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화 〉 #89 함정
* * *
“로엔! 팔 쪽 막아!”
“알았어!!!”
“카리온! 솔로몬 좀 빌리겠다.”
“솔로몬. 엘로아 쪽으로 가!”
우리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거대한 키메라의 몸은 점점 깎여나갔고 핵은하나씩 모습을 드러냈다.
핵을 부숴가는 속도는 정말 빨랐다.
또 키메라가 특이한 능력이나 갑작스러운 공격을 하더라도 모두 빠른 임기응변으로 대응했다.
내 동료들이 강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강할 줄은 몰랐다.
엄청난 크기의 키메라를 가지고 놀면서 없애버리고 있었다.
아님... 키메라가 약한 건가?
이렇게 압도적인 상황에서 굳이 근원을 쓸 이유는 없었다.
근원은 일단 필살기처럼 아끼기로 하고 신관장이나 교황을 상대할 때 쓰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근원이 없이 키메라에게 대응했다.
신력이나 마신의 기운으로 직접적인 공격을 해봤자 별 의미가 없어보여 그냥 모두가 싸우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구경만 하고 있는데도 핵은 하나씩 부서져나갔다.
핵은 키메라의 몸속에서 하나씩 발견되었다.
몸을 깎아나가다보면 보석이 하나씩 발견되는데 그게 키메라의 핵이었다.
그리고 그 핵을 하나 부술 때마다 치료가 느려졌다.
촉수의 움직임이 둔해지고 일부분 촉수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촉수의 움직임이 둔해지다보니 키메라의 몸은 점점 깎여나갔다.
피부가 없고 뼈가 드러나는 모습은 보기 좋은 장면은 아니었다.
하지만 뼈가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끝나간다는 느낌이 들다보니 뭔가 성취감도 있었다.
기분 좋음과 나쁨이 공존하는 모순되는 느낌?
그래도 기분이 나쁜게 더 크긴했다.
“으...! 언제 끝나는 거야!”
페르세스도 화가 쌓였는지 검을 휘두르다가 소리쳤다.
그러자 엘로아가 침착하게 페르세스에게 말했다.
“긴장 풀지마. 이 녀석이 끝도 아니고 약하지만 어떤 행동을 할지 모른다.”
엘로아의 말이 끝나자마자 많은 수의 촉수가 솟아올라 페르세스를 노렸다.
많은 수의 촉수들이 페르세스를 덮쳐서 페르세스의 모습이 가려졌다.
그렇지만 누구도 걱정하지 않았다.
“흡...!”
페르세스의 기합과 함께 촉수가 난도질 되었다.
촉수들은 전부 잘려 바닥에 떨어졌다.
페르세스는 촉수 더미 사이에서 검으로 촉수를 치우며 나왔다.
“으... 더러워...”
페르세스는 촉수들에서 나온 체액들을 털어냈다.
그리고 엘로아가 말한 긴장풀지 말라는 말에 대답헀다.
“거의 다 끝났는데 뭐.”
페르세스의 말이 맞긴 했다.
이제 촉수의 움직임은 엄청나게 느려졌고 카리온이 소환한 그림자 늑대가 키메라의 몸을 깎아낼 때까지 기다릴 뿐이었다.
그리고 핵이 나타나면 그 핵을 부수기만 하면 됐다.
“이 녀석은 그저 지나가는 절차일 뿐이다. 아직 차원의 틈은 들어가지도 못했어.”
“이 시발... 신관장 놈들은 언제 잡냐...”
“일단 이 녀석부터 잡고 생각하자.”
내가 말하자 페르세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페르세스! 여기 찾아낸 보석이나 부숴줘.”
“알았어.”
페르세스는 아래쪽으로 달려 내려갔다.
“슬슬 끝나겠네...”
이제 핵도 2개 밖에 남지 않았다.
그럼 이제 신관장들과 싸우는 건가...
‘응...?’
그 때 갑자기 숨이 막혀오는 듯한 느낌을 느꼈다.
진짜 숨이 막혀온 건 아니었다.
그저 천장에 있는 공기 구멍이 막혀버린 기분.
몸 전체가 답답해지는 느낌이었다.
이 느낌을 나뿐만 느낀 건 아니었다.
엘로아도, 페르세스도, 카리온도 모두 하던 행동을 멈췄다.
"뭐...뭐야?"
그 뿐만 아니라 키메라의 움직임도 멈췄다.
움직임을 멈출 뿐만 아니라 몸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키메라는 이상한 검은색 물이 되어 녹아내렸다.
그리고 키메라 몸 속에 있던 핵만이 공중에 떠있었다.
그리고 그 핵은...
콰직.
그대로 부서져 버렸다.
“시발 뭐야?”
우리 모두 이 상황에 어이가 없었다.
갑자기 보석이 부서져...?
“아무래도 함정에 걸린 거 같네.”
엘로아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하...함정?”
“정확한 건 아니니까 일단 계획대로 간다.”
나는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엘로아가 말했던 이야기.
이곳이 혹시 함정일 수 있다.
그러니 함정에 걸린 걸 알아챈다면 바로 신계로 복귀한다.
신계에서 여기로 돌아오는 것도 가능했으니 나가는 건 원래 더 쉬운 작업이었다.
나는 아까 사용했던 마법진을 다시 구현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는 포탈을 열려고 했다.
“...안되는데?”
나는 몇 번을 더 시도했다.
결과는 똑같았다.
“시발 갇힌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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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뭐냐 씹...”
카루아는 빠르게 1차원으로 내려왔다.
카루아는 내려올 때부터 불안하기는 했다.
1차원은 광신의 방어선.
로엔과 엘리시가 있었던 차원.
그리고 이번에 광신도들에게 처음으로 정면 공격을 당한 차원.
아주 수도 없이 문제가 일어났었는데 엘리시가 이렇게 난리 친다는 건 정말 큰일이 일어났다는 거 아니겠는가.
카루아가 내려오자 그 장소에는 몇몇 사람이 모여있었다.
드래곤 로드, 페나, 카론, 엘리시 등등
차원에서 강한 녀석들이자 로엔의 동료였던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그리고 하늘을 보자 하늘 전체를 가릴만한 포탈이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누구도 내려오고 있지 않았다.
그저 끈적하고 불쾌한 광신의 기운만이 풀풀 풍겨오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카루아가 묻자 드래곤 로드인 루카스가 말을 꺼냈다.
“그저 천장에 갑자기 포탈이 열렸을 뿐입니다. 이제 저기서 어떤 게 나오는 지가 문제겠죠.”
루카스가 그렇게 말했지만 카루아는 살짝 생각이 달랐다.
저기서 뭐가 나올지도 문제지만 저 포탈이 열린거 자체가 문제였다.
이곳에서 카루아만이 느끼는게 한 가지 있었다.
‘연결되었다...’
저 포탈은 그저 공간과 공간을 넘어다니는 역할의 포탈이 아니었다.
공간을 잇는 통로가 되어 저 공간과 1차원을 같은 공간으로 만들어버렸다.
공간과 공간 자체를 이어버렸다.
카루아는 지금 중간계에 내려왔지만 중간계에 있는 느낌이 아니었다.
이 차원에는 지금 인과율이 없어져 버렸다.
저게 어디로 이어진 포탈인지는 모르겠지만, 저 포탈이 이곳과 연결되는 바람에 인과율이 없어졌다.
인과율이란 초짜신들에겐 신들이 중간계에서 사고 치지 말라고 만든 장치라고 설명하지만, 진짜 역할은 따로 있었다.
신들이 못 막을 존재가 나왔을 때 공간 자체를 붕괴시켜 그 존재를 없애버리려고 만들어둔 장치.
인과율은 사실 자폭장치였다.
중간계 하나를 제물로 적을 죽이려는 자폭장치.
신들도 못 막을 존재가 나왔을 때 중간계 하나를 제물로 바쳐 그 존재를 막는다면 싸게 먹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인과율이 없어졌다는 건...
“씹...”
당장이야 저기서 누군가 나와서 싸운다면 모든 힘을 쓸 수 있으니 이득일 수 있다.
하지만 저쪽에서 꺼낼 카드는 광신.
과거 중간계를 멸망시키려고 했던 에레보스 그 자체다.
그 에레보스는 엘로아도, 다른 신들도 막지 못해서 결국 주신이 나서야 막았던 존재다.
그런 광신을 지금 막으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아니, 마신들이라도 있으면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마신들은 지금 다른 곳에 가 있다.
물론 그들도 광신에게 공격하러 간 거였지만
“딱 봐도 느낌이 안 좋네.”
이 발 끝부터 올라오는 싸함.
이건 아무리 봐도...
“저... 혹시...”
카론이 카루아에게 조심히 말을 걸었다.
“로엔은 어디 갔나요?”
"로엔은 신관장들을 잡으러갔다."
"...네? 근데 저 포탈은 광신도들의... 그럼 로엔은 어떻게..."
그 물음이 끝나자마자 카루아가 대답할 필요가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하늘에 있던 포탈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거기에서는 수 많은 괴물들이 내려왔다.
그 뿐만 아니라 눈에 띄는 네 명이 있었다.
신관장.
수 많은 마물 뒤에 네 명의 신관장이 내려왔다.
그 장면을 본 모두는 카론의 질문에 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쐐기를 박듯 카루아가 조용히 말했다.
“아무래도 뭔가 단단히 꼬인거 같다.”
@
“으으윽...”
조용한 공간에서 에레보스의 신음만이 울렸다.
그 옆에는 한 여성이 앉아있었다.
후드를 쓰고 있어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로엔과 만났을 때 입고 있었던 후드.
그 같은 모양의 후드는 그녀가 교황이라는 걸 보여줬다.
“조금만 있으면 너가 과거에 원하던 상황이 나올 거다.”
에레보스는 그 말에 웃음을 흘렸다.
“후우...너가 막으려던 상황 아니었나?”
에레보스의 말에 옆에 있던 여성은 그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에레보스는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지금의 내가 원하는 상황은 아닌걸?”
“그럼 나의 말도 같다. 지금은 이게 내가 원하는 상황이다.”
“크윽... 후우...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겼는지는 묻지 않으마.”
에레보스는 빤히 여성을 쳐다봤다.
후드 사이로 그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그 여성의 모습은 모두가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 후드 사이로 흘러나와 있는 머리카락이 보였다.
그 얼굴은 분명 모두가 알고 있는 사람의 얼굴이었지만 머리카락은 달랐다.
금발이 아닌 흑발.
평범한 흑발도 아닌 에레보스의 흑발과 같이 사람들을 빨아들일 듯한 흑발이었다.
“이봐 카루아. 그만하자.”
에레보스가 말하자 앞에 있던 여성이 살벌한 눈으로 에레보스를 봤다.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마라.”
“그럼 뭐라고 불러줄까? 주신?”
“더 이상 말하기 싫군.”
그 여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곳으로 사라져버렸다.
“제발 카루아...”
에레보스는 마지막으로 말을 흘렸다.
그 여성의 얼굴은 주신의 얼굴이었다.
주신의 얼굴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아챌 수 있는 주신의 얼굴.
그리고 주신의 목소리.
말투가 원래 주신보다 거칠고 날이 서 있었지만 아무리 보더라도 그녀는...
그녀는...
주신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