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 #52 공작을 물다.
* * *
“이게 무슨 소리인가. 크리브디스 공작.”
“모함입니다. 폐하.”
제국의 회의장은 소란스러워졌다.
한 교황의 호소서.
제국의 백성들이 잡혀 고문을 받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그들은 광신도들이고 배후에는 크리브디스 공작이 있다.
이 사실을 황제가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황제가 모르도록 크리브디스 공작이 어떻게든 수작을 벌였다.
평범한 신관들이나 변방의 귀족들이 호소서를 보낸 적은 몇 번 있었지만,그런 호소문들은 크리브디스 공작 선에서 잘라버렸다.
하지만 이렇게 교황의 호소문이 온 적은 처음이었다.
교황이 직접 보낸 호소서를 크리브디스 공작이 막을 방법은 없었다.
‘저 멍청한 황제가... 평소처럼 내 손바닥 위에서 놀아날 것이지...’
황제는 무능하다.
황제 주위 사람들도 무능하다.
그들이 아무리 머리를 써도 크리브디스 공작을 막을 수 없다.
뭐 황제 주위 사람들이 전부 황제 사람이었다면 어느 정도 틈을 찾을 수 있었겠지만, 황제의 주위 사람들도 크리브디스 공작이 심어둔 사람이다.
아무리 공작의 틈을 찾으려고 해도 황제 측근들이 공작 편인데 찾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황제가 수도에 없는 충신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면 지금보다는 상황이 좋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변방에 있는 충신들조차 지금은 황제에게 실망한 상태였다.
크리브디스 공작에게 대항하려고 해봤자 계속 실패하는 모습만 보이는 무능한 황제.
그런 황제를 먼저 나서서 도와줄 위인은 없었다.
도와줬다가 크리브디스 공작에게 목이 잘리면 잘렸지 황제가 자신을 도와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달랐다.
크리브디스 공작은 이리나에게 교황에 대해 이야기를 대충 듣긴 했지만 말 그대로 대충 들었다.
아무리 교황이라지만 본인이 몇 년 동안 쌓아온 것들을 어떻게 한 번에 무너뜨릴 거로 생각하겠는가.
하지만 그 일이 일어나고 있다.
대체 어떻게 찾은 건지 자세한 상황과 증거까지 가지고 있다.
지하감옥의 상황과 본인이 광신도라는 증거는 정확하게 제시하지 못했으나 심증을 제시했다.
그리고 주변에 일어나는 상황들은 정확하게 증거까지 제시했다.
“공작. 이렇게 자세하게 적혀있는 호소문이 있는데 어떻게 모함이겠지 하고 넘기겠는가.”
“폐하. 그동안 크리브디스 공작의 충심을 몰라주시는 겁니까.”
“폐하 공작은 충신입니다. 천천히 다시 생각해봐 주시길 바랍니다.”
황제가 말하자 주위 귀족들이 황제에게 말을 올렸다.
황제는 그런 귀족들을 말을 귀찮다는 듯 손을 저었다.
“그대들이 그렇게 말한다면 이 호소문을 반박할 증거를 가져오길 바라네.”
그런 증거가 있을 리 없었다.
다른 증거가 나오면 나왔지 이것들을 반박할 증거는 조작하지 않는 이상 나올 수가 없다.
"아니면 교황보다 높은 직위를 가져오고 말하던가."
그런 사람이 있을 리도 없다.
"교황이 직접 이런 증거를 모아서 제시했는데 모함이라고 말한다니. 신성모독을 할 셈인가."
"죄...죄송합니다. 폐하."
황제는 말을 이어나갔다.
“내 생각엔 교황을 불러서 이야기를 들어보는 게 맞다고 생각하네. 자네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주변 사람들은 서로의 눈치만 봤다.
교황이 온다면 상황이 더 나빠지면 나빠지지 좋아질 리가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하시죠. 교황님이 즉위식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일주일 정도 뒤는 어떠십니까.”
공작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황제에게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저 사람이 미쳤느냐고 생각했다.
누가 봐도 교황이 오면 공작이 불리해질 거라는 걸 알 텐데...
그냥 불리해질 뿐만 아니라 모가지가 날라갈게 분명했다.
그런 말을 하는 공작을 보고 황제도 의아한 듯 쳐다봤다.
하지만 황제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공작을 밀어낼 수 있는 기회.
“공작의 말대로 하지. ”
그렇게 회의가 끝났다.
공작의 측근들은 공작을 따라 다른 회의실로 향했다.
그들 중에는 광신도도 있었고 광신도는 아니었지만, 공작을 도와 광신도에 관련된 일을 한 사람도 있었다.
“공작님 어떻게 하실 계획입니까.”
“이대로 가다간 저희 목이 온전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주변에 있는 귀족들은 불안에 차서 공작에게 물었다.
이대로 가다간 공작의 목은 물론이고 본인들의 목까지 날라가고 말 것이다.
하지만 공작은 의연한 태도로 의자 앉아 웃었다.
"크흐흐흐흐흐흐."
“공작님! 웃을 때가 아닙니다! 한시라도...!”
“크흐흐!! 우습지 않습니까. 본인의 살길이라도 찾은 사람 같이 기뻐하는 황제를 보십시오!”
공작이 그렇게 말하자 사람들은 서로의 눈치를 봤다.
좆된 건 우리 아니야?
황제가 살길을 찾긴 했다.
그게 우리를 죽이는 길인게 문제지.
드디어 몇몇 사람은 공작이 궁지에 몰리더니 미쳤나라고 생각했고 몇몇 사람은 살아남을 길이 있으니 웃겠지라는 마음으로 공작을 봤다.
“교황은 황궁에 한 발자국도 못 들어올 겁니다.”
공작은 웃음을 멈췄다.
그리고 분위기도 갑자기 살벌해졌다.
“아니 들어와서는 안 됩니다.”
“어떻게 하실 계획입니까?”
한 귀족이 기다리지 못하고 공작에게 물었다.
“본인이 들어오기 싫다고 말하던가. 아니면 들어올 수 없는 상태가 돼야겠죠.”
정적이 흘렀다.
들어오기 싫다고 말한다는 건 뇌물이나 서로 거래를 통해서 할 수 있겠지만...
들어올 수 없는 상태가 된다는 건 교황을 죽이거나 상해를 입힌다는 소리였다.
감히 교황을 죽인다는 살인 예고이다.
이런 말을 꺼낸 것만으로도 신성모독이 될 수도 있었고 살인 미수로 잡혀갈 수도 있다.
황제가 제국의 최고라면 교황은 종교의 최고를 뜻하는 의미.
실제로 살인을 계획하지 않더라도 이런 말을 한 사실이 교단들에게 알려진다면 죽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아무리 공작... 아니 황제라도 용서받지 못한다.
하지만 그런 말을 그냥 동네 돼지 한 마리 잡는다는 식으로 말하니 사람들은 식은땀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허...허허허... 묘...묘안입니다!”
“여...역시 공작님이십니다.”
몇몇 이들은 빠르게 아부했다.
공작의 위상이 대체 어디까지 높아진 것인가.
처음에는 황제 자리까지 노리는 것 같았으나 지금은 아니다.
황제 자리보다 더 높은 어딘가를 보고 있다.
그들은 눈치 빠르게 그런 공작에게 아부한 것이다.
“그렇소? 하하! 고맙구만.”
공작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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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제 작전을 짜볼까?”
회의장에 사람들이 모여있다.
사람들이라고 해봤자 몇 명 없었지만.
나, 렌, 에레보스, 로드, 세레나가 책상에 둘러앉아 있고 제일 상석에 카론이 앉아있었다.
“세레나씨는 왜 있는 거야?”
“저도 도와드릴게요!”
세레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 사제장이니까 확실히 우리 편이긴 한데...”
우리 편이라도 나하고 에레보스가 불편해지잖아.
우리뿐만 아니라 로드의 정체도 애매해지고.
내가 카론을 보자 카론도 그 사실을 아는지 미안하다는 눈빛을 나에게 보냈다.
“그래도 손 하나라도 더 있는 게 좋지 않겠어? 도와준다는 걸 거절할 필요도 없고.”
“뭐 그냥 같이 있자. 세레나씨 내가 이야기 좀 해봤는데 괜찮은 사람이더라고.”
“렌씨...!”
렌...
그거 세레나가 네 팬이라서 그런 거 아니야?
마음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렌이 그런 거 가지고 사람을 옹호해줄 사람은 아니긴 했다.
“그래. 세레나씨 저희 배신하려고 하면 카루아님이 이놈하고 혼낼 거에요.”
“후후후... 알겠어요.”
말은 귀엽게 ‘이놈!’ 이라고 말했지만, 진짜 배신한다면 이놈으로 안 끝날 걸요...
에레보스와 로드가 가만히 있을 것 같지도 않고.
“그럼 제대로 작전을 짜보자고.”
로드는 상황을 정리했다.
그 말을 듣고 카론은 아까 황성에서 왔던 편지를 꺼냈다.
“아까 황제에게 편지가 왔습니다. 황성에서 증언해달라는 편지죠.”
“황제가 광신도래서 함정에 끌어들인다는 가능성은 있어?”
“없었으면 좋겠지만 0은 아니겠지. 하지만 전부터 공작과 황제의 사이가 나빴다는 소리가 있으니까 0에 가까울 거야.”
“그럼 된 거 아니야? 가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증거들이나 다른 걸 제시하면 끝이잖아.”
렌은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아니. 공작이 이렇게 쉽게 ‘내 목 잘라주세요.’ 하겠어? 뭔가 있겠지. 그 뭔가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공작이 무슨 행동을 할지 예상하면 카론을 공격하는 정도가 있겠네.”
내가 그렇게 말하자 세레나가 깜짝 놀랐다.
“교... 교황을 공격해요? 그런 말도 안 되는...”
“본인이 살려면 무슨 짓을 못하겠어요. 카론 한동안 어디 움직일 때 나랑 같이 다녀. 나 없으면 보스라도.”
“로에나씨랑... 흐음...”
세레나는 뭔가 의미심장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며칠 동안 세레나를 봤는데 한 가지가 확실해졌다.
카론을 좋아하는지는 확실하게 모르겠지만, 호감을 품고 있다는 건 확실했다.
자꾸 주위에 있는 나랑 렌을 견제하려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
뭔가 오랜만에 장난기가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근데 요즘 카론 여기저기 돌아다녀야 할 곳 많지 않아?”
“그렇지?”
“그럼 오랜만에 둘이서 이곳저곳 다니겠네?”
“어 그렇지?”
“어...어어...? 둘이서...?”
내가 카론을 향해 방긋 웃자 세레나가 놀란 얼굴로 나와 카론을 번갈아 봤다.
처음에 봤을 때는 자존심 강하고 도도한 아가씨인줄 알았는데 보면 볼수록 순진한 아가씨 같아 보였다.
뭐 신전에서 자랐으니까 당연한 건가 싶기도 하고.
‘사람들이 쟤 왜 저래?’ 싶은 얼굴로 쳐다보긴 했지만 난 세레나의 반응을 보는게 재밌었기에 그냥 만족스러운 미소만 짓고 있었다.
우리는 회의를 마치고 방에서 나왔다.
그러더니 에레보스가 나에게 조용히 다가왔다.
“이 아버지는 저 새끼랑 연애 반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