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화 〉 입보지 서하은 (1)
* * *
시끄러운 전화벨 소리가 날 깨웠다.
눈을 뜨니 커튼 사이로 따사로운 햇볕이 들어오고 있었고, 침대에 누운 채 팔을 휘저으며 여전히 시끄럽게 벨 소리를 울리고 있는 스마트폰을 찾아 눈을 찌푸리며 이 소음의 원인이 누구인지 확인했다.
누가 아침부터 이렇게 전화질이야.
흐음, 수아잖아. 나 생각보다 오래 잤나?
"여보세요."
"이제 일어났어요? 빨리 준비하고 내려와요."
방금 막 잠에서 깬 참이라 내 목소리를 푹 잠겨있었고, 단번에 그 사실을 알아챈 수아는 목소리는 다정했지만, 묘하게 공격적이었다.
"지금 몇 신데…?"
"곧 점심이에요."
"와….? 씨, 얼른 내려갈게."
생각보다 오래 잔 수준이 아니라 개꿀잠 자고 있었네.
다행히도 잠들기 전에 샤워도 하고 집 갈 준비 미리 다 끝내놔서 오래 걸릴 건 없다.
얼른 세수하고 이 닦고 내려가야겠네.
대충 준비를 끝내고 짐을 챙겨서 내려오니 이미 사람들이 꽤 빠져 있는 게 느껴졌고, 넓은 거실 한편 소파에 앉아 날 기다리고 있는 여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왜 이렇게 늦어!!!"
"리나야. 이렇게 말하면 절대 안 믿겠지만, 사실 오늘 내가 제일 먼저 일어나서 준비까지 다 해놨었단다."
날 보자마자 리나가 성을 냈고, 그 옆에 서하은이 실실거리며 웃고 있었다.
"근데 왜 이렇게 늦게 내려오는데!"
"너무 일찍 일어나서 다시 실컷 잤거든."
"아까 통화할 때 보니깐, 그럴 거 같았어요. 일단 얼른 출발하죠."
어느새 짐을 챙겨서 내 옆에 선 수아가 끼어들었고, 입을 다문 리나는 여전히 성이 난 표정으로 이젠 수아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래~ 더 복잡해지기 전에 빨리 가자."
난 조심스럽게 말을 돌리고 리나의 눈치를 살피며 주변을 확인했다.
흠, 이틀 동안 같이 술 마신 사람들은 다들 먼저 간 건가? 그래도 나름 즐겁게 놀았는데. 헤어질 때 인사도 못 해서 살짝 아쉽네.
그렇게 주변을 둘러보고 있으니. 이내 내 시야에 첫날 따먹었던 한서연이 들어왔다.
처음 봤을 때 양 갈래 머리를 하고 있던 한서연은 머리를 풀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수수한 느낌이 강해서 의외였다. 여자의 이미지는 헤어스타일이 차지하는 비중이 생각보다 크구만.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아주 밝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뭐, 나에 대한 기억을 전부 지웠으니 인상을 쓰고 있었어도 내가 신경 쓸 건 없지만.
문제는 나중에 한서연이 누군가와 섹스를 하게 된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내게 처녀을 상실했으니 꽤나 당황하게 될 것이다. 처녀로서의 증명이 없을 테니.
뭐, 그래도 첫 경험 때 피가 안 나오는 경우도 생각보다 많다고 하니깐, 그 정도로 생각해주면 내 마음이 편하겠다.
그나저나, 인상을 쓰고 있는 건 저쪽이네.
시선을 돌려 계단을 바라보니 계단을 내려오며 굉장히 컨디션이 안 좋아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는 유지민이 보였다.
근데 느낌상 저건 아무리 봐도 숙취 때문에 고통스러워 보이는 모습이네. 심지어 워낙 많은 사람들이 어제 과음을 해서 숙취에 찌들어 있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뭐, 한서연과 마찬가지로 유지민도 나에 대한 기억을 전부 지워놨으니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단지 내게 조종당했던 그녀들이 무탈하게 잘 있는지 궁금할 뿐이다.
흐음, 이제 여기서 더 볼 사람은 없는 거 같은데. 최서진은 어디 있지?
리나와 수아가 앞장서서 건물 밖으로 나가는 사이 난 서하은에게 조심스럽게 귓속말을 건넸다.
"최서진은 어디 있어?"
"조금 전에 밖으로 나갔으니깐, 아직 주차장에 있을 거야."
그럼 얼른 나가서 최서진의 상태까지 확인하고 출발해야겠다.
난 잠시 바닥에 내려놨던 가방을 들어 올렸고, 서하은은 앞장서서 건물을 빠져나갔다.
현관을 지나 밖으로 나오니 2박 3일 동안 즐겁게 보냈던 공간들이 텅 비어있자 조금 공허해 지는듯한 그런 느낌이 들었다.
특히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이 있던 수영장이 텅 비어있는 모습이 제일 낯설다. 저녁 시간만 되면 파티를 벌이던 야외 테이블을 펜션 관계자들이 치우고 있는 모습도 어제 오전에 봤던 것과는 느낌이 꽤나 다르네.
뭐, 어쨌든 집에 가는 건 좋다. 이틀 동안 너무 좆질을 해서 몸에 힘이 없다. 이 말이야.
그렇게 앞에 서 걸어가는 리나와 수아를 바라보며 서하은과 나란히 걸었고, 어느새 주차장에 도착했다.
주차되어 있는 내 차로 이동하기 위해 안쪽으로 들어가는데 코너를 지나니 눈앞에 흰색 718 박스터 GTS가 있었고, 여자 한 명이 트렁크에 짐을 싣고 있었다.
"어! 시온 씨 살아 있었네요?"
트렁크에 짐을 싣던 여자가 인기척을 느끼고 뒤돌아 날 발견한 뒤 해맑게 인사를 건넸다.
이다혜잖아? 그럼 최서진도 이 근처에 있겠네.
그나저나, 저 여자는 만날 때마다 살아있었냐고 물어보고 있냐.
"그거 뭐, 제 전용 인사입니까?"
"아니~ 어제는 진짜 시온 씨 죽은 줄 알았어요. 완전 시체 같던데."
"나랑 적당히 마시기로 약속했잖아."
옆에서 리나가 날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크흠, 딱히 할 말이 없네. 그렇게 눈치를 보며 리나의 시선을 피하고 있는데. 눈앞에 있는 이다혜의 차 조수석 창문이 열렸다.
"나도 죽을 거 같아…."
열린 창문에서 최서진의 얼굴이 나타났다. 어디 있나 했더니 차에 타 있었네. 생각해보니깐, 최서진도 어제 만취해서 나랑 같이 그 방에 버려져 있던 거였지.
그래도 저렇게 말하는 거 치곤 그녀의 얼굴은 나름 괜찮아 보였다. 숙취 때문인지 머리가 아프다는 표정을 짓고 있긴 했지만.
근처에 최서진과 이다혜 말고도 어제 함께 마시고 놀았던 사람들이 몇 명 더 있었는데. 내 모습을 보고도 특별한 말은 없는 걸 보면 나와 최서진이 밤새 함께 있었다는 걸 모르거나 아니면 대충 별일 없었을 거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뭐, 애초에 둘 다 개취해서 인사불성이었으니 최서진과 내가 서로 뭔 짓을 했을 거란 생각은 다들 굳이 안 하겠지.
심지어 나와 최서진이 함께 잤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을 거다. 다들 취해서 정신이 없었던 만큼 그때 상황을 자세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사실상 없을 것이다.
있다고 쳐도 뭐, 실제로 내가 잠에서 깨기 전 까진 최서진이 내 팔을 베고 자고 있던 거 외엔 밤새 아무 일도 없었던 건 사실이니깐.
물론 그 뒤로는 내가 댓글 명령을 이용해 최서진을 존나게 따먹긴 했다.
그래서 이렇게 그녀를 직접 확인하러 온 거잖아?
난 싱긋 웃으며 차에 타고 있는 최서진에게 말을 건넸다.
"좀 괜찮아요?"
"네…. 그쪽은 어때요? 저보다 더 오래 마셨잖아요."
"전 아침에 혼자 몸에 좋은 거 챙겨 먹어서 괜찮아요."
"혼자 뭐 먹었는데요. 숙취해소제?"
"뭐, 비슷해요."
"와…. 진짜 치사하네."
치사하긴 지금 너 따먹었다고 얘기하는 거야.
어쨌든 대충 대화를 나눠보니 최서진이 이른 오전에 나와 있었던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건 확실했다.
기억하고 있으면 저런 반응이 절대 나올 리가 없지.
문제는 최서진과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는 나를 리나와 수아가 뒤통수가 따갑도록 노려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슬슬 정리하고 가야겠네.
다행히 이틀 동안 술자리에서 어울렸던 사람들은 대부분 이곳에 있었고, 우리는 각자 다음을 기약하는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이렇게 약속해놓고 절대 안 만나는 게 국룰이긴 하지만.
내 차에 각자 짐을 실은 여자들은 다들 차에 탔고, 마지막으로 내가 운전석에 탑승했다.
리나와 수아는 벌써 뒷좌석에서 잘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애들아 아무리 20살짜리 여자애들이어도 그렇지 너무 한 거 아니냐?
조수석에 타 옆에 있는 서하은은 싱글벙글한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흠, 밥은 서하은이랑 둘이 먹으러 가야 하나?
"일단 해장하러 밥부터 먹으러 가죠. 뭐, 먹을까요?"
"시온이 먹고 싶은 거 먹으러 가야지!"
내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는 서하은의 말투에 뒷좌석에 탄 두 사람이 움찔하는 모습이 룸미러로 보였지만, 둘 다 회사 대표님을 감히 노려볼 생각은 못 하는 듯했다.
뭐, 서하은의 말이 맞긴 하다. 내가 오고 가고 운전은 혼자 다 하는데. 내가 먹고 싶은 거 먹는 게 맞지.
씨발…. 집 갈 생각하니깐, 존나 막막하네.
"일단 조금이라도 운전을 덜 하고 싶으니까, 뭘 먹던 가는 길에 휴게소에서 먹죠."
3시간 동안 지루했던 운전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왔다.
수아와 리나는 각자 집 앞에 내려줬고, 두 사람 모두 서하은을 의식하느라 평소 같은 달콤하고 진득한 작별 인사를 나누진 못했다.
딱히 서하은이 쳐다봐도 문제없는데 말이야. 보고 있다는 것 자체로 리나와 수아에겐 문제가 되려나? 뭐, 대낮에 그렇게 물고 빠는 거 자체가 문제이긴 하지만.
두 사람을 내려준 뒤 서하은도 집에 데려다주려 했지만, 내가 새로운 호텔에서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내가 어떻게 지내는지 자신이 꼭 확인해야 한다고 난리를 치는 탓에 호텔까지 데려와 버렸다.
저런 것도 약간 메이드의 본능 같은 건가?
뭐, 그렇게 내가 묵고 있는 호텔 방에 오게 된 서하은은 잠시 이곳저곳 둘러보더니 흡족한 표정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나 이제 가볼게 시온아!"
"…? 아니, 오늘 약속이나 스케줄 있어?"
"응? 없는데."
"그럼 자고 가. 이틀 내리 놀고 와서 누나도 피곤할 거 아니야."
"헐…. 주인님… 메이드는 완전 감동이에요…."
서하은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저 표정이 존나 부담스럽단 말이야. 진짜.
"오늘은 진짜 그냥 쉴 거니깐, 누나도 얼른 씻고 얌전히 누워 있어."
"네. 주인님…."
순종적으로 내 말을 따르는 모습과 다르게 서하은의 눈빛은 욕망이 가득했다. 저 정도면 발정난 눈빛이라고 해도 믿겠어. 하긴, 니가 내 자지 맛을 안 본 지 오래되긴 했구나. 그래도 오늘은 진짜 피곤해서 얼른 쉬고 싶단 말이야.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 지 서하은은 씻기 위해 욕실 앞에서 골반을 씰룩거리며 레깅스를 내리고 있었다.
하아, 진짜 얌전히 씻고 낮잠 자려고 했는데. 저런 모습을 보니깐 또 밑으로 피가 쏠리네….
그렇다고 허리를 움직이긴 또 힘들고 귀찮단 말이지.
서하은이 씻고 나오면 입으로 한 발 빼달라고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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