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5화 〉 오월한테 호감 얻을 수 있냐? (3)
* * *
얼떨결에 오월과 함께 식물원 산책로를 걷고 있다.
처음에는 마스크와 선글라스로 중무장을 하고 있던 오월이지만, 나와 몇 마디 나눈 그녀는 나름대로 안심했는지 지금은 선글라스만 쓴 채 걷고 있다.
마스크라도 벗으니 훨씬 보기 좋네. 선글라스에 마스크라니 그건 너무 답답하잖아.
리나도 그렇고 연예인들은 그게 더 수상하다는 생각은 못 하는 건가?
어쨌든 오월이 다시 선글라스를 썼으니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묘하게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얼굴과 몸매를 가리고 있어도 묘하게 이목을 끄는 게 있단 말이지.
"좋아하는 거 있으세요?"
"아무거나 괜찮아요. 얻어먹는 건데, 사주시는 대로 먹겠습니다."
"아니……. 사과하는 뜻으로 사드리는 건데 그렇게 얘기하시면 어떡해요."
"근데, 저 어차피 제주도 와본 적이 별로 없어서 뭐 파는지도 잘 몰라요."
"그러면…… 제가 알아서 괜찮은 집으로 데려가 드릴게요."
"네. 저야 좋죠."
오월의 식사 대접은 흔쾌하게 받아들였다.
원하는 목적을 거의 다 이뤘으니 굳이 더 튕기면서 밀어낼 필요도 없고, 저렇게까지 얘기하는데 계속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지.
그렇게 음식에 대한 간단한 대화를 나누며 길을 걷고 있는데, 묘한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안 그래도 몇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 커플이고, 오월과 나도 이렇게 남녀 한 짝을 맞춰서 걷고 있으니 꽤나 간질간질한 기분이다.
아마 서로 의도치는 않았겠지만, 오월과 나는 나란히 걸으며 걸음을 맞췄고, 주변에 보이는 커플들 사이로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것 같았다.
뭐, 나 혼자 착각해서 느끼는 기분일 수도 있긴 하다.
근데 딱 이 타이밍에 오월도 입을 다문 거 보면 아마 나랑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게 분명하다.
살짝 어색해진 분위기를 유지하며 걷고 있는데, 저 멀리서부터 보이던 커플이 오월과 내게 다가왔다.
설마 오월을 알아본 건 아니겠지?
우리 앞에선 두 사람은 딱 봐도 커플이었다. 그냥 그런 티가 팍팍 났거든.
나와 오월 둘 다 키가 큰 편이고, 눈앞에 서서 우물쭈물하는 여자는 키가 꽤나 작아 굉장히 귀여워 보였다.
"저, 저기… 사진 좀 찍어주세요…!"
남자는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숙이며 여자와 함께 부탁하고 있었다.
오월은 사진을 찍어달라는 말에 본능적으로 놀랐는지 당황한 듯 굳어 있었다.
내가 얼른 찍어줘야겠네.
"네. 찍어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여자의 스마트폰을 받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사진을 몇 장 찍어준 뒤 스마트폰을 돌려주고, 감사의 인사를 받았다.
그 귀여운 커플들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내가 찍어놓은 사진들을 보더니 나와 오월은 반짝이는 눈빛으로 쳐다보기 시작했다.
"두 분도 저희가 사진 찍어드릴게요!"
오월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데도 당황한 표정이 얼굴에 완전히 드러나 있었고, 내가 재빠르게 대답했다.
"어…… 괜찮아요…!"
"네? 제가 잘 찍어드릴게요!"
"괜찮습니다. 마음만 받을게요."
내가 싱긋 웃으며 대답하자 여자는 아쉽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고, 오월은 대화가 계속해서 길어지자 상황을 정리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저희가 사귀는 사이가 아니라 사진을 찍기가 좀 그래서요."
화들짝 놀라며 토끼 눈을 뜨고 나와 오월을 번갈아 보는 귀여운 여자.
"아, 두 분 사귀시는 줄 알았어요. 죄송해요…!"
오월과 나의 당황스럽다는 듯한 미소를 본 여자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사과했다.
"죄송하실 건 없죠. 괜찮아요."
"두 분 완전 잘 어울리시는데…!"
"하하, 감사합니다."
그렇게 귀여운 커플과 짧게 대화를 나눈 뒤 우리는 주차장으로 빠져나왔다.
사진을 찍어준 커플과 거리가 충분히 멀어지자 오월은 조금 전 상황이 재밌었는지 작게 웃기 시작했다.
"잘 어울린다는데, 감사합니다. 라고 대답하는 건 뭐예요."
"뭐, 저한텐 당연히 극찬이죠. 상대가 오월 씨였잖아요. 물론 저 두 사람은 생각도 못 했겠지만."
나도 작게 미소를 지으며 오월을 바라봤고, 오월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크흠, 그렇게 말씀하니깐, 민망하네요."
"뭘 그런 거 가지고 민망해하세요. 제 바지에 커피도 쏟으신 분이."
"뭐야…! 신경 안 쓴다고 했잖아요!!!"
킥킥대는 내게 오월이 작게 성질을 부렸다.
"농담이에요. 신경 썼으면 애초에 연락해서 세탁비 달라했겠죠."
"진짜…! 전 지금도 다 물어드리고 싶거든요?"
"아, 괜찮아요. 다시는 이런 장난 안 칠게요. 맛있는 거나 사주세요."
"네. 나름 자신 있는 가게예요."
주차장에 도착해 주변에 사람이 전부 사라지자 선글라스를 벗고 기세등등한 표정을 짓는 오월. 저 차갑고 예쁜 얼굴에서 귀여움까지 느껴질 줄이야.
살짝 충격인데.
갑작스럽게 심장이 두근거리자 난 괜히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사진 한 번 찍어줬다가 무슨 폭풍에 휘말린 것 같네요."
"그러게요. 여자분 기운이 너무 넘쳐서 혼이 쏙 빠져나가는 줄 알았어요."
그렇게 오월과 조금 전 있었던 일을 얘기하며 서로 가볍게 웃었고, 서로 각자 차에 도착했다.
"여기서 금방이니깐, 뒤따라오세요."
"네."
오월은 간단하게 말하고 차에 올라탔다.
복장은 평범하게 입고 있는데, 차는 평범하지가 않네.
그래도 레인지로버 벨라에 저런 여자가 타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다들 잘 안 할 테니 오히려 허를 찌르는 걸 수도 있겠네.
그에 비해 지금 내 차는 시발 평범한 렌트카…….
심지어 서울에 있는 내 차가 오월의 차보다 조금 더 비싼데도 오월이 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저 차가 훨씬 더 고급스러워 보인다.
뭐, 이건 그냥 내 한탄 같은 거고, 오히려 평범한 차를 렌트해서 더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특색 없어 보이는 내 모습에 오월은 더욱더 믿음이 생기겠지.
오월의 차가 앞장서서 느긋하게 주차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고, 난 그 뒤를 따라갔다.
"와, 진짜 잘 먹었습니다."
여자한테 얻어먹는 건 오랜만이네.
오월은 날 갈치구이 집으로 데려갔고, 진짜 맛있게 잘 먹었다.
대체 뭔 생각으로 처음 만나는 사람을 이런 데로 데려가나 싶었는데, 생각보다 서비스가 엄청나게 좋았다.
룸에서 먹었으니 오월의 유명세도 전혀 문젯거리가 될 게 없었고, 심지어 고기 뼈도 직원분이 다 발라주시는 덕분에 호강하는 기분으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좋아하셔서 이제야 마음이 좀 편해지네요."
마음이 편해지긴, 영상 속이었지만, 내가 널 강제로 얼마나 많이 따먹었는데.
묘하게 웃기기도 하고, 동시에 양심이 찔리기도 했다.
"다행이네요. 이제 정말로 그만 미안해하셔도 됩니다."
내 대답을 듣고 배시시 웃는 오월을 보고 있으니 심장이 너무 뛰어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저 예쁜 얼굴은 웃으면 더 예쁘구나.
"근데, 저랑 영화 취향이 그렇게 잘 맞을 줄 몰랐어요."
"그러게요. 저도 깜짝 놀랐어요."
"심지어 와인 취향도 똑같고…… 이렇게 잘 맞는 사람은 처음 봐요."
방금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이 꽤나 민망하게 느껴졌는지 내 시선을 피하며 홍조를 띠는 오월.
"방금 한 말은 잊어주세요……."
"뭐, 그럴 수도 있죠. 저도 오월 씨 말처럼 이렇게 잘 맞는 사람은 처음 만나봤거든요."
안 그래도 민망해하던 오월은 내 대답을 듣고 더욱더 민망해하기 시작했다.
"진짜 신기하네요……. 뭔가 예전부터 시온 씨랑 알고 지냈던 그런 기분이 느껴져요."
저건 댓글 명령의 효과겠군.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오월이 느끼는 감정이 알고 지냈던 기분 같은 건 절대 아니다.
오히려 그보다 조금 더 깊은 내용이지.
물론, 오월과 영화, 와인, 이것들을 포함한 여러 가지 취향들이 겹치는 것도 전부 내 능력 덕분이다.
새로운 능력을 사용해 영상 속으로 들어가 오월을 만났을 때, 그녀가 좋아하는 모든 걸 기록한 뒤 영상 속에서 빠져나왔거든.
그 뒤로 현실에서 틈틈이 오월이 좋아하고 관심 있어 하는 분야를 공부했었다.
그 덕분에 지금 오월과 완벽하게 취향을 맞출 수 있었던 것이지.
영상 속에서 열심히 빼냈던 정보와 내 노력이 드디어 빛을 발한 것이다.
하지만, 이 뒤로는 더 이상 내 영역이 아니다.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많은 밑밥을 뿌려놨다. 이제 남은 건 오월이 확실하게 미끼를 물어주는 것이지.
뭐, 댓글 명령을 사용하면 오월이 어떤 여자건, 어떤 위치에 있건 무조건 따먹을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니까.
오월 스스로 내게 빠지게 만들어야 한다.
스스로 감정을 열어, 스스로 나라는 사람이 계속해서 머릿속에 떠오르도록 말이야.
"덕분에 식사 잘했습니다."
"아, 네…! 저도 시온 씨 덕분에 시간 잘 보냈어요."
"아닙니다. 제가 오월 씨 덕분에 좋은 시간 보냈죠."
영상 속에서도 현실에도 말이야.
난 고민에 깊게 빠져 있는 오월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전 이제 가볼게요. 아직 일정이 남아있어서요."
"아…… 혹시 저 때문에 시간 뺏기셨던 건가요?"
"절대 아닙니다. 애초에 놀러 온 건데요. 저녁 전에 잠깐 일정이 있는 거예요.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신경 안 써도 된다는 내 말에 오월의 표정에서 작은 서운함을 드러낸다.
"진짜 가볼게요. 늘 응원하겠습니다. 기회가 돼서 또 보면 좋겠네요."
오월에게 간단하게 목례한 뒤 주차된 차를 향해 걸어가려는데, 오월이 다급하게 발걸음을 옮겨 내 앞을 가로막았다.
"지금 기회가 되잖아요…!"
"네?"
내 앞을 가로막고 서서 날 살짝 올려다보고 있는 오월의 눈빛은 꽤나 애절해 보였다.
"……시온 씨, 서울로 언제 올라가세요?"
"확실하게 정해놓은 건 없는데. 아마 며칠은 더 있을 거 같아요."
"저, 그럼…… 오늘 저녁에 와인 한잔할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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