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화 〉 리나와 수아 (1)
* * *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던 리나는 상체 라인을 전부 드러내는 흰색 반팔 위로 검은색 니트 뷔스티에를 입고 있었다. 그 밑으론 청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꽤나 귀여워 보이는 옷차림이지만, 워낙 훌륭한 미드 사이즈와 힙업 된 엉덩이는 그녀에게서 관능미를 뿜어내고 있었다.
리나는 나와 눈이 마주친 뒤 못 볼 걸 봤다는 듯 고개를 확 돌렸다.
야, 너무 그렇게 노골적으로 기분 나쁘다는 듯이 굴면 나도 상처받거든?
그나저나, 생각보다 문제가 크다. 기존에 계획 했던 대로 라면 오늘은 리나와 친밀감을 꽤나 높게 형성했을 터인데. 여러 가지 일이 꼬이면서 결국 이 모양이 됐다.
오히려 더 안 좋은 이미지가 돼 버리다니. 댓글 명령을 사용하지 않고는 이걸 해결할 방법이 마땅히 떠오르지 않는다. 뭐, 반대로 생각하면 리나를 조종하게 될 경우엔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리나는 최대한 조종을 영향을 줄여서 내게 빠지게 만들기로 이미 계획했기 때문에 조종을 가볍게 남발할 생각은 없다. 어차피 조진 이미지면 그냥 궁금했던 거나 막 질러보자.
"사람 면전에 두고 너무 기분 나쁜 티를 팍팍 내는 거 아닙니까?"
뒤에서 들려오는 내 목소리에 리나는 고개를 돌렸고, 그 표정은 마치 `내가 대체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싶은 표정이었다.
한눈에 봐도 엄청나게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리나는 내게 뭐라고 대꾸할 생각도 못 하고 있는 듯했고, 그런 그녀에게 난 계속해서 말했다.
"전 리나 씨가 뭘 그렇게 기분 나빠 하시는지 잘 모르겠네요. 아니면 뭐, 질투하는 거예요?"
리나는 언성을 높이며 대답했다.
"아니거든요!!! 진짜 씨... 어이가 없네. 말 걸지 마세요."
와, 욕하겠는데?
"그런 태도가 이해 안 간다는 겁니다. 애초에 그쪽 도와주려고 수아 씨랑 몇 번 얼굴 본 건데. 대체 뭐가 그렇게 불만입니까?"
"전 그 쪽한테 도움받을 일 없거든요? 그쪽이 수아랑 만난 게 저랑 무슨 상관인데요."
리나는 다시 거칠게 뒤돌며 내게 등을 보였다.
얘는 우리가 회사에서 손잡고 다녔던 게 문제가 될 거라는 생각은 전혀 안 하는 건가...? 내가 이걸 설명하는 것도 묘하게 구차하단 말이지.
슬슬 짜증 나네.
"뭐가 그렇게 불만입니까? 애초에 수아랑 그냥 얼굴만 아는 사이가 맞긴 한 거예요?"
날 다시 돌아본 리나의 얼굴엔 이제 짜증이 가득했다. 그녀는 내게 천천히 걸어오며 말했다.
"야? 니 나 알아? 뭔데 의심 질이야."
이젠 반말까지 하네. 너무 열 내는 거 아니야? 그럼 나도 반말해야지.
"너? 잘 알지. 묻는 거에 대답이나 해. 저번엔 서로 얼굴만 아는 사이라더니. 아무리 봐도 아닌 거 같은데?"
"별 미친... 차수아가 얘기해 줬냐? 그래서 네가 뭐 어쩔 건데."
얘기해 줬냐고? 그럴 리가. 아직 하나도 들은 건 없다. 근데 상황이 생각보다 잘 풀렸다. 이렇게까지 된 이상 완벽하게 들은 척을 해서 리나의 입에서도 정보를 끄집어낸다.
난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어. 수아한테 다 들었는데. 딱히 내가 뭘 어쩔 생각은 없고, 네가 왜 그랬는지 좀 궁금해서. 너 왜 그랬던 거야?"
"하! 뭔 개소리를 듣고 온 건지는 모르겠는데. 난 걔랑 연습생 생활 잠깐 같이 한 게 끝이거든? 그거 외엔 아무것도 없으니깐. 이상한 소리 하지 마."
잠깐만, 진짜 그게 끝이라고? 정말 리나 말대로 둘은 연습생 생활을 잠시 같이 한 게 끝인 사이라면 수아가 리나를 싫어할 이유가 딱히 있나?
일단 수아 얘기는 전혀 듣지 못한 상태이니만큼 한쪽 말을 신뢰할 필요는 없다.
"사실 나 수아한테 들은 거 아무것도 없어. 구라 친 거야. 연습생 생활을 같이했다고? 그럼 너 수아 괴롭혔냐?"
리나의 얼굴이 푸르락누르락해졌다.
"미친! 개소리야!!!"
아오, 귀 아파.
"아니면 아닌 거지. 뭔 소리를 지르고 난리야."
"난 사람 괴롭히고 그딴 짓거리 안 하거든? 말 함부로 하지 마."
리나는 말 그대로 정말 개정색을 하고 있었다. 슬슬 나도 입을 조심해야겠는데. 이 이상으로 막 찔러보다간 진짜 리나의 기억을 통째로 날려야 할 수도 있겠다.
"그래. 내가 말실수했어. 미안하다."
반응을 보면 정말 수아에게 무슨 나쁜 짓을 한 거 같진 않다. 그럼 원인은 수아한테 있다는 건데. 뭐, 어차피 곧 듣게 될 테니 여기서 이러고 있을 필요는 없지.
"그리고 그쪽, 회사 직원이 소속 뉴투버한테 반말하고, 함부로 의심하고, 그래도 되는 거야?"
"반말은 네가 먼저 했다. 어이가 없네."
리나는 인상을 팍 썼다. 그러니깐 좋게, 좋게 좀 굴지 그랬어.
"그리고, 그쪽은 차수아랑 무슨 사이길래. 나한테 그딴 식으로 구는 거야. 남자친구야?"
"네가 신경 쓸 거 없다. 계속 그런 태도로 굴더니 나한테 뭐라도 물어보면 내가 대답이라도 해줄 것 같았어?"
인상을 쓰며 잠시 고개를 돌렸다. 다시 리나의 얼굴을 바라보니 그녀의 눈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진짜... 짜증나게...."
잠시 정적이 흘렀고, 이내 엘리베이터가 28층에 도착했다.
리나는 손등으로 흐르는 눈물을 훔치며 엘리베이터에 탔다.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이 딱히 없다는 걸 깨달은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닫히는 문 사이로 그녀에게 뭐라도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도저히 할 말이 없었거든.
그러니깐, 결국 정리해 보자면 리나와 수아는 연습생을 같이 했던 사이였고, 적어도 리나에 입장에선 수아와 특별한 트러블은 없었다는 얘기다.
결과적으론 내 이미지만 존나 조져놨다. 뭐, 여차하면 댓글 명령으로 조종해 버리면 되니깐. 실패했다고 할 수는 없지.
내일 서하은이 리나와 자연스럽게 만나도록 도와줄 사람을 소개해준다고 했으니 일단 차분하게 기다려보자.
우선 지금은 수아를 만나러 가야 한다. 이제는 내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다.
수아의 집 앞에 차를 세워놓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얼마 안 돼서 두리번거리는 수아가 내 눈에 들어왔다. 이내 수아는 내 차를 발견하고 천천히 걸어와 조수석 문을 열고 시트에 앉았다.
수아는 시무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난 최대한 부드러운 어투로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그렇게 가 버리면 어떡해요. 걱정했잖아요."
"미안해요...."
수아의 표정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뭐, 지금 중요한 건 이 얘기가 아니니깐. 굳이 더 이상 말할 필요 없지.
"사과 안 해도 괜찮아요. 이해하니깐. 오늘 저한테 해주기로 한 이야기 기억하죠?"
"네."
수아는 무언가 다짐한 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 나갔다.
"저한텐 너무 부끄럽고, 민망한 이야기니깐. 절대 듣고 나서 저 미워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요."
"절대로, 죽어도 그럴 일 없으니깐, 얘기해봐요."
차 안에서 한참 동안 수아와 대화를 나눴다.
리나가 말했던 것처럼 두 사람은 같은 회사에서 연습생 시절을 보냈고, 둘 사이에 특별할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문제가 있었다면, 수아가 리나를 질투했다는 것, 내성적인 수아와 다르게 리나는 출중한 실력으로 주변 사람들을 이끌며 많은 사랑을 받았고, 수아는 늘 그런 리나가 부러웠다고 했다.
수아도 처음 회사에 들어왔을 당시엔 매우 많은 주목을 받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이 주목한 건 단지 자신의 외모뿐이란 걸 깨닫고, 더욱더 자괴감에 빠지며 연습생을 그만뒀다고 한다.
아마 리나를 질투하며 느꼈던 열등감이 생각보다 컸던 것 같다.
그 뒤로부터 SNS를 볼 때마다 활약하고 있는 리나를 보면 자신도 모르게 시기와 질투를 하고 있었고, 리나에게 느끼는 열등감은 점점 커졌다고 한다. 그렇게 뉴투브를 시작하고 어느새 리나와 같은 회사 소속까지 된 것이다.
흠, 생각보다 진짜 별일 아니잖아? 그래도 수아의 입장에선 가볍게 생각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겠지. 사람은 생각보다 사소한 일들로 망가지고 상처받게 되니깐.
나도 사실 수아가 리나를 질투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긴 했었다. 그러나 적어도 내 눈앞에 보이는 수아의 성격도 그렇고, 외적인 미모를 굳이 나누자면 수아 쪽이 리나보다 더 뛰어나기 때문에 수아가 딱히 질투를 할 리는 없겠지. 하고 넘어갔었다.
그러나 결국 내 생각은 틀렸고, 수아에겐 리나보다 뛰어난 외모마저 컴플렉스였던 거지.
얘기를 끝마친 수아는 생각보다 덤덤해 보였다. 누군가에게 시원하게 속마음을 털어놓으니 오히려 더 편해질 걸 수도 있다.
난 수아를 위로할 생각은 딱히 없었지만, 그래도 다정한 말을 건넸다.
"수아 씨가 굳이 누군가와 자신을 비교할 필요는 없어요. 남들이 가지지 못한 많은 매력이 있으니깐."
수아는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됐어요.... 그래도 고마워요. 얘기하니깐 속 편하긴 하네요."
"솔직하게 얘기해줘서 저도 고마워요. 그럼, 전 오늘은 이만 가볼게요. 내일부터는 바빠서요."
내일부터는 확실히 바빠져야지. 오늘 반쯤 조져놓은 리나와의 관계를 다시 회복시켜야 한다.
수아는 아쉽다는 표정으로 내 손을 붙잡았다.
"아직 일주일 안 지났는데...."
"그러니깐, 다음에 또 봐요. 그 일주일을 좀 늘려보죠."
수아의 표정이 밝아졌다.
"정말요?"
"네. 전 수아 씨랑 지냈던 며칠 동안 정말 즐거웠거든요."
즐겁진 정말 여러모로 즐거웠지. 수아를 절대 이대로 놔줄 생각은 없다.
수아는 고개를 푹 숙이고 부끄러워하며 내 손과 팔을 잡아당겼다. 난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끌려갔고, 수아는 내 볼에 입을 맞췄다.
"연락할게요...."
난 돌아서 문을 열고 나가려는 수아를 다시 붙잡아 내 쪽으로 확 잡아당겨 그녀의 입술과 내 입술이 서로 맞닿게 했다.
"조심히 들어가요."
수아는 홍조를 띠며 고개를 살짝 숙이고 차 문을 열고 나갔다. 나도 그녀를 따라 차에서 나왔고, 난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천천히 걸어가던 수아는 이내 뒤를 돌아 날 바라봤고, 나와 눈이 마주치자 배시시 웃었다. 난 그런 그녀에게 손을 가볍게 흔들어줬다.
진짜 귀엽다. 수아는 이제 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난 다시 차에 타서 벨트를 매고 집으로 향할 준비를 했다.
드디어 집에 간다. 이게 대체 얼마 만이냐. 내일 서하은이 소개해준다는 사람을 만나러 또 회사에 가야 하긴 하지만....
어쨌든 난 집으로 출발했고, 금세 도착해 씻고 침대에 대자로 뻗어버렸다.
"그래서 소개해준다는 사람은 누구예요?"
아침 댓바람부터 회사에 도착해서 서하은의 사무실로 곧바로 왔다. 아침부터 너무 정신없이 움직였더니 머리가 얼얼한 것 같다.
"곧 도착할 거야. 그 전에 설명부터 해줄게. 시온이 폴 댄스라고 알아?"
"네. 알죠. 그, 돌아가는 봉 잡고 하는 운동이잖아요. 뉴투브에서 누나가 하는 것도 봤어요."
"헙... 진짜? 시온이... 누나 완전 감동이야아...."
서하은은 내게 양팔을 벌리고 다가오고 있었다.
"그만하고 일단 설명해줘요!"
"힝, 이번에 리나 뉴투브 채널에 게스트가 출현하거든. 그 사람을 소개해줄 거야."
"그럼 그 사람이 폴 댄스 뉴투버 겠네요?"
"응. 그렇지. 그리고 시온이는 내 대리로 그 자리에 따라가서 현장 감독을 한다 생각하면 돼."
"현장 감독이요...? 너무 거창한 거 아닙니까?"
내 얼떨떨한 표정을 보고 서하은은 웃고 있었다.
"괜찮아. 내가 대표인데 뭘, 신경 쓸 거 없어."
멋지다...! 나도 해보고 싶은 말이야. 언젠가 해봐야겠다.
"그럼 그 사람은 언제 도착하는데요?"
"곧 올 거야. 그전까지 나 좀 예뻐해 주면 안돼?"
"크흠, 다음에요. 곧 온다는데 시간이 짧으면 아쉽잖아요."
핑계 한번 잘 골랐다. 서하은한테 이게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럼 늦게 오라고 할까?"
"아니에요! 됐어요!"
서하은은 해맑게 웃고 있었다. 어디 주인님한테 장난을 쳐. 그 사람 오기 전까지 엉덩이나 몇 대 때리고 있어야겠다.
"쓰읍, 이리와요. 엉덩이 대."
"꺄아~"
내가 손바닥을 내보이며 서하은에게 다가가자 그녀는 작은 비명을 지르며 무섭다는 듯 연기를 했다. 그러던 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네. 들어오세요."
서하은의 목소리를 듣고 한 여자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키는 서하은과 비슷했고, 나이는 서하은보다 조금 많아 보였다. 한 30대 초반 정도로 느껴졌는데. 굉장히 큰 눈과 오뚝한 콧대 그리고 날카로운 턱선을 가진 그녀는 다른 사람보다 더 고급스러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고, 질끈 묶은 포니테일은 그녀의 갈색 머리 채를 붙잡고 싶어지게 만드는 욕구를 자극했다.
그녀는 회색 레깅스와 몸에 딱 달라붙는 검은색 스포츠웨어 반팔을 입고 있었다. 아까 설명 들었던 만큼 난이도 높은 운동을 해온 사람이어서 그런지 굉장히 뛰어난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매끄러운 라인들 사이에서 그녀의 잔근육들이 조금씩 느껴졌다.
"우리 회사 소속 뉴투버인 로렌님이셔. 로렌님 이쪽은 남시온 컨설턴트 입니다. 서로 인사 나누세요."
"안녕하세요. 남시온 입니다."
"네. 반갑습니다."
난 그녀에게 어색한 인사를 했고, 그녀는 묘하게 연륜이 넘치는 모습으로 내 인사를 받아주었다.
로렌? 닉네임이겠지. 그녀와 눈을 마주치고 있으니 마음속에서 묘한 감정이 올라왔다. 저 눈빛, 저거 완전 폭스인데....
그 순간 로렌의 스마트폰이 벨소리를 울렸다,
"잠시만요."
그녀는 우리에게 양해를 구하고 뒤돌아 전화를 받았고, 난 조심스럽게 옆에 있는 서하은에게 귓속말을 건넸다.
"빈 회의실 있으면 알려줘요."
"응. 탕비실 바로 옆 회의실 쓰면 돼. 근데 로렌님 애도 있는 유부녀야. 괜찮아?"
오히려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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