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화 〉 회사 계단에서 하자고? (1)
* * *
"저도 같이 가요."
"네?"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 벌어졌다.
또다시 수아와 함께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 날 아침. 난 계획한 대로 리나의 미팅 날짜인 오늘 회사에 가기 위해 수아의 집을 나설 준비를 마쳤다.
근데 계속 조용히 날 지켜보던 수아가 나가기 직전인 지금 회사에 따라가겠다고 말하고 있다.
"어... 수아 씨? 저 지금 출근 하는 거에요."
"알아요. 저도 같이 갈 거예요."
"아니, 회사에서 볼 일도 없는 사람이 굳이 따라와서 뭘 하려고요."
"저도 그 회사 소속인데. 가면 안 될 이유도 없잖아요?"
수아는 굳은 의지를 지닌 표정으로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 애가 대체 왜 이러는 거야. 평소 같았으면 전혀 상관이 없었겠지만, 오늘 같은 경우는 확실히 문제가 있다. 일이 이렇게 흘러가면 안 되는데.
오늘은 리나에게 새로운 댓글 명령을 작성해서 그녀를 한층 더 내게 가까워지게 만들어야 하는 날이다. 그러나 수아가 회사에 날 따라오게 된다면 적어도 회사 밖으로 나가는 순간은 반드시 내 옆에 붙어있을 텐데. 그렇게 될 경우엔 내가 리나를 댓글 명령으로 조종할 틈이 없어지게 된다.
물론 수아가 일하려고 출근한 나를 직장 내에서도 새끼 오리 마냥 따라다니진 않겠지만, 내가 지금 리나에게 작성하려고 구상해놓은 댓글 명령은 사실상 회사 밖에서 리나를 조종하게 되어있다.
일단 할 수 있는 만큼은 수아를 설득해야 한다.
"우리 어차피 할 얘기 남아있잖아요? 저 회사에 그렇게 오래 있을 계획은 없으니깐, 그냥 집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싫어요."
아! 애는 대체 왜 이러냐....
수아는 절대 생각을 바꿀 마음이 없어 보였다. 아, 일이 점점 꼬인다. 뉴투버가 MCN에서 미팅을 하는 경우는 사실 많지 않다. 뭐, 많이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일반적인 경우를 생각해보자면 대부분 뉴투버들은 독자적인 시스템들을 갖추고 있다. 그러니 결국 미팅 같은 걸 그렇게 자주 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이 말이 무슨 뜻이냐. 리나의 미팅은 오늘이 마지막이란 뜻이다. 당연히 앞으로도 미팅을 하긴 하겠지만, 적어도 정해져 있는 일정 속에선 오늘이 마지막 미팅이고, 앞으로 정해져 있는 미팅은 없다.
그러니 오늘이 지나면 언제 또 이렇게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리나를 조종할 기회가 생길지 모른다는 말이다.
후... 그렇다고 수아에게 막무가내로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회사가 큰 건물이긴 하지만, 아무리 커도 결국 실내, 그 안에서 수아를 따돌린다 쳐도 리나를 조종하기엔 아직 문제와 변수가 너무 많다. 사실상 방법은 퇴근하는 길에 수아를 회사에 버려두고 혼자 나와야 한다는 것인데.... 가능할 리가 없지.
심지어 리나를 조종하는 게 아니라면 애초에 회사에 갈 이유도 없다. 그것 때문에 굳이 출근하는 건데. 수아를 회사에 데려가면 리나를 조종을 못 하니 출근을 할 이유가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없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같이 가자고요? 그럼 그냥 안 갈래요.` 이 지랄을 할 수도 없으니....
씨발, 댓글 명령부터 방식까지 거의 완벽하게 정해놨었는데.
성급하게 굴다 일을 망치는 것보단 후일을 기약하는 편이 좋다.
"알겠어요. 같이 가죠."
수아의 표정이 살짝 밝아졌다. 뭘 알고 이러는 거야. 아니면 그냥 심심해서 따라오겠다는 거야.
저번에 회사 근처에서 수아의 집으로 올 때도 느꼈지만, 길이 뻥뻥 뚫려있어서 역시 금방 도착한다.
수아와 나는 회사에 도착해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기다리고 있었다. 내 옆에 서 있는 수아는 블랙 투피스를 입고 있었다. 허벅지가 훤히 드러나는 짧은 길이의 하의와 은은하게 그녀의 상체의 달라붙어 라인을 드러내는 상의는 짧은 기장으로 인해 수아의 흰 허리를 살짝 내보였다.
나도 모르게 입에 군침이 돌았다. 난 수아의 하체 쪽으로 손을 뻗어 그녀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탁' 쳤다.
"꺄아... 뭐해요!"
수아는 홍조를 띠며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봤고, 난 별다른 대답은 하지 않고 그냥 씨익 웃었다.
이따 저녁에 또 따먹어야겠구만.
잠시 후, 뒤에서 묘한 인기척이 느껴지더니 이내 누군가 나한테 말을 걸어왔다.
아 씨발, 누군진 모르겠지만, 방금 우리 모습은 제발 못 봤어라.
"시온아?"
갑작스럽게 내 이름이 들리자 꽤나 당황했지만, 난 자연스럽게 뒤를 돌아봤다.
뒤를 돌아보니 흰 셔츠와 길이가 무릎까지 오는 검은 색 치마, 전형적인 오피스룩을 입고 금발 머리를 올림머리로 묶고 있는 서하은이 날 쳐다보고 있었다.
후, 씨발 서하은이면 봤어도 상관없지. 좆 될뻔 했네.
순간 나도 모르게 누나라고 부를 뻔했다. 옆에 수아가 있지. 수아는 서하은과 내 관계를 전혀 모른다. 말실수 하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물론 서하은 너도 말실수하면 안 된다. 난 별다른 것 없는 일상처럼 태연하게 말했다.
"일찍 출근하셨네요."
내가 자연스럽게 서하은에게 말을 건네는 모습을 보고 수아도 서하은에게 고개를 숙이며 묵례했다.
"응. 근데 둘은 같이 온 거야?"
서하은은 단순히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질문하고 있었고, 난 최대한 그녀를 진짜 내가 소속된 회사에 대표님이라고 생각하며 대답했다.
"아니요. 집 근처 카페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수아 씨도 회사에 들러야 한다길래 함께 왔습니다."
수아는 당황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고, 서하은은 상황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됐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아~ 그럼 시온이는 저번에 이야기했던 일 보러 온 거지?"
난 수아는 눈치채지 못하게 살짝 인상을 쓰며 서하은에게 눈으로 경고했다.
쓸데없는 얘기 하지 마. 굳이 안 해도 될 얘기를 하고 있어.
"네. 오늘이 마지막 날이니깐, 마무리 지어야죠."
내 대답을 마지막으로 불편한 침묵이 한동안 유지되고 있었고, 그 침묵은 마침내 엘리베이터가 도착해 모두 탑승한 후에도 유지되고 있었다.
근데 수아 얘는 아무리 고용 관계는 아니라 해도 본인이 소속된 회사 대표를 만났는데. 말 한마디를 안 하네.
난 엘리베이터에 타서 곧바로 28층 버튼을 눌렀고, 뒤로 물러섰다. 출근 시간이었지만, 엘리베이터에 탑승한 사람은 우리 셋뿐이었다. 난 정중앙에 서 있었고, 내 양옆으로는 수아와 서하은이 서 있었다.
수아는 키가 작은 탓에 그렇게 내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나보단 작아도 여성들 중에선 키가 큰 편인 서하은은 눈길을 옆으로 살짝 돌리면 그녀의 표정이 내게 보였다.
서하은은 묘하게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저거 은근히 건방지네. 주인님은 이렇게 조마조마한데 지는 뭐가 좋아서 웃고 있는 거야.
잠깐만, 리나의 미팅 날은 오늘이 마지막인 건 어쩔 수 없지만, 어차피 난 오늘 회사에 도착했고, 서하은에게 도움을 받으면 오늘이 아니더라도 자연스럽게 리나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이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수아를 곁에 두고 리나를 따로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지만, 수아는 서하은과 내 관계를 전혀 모르고 있다. 내가 서하은을 따로 만나러 간다고 해도 직장 상사를 만나러 가는 것이니 크게 신경 쓰지 않겠지.
"대표님, 오전 중에 시간 괜찮으시면 얘기 좀 하시죠."
흠, 이건 아무리 봐도 직원이 대표한테 할 수 있는 말투가 아닌데.... 근데 뭐, 어쩌냐 예전 직장에서도 대표랑은 한마디도 말을 나눠본 적이 없다. 그래도 규모가 그렇게 큰 회사도 아니고, 나름 자유로운 분위기를 가진 회사니깐 수아도 크게 이질감을 느끼진 못하겠지.
그리고 결정적으로 수아는 이제 20살짜리 여자애인데. 난 대체 뭔 걱정을 하는 거냐....
"네~ 그러시죠. 남시온 컨설턴트님."
서하은은 날 쳐다보고 묘하게 신뢰가 느껴지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수아는 그 모습을 보더니, 서하은에겐 보이지 않도록 내 검지를 꼬옥 붙잡았다.
수아를 살짝 내려다보니 수아는 살짝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지. 질투하는 건가?
어쨌든 이 불편한 시간도 결국 흘러갔고, 우리는 28층에 도착했다.
서하은은 우리에게 가벼운 눈인사를 건넨 다음 자신 사무실을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자, 이제 속전속결로 빠르게 해결한다. 어차피 수아와 함께 회사에 온 이상 사실상 리나를 조종하는 건 실패 했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빠르게 내 볼일을 보고 이 불편한 곳에서 얼른 빠져나가는 게 베스트지. 방법은 이렇다. 우선 수아를 잠시 떼어놔야 한다. 껍데기 뿐이지만, 일단 난 이 회사의 직원이다. 적어도 수아는 그렇게 알고 있으니 일을 하려는 날 방해하진 않을 것이다.
"수아 씨, 전 자료 좀 챙기러 가야 하니깐. 쉬고 있어요."
"저 매니저님 만나러 갈 거예요."
수아는 계속해서 자신을 애 취급하는 내게 불쾌함을 느꼈는지 살짝 공격적인 말투로 말했다. 하긴, 애가 날 골탕 먹이려고 회사까지 따라온 것도 아닐 텐데. 내가 너무 예민하게 굴고 있었다.
난 걸어가는 수아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난 그녀를 따라잡기 위해 걸음 속도를 조금 높였고, 수아를 처음 만났던 텅 빈 복도는 여전히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어느새 난 수아의 옆에 나란히 서게 됐고, 내 태도에 삐진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수아의 손을 살짝 붙잡았다.
"저도 같이 오고 싶었으니깐. 기분 풀어요."
수아는 내 눈도 쳐다보고 있지 않았지만, 표정은 분명히 풀리고 있었다. 속에 뭐가 든 지는 도저히 모르겠는데. 감정은 또 묘하게 알기 쉽단 말이지.
난 저번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붙잡았던 수아의 손을 얼른 놨다. 바보도 아니고, 똑같은 실수를 두 번씩 할 필요는 없지.
그러나 그게 내 뜻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내가 손을 놓자 오히려 수아는 내 손을 다시 붙잡았다.
그녀의 희고 작은 손이 내 손을 반도 감싸지 못한 채, 마치 내 손에 매달려 있는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흠, 너무 귀엽고 좋긴 하지만, 안 되는 건 안 된다. 저번과 같은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심지어 그 당사자가 지금 나와 손을 잡고 있는 상대라니. 참 기구하다.
수아가 속상하지 않도록 천천히 부드럽게 손을 놓아....
으아악!!!
입으로 비명이 나올 뻔할 걸 겨우 참아냈다. 대체 이게 뭔 좆같은 경우냐.
복도 코너에서 눈앞에 리나가 나타났다.
리나는 굉장히 놀란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거 데자뷰인가? 그럴 리가 있겠냐. 씨발 손잡고 있는 여자가 바뀌었는데.
심지어 저번엔 복도 코너에서 꽤 떨어진 곳에서 수아를 마주쳤지만, 이번엔 코너 바로 앞에서 리나를 마주친 탓에 그녀의 놀란 표정을 거의 눈앞에서 정확하게 볼 수 있었다.
물론 내가 짓고 있는 엄청나게 당황한 표정도 리나가 보고 있겠지.
심지어 서로의 길을 막게 된 우리는 모두 제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난 곧바로 수아의 손을 놓으려 했지만, 수아는 내 손을 더욱더 꽉 붙잡았다. 당황하는 나와 리나랑은 다르게 수아는 차가운 시선으로 리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리나는 꽤나 충격을 받았는지. 마치 얼어있는 모습이었지만, 곧 수아의 시선을 느끼고 표정을 고친 뒤 날 바라보며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저번이랑은 상황이 반대네요?"
이걸 뭐라 대답하냐. 딱히 할 말도 없다. 난 그냥 리나의 시선을 회피하며 말을 무시했다.
"대답 안 하세요? 원래 아무 여자 손이나 붙잡고 다니시나 봐요?"
엄청 공격적이구만. 날 그런 이미지로 보다니, 난 고작 그 정도 수준이 아니라 예쁜 여자만 따먹고 다니거든? 리나는 계속해서 자신을 무시하는 나를 이제는 공격적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하... 어쩔 수 없지. 이럴 때 쓸데없이 떠들면 오히려 마이너스 요소긴 하지만, 방법이 없으니 대충 둘러대서 보내야겠다.
그러나 나보다 수아가 한발 앞섰다.
"저기, 우리 지나가야 하니깐. 좀 비켜 줄래?"
수아는 여전히 차가운 표정으로 리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리나는 잠시 수아를 노려보더니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푹 숙이고, 내 옆으로 지나갔다.
물론 얌전히 지나가진 않았고, 온 힘을 다해서 내 팔꿈치를 밀치며 지나갔다. 은근히 힘이 좋네.
후, 이제 어쩌지 이거 그냥 존나 조진 거 같은데. 상황이 너무 끔찍해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 순간 내 손을 붙잡고 있는 수아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게 내게 전해져왔다.
난 곧바로 수아의 얼굴을 확인했다. 수아는 조금 전 차가운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평정심을 잃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괜찮아요?"
난 살짝 허리를 숙여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수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 수아는 곧바로 내 손을 잡아끌며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 뭐 하는 거야.
수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진 모르겠지만, 난 순순히 그녀에게 끌려가 줬고, 수아는 계단실 문을 거칠게 열며 나와 함께 들어갔다.
문은 자동으로 닫혔고, 수아는 날 벽으로 강하게 밀어붙이며 말했다.
"여기서 당장 해줘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