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7화 〉 선택적 집순이 오월 (6)
* * *
아, 이 호텔도 오늘이 마지막이구나.
씻고 나와서 대충 머리를 말리고 있으니 새삼 서울로 올라가기가 아쉬웠다.
생각보다 제주도에서 지내는 것도 괜찮단 말이지.
바다도 나름 보는 맛이 있고, 은근한 이색적인 분위기도 나쁘지 않다.
뭐, 그래봤자 내 여자들은 전부 서울에 있으니 올라가는 수밖에 없지만.
심지어 오월도 오늘 저녁이면 제주도에서 떠나게 되니 딱히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다.
대충 이런 생각들을 하면 머리를 싹 말린 뒤 짐을 챙기고 있는데 핸드폰에서 벨 소리가 울렸다.
침대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핸드폰을 뒤집어 발신자를 확인하니 오월이었다.
뭐야, 벌써 도착했나? 아직 시간 꽤 남았는데.
"네. 오월 씨, 벌써 도착했어요?"
"아니요, 지금 출발하려고요. 시온 씨는 준비 다 했어요?"
핸드폰 너머로 들리는 오월의 목소리.
이건 참 들어도 들어도 익숙해지지가 않네.
"이제 짐만 챙기면 돼요. 천천히 오세요. 밑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알겠어요."
심지어 날 공항에 데려다주겠다고 이른 아침에 픽업까지 해주니 더 실감이 안 난다.
3일 동안 그렇게 같이 실컷 놀았으면 이제 적응할 법도 한데, 진짜 현실감이 없단 말이지.
며칠 동안 잘 타고 다녔던 렌트카를 우선 반납하고 왔다.
렌트카 반납하는 곳이 호텔 바로 앞이라 걸어서도 금방이었고, 지금은 주차장으로 다시 돌아가고 있다.
생각해보면 지금 이 앞에서 택시 타고 공항으로 가면 오월을 기다리는 것보다 훨씬 빠를 텐데 말이야.
하지만, 오월을 공략하는 입장에서 조금이라도 같이 보낼 수 있는 시간을 포기할 수는 없지.
반대로 생각하면 오월도 나와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어 한다는 뜻이 되려나?
뭐, 비슷한 감정이겠지.
저번에 오월이 날 태우러 왔던 주차장 구석 벤치에 앉아 있으니 오월의 차가 안쪽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오월이 앉아 있는 날 알아봤는지 오월의 차는 내 앞쪽까지 다가와 멈췄고, 난 곧바로 조수석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며 운전석에 앉아 있는 오월이 눈에 들어왔다.
어제와 옷차림은 비슷하지만, 딱히 차에서 내릴 일이 없어서 그런지 모자와 안경은 쓰고 있지 않았다.
근데, 왜 저렇게 피곤해 보이지?
진짜 얼굴에 저 피곤해요. 라고 쓰여 있는 거 같은 얼굴이다.
물론, 그래도 여전히 존나 예쁘긴 하지만.
"……오월 씨 어제 잠 안 잤어요?"
"시온 씨랑 통화하느라 얼마 못 잔 거잖아요."
오월은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내게 퉁명스럽게 말했다.
"계속 전화 끊지 말라고 했던 건 오월 씨잖아요…?"
"크흠, 전 시온 씨 내려다 주고 집 가서 더 자면 되니까, 신경 안 써도 돼요."
민망한 듯 괜히 헛기침을 하며 내 시선을 피하는 오월.
진짜, 귀엽다 귀여워.
"그래도 피곤하면 집에서 좀 쉬지 그랬어요. 혼자 가도 괜찮은데."
"오늘 아니면 또 언제 볼 수 있을지 모르잖아요……."
오월의 표정은 차가운 느낌 그대로였지만, 목소리는 상당히 침울했다.
일단 지금 얘기는 오월의 말이 맞긴 하다.
나야 그렇다 쳐도 오월은 연예인이니 그 상당한 스케줄들을 쉽게 무시할 수 없겠지.
실제로 우리는 연락처와 간단한 주소지까지 서로 알고 있는 상태지만, 다음에 만날 날짜에 대한 기약은 전혀 없다.
"걱정하지 마요. 금방 또 만날 수 있어요."
시무룩해진 오월을 위로해주기 위해 대충 뱉은 말이 아니다.
딱히 오월과 정해놓은 기약이 없다는 것뿐이지, 난 오월과 만날 방법을 충분히 가지고 있으니까.
오월이 연예인이라고 하지만, 나도 평범한 사람은 아니다.
뭐, 이런 내 마음을 오월이 알고 있을 리가 없으니 그녀는 여전히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서울 가면 어떻게든 시간 만들어볼게요."
그래도 저렇게 얘기해주니깐, 고맙긴 하네. 솔직히 설레기도 하고 말이야.
"너무 조급하게 굴지 마요. 저 어디 안 가요."
오월은 싱긋 웃는 날 살짝 바라보더니 귀를 붉혔다.
"시온 씨가 어디 갈까 봐 그러는 게 아니거든요……."
"그래요? 그럼 왜 그러는데요?"
"……물어보지 마요!"
오월은 언성을 살짝 높이더니 거칠게 엑셀레이터를 밟았다.
진짜, 재밌다니까.
제주공항에 도착한 오월과 나는 공항 주차장 안쪽에 차를 세웠다.
"여유 있게 도착했네요.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오월 씨."
"제가 하고 싶어서 한 건데요, 뭘."
오월은 내가 오는 길 내내 장난을 쳐서인지, 아니면 정말 이제 나랑 헤어져서 기분이 안 좋은 건지, 아직도 꽤나 뚱해 있었다.
일단 기분 좋아질 말이라도 좀 해봐야겠다.
"오월 씨 덕분에 며칠간 정말 잘 놀았어요.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경험해보지 못한 것들도 즐기면서 시간 잘 보냈네요."
"그럼……."
말하기를 망설이는 듯 입을 달싹거리며 뜸을 들이는 오월.
"……그럼 다음에 저 제주 올 때, 시온 씨도 같이 와요."
오월은 큰 용기를 냈다는 듯 긴장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건 좀 많이 감동인데?
당장이라도 저 볼을 붙잡고 찐하게 뽀뽀를 갈겨주고 싶다.
"저야 감사하죠. 그럼 그때도 오월 씨가 저 재밌게 놀아주는 거죠?"
"시온 씨가 절 재밌게 놀아줘야죠."
"뭐든 좋아요. 다음에 제주 오면 오월 씨가 얘기했던 둘레길, 거기 같이 가면 좋겠네요."
"……네, 좋아요."
물론, 오월을 다시 만나게 되는 장소가 제주는 아니다. 난 그때까지 기다릴 자신이 없어.
"이제 저 슬슬 가볼게요.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도착하면 까톡해요."
오월은 날 바라보며 입술을 앙다물고 있었고, 난 그런 그녀를 귀엽게 바라보며 조수석 문을 열라는데.
내 손목을 오월이 잡아당겼다.
쪼옥.
날 자신이 앉아 있는 운전석 쪽으로 강하게 잡아당긴 오월은 몸을 살짝 일으켜 내게 입을 맞췄다.
벌써 오월에게 두 번째 기습 키스를 당했지만, 이번 건 뭐랄까.
너무도 달다.
"잘 가요."
"오월 씨도 조심히 가요."
애틋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는 오월에게서 너무도 따스한 다정함이 느껴졌다.
그렇게 아쉬운 작별 인사를 마치고 주차장을 빠져나가던 중 잠시 뒤를 돌아보니 아직도 창문을 열고 날 바라보고 있는 오월이 있었다.
가슴 한구석이 찡하게 울리는 것 같다.
내가 싱긋 웃으며 손을 작게 흔들자, 오월은 처음 보는 미소로 내게 답해주었다.
공항으로 가는 길.
오월은 이미 차를 타고 이곳을 빠져나갔을 텐데, 며칠간 날 즐겁게 해주던 그녀의 향기가 계속해서 느껴진다.
심각하네, 씨발.
공략을 한 거냐, 공략을 당한 거냐.
며칠간 정말 꿈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그게 내 능력 덕분인지, 오월 때문인지 이제는 구별이 안 된다.
김포공항에 도착해 게이트 밖으로 나가니 비상등을 켜고 있는 내 차가 보였다.
시간 맞춰서 딱 잘 왔네.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조수석 문을 여니 운전석에 앉아 있는 서하은이 보였다.
서하은은 부드러운 미소로 날 반겨주었다.
"시온이, 잘 놀다 왔어?"
"흐음…… 너무 잘 놀고 와서 문제야."
"그래? 더 놀다 오지 그랬어!"
"그러고 싶었는데 뭐, 시간이 안 맞아서 어쩔 수 없었지."
서하은은 의아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나저나, 나 인생 제대로 살고 있구나.
출발할 때도 예쁜 여자가 공항까지 데려다줬는데, 도착하니 다른 예쁜 여자가 공항으로 날 데리러 오다니.
팔자가 이렇게 좋아도 되나 싶어질 정도다.
"데리러 와줘서 고마워. 내가 운전할까?"
"아냐, 아침 일찍 비행기 타고 오는 것도 피곤했을 텐데 쉬고 있어!"
딱히 피곤하진 않았는데…… 솔직히 운전하기 귀찮긴 하다.
"……고마워!"
"고맙긴, 시온이한테는 뭐든 해줄 수 있다니까."
날 바라보며 싱긋 웃는 서하은은 차를 출발시킨다.
"아, 맞다. 시온아 잠깐 회사 좀 들렀다 호텔로 갈게. 나 챙길 게 있어."
"응, 운전도 누나가 하는데 뭘. 편한 대로 해."
"응! 넌 자고 있어!"
"아니, 잠은 안 와……."
차가운 성격을 가진 오월과 시간을 보내고 와서 그런가 서하은이 묘하게 열정 과다로 느껴진다.
뭐, 이게 서하은의 매력이긴 하지만.
흐뭇함을 느끼며 서하은을 바라보고 있는데, 흰색 셔츠 안쪽으로 비치는 서하은의 브라가 내 시선을 자극한다.
호텔 도착하면 오랜만에 예뻐해 줘야겠네.
찐하게 한 발 빼고 싶기도 하고 말이야.
회사 지하 주차장에 도착해 차를 세운 서하은은 운전석 문을 열었다.
"금방 다녀올게."
"천천히 해도 돼, 나 급한 거 없어."
서하은은 배시시 웃으며 운전석 문을 닫고 엘리베이터를 타러 걸어갔다.
그 잠깐 사이에도 서하은의 하체에 타이트하게 달라붙는 검정 슬랙스는 각선미를 뽐내며 내 시선을 자극했다.
넓은 골반과 잘빠진 라인, 힙업된 엉덩이까지.
서하은은 역시 저렇게 입는 게 제일 꼴린단 말이지.
서하은은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건물 안으로 들어가며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핸드폰이나 만지면서 시간 때우고 있어야겠구만.
그렇게 스마트폰으로 대충 밀린 뉴투브 영상들이나 보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창문 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져 앞을 보니 익숙한 여자가 내 차 앞을 지나고 있었다.
……저 여자 누구였지?
상당히 건강미가 넘치는 몸매, 그럼에도 은근한 여리여리함이 섞여 있어 남자를 미치게 만들기 딱 좋은 그런 몸이다.
그리고, 저 푸석푸석한 긴 흑발은…….
아…! 여름휴가 파티에서 봤던 무슨 격투기 선수 하령이다.
아니지, 은퇴했다고 했으니 전 선수가 맞겠군.
하도 오랜만에 보니 얼굴을 잊을 뻔했네.
그때 당시에 취기가 꽤나 올라있는 내게 로렌과 무슨 사이냐고 추궁하다 내게 댓글 명령으로 조종당했던 여자로 기억하고 있다.
날 바라보면 오르가즘을 느끼게 만든 뒤 나에 대한 어떤 것도 발설할 수 없도록 만들었지.
그 뒤로 시간이 꽤나 지난 지금, 저렇게 멀쩡한 거 보면 그동안 내게 댓글 명령으로 조종당했던 여자들도 잘 지내고 있을 거 같아서 다행이다.
평생 저대로 둘 수도 없으니 얼굴 본 김에 인사나 해볼까?
난 차에서 내려 앞서 걸어가고 있는 하령을 뒤따라갔다.
운동선수라 해도 하령의 팔다리는 꽤나 얇은 편이었다.
오히려 레깅스를 입고 있는 저 다리는 근육이 예쁘게 자리잡혀 더욱더 내 시선을 자극하고 있었다.
내가 본인을 따라오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모르고 있는 하령은 자기 걸로 보이는 차 앞에 멈추어 섰다.
그리고, 난 그런 하령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저기요."
"네?"
의아한 눈빛으로 날 돌아본 하령의 표정이 순식간에 돌변했다.
"너…!!!"
하령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내 멱살은 붙잡은 뒤 날 차에 밀어붙였다.
퍽!
아야, 씨팔 아파라. 너무 거친 거 아니야?
"……너, 대체 뭐야……."
날 잡아먹을 듯 노려보던 하령의 눈은 점점 힘이 풀리고 있었다.
작성한 시간이 아무리 오래돼도 댓글 명령은 제대로 발동하는구나.
역시, 믿음직한 능력이란 말이지.
그럼에도 하령은 여전히 내 멱살을 꽈악 붙잡고 있었다.
와, 조종당하고 있는 상태에서 이 정도 저항이라고? 허, 대단하네.
조금 전 하령을 뒤따라갈 땐 그녀가 긴 남방을 입고 있어 하령의 상체는 보이지 않았는데, 지금 내 멱살을 잡고 있는 하령을 내려다보니 타이트한 크롭티를 입고 있었다.
봉긋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 생각보다 더 훌륭한 여자였잖아?
내 멱살을 잡고 있는 하령의 주먹은 점점 힘이 풀리고 있었고, 난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놓고 얘기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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