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화 〉 간과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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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과 (5)
#8
“……전하. 제가 생각하기에는.”
뒷말을 잇기 전에 잠시 뜸을 들인다.
국왕은 평소처럼 근엄한 표정으로 에지오의 말을 듣고 있다. 대체로 침착해 보이는 낯빛이다. 과연 한 나라의 국왕.
그러나 에지오의 눈에는 보였다. 초조한 듯 옥좌의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는 미약한 움직임이. 아닌 척해도 내심 기대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기실, 지금까지의 흐름을 보면 에지오가 내놓을 대답은 정해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국왕도 그것을 잘 알고 있을 터.
그렇다면 지금 국왕이 약간의 기대감을 품은 까닭이란 무얼까.
“……유리를.”
에지오는 깊게 고민하는가 싶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
“유리를… 프론티어로 돌려보내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역시 그대의 뜻은 그러한가.”
국왕이 나른한 한숨을 흘렸다.
여기까지는 국왕이 예상한 바에서 한 톨만큼도 벗어나지 않았다. 그에 국왕은 미약한 실망감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저 청년이라면 조금은 자신의 허를 찌르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마치 자신의 아들처럼…. 여하튼, 썩 재치 있는 답변을 기대했던 국왕으로선 아쉬운 마음이 들고 말았다.
그때.
‘……아니, 잠깐.’
국왕의 미간이 신속하게 좁혀졌다.
방금 들었던 에지오의 답변을 뇌내에서 반복 재생했다. 그러자 국왕은 에지오의 답변으로부터 무언가 이상한 점을 탐지할 수 있었다.
유리를 돌려보내야 한다, 도 아니고.
돌려보내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 라고?
“…더 자세하게 말해보거라. 주장에는 마땅한 근거가 존재해야 할진저.”
국왕은 진지한 투로 그리 말하며 귀를 기울였다.
“국왕 전하께선 더 이상 프론티어를 신뢰하지 못하겠다고 말씀하셨지요.”
“당연히 그러하다.”
소중한 딸을 사지(한자)로 내몰았던 기관이다.
신뢰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것은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국왕의 눈썹이 살짝 위로 올라갔다.
“의외라는 표정이시군요.”
“…그렇진 않다. 다만 그대는 제법 당돌한 면이 있군.”
“과찬이십니다.”
“…여튼, 계속 말해보거라.”
에지오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곳에 계신 교원분들을 나쁘게 생각하는 건 아닙니다. 단지, 프론티어는 더 이상 ‘천혜의 요새’라 불릴 수 없게 되었다고 생각하기에.”
제국 수도 같은 최중요 지역의 최중요 시설이 마족의 침입을 허락했다.
오랜 전쟁 끝에 평화를 맞이하는가 싶었으나, 제국을 위협할 수 있을 만큼 강대한 마족 세력이 아직 잔존해 있다는 사실의 방증이다.
그러니 시민들은 불안과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고, 제국은 긴장감을 바짝 끌어올려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 모든 혼란의 중심에 놓인 프론티어.
기존에 ‘천혜의 요새’라 불리며 절대 무너지지 않는 철옹성 같은 이미지를 무구한 세월 동안 지켜왔으나, 이번 사태로 인해 그 이미지가 와장창 깨부서지기 직전이다.
“한 번 일어난 일, 두 번 일어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국왕님께서도 분명 그런 생각을 가지고 계셨죠.”
“음.”
“저라고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같은 위기에 언제라도 빠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감히 예상컨대, 프론티어는 더 이상 저희의 안전을 완벽하게 보장해줄 수 없을 겁니다.”
“하면….”
국왕이 무어라 입을 열려던 찰나.
“완벽히는 아니게 되었지만.”
에지오가 담백하게 말을 잇는다.
“대륙에서 완벽에 가장 가까운 안전을 성공적으로 구축한 장소는, 여전히 프론티어뿐입니다.”
“…….”
황립 프론티어 아카데미.
일반인들과 궤를 달리하는 괴물들이 득실거리는 곳.
마탑의 상층에서나 볼 수 있는 고위계 마법사와, 검술의 극의를 깨우친 소드마스터가 고작 하급 교직 자리를 꿰차기 위해 필사적으로 피와 땀을 흘리며 경쟁하는 곳…….
“그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전하.”
그 외로도 일각에선 프론티어와 제국 수도를 따로 분류할 만큼 독자적이며 혁신적인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는 도시가 바로 프론티어였다.
“…….”
국왕은 잠시 눈을 감고 생각했다. 저 청년이 자신에게 무엇을 피력하고자 하는지 정도는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다.
제아무리 혈장미 기사단을 필두로 막강한 군사력을 자랑하는 아르티나 왕국이라 한들, 국왕이 마음만 먹으면 왕궁을 둘러싼 결계 정도야 언제든지 다시 두를 수 있다고 한들──
왕국 마법사들이 구축한 결계를 프론티어의 결계와 비교한다면, 비교하는 것 자체가 실례인 수준일 것이었다.
어느 쪽이 허리를 깍듯이 숙여야 하는지는 구태여 설명할 필요조차 없을 터였다…….
“…그러하군. 그대의 뜻은 잘 알았다.”
국왕은 속으로 작게 헛웃음을 흘렸다. 자칫하면 대단히 모욕적인 언사가 나올 수도 있을 법했다.
그러나 에지오는 직접적인 말을 삼갔다. 대신 추측의 여지를 남겼다. 국왕이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도록.
‘보면 볼수록… 아이델이 생각나는군.’
좌우간….
참으로 간단한 논리였다.
그래서 왕국이 프론티어보다 강하고 안전한가?
이 세상에서 프론티어보다 안전한 장소가 있나?
딱 이거였다.
막말로 제국 수도까지 손쉽게 뚫어버린 마족이 왕국을 습격한다면, 그것도 제 딸 유리만을 노린다면.
자신은 과연 딸의 목숨을 지켜낼 수 있을까.
‘내 수명을 전부 바쳐서라도 항거하겠지만…….’
……상상만 해도 아찔한 결말에, 국왕은 눈살을 찌푸리며 관자놀이를 손으로 꾹꾹 눌렀다.
잠시 뒤.
“해서, 그대는 지금 제후국 따위가 감히 제국에게 비빌 수 있겠느냐, 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로군?”
“저, 전하. 그렇게까지는…….”
에지오가 식은땀을 흘렸다. 국왕이 그 말을 꺼내자마자 혈장미 기사단장 할튼이 검의 손잡이를 붙잡았던 까닭이다.
스윽─
국왕은 손짓만으로 할튼을 제지했다.
그리고 다시금 정면을 바라보며.
“농이었다. 더욱이 크게 틀린 말도 아니지. …그래, 그러한가. 내 딸이 가장 안전할 수 있는 길이 결국 그뿐인 것인가…….”
잠시 눈꺼풀을 닫았던 국왕이 재차 눈을 떴다.
“무얼, 나도 그대와 같은 생각을 했었노라.”
“……그러셨습니까? 제가 괜한 조언을.”
“아니, 그렇지 않다. 그때는 자문을 통해 결론을 내렸었지. …하지만 지금 내 앞에는 그대가 있다. 나는 그대의 의견이 더 듣고 싶군.”
정말로 유리를 생각한다면 오히려 왕국에 남는 것이 더 위험한 길일 수도 있다. 그러니 프론티어로 돌려보내야 한다. 이러한 주장과 그에 대한 근거 역시 확인했다.
다만… 납득할 수 있는 근거가 아직 부족했다.
“내 생각은 이러했노라. 최근 프론티어 내부에서 크고 작은 소란이 심심찮게 벌어지고 있지 않나. 특히 마족과 연루된 사건은 전부 프론티어에서만 벌어졌던 일이 아닌가.”
“…….”
“그렇다면 마족은 프론티어를 집중적으로 노리는 것이 아닌가. 그곳은 인류의 정수가 담겨 있는 중요한 장소이니. 제국의 수도, 그중에서도 프론티어부터 먼저 무너뜨리려 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
“…….”
“이런 가설을 세워보도록 할까. 마족의 표적은 최우선적으로 프론티어. 따라서 왕국에 남는다면 내 딸이 마족의 표적이 되거나 위험한 사건에 휩쓸리지 않을 수가 있다……. 라는 생각을 해보았노라.”
국왕의 논리는 깔끔했다. 나름 합당한 추론.
국왕은 자신의 의견에 반론을 제시해 보라는 듯 에지오를 지그시 응시했다. 그러자 에지오는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전하. 마족의 목적은 아무도 모릅니다.”
“흐음.”
“어느 무엇도 명확한 게 없습니다. 아무래도 마족들은 워낙 제멋대로이지 않습니까? 일례로, 인마대전이 한창일 때에도 마계의 어떤 대악마가 다른 대악마와 영토 분쟁을 벌이다가 결국 한쪽이 무참하게 살해당한 전적이 있지요.”
“흥미로운 이야기로군. 나는 처음 듣는다.”
“「인간 혹은 괴물」이라는 신간 서적에서 나온 내용인데, 도서관에서 쉽게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무튼, 그 정도로 마족들의 행동은 예측하기가 힘듭니다.”
당장 나디엘리와 나베리우스의 경우를 보라.
나디엘리는 명백히 에지오를 노리고 덮친 것이 맞지만, 나베리우스는 에지오뿐만 아니라 다른 학생들까지 제물로 바치려 했다.
무엇보다 나디엘리는 개인의 사적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서였다면, 나베리우스는 그 제물로 말미암아 마신이라는 존재에게 인정을 받기 위해서 그들을 습격했다. 서로의 목적이 상이하다.
더군다나 제국에 암약하고 있는 대악마는 한둘이 아니다. 제국 바깥 대륙 어딘가에도 인간으로 위장한 대악마가 숨어 있을지 모르는 일. 당장 나베리우스만 해도 ‘네비로스’라는 가명으로 일부 마법사들에게 찬양을 받아왔지 않는가.
…그리고, 마신 셀레네.
에지오의 입장에선 국왕에게 함부로 밝힐 수 없는 정보였지만, 그 마신이란 존재야말로 목적을 도저히 가늠할 수가 없다.
“때문에, 오직 프론티어만을 표적으로 삼는다고 쉽게 단정 지을 수가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벌일지 모릅니다. 오히려 지금 같은 시기에는, 제국이 마족의 잔존 세력을 붙잡아 목적을 확인하기 전까지 프론티어의 보호를 받는 것이 가장 안전할 겁니다.”
“……흐음.”
“무엇보다 그런 위험한 사고들이 일어났음에도, 아직 사망자가 한 명도 발생하지 않다는 점 역시 집중해서 조명해야 합니다. 프론티어의 신속한 대처와 수습 덕분이지요. 또한, 어느 학구에서든 빠르게 이동할 수 있도록 중앙부에 신전도 위치하고 있어…….”
“그대는.”
“예?”
“그대는 프론티어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치곤, 굉장히 프론티어를 신뢰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는군.”
“아.”
프론티어에 관한 국왕의 인식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다. 딸아이를 자칫 저승의 건너편으로 보내버렸을 수도 있는 기관이니까.
하여, 프론티어가 안전하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변호하듯 열변을 토하는 모습이 퍽 언짢게 보일 법도 했다.
“송구하옵니다. 다만 제가 한 말만큼은 전부 사실…….”
“딱히 나무라는 것은 아니었다. 고개 들거라.”
“예, 전하.”
에지오가 숙였던 고개를 빠르게 들었다.
“그대의 말은 잘 들었노라. 과연, 내가 간과하고 있었을 수도 있겠군. 가증스런 마족들이 다시 대륙에 모습을 드러낼 수도 있다, 라. 그래, 그렇다면…. 음…….”
이쯤에서 국왕은 고민하는 척을 하고 있었지만.
사실상,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
에지오는 잠자코 국왕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올곧게 선 자세로 주먹을 꾹 쥐었다.
‘긴장되네.’
과연 자신의 설득이 통했을까.
어설픈 감정 호소에 기대지도 않았고, 철저하디 이성적인 논리에 기반한 주장을 내세웠다.
누가 봐도 합리적인 선택이란 생각이 들게끔.
…그러려고 했는데.
“국왕 전하.”
“…무언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에지오는 다시금 올곧게 선다.
“제가 분명 공주 전하의 안전을 위해서는 프론티어에 남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라 말했었지요. 거기에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말해보거라.”
국왕이 고개를 까딱인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절대 제 자신을 치켜세우기 위함이 아니옵고… 이번 사건에서 마족을 물리치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은 바로 저입니다.”
“알고 있노라. 그대가 정말 잘해주었더군.”
“예, 전하. 달리 말해 제게는 유사시 마족을 상대로 오래 버틸 수 있을 만한 힘이 있습니다.”
국왕이 금빛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흥미를 표했다.
“…그래, 그대는 에픽 클래스였지. 그 힘이 그대의 재능인가?”
“그렇다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에지오는 정신을 집중하며 주먹을 꾹 쥐었다.
“제 힘은 아무래도 마족을 상대로 할 때 가장 강력해지는 듯합니다. 아직 단언할 수는 없으나, 어쩌면 대단한 신성력을 갖춘 고위 신관보다도 더…….”
그러자,
“……호오?”
파아앗─
새하얀 빛이 명멸하듯 터져 나오며 에지오의 주먹을 하얗게 물들였다.
어찌나 밝고 눈부신지 국왕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성스러운 빛이라. 유전은 아닌 듯한데…….’
저렇게 찬란한 광원이라면, 어떤 어둠이라도 몰아낼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때.
“어전에서 불온한 힘을…….”
할튼이 나서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국왕은 그의 행동을 제지하려는 듯 손을 들며 말했다.
“그대여, 시력을 잃기 직전이니 어서 그만두도록 하거라.”
“예, 전하.”
파아앗─
빛주먹이 삽시에 사그라든다.
“…그대의 말은 과장이 아니로군. 신관들의 신성력과는 다른 기운이 느껴진다. 허나 신성력이 아니라면, 이 신성한 기운은 대체…….”
국왕은 진지한 투로 무어라 중얼거리더니.
“그래서, 하고픈 말이 무언가?”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에지오에게 되물었다.
“보시는 것처럼 제게는 이만한 힘이 있고, 저는 언제나 공주 전하와 가까운 거리에 있습니다.”
같은 반이니까.
매일 얼굴 보고 산다.
…아무튼.
“만일 프론티어에 마족이 또 다시 침입한다 하더라도, 제가 사활을 걸고 공주 전하를…….”
이런 장담을 하는 게 아주 약간 부끄럽지만.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해야만 한다면, 할 수밖에 없다.
“…….”
에지오의 결의가 담긴 장담은 국왕에게 닿았다.
국왕은 한층 가라앉은 눈빛을 띠었다.
“……그대는.”
느리게.
입이 열렸다 닫히기를 반복한다.
국왕의 눈빛이 아주 깊게 가라앉는다.
“…그대는 어찌하여 이렇게까지 내 딸을 위하는가.”
에지오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대답한다.
“이미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다음 말 역시 거침이 없다.
“소중한 친구입니다. 저에게도, 제 친구들에게도.”
“…….”
끝내 국왕이 침묵하며 눈을 감았다.
한편, 에지오는.
‘이게 최선이야. 이래도 안 된다면…….’
한참 쉬지 않고 말을 늘어놨던 탓에 입안이 바싹 메말랐다. 시원한 냉수라도 한 잔 들이키고 싶었지만 지금 그럴 수 있을 리가.
그렇게 얼만큼의 시간이 지났을까.
“그대여.”
“…예, 예. 전하.”
나지막이 부르는 목소리에, 에지오는 정신을 차리곤 정자세로 우뚝 섰다.
마침내 국왕의 입이 다음 말을 내뱉자.
“혹시 군것질 좋아하나?”
“……예?”
에지오는 잠시 멀뚱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내 딸은 아주 좋아하지. 내 아들도 좋아했고.”
그러거나 말거나.
국왕은 중얼거리듯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중에서도 대륙 남부 크리톤 왕국의 특산품인 「황금 마카롱」을 가장 좋아했었다.”
크리톤이라면.
분명…….
“이제는 구할 수 없게 되었지만.”
국왕이 씁쓸한 듯 말했다.
그리고.
“확실하진 않으나, 소실된「 황금 마카롱」의 레시피를 보유한 가게가 프론티어 어딘가에 있다고 들었다.”
대륙을 넘어 마계에서만 구할 수 있는 식자재마저 버젓이 존재하는 장소가 바로 프론티어였다.
꿀꺽─
“그 말씀은….”
에지오는 침을 목구멍 너머로 삼켰다.
이 대화의 흐름은, 분명….
“만일 찾게 된다면, 내 딸을 한 번쯤 그곳에 데려가 줬으면 좋겠군. 아마 티를 안 내고 싶어도 안 낼 수 없을 만큼 좋아할 터다.”
에지오의 입이 작게 벌려졌다.
국왕의 표정이 그렇게 긍정적으로 보이진 않아서 살짝 긴가민가했는데, 설마.
…진짜로?
…설득에 성공했다고?
“국왕 전하….”
“당장은 아니된다. 내일 아침도 무리지. 아직 내 딸이 공주로서 해주어야 할 일들이 남아 있으니. 그걸 전부 끝내고 나면…….”
국왕은 세상 포기한 얼굴로 한숨을 푹 내쉬다가, 주름진 입꼬리를 느슨하게 들어 올리며 쓴웃음을 짓고는.
“내 딸을… 프론티어로 돌려보내겠다.”
“아…!”
작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절대 뜻을 굽히지 않을 것만 같았던 국왕.
그런 국왕의 마음을 돌리는 데 기어코 성공했다.
“성은이 망극……!”
환희 내지 기쁨이 가득 차오른 얼굴로 에지오가 감사의 인사를 하려던 찰나.
“미안한데.”
“……?”
저벅─
두 사람의 말소리를 제하곤 고요하기만 했던 공간에 작은 울림이 더해진다.
“그 가게, 이미 찾았거든?”
크고 널찍한 기둥 옆으로 금빛의 실가닥들이 찰랑였다.
저벅, 저벅─
그 발자국 소리가 코앞으로 다가올 때까지, 에지오와 지그리트 국왕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아빠, 너무 과장이 심한 거 아냐? 그 정도로 좋아하진 않는다구. 그냥 어쩌다 생각나면 한 번씩 사 먹는 정도야.”
기둥 뒤를 빠져나와 찬란한 크리스탈 샹들리에 아래로 당당히 걸어온 유리 폰 아르티나는, 퉁명스레 그런 말을 꺼내었다.
한데….
“…….”
“…….”
기세 좋게 나온 것치곤 반응이 영 시원찮다.
“뭐, 뭐 그렇게 보는데…. 내가 무슨 범죄라도 저질렀어? 그냥 지나가다가 대화 좀 엿들었을 뿐이라구?”
유리는 팔짱을 낀 채로 말을 더듬었다.
에지오는 얼떨떨한 마음에, 국왕은 아까 전 짧은 말다툼을 벌이며 딸에게 눈물을 보이도록 만든 일로 쉬이 입을 열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어색한 침묵이 흐르다가.
“…아니, 왜 계속 보기만 하는 거야. 사람 무안하게. 뭐라고 말들 좀 해봐….”
에지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도청은 경우에 따라 중범죄가 되긴 하지.”
“진지하게 받아치지 마!”
여느 때처럼 빼액 소리를 지르는 유리의 얼굴과 귓불은, 잘 익은 복숭앗빛으로 연하게 물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