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5화 〉 #134 무너진 엘로아
* * *
비를 맞으며 쓰러진 채로 있었던 엘로아는 울다 지쳐 정신을 잃었다.
몸의 기운을 다 써서 평범한 인간처럼 쓰러진 것이었다.
그리고 엘로아가 정신을 차리자 반겨주는 것은 익숙한 천장이었다.
“어...”
엘로아가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좀 더 누워있지 그래?”
목소리가 들리는 쪽을 보자 아레스가 의자에 앉아있었다.
평소에 아레스와 교류가 잦은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교류가 없지는 않았다.
일 관련한 교류였을 뿐.
그러니 여기에 아레스가 있을 이유는 없었다.
“왜 여기 있으십니까.”
엘로아는 평소처럼 존댓말을 사용해 아레스에게 말했다.
그러자 아레스는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신계의 중심이던 신이 갑자기 사라지면 찾지 않겠어?”
“신계의 중심?”
엘로아는 놀란 얼굴을 하다가 이내 고개를 숙였다.
어떻게 자신이 신계의 중심일 수 있겠는가.
자신이 한 일은 하나도 없었다.
전부 에레보스와 카루아가 만들어둔 세계에 숟가락만 얹고 있을 뿐이었다.
현재의 상태가 그 증거였다.
에레보스를 막지 못하고 침대에 누워있는 모습.
잠깐의 시간을 지체시킬 뿐 아무것도 못 한 모습.
이런 데 어떻게 신계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고 보니 제가 왜 여기 있는 겁니까?”
분명 자신은 에레보스와 싸우고 쓰러진 채로 있었을 터였다.
“갑자기 에레보스님을 찾으며 사라졌다고 하길래. 몇몇 신들과 중간계를 뒤지고 왔어. 네가 있어야지 서류 작업을 하지.”
“...혹시 저가 쓰러진 지 며칠이 지났습니까?”
“일주일. 일주일 동안 누워있었어.”
엘로아의 표정은 더 어두워졌다.
첫째 날 때 일어났던 사망자는 7천만 명.
그럼 지금까지 일어난 사망자는 셀 수 없을 정도일 게 분명했다.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숫자.
세상의 멸망은 순식간에 이뤄질 것이다.
그런데 다른 신들이 서류 처리를 위해 나를 찾았다?
말이 안됐다.
“이제 서류 처리는 필요 없지 않습니까.”
서류 대부분은 중간계의 관련된 일들이었다.
중간계에 있는 부족한 점을 보완하는 서류들.
하지만 이제 그 서류들은 불쏘시개나 다름없었다.
어차피 에레보스가 중간계를 멸망시킬 테니까.
“그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잖아. 그리고 너가 있어야 에레보스를 다 같이 막으러 가든지 하지.”
아레스가 그렇게 말했지만, 엘로아는 고개를 저었다.
모든 신이 힘을 합쳐 에레보스를 막으려 해도 막지 못할 거다.
엘로아가 느꼈던 에레보스의 힘은 넘지 못할 산처럼 보였다.
절대로... 넘지 못할 산.
그리고 신들이 큰 힘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 힘을 제대로 다룰 줄 몰랐다.
신들이 싸울 상황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으니까.
중간계의 존재들도, 마계나 다른 세계의 존재들도 신들에게 범접할 수 없었다.
자신보다 강한 존재와 싸울 상황이 없던 신들은 에레보스에게 그저 귀찮게 구는 날파리 정도의 수준일 게 분명했다.
“그럼 포기할 텐가.”
아레스는 그런 엘로아를 보며 말했다.
그러자 엘로아는 분하다는 듯 주먹을 쥐었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저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최선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나 보네.”
그 말에 엘로아는 고개를 들고 아레스를 쏘아붙였다.
“그럼 포기하고 싶겠습니까? 카루아가... 주신이 만든 이 세계를 버리고 싶겠습니까? 그런 생각이었으면 제가 그렇게 노력했겠습니까?”
엘로아가 토해내듯 말했다.
그리고 엘로아는 잠깐 흠칫했다.
아무리 자신이 힘든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아레스에게 화풀이하는 행동은 너무나 무례한 행동이었다.
아레스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 말하다니.
엘로아는 머리를 붙잡고 아레스에게 말했다.
“미안합니다. 지금 누구랑 대화할 상황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자 아레스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 그럴 수 있지. 그래도 포기하기 싫다면 주신의 편린에 가봐.”
“편린...?”
그러고 보니 엘로아는 카루아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정신의 편린을 놓고 간다는 그 말.
몇 번 신들이 사용했다는 보고를 들었지만, 정작 자신이 가본 적은 없었다.
그건 카루아의 편린이지 카루아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혹시나 자신이 본다면 카루아를 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커질까 봐 가보지 않았다.
“그럼, 좋은 결과를 낼 수 있길 바래.”
그렇게 아레스 그 말을 하고 엘로아의 방에서 나갔다.
아레스가 나가자 엘로아는 몸을 일으켰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에 카루아의 편린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그 방에 들어가자 흰색 빛을 내고 있는 공이 보였다.
그리고 목소리가 들렸다.
“어서오십시오. 엘로아님.”
“아...”
엘로아는 그 목소리를 듣자 심장이 아려왔다.
그 목소리는 분명히 카루아의 목소리였다.
자신이 그렇게 보고 싶어하던 카루아의 목소리.
“카...카루아...”
엘로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들려오는 답은 자신이 원하는 답이 아니었다.
“저는 주신님이 아닙니다. 주신님의 편린일 뿐입니다.”
그 답은 엘로아를 더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엘로아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카루아가 그립기는 하지만, 지금은 그 그리움을 표현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그...그래. 너한테 물으면 카루아의 지식으로 대답해주는 거지?”
“맞습니다.”
엘로아는 제대로 정신을 차리고 그녀에게 말했다.
“에레보스를 막고 싶어. 중간계를 지키고 싶어.”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토로해냈다.
“카루아 돌아올 때 멋진 세상을... 보여주고 싶어.”
그러자 흰색 구는 강한 빛을 냈다.
그리고 엘로아에게 말했다.
“가만히 있으시면 됩니다.”
“...뭐?”
“아무것도 안 하시고 계시면 됩니다.”
엘로아는 어이가 없었다.
그리고 화가 났다.
그 어이없는 답을 카루아의 목소리로 들으니 더더욱 화가 났다.
“나한테... 가만히 있으라고?”
그 상황을 보면서 지켜보기만 하라고?
어떠한 조치도 하지 말라고?
무너지는 세상을 방관하라고?
“맞습니다. 그저 지켜보고만 계시면 됩니다.”
다시 한 번 그 답을 듣자 엘로아의 분노는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엘로아의 기운이 땅을 울렸다.
그리고 자신 옆에 있는 벽을 강하게 쳤다.
쾅...!
벽에 금이 갔다.
그렇게 화가 나고 이가 갈렸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저 흰색 구를 부숴버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카루아가 남긴 편린이다.
카루아가 하지 않을 말이라고 해도 카루아의 부분이다.
그러니 분명 의도가 있을 거다.
분명...
엘로아는 카루아의 편린이 말하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으니까.
“...네 말대로 하겠다.”
엘로아는 그대로 그 방에서 나갔다.
한 번 더 그 목소리로 저 딱딱한 말투와 카루아 답지 않은 말들을 듣는다면 화를 참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엘로아는 방으로 돌아가 더 이상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중간계에 관련된 일도, 환생에 관련된 일도.
마계와 천계에 관련된 일 또한 하지 않았다.
그러자 신계를 포함한 모든 세계가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다.
중간계의 일이 없다고 하더라도 마계와 천계에서는 다른 일들이 일어났으니까.
그리고 마족들이 새로 태어난 붉은 머리의 마신을 따라 중간계를 학살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마족에 관한 복잡한 일들이 일어나버렸다.
일주일 동안 쓰러져 있을 때는 다른 신들이 서류들을 어떻게든 처리했지만, 엘로아가 없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다른 신들이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
엘로아는 그런 일을 알고 있어도 가만히 침대에 누워있었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그저 누워있었다.
하지만 누워만 있으면 아무 생각을 안하려 해도 자꾸 안 좋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녀가 선택한 방법은 잠을 자는 거였다.
잠에 들면 모든 일이 잊혀지는 것 같았으니까.
그렇게 하루 하루를 지내다가 생각지도 못한 존재가 자신의 방에 들어왔다.
“너 뭐하는 거지?”
그 존재는 에레보스였다.
대체 저 마신은 무슨 낯짝으로 내 방에 들어오는 거지?
엘로아는 그 얼굴을 보니 화가 차오르고 이가 갈렸지만, 담담하게 말했다.
“보다시피 누워있다.”
“그걸 묻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 텐데?”
“그럼 너는 뭐하고 있는 거지? 여기 있을 게 아니라 중간계를 멸망시키러 가야 할 것 아닌가.”
엘로아는 에레보스를 비웃듯 입꼬리를 올리고 비아냥거렸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거다. 그렇다 하더라도 다른 일은 왜 안 하는 거지?”
“다른 일?”
“내가 널 왜 만들었다고 생각하느냐. 환생에 관련된 일은 왜 안 하는 거지?”
그 말을 듣자 엘로아는 더 이상 표정 관리를 하기 힘들어졌다.
다른 신들이 물을 수는 있겠지만, 저 신 만큼은... 에레보스만큼은 물으면 안 되는 질문 아닌가.
“그걸 진심으로 묻는 건가?”
“그럼 내가 지금 너와 장난치러 온 거라 생각하느냐?”
엘로아는 침대에서 나와 자신의 집무실로 향했다.
에레보스는 그런 엘로아를 뒤따라 갔다.
“어디 가는 거지?”
엘로아는 에레보스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집무실로 들어갔다.
그러자 집무실에 있는 천사, 리시아가 보였다.
울상을 짓고 집무실에 앉아있던 리시아는 엘로아를 보자 표정이 밝아졌다.
“에...엘로아님!”
“일하려고 하는 건가?”
엘로아는 그런 에레보스와 리시아를 무시하고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자 투박하게 생긴 왕관이 보였다.
엘로아를 숭배하는 중간계의 존재들이 자신에게 바친 왕관이었다.
자신에게 고맙다고 바친 왕관...
“으으...!”
엘로아는 그 왕관을 잡고 자신의 기운을 넣기 시작했다.
“뭐 하는 거지?”
“엘로아님?”
왕관에 엘로아의 기운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마신의 기운.
에레보스가 자신에게 준 기운이었다.
환생을 관리하라고 자신에게 줬던 기운.
그 모든 기운을 꺼내 그 왕관에 넣기 시작했다.
밑바닥에 있는 기운마저 전부 끄집어냈다.
자신의 기운을 강제로 끄집어내서 넣자 엄청난 고통이 엘로아를 덮쳤다.
하지만 엘로아는 멈추지 않았다.
“나...나는 더 이상 끄윽...”
"엘로아님!!! 안됩니다!!!"
“뭐하는 것이냐!!!”
에레보스가 그 행동을 보고 놀라 엘로아의 어깨를 잡았다.
엘로아는 에레보스의 손을 뿌리치고 계속 그 행동을 이어나갔다.
“더 이상!!!!!!! 마신이 아니야!!!!!!”
그리고 그 모든 기운이 왕관에 들어가버렸다.
“허억...허억...”
엘로아는 식은 땀을 흘리며 숨을 내뱉었다.
“이게... 뭐하는...”
그리고 엘로아는 그 왕관을 에레보스에게 집어 던졌다.
왕관은 에레보스의 가슴팍에 맞고 바닥에 떨어졌다.
“그딴 일들... 네가 알아서 하라고.”
엘로아는 숨을 내쉬며 자신의 방에서 나갔다.
“[이동.]”
그리고 언령을 사용해 모습을 감췄다.
엘로아가 간 곳은 지옥이었다.
환생을 거치기 전에 벌을 받는 장소.
중간계의 이들에게 사용하려고 미리 만들어놨던 장소였다.
하지만, 아직 한 번도 사용해보지 못했다.
아직 체계가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아...”
엘로아는 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쪼그려 앉았다.
“카루아...”
그리고 이내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
“엘...엘로아...”
카루아는 쪼그려 앉아있는 엘로아를 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떨어진 왕관을 보고 있는 에레보스를 봤다.
엉망이 된 세계.
자신이 없어지자 모두가 망가지고 있었다.
카루아는 에레보스처럼 잠이 든 게 아니었다.
그저 정신체가 되었을 뿐.
정신체가 되자 세계를 둘러볼 수는 있되, 간섭할 수는 없었다.
자신이 만든 미카엘과 가브리엘이 세상에 도움을 주고는 있었지만, 에레보스가 깨어나자 그조차 의미가 없어졌다.
“미안해... 나 때문이야...”
카루아는 자책하기 시작했다.
자신 때문에 중간계도, 엘로아도, 에레보스도 망가지고 있었다.
멍청한 자신 때문에...
카루아는 어느 정도 돌아온 자신의 힘을 바라봤다.
이 힘으로 자신이 다시 몸을 만들어 돌아갈 수는 없었다.
몸을 만들어 자신의 정신을 넣어봤자 몸이 감당하지 못할 테니까.
운이 좋아 감당한다고 하더라도 힘이 조금 돌아오면 몸이 힘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자신은 정신체로 변해버릴 거다.
카루아는 다른 방법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지금 자신이 존재하는 곳은 차원의 틈이었다.
“다른 것보다... 에레보스를 막는 게 먼저야...”
에레보스가 중간계를 멸망시킨다는 계획을 멈추기만 한다면...
하지만 세상에 간섭할 수 없는 카루아가 에레보스를 막을 방법은 없었다.
직접적으로는 말이다.
카루아는 결심했다.
“이 공간에... 에레보스를 끌어들인다.”
자신이 저 세계로 갈 수 없다면 에레보스를 이 공간에 끌어들이면 된다.
그럼 대화할 시간이 있을 테니 에레보스를 설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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