭙잖은 설득은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딸의 눈물을 보고서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으니. 그런 국왕은 에지오 자신에게 어떤 대답을 원하는 걸까.

“…….”

하면 대답 여하에 따라 결정을 달리할 수도 있다는 말인가. 그것은 썩 좋은 신호였다.

‘확실하진 않지만.’

지금쯤 방에서 쉬고 있을 루비아나 스텔라를 끌고 와서 감정에 호소하도록 만들 필요까진 없었다. 에지오는 여기서 끝낼 생각이었다.

어차피 감정 호소 따위로 쉽게 움직일 사람이었다면 유리가 진즉 설득에 성공했겠지.

그렇다면….

“……전하. 제가 생각하기에는.”

#7

유리 폰 아르티나의 방.

그러니까, 공주의 처소.

“자랑할 거 없는 공간이지만 구경 정도는 시켜주고 싶었는데, 시간이 너무 늦었네. 미안해, 얘들아.”

“미안할 게 뭐 있어. 오히려 쉬고 싶었던 참이야.”

“…그래?”

“응. 아늑하고 좋다, 여기.”

왕족의 침실이었지만, 과하게 반짝이거나 부담스러울 정도로 고급스럽다거나 하진 않았다. 유리의 취향이 일부 반영된 건지. 아니면 필요 없는 짐들을 정리해서 그런 건지.

‘진짜 공주님 방이네….’

물론 루비아의 눈에는 구분 없이 웅장하게만 보이는 방이었다. 에픽 클래스 기숙사와는 살짝 다른 감성의 전통적인 로얄 럭셔리 룸이랄까.

환복하기 전 드레스 차림의 유리가 말했다.

“침대에 누워도 돼. 아니면 여기서 나랑 같이 자도 괜찮고. 아니, 그냥 루비아 너도 여기서 같이 자자. 스텔라도. 세 명 정도는 충분해.”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옆자리를 팡팡 두드린다.

다만 루비아는 쓴웃음과 함께 고개를 내저었다.

“아냐, 아직은 괜찮아. 지금 잠들어서도 안 되구.”

“응? …왜? 피곤하지 않아?”

“피곤하긴 한데, 할 일이 남아 있으니까.”

그러면서 옆의 스텔라를 슬쩍 돌아본다.

“맞아요.”

스텔라는 작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저희는 유리 씨 아버님에게 드릴 말씀이 있잖아요.”

“…으으음.”

당장 아침이 되자마자 왕국을 떠나야 하는 입장으로서, 국왕을 설득할 기회는 지금밖에 없긴 하다. 아까 왕국에 머물 수 있도록 허락을 받을 때만 해도 멀쩡히 잘 깨어 계셨고.

비록 깊은 밤이나, 그들은 무례의 무례의 무례를 무릅쓰고서라도 국왕과 대면할 기회를 만들어야만 했다.

“그거 말인데….”

곤란한 듯 입술을 매만지던 유리가 결국.

“정말 될까.”

고개를 아래로 떨구며 자신 없이 중얼거렸다.

“포기하지 마세요. 유리 씨. 내일 저희와 같이 갈 수 있을 거예요. 저희가 어떻게든 해볼게요.”

그에 스텔라가 의욕을 불어넣기 위해 주먹을 쥐어 보이지만.

“고마워, 스텔라. 하지만….”

“괜찮아. 다 잘 될 거야.”

“…루비아.”

“오늘 실패한다고 해도 기회는 오늘뿐이 아니잖아. 내일도 있고 그 모레도 있어. 시간이 흘러도 유리 네가 언제까지나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아버님도 어머님도 네 뜻을 존중해주실 거야. 반드시.”

“…그랬으면 좋겠다. 헤히.”

루비아의 확신에 찬 목소리, 그리고 결연한 표정은 상대방이 조금이나마 기운을 차리게끔 해준다. 플러스 파워라고 하면 좋을까. 유리도 배시시­거리는 웃음을 작게 터트리며 테이블 위 루비아의 손을 조물조물 매만졌다.

루비아 또한 유리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약하게 덮는다.

“돌아가면 거리에 나가서 맛있는 음식도 많이 먹자. 학생들의 유흥을 위한 구역도 최근에 새로 생겼다는데, 거기도 같이 가보구.”

“응, 응….”

“아직 못해본 게 너무 많잖아. 이대로 떠난다는 건 말이 안 돼. 축제도 같이 못 즐겨봤는걸. 되게 재밌을 거야. 분명.”

“그치….”

“스텔라 너도…….”

그저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을 뿐이던 스텔라를 돌아보다가, 무언가 생각난 듯 갑작스레 입을 다문 루비아는.

“너도 맘껏 즐겨야지.”

스텔라의 손을 잡아 포개며, 부드럽게 웃는다.

“모처럼 프론티어에 왔는걸. 제때 휴식하는 것도 중요한 거 알지? 놀 때는 확실하게 노는 거야. 복잡한 고민 같은 건 전부 잊어버리고. 응?”

“그럼요.”

스텔라는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엷은 미소가 불안했던 건지 루비아는 스텔라의 손을 아주 조금 더 강하게 쥐었다.

“…약속한 거다? 스텔라 너도 축제가 있는 날에는 우리랑 같이 놀기로.”

“네, 약속해요.”

“말뿐인 약속이 아니라고 믿을게. 스텔라 너니까.”

“믿어주셔서 감사해요. 루비아 씨. 그보다….”

그렇게 훈훈한 마무리를 짓는가 싶더니.

문득 스텔라가 눈을 깜빡이며.

“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네요.”

고개를 돌려 침실의 문 쪽을 향했다.

“…응? 무슨 소리?”

유리가 의문을 표했다.

“여러분은 안 들리시나요?”

“안 들리는데…? ……어, 잠깐만.”

“나도… 들리는 것 같아.”

유리는 미간을 가운데로 좁히며 무언가에 집중하기 시작했고, 워낙 감각이 좋은 루비아 또한 알겠다는 듯 머리를 끄덕였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건 유리였다. 왕가의 문양이 음각된 문에 귀를 바짝 붙이며 소음의 정체를 파악하려 한다.

“가까운 곳에서 말소리가 들렸어. 발소리도 들리고.”

야간 순찰을 도는 왕실 근위병인가. 그건 아닌 것 같다. 발소리는 적어도 두 명 이상이었다.

바로 그때.

─저만 뵙자고 하신 겁니까?

마침 이 앞을 지나는 건지, 좀 더 선명하게 들려오는 목소리가 유리의 의문을 명료히 해소시켜 주었다.

“아.”

저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여러 감정이 뒤섞인다.

“……유리? 밖에 무슨 일 있어?”

루비아가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그리 말했다.

유리는 다소 곤란한 표정을 짓더니.

“아니, 음…….”

곧 복잡한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아빠가 그 녀석을 부른 것 같아.”

“그 녀석이라면….”

유리가 그 녀석이라 지칭하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에지오 씨네요.”

그러니 말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는 안 부르셨는데?”

“응. 또 그 녀석만 부른 거겠지.”

“……왜?”

“내가 알겠니. 나도 몰라.”

뭔 말을 하려고. 중얼거린 유리는.

“…얘들아.”

점차 멀어지는 소리의 방향을 분석하며, 조심스레 뒤를 돌아보았다.

“혹시 아빠가 그 녀석한테 이상한 소리를 할지도 몰라. 내가 혼자 갔다 올게. 너희는 여기 있어.”

난입해도 유리 자신이 난입하는 게 낫다. 세 명이 함께 가면 괜히 부산스러워질 거다. 딸바보 아빠의 도 넘은 행동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건 딸밖에 없기도 하고.

“아니면 방으로 돌아가도 좋아. 여기서 자도 괜찮고. 아빠 성격상 한번 얘기를 시작하면 분명 오래 얘기할 게 분명하니까… 금방 못 돌아올 수도 있어.”

“으, 응. 알았어. 알았는데….”

“저희도 같이 가면 안 되나요?”

“안 돼.”

유리는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우리가 끼어들면 그 녀석한테 아빠가 원래 하려던 얘기가 뭔지 모르게 되어 버려. 그러니까 너희는… 그 녀석이랑 아빠 얘기가 끝나고 나면 그때 부를게. 피곤하면 자도 돼. 갈아입을 옷은 각자 방에 준비되어 있을 테니까. 알았지? ”

결국 말을 더 잇지 못한 루비아는 고개를 가만 끄덕여 보였고, 스텔라 역시 조용하게 수긍하는 듯했다.

“그럼….”

머리를 한 차례 등 뒤로 넘긴 유리가 문 손잡이를 잡았다. 끼이익… 소리 나지 않게 조심히 열면서,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갔다올게. 기다리고 있어.”

그렇게, 쿵─

침실의 문이 닫혔고.

“…….”

루비아는 왠지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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