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1화 〉 #130 선택
* * *
“주신...”
신들을 만들어내고, 기운들을 만들어내고, 세상까지 만들어낸 존재.
지금까지 몇 번이나 이름을 들었다.
간접적으로 얼굴도 봤다.
그리고, 드디어, 만나게 되었다.
“하하... 주신님... 정말 주신님이신가요?”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주신을 만나게 될 줄 몰랐다.
“그래. 내가 진짜 주신이야.”
주신님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미소는 에레보스의 미소와 매우 유사했다.
나를 아낀다는 느낌이 스며들어있는 이 눈빛.
그리고 보는 사람으로서 마음의 평온을 찾게 해주는 미소였다.
주신님은 내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그동안 정말 수고 많았어. 탄생하자마자 고생이란 고생은 다하고...”
주신님의 따뜻한 손길이 내 머리에 닿았다.
내가 해왔던 고생들, 겪었던 고통들이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정말... 정말로 따뜻한 손길이었다.
나는 갑자기 감정이 벅차올랐다.
“흐...흐윽...”
내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이 세계를 지키기 위해서 무거운 짐을 짊어졌었다.
내가 실수를 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죽을 수도 있다.
세상이 멸망할 수도 있다.
이런 부담감을 짊어지고 계속 나아갔었다.
잠깐의 쉴새도 없이 앞으로만 나아갈 뿐이었다.
“힘들었지? 미안하단다... 너에게 이런 짐들을 짊어지게 해서.”
주신님은 나를 꼬옥 안아줬다.
나에게 제대로 된 어머니가 있었더라면 이런 느낌이었을까?어머니의 품을 제대로 느껴본 적은 없었지만, 주신님의 품은 그런 따뜻함을 느끼게 해줬다.
등에 느껴지는 토닥거림이 더 큰 평온함을 불러왔다.
“흐으윽...흐아앙...흐으으앙...”
나는 금세 울음을 터트려버렸다.
그동안 쌓여왔던 것들이 터져버린 거였다.
나는 신이면서 신이 아니었다.
신의 직무나 신의 힘 같은 경우는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
인간이었던 내가 1년 만에 정신마저 신이 될 수는 없었다.
신처럼 보이려고 노력할 뿐.
다른 신들에게 버림받지 않기 위해서 노력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하면 다른 마신들이 내가 신 같아 보여서 나를 아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나’이기 때문에 아껴줬던 거지.
“힘들었어요... 괴로웠어요...”
하지만 그런 나에게 닥쳐왔던 일들은 너무 큰 부담이었다.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사람들이 죽어가고, 노력하지 않으면 세상이 멸망한다.
정신은 인간이었던 나에게 너무 큰 고통이었다.
“괜찮아... 괜찮아...”
주신님은 그런 나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말했다.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지났다.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울면서 찡얼거리다니...
부끄러움이 파도처럼 나를 덮쳤다.
“그... 주신님?”
“이제 좀 진정됐니?”
주신님은 내가 고개를 들자 미소를 지으며 나를 놓아줬다.
“아 네...”
나는 부끄러워서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숙였다.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단다. 네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잘 아니까.”주신님이 그런 나를 위로하듯 말했지만, 부끄러운 건 부끄러운 거였다.
애도 아니고 갑자기 그렇게 울어 재끼다니...
그런 부끄러움이 슬슬 가시기 시작하자 상황에 대해 파악했다.
그러고 보니 난 광신과 결합을 하고 난 후였다.
왜 내가 이런 공간에 있는 거지?광신은 어떻게 된 거고?
설마 실패...한 건가?나는 급하게 주신님께 물었다.
“주신님... 그러고 보니 여기는...”
“여기는 광신과 나의 정신세계란다.”
그러자 주신님은 내가 물을 줄 알았다는 듯 대답했다.
“그럼 결합은...!”
“그래. 성공적으로 됐단다. 아마 밖의 세계에서 광신은 네 뜻대로 됐겠지.”
내 뜻대로라고 하면 광신을 죽이는 데 성공했다는 소리였다.
그 말을 듣자 안도감이 들었다.
철렁 내려앉았던 가슴이 안도감으로 쓸어내렸다.
“휴... 다행이네요.”
“그래... 네 덕분이란다. 그리고 미안하다... 내 실수 때문에...”
주신님의 얼굴에 그늘이 깃들었다.
나는 그런 주신님께 미소를 지어 보였다.
“헤헤... 괜찮아요! 잘 해결됐으니까요!”
밖의 일이 잘 해결되었다고 들었더니 바보 같은 웃음이 피어올랐다.
다행히 주신님도 내 웃음을 보고 얼굴이 펴졌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구나...”
“헤헤...”
주신님은 다시 나를 품에 안았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나는 이상한 소리를 냈다.
“에?”
“후...”
주신님은 나를 안고 잠시 있다가 무언가 결심했다는 듯 나를 다시 풀어줬다.
“이제 슬슬 너도 원래 세계로 돌아가야겠지?”
“아... 그러네요. 시간이 좀 흘렀나요?”
“그래... 다들 밖에서 걱정할 거란다.”
주신님은 그리고 나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상황은 완전히 끝난 게 아니란다.”
“네?”
나는 주신님의 말에 놀라 대답했다.
상황이... 끝나지 않았다고?분명 광신을 죽였다고...
“여기가 광신의 정신세계라고 했지.”
“네...”
“지금 광신은 밖의 세계에서 힘을 많이 사용하고 죽임까지 당해서 내가 이 정신세계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을 뿐이란다. 그래서 여기에 광신이 없는 거지.”
정신세계의 주도권?
한 마디로 광신의 힘이 약해져서 주신님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는 소리인가?
그럴 수 있었다.
두 정신은 어느 정도 동화가 되었다는 상태라고 했으니까.
아까는 광신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어서 주신님의 정신이 묻혀있던 거였고 지금은 광신의 정신이 묻혀있는 상태라는 건가.
“그래서 지금은 광신이 다시 내가 봉인한 공간으로 돌아갈 테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광신일 일어날 거다.”
“다시...”
“그래서 너에게 한 가지 더 부담을 안겨줘도 되겠니?”
주신님은 내 손을 꽉 쥐었다.
아플 정도는 아니었고 그저 주신님의 미안함과 간절함이 느껴질 뿐이었다.
“어떤... 일이죠?”
“나를 죽여다오.”
“...네?”
“여기서 나를 죽이면 광신도 같이 죽는다. 지금 광신과 나는 한몸이니 내가 죽으면 광신도 죽는 거지.”
“...”
주신님을... 죽인다고?
“그럼... 주신님이 그 전에 광신을 죽일 수도 있던...”
“아니... 내가 봉인할 때, 광신의 힘과 내 힘은 비슷해서 죽이지는 못하는 상황이었단다.”
“그럼 지금의 저는...”
“광신의 정신은 현재 묻혀있는 상태고, 내가 저항하지 않는다면 죽일 수 있겠지.”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주신님을... 죽이라고?
“부탁한단다... 다시 이런 끔찍한 일을 일어나게 할 수는 없지 않으냐.”
“그래도...”
“네가 완벽한 세계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었지... 그런 완벽한 세계를 만들기 위해 광신은 없어져야 할 존재야... 내 실수로 만들어낸 존재. 그런 존재를 만든 내 속죄이자 내 희생이라 생각하고 나를 죽여다오.”
광신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이 일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일이고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이것이 주신님의 잘못이니 주신님이 책임지고 죽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그럼 주신님이 희생해서 이런 일을 방지하는 것은 옳은 일일까.
그것이 진짜 완벽한 세계로 가기 위한 길일까?
그러자 내 손에 작은 단도 한 자루가 쥐어졌다.
“내 기운으로 만들어낸 단도란다. 그것으로 날 찌르면 너는 이 세계에서 나가질 거란다.”
“아...”
나는 그 단도를 바라봤다.
그리고 주신님을 바라봤다.
주신님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팔을 벌렸다.
그 미소는 나에게 괜찮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 선택이... 이 희생이... 정말로...
그러자 나는 미카엘과 가브리엘의 말이 생각났다.
과거를 기억하십시오.
미래로 나아가십시오.
현재를 살아가십시오.
현재...
이 현재는 미래 사람들에게 과거가 될 것이다.
그 미래 사람들은 이 과거를 기억하겠지.
그리고 이 과거가 미래 사람들에게 정말 가치 있는 과거일까.
주신님의 희생이 정말 완벽한 세상을 위한 가치 있는 과거가 될 수 있을까.
아니다.
이 희생은 절대로 가치 있는 과거가 될 수 없다.
나는 단검을 바닥에 던졌다.
“로...로엔.”
“저는 주신님을 죽일 수 없습니다.”
“그럼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 그래도 그 선택을 할 것이냐.”
“...”
다시 이런 일이...
아니. 나는 그것도 용납하지 못한다.
“저는... 저는...”
나는.
“다른 길로 갈게요.”
그 두 가지 선택지 모두 거부한다.
“주신님도 살리고.”
결심하고 고개를 들었다.
“세상도 구할 거에요.”
“...어떻게 하려고 그러느냐.”
“새로운... 새로운 길을 걷겠어요.”
완벽한 세상을 위해 희생이 필요하다.
이 말은 내가 한 말이다.
하지만, 그렇지만, 우리가 편하기 위해 누군가를 희생시키는 짓은 광신과 다를 바 없다.
모든 세계 사람들을 희생시키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려는 광신과.
주신을 죽이고 편한 세계를 만든다.
주신을 죽이지 않고 다시 한 번 이 일을 일어나게 한다.
이 두 가지 선택지 모두 내가 원하는 세계를 위한 선택지가 아니다.
“주신님을... 살려낼게요.”
“...”
“약속할게요.”
주신님은 걱정되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어떻게 하려고 하느냐.”
“헤헤... 그건 나가서 생각해봐야겠죠.”
“나간다면 되돌릴 수 없을 거다. 나를 죽일 기회는... 광신을 죽일 기회는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야 생길 수도 있어.”
“그건 저가 책임을 져야겠죠. 아니.”
나는 방긋 웃음을 지었다.
“저에게는 가족들이 있거든요.”
명확한 방안이 생각나지는 않지만, 내 가족들이 있다면 생각나는 바가 있을 수도 있다.
부족한 나를 채워 줄 수 있는 마신들이.
그동안 힘들어도 나를 받쳐주고 함께하던 마신들이 있었기에 버텨낼 수 있었으니까.
지금까지 나 혼자서 해온 일은 하나도 없었다.
카론이나 렌, 마신들 등 많은 가족, 친구들이 있었기에 해낼 수 있었다.
“꼭. 구해 드릴게요.
“...너에게 더 큰 짐을 짊어지게 한 것 같구나.”
“아니에요.”
아까 전까지만 해도 내가 짐을 짊어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다.
생각해보니 나는 지금까지 짊을 혼자 짊어진 적이 없었다.
“짐도 다 같이 들면 가벼우니까요.”
나는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그래. 나는 응원하고 있으마. 나중에 볼 수 있으면 보자꾸나.”
“아뇨.”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이따 봐요!”
나는 바보같이 웃었다.
주신님은 그런 내 웃음을 보고 본인도 나에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주신님이 포탈 하나를 열었다.
“이곳으로 나가면 밖의 세계로 나갈 수 있다.”
나는 그 포탈로 걸어갔다.
그러다가 잠시 뒤돌았다.
“아!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내가 그동안 궁금했던 것이 있었다.
“무엇이니?”
“왜 몸을 바쳐서 중간계를 만드신 거에요? 자신을 희생하시면서까지.”
왜 주신님은 중간계를 만드신 것인가.
주신님은 에레보스와 다른 신들과 행복하게 지내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중간계를 만들었다.
무언가 부족함이 없었음에도 중간계를 만들어냈다.
“아... 너의 말을 빌리자면 완벽한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
“완벽한 세계...”
“그리고 쉽게 말하자면...”
주신은 나를 보며 방긋 웃어 보였다.
“친구는 많은 게 즐겁잖니. 모두에게 친구를 선물하고 싶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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