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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였던 내가 여신이 되었습니다-94화 (94/138)

〈 94화 〉 #93 탈출

* * *

이 요정을 믿어도 될까?

로젤리아가 에레보스의 방에 데려다 주면서 들었던 첫 번째 생각이었다.

분명 요정 여왕이라면 뛰어난 존재는 맞다.

요정은 보조 마법이라면 드래곤들보다 더 많은 연구 자료와 능력을 지닌 존재들이다.

그런 존재들의 왕이라면 당연히 그 분야의 최고 아니겠는가.

그렇지만 지금 상황이 문제였다.

에루는 신들과 지금까지 아무런 연이 없었다.

처음으로 로엔의 마법을 교육하느라 신들과의 연이 생긴 거였다.

그런데 광신도들이 총력전을 펼치고 있는 이때 이 요정에게 이 일을 맡기는 게 맞는 건가.

이 요정이 마신들을 배신한다면...

자신의 이 판단이 틀려서 마신들을 구하지 못하게 되면...

로젤리아는 에루와 함께 있던 로엔의 미소를 생각했다.

로젤리아가 본 로엔은 엄청나게 감각적이었다.

렌을 의심할 때도 머리로는 의심했지만, 몸은 렌을 배려하고 좋아했다.

렌에게 친절하게 대해주고 밝은 미소를 보여줬다.

하지만 광신도라든지 자신에게 악의를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는 살벌하고 잔혹했다.

평소의 착하고 친절하던 로엔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적의를 숨기고 있더라도 로엔은 똑같이 살벌하게 대했다.

이걸로 로젤리아는 한 가지를 느꼈다.

로엔은 악의에 굉장히 민감하다.

상대방이 자신을 진심으로 대하는지 가식으로 대하는지 굉장히 빨리 알아챘다.

복수의 신으로서 가진 능력인지 그저 로엔 그 자체로서 가진 능력인지는 모르겠지만 신기한 능력이었다.

물론 로엔의 머리가 그렇게 인지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로엔의 몸이 그렇게 움직였다.

솔직히 그렇다고 하면 로엔 본인은 의미 없는 능력일 수 있었다.

몸이 아무리 얘가 배신자라고 말해도 본인의 몸이 그렇게 움직인다는 걸 알아채지 못하니까.

하지만 주변인들이 그녀를 보면 달랐다.

이상한 상대면 상대일수록 몸은 그 사람을 거부하거나 잔혹하게 대했다.

그것도 너무나 티 나게.

원래 로엔이 거짓말 하는 걸 못하긴 한다.

하지만 머리가 인지하지 못한 채로 몸이 움직이다 보니 더욱 티가 났다.

거의 상대방 적의를 파악하는 탐지기 수준이었다.

적의를 가진 사람이 나타나면 탐지기처럼 빨간불을 울렸다.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도록.

그런 로엔이 에루에게 보여줬던 미소는 로젤리아에게 믿음을 줬다.

그 생각을 하니 에루가 배신할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래도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로엔의 미소를 생각하면 에루가 배신할거라고 생각이 되진 않았지만 에루가 마신들을 구할 수 있을까는 좀 다른 문제였다.

분명 요정이 마법 쪽에서 뛰어난 존재들인 것은 맞다.

그렇지만 지금 이 요정이 도움을 주려고 하는 건 마신이다.

전 차원에서 제일 강한 존재들이라고 불리는 마신.

그런 마신들이 걸린 함정을 이 요정이 깰 수 있을까?

이 요정이 그런 힘이 있을까?

그런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작은 몸의 요정이 세상을 대표하는 마신을 구하러 간다고 한다면 모든 이들이 비웃을 것이다.

외면적인 면뿐만이 아니었다.

가벼운 분위기나 장난스러운 태도.

요정은 어떤 일을 하다가도 재미가 없으면 때려치워 버리는 존재들이었다.

그런 존재들이 공부를 해봤자 얼마나 하겠는가.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기엔 사실 요정과 마법은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영역이었다.

로젤리아도 그렇게 생각했다.

이 요정에게 시간을 투자했는데 마신들을 구하지 못한다면 정말 대참사가 일어나는 거였다.

하지만 이 요정 말고 도움 요청할 존재는 없었다.

로젤리아는 동아줄이라도 잡는 심정으로 에레보스의 방으로 에루를 안내했다.

“여기가 에레보스님의 방입니다.”

“흐응?”

에루는 방을 쭉 둘러보았다.

엄청난 양의 서류에 책상이 뒤덮여있는 방.

“두 번째 서랍... 두 번째 서랍...”

에루는 중얼거리더니 에레보스의 책상으로 갔다.

그리고 그 서랍을 여니 검은색 단도가 하나 있었다.

“오~~ 노력 좀 했나 본데?”

에루는 이리저리 그 단도를 보더니 감탄사를 내뱉었다.

“연구는 많이 한거 같은데 때려 박은 힘에 비해 정교함은 별로네.”

“어떻게... 가능 할 거 같나요?”

에루는 익살스러운 미소를 짓고 로젤리아를 잠깐 보더니 주문을 외웠다.

“오퍼레이션.”

그 말을 하자 주변에 엄청난 수의 마법진이 생겼다.

마치 에루를 보조하듯 에루의 주위를 둘러싸고 그 마법진 앞에는 펜이나 칼 같은 엄청난 수의 도구들이 생겨났다.

그리고 익살스럽고 장난기가 넘치던 에루의 표정이 사라졌다.

그저 에루의 얼굴에는 진지함만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주변의 분위기 또한 바뀌었다.

평소의 장난스러운 분위기가 사라졌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는 차갑고 진지한 분위기가 되었다.

에루가 에레보스 책상에서 찾은 단검에 손을 대자 마법진 하나가 나왔다.

단검에 새겨져 있던 마법진.

천사들은 기본적인 마법 지식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마법을 잘 사용하는 건 아니었지만, 신들을 보조할 정도의 마법은 공부해야했다.

그리고 로젤리아는 다른 천사들에 비해 공부를 많이 한 편에 속했다.

그렇지만 로젤리아는 단검에서 나온 마법진의 기본 구조도 이해 가지 않았다.

보통 마법진의 기본 구조 정도는 힐끔만 봐도 알아챌 수 있지만 이 마법진은 아니었다.

너무 복잡한 식으로 이루어진 마법진.

에레보스와 카리온이 살아가면서 계속 보수하고 발전시킨 마법진이다.

그런 마법진을 로젤리아가 이해하기는 너무나 부족했다.

하지만 에루는 달랐다.

에루는 그 마법진을 읽기 시작했다.

마치 환자를 보는 의사 같은 느낌으로 조심스럽고 신중했다.

그런 에루의 진지한 태도는 주위의 분위기를 내려앉게 만들었다.

그저 에루가 도구를 움직이는 소리만 날 뿐 어떤 소리도 나지 않았다.

로젤리아는 자신의 숨소리가 크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렇게 숨을 죽이고 에루를 보고 있었다.

에루는 어느 정도 분석이 끝났는지 고개를 들고 로젤리아에게 말했다.

“그럼 이제 시작한다.”

그 한 마디를 시작으로 에루는 마법진을 분해하기 시작했다.

에루는 도구들을 이용해 마법진의 선을 끊기도 했고 새로운 선을 긋기도 했다.

마나를 이용해 마나 구조를 조절하고 분해했다.

그런 행동을 하는 에루의 행동은 경건했다.

신성했다.

마치 신에게 기도하는 신도같은 느낌으로 행동 하나하나를 조심했다.

아니.

신도라는 느낌보다는 아까 느꼈던 느낌이 맞았다.

에루의 행동은 의사 같았다.

환자의 환부를 만지는 의사같이 마법진을 만졌다.

어떤 때는 조심스럽고 어떤 때에는 과감했다.

하지만 이것만은 확실했다.

에루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확신에 가득 찬 움직임이었다.

사소한 행동에 머뭇거림 따윈 존재하지 않았고 작은 떨림조차 용서되지 않았다.

로젤리아는 생각했다.

대체 그 작은 행동에 많은 지식이 담겨있을까.

얼마나 많은 경험이 담겨있을까.

로젤리아는 생각했다.

그 작은 요정 안에 대체 얼마나 많은 것들이 담겨있는가.

로젤리아는 생각했다.

로젤리아는... 생각했다...

그리고 로젤리아는 깨달았다.

이런 존재를 동아줄이라고 비유한 자신이 바보였다고.

차라리 배신의 가능성을 의심하지 능력을 의심한 건 자신이 너무 바보였던 거라고.

자신이 부족해서 보지 못한 거라고.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났다.

“어느 정도 끝난 거 같은데?”

꽤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았지만 로젤리아는 순식간에 시간이 지나간 것 같았다.

마법에 그렇게 큰 지식도 관심도 없었던 로젤리아였지만 에루의 작업은 눈길을 빼앗았다.

“그럼 이제 구해볼까?”

에루의 말과 함께 마법진은 빛을 뿜어냈다.

전장에 모든 정령왕들이 등장했다.

하지만 그로써 크게 바뀌는 건 없었다.

분명 힘들이 더해졌는데도 불구하고 신관장들은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기세가 더해졌다.

그리고 사제장들의 대화에 모두의 사기가 죽어버렸다.

“힘 좀 더 꺼내면 안돼?”

“안된다. 광신이 부활할 때까지 시간만 끌어라.”

“에이 재미없는데...”

후각의 사제장과 통각의 사제장의 이 대화에 모두가 싸울 의욕을 잃어갔다.

이렇게 압도적인 무력을 자랑하고 있는데도 힘을 다 꺼낸 게 아니라는 사실.

이 사실뿐으로 모두가 절망했다.

‘하... 이렇게 강해지다니...’

카루아 또한 의욕이 꺾여갔다.

정령왕들이 온다면 이기긴 힘들어도 분위기는 바꿀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그렇지만 크게 바뀌지 않았다.

분명 카루아가 신계에서 봤던 신관장들의 힘이 아니었다.

아마 광신의 부활이 가까이 오면서 힘이 더 강해진 거 같았다.

‘포기... 해야하나?’

전황이 망가지고 있자 카루아는 다른 생각을 하게 됐다.

1차원을 포기하고 다른 방법을 강구할 수도 있다.

광신도들의 계획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마신이 없는 이상 후일을 도모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하지만.

카루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의 차원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이들.

처음에는 드래곤들과 카론과 같은 로엔의 동료들만 싸웠지만, 주위에 있던 병사들이나 기사들도 같이 싸우기 시작했다.

그들은 마물 한 마리도 상대하기 버거워했지만 그래도 자신 차원을 지키겠다는 일념 하나로 싸워갔다.

그런 사람들이 있는데 이 차원을 버리는 판단을 하자고 생각하니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그렇게 해서 광신과의 싸움에서 이긴다면 그걸 승리라고 부를 수 있을까?

카루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승리가 아니다.

“하아...”

하지만 걱정되었다.

자신의 이런 판단 때문에 여기 차원 뿐만 아니라 다른 차원까지... 다른 차원을 넘어서 모든 신들까지 죽는다면...

카루아는 자신의 뺨을 때렸다.

“그런 생각을 할 시간에 이길 방법이나 생각해라. 카루아.”

카루아는 어금니를 깨물면서 전투에 집중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황이 좋아지는 건 아니었다.

사람들은 죽어갔다.

사람들 뿐만 아니라 드래곤들도 하나씩 쓰러져갔다.

그리고...

“쿨럭...”

“노아스!!!”

“정령왕 별거 없네?”

노아스의 배가 후각의 사제장에게 뚫렸다.

노아스는 너무 최악의 상황에서 끼어드는 바람에 기운을 빠른 속도로 소모해갔었다.

그리고 결국 사고가 일어난거다.

하늘에서 싸우고 있던 노아스는 후각의 사제장에게 배가 뚫린 후 땅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으...!”

카루아는 요새에서 나와 떨어지는 노아스를 잡으러 가려 했다.

하지만 너무 늦어진다는 게 느껴졌다.

요새에서 나오고 붙잡으러 가면 이미 노아스는 땅에 도달하고도 남는다.

그리고 다른 존재들은 다른 사제장과 싸우고 있어서 노아스를 붙잡으러 간다면 전장의 균형이 무너진다.

겨우 유지하고 있는 전장의 균형이...

카루아는 늦더라도 빨리 나가야 한다는 마음으로 요새에서 뛰쳐나왔다.

그리고 노아스 쪽으로 날아가려고 하자 자신보다 먼저 날아가 노아스를 붙잡는 사람이 보였다.

은발을 하고 있는 여성.

자신의 몸보다 살짝 큰 옷을 입고 있는 여성이었다.

“으차!”

그 여성은 떨어지는 노아스를 붙잡았다.

“노아스 괜찮아요?”

그리고 그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무나 기다렸던 이들.

가끔씩 너무나 짜증나고 막무가내인 녀석들이었지만 누구보다 든든하게 있었던 녀석들.

­탁!

“우리가 너무 늦었냐?”

누군가 카루아의 뒷통수를 쳤다.

평소 같으면 정말 기분이 나빴을 거 같았지만, 그런 느낌이 하나도 들지 않았다.

카루아는 웃으면서 말했다.

“빌어먹게도 딱 맞췄다. 페르세스.”

그리고 전장 중앙에 왕관을 쓴 소녀가 나타났다.

죽음의 신.

에레보스를 제외하면 가장 오래 살아온...

엘로아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엘로아의 뒤에 엄청난 수의 천사 부대가 나타났다.

신계의 천사 부대.

발키리.

그 모습을 보니 마치 왕과 친위대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엘로아는 말했다.

“적의 뼛조각도 남기지 마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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