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1화 〉 장난감 하령 (2)
* * *
하령이내게 보내준 주소는 오피스텔이었고, 정황상하령이사는 곳 같았다.
문자에 적혀 있던 내용대로 지하 1층 주차장에 들어오니꽤나익숙한 실루엣에 여자가 보였다.
난 그쪽으로 다가가 차를 세운 뒤 운전석 창문을 열었다.
창문을 열자하령이차가운 눈빛으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흐음…… 갑자기 때리는 건 아니겠지…?
생각 이상으로 분위기가 좋지 않자 난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하령에게 괜히 인사를 건넸다.
"……안녕?"
"지금 나한테 인사를 하고 싶어?"
차가운 눈빛으로 날 바라보던하령의표정이 이제 혐오로 바뀌어있었다.
크흠, 역시 뭘 해도 악효과가 나는구나.
"뭐, 그냥 얼굴 본 김에 하는 인사지."
"……."
내 말을 대놓고 무시하며 날 혐오스럽다는 듯 쳐다보는하령과마주하고 있어도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다.
오히려 더 즐겁단 말이지. 이런 여자가 곧 내게 사정없이 따먹힐 예정이니깐 말이야.
그나저나, 여기 언제까지 서 있을 예정이야?
"저기, 내가주차를 할까? 아니면니가차에 탈래?"
내 대답과 함께 나와 상반된 표정으로 시선을 마주 보던하령은나 앞쪽으로 돌아 조수석으로 향했다.
이내 앞유리창 너머로하령의모습이 보였고, 늘 라인이꽤나드러나는 옷이나 노출이 있는 옷을 입고 있었던하령이오늘은 상당히 펑퍼짐한 옷을 입고 있었다.
하긴, 오늘 나와 겪을 일들을 생각하면 도저히 색기 넘치는 옷을 입고 나오고 싶지 않았겠지.
뭐랄까, 본인이 유혹한다는 듯한 모양새가 돼 버리니까?
자세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쨌든하령은곧 내게 따먹힐 주제에 아직 자존심은 확실하게 챙기고 있는 것 같았다.
아주 좋아. 그래야 내가 즐겁지.
본넷쪽을 돌아서 조수석 앞에선하령은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이내꽤나단호한 동작으로 차 문을 열어 조수석에 앉았다.
난 그런하령을바라보면 싱긋 웃었다.
"어디 혹시 갈 곳이 있는 거야? 아니면 내가 알아서 갈까?"
"니가알아서 해."
까칠하긴, 나도 그럴 예정이었어.
일단 여기가하령이살고 있는곳은 맞는 거 같은데, 가깝다고 해서하령의집으로 가는 건 솔직히 조금 불안하다.
딱 봐도 내게 미친 듯이 적대적인 여잔데, 그런 여자가 사는 집으로 가는 건위험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
뭐, 그런 걸 떠나서 애초에하령성격상 본인 집으로 날 들일 생각도 없겠지.
그렇게 되면 내 호텔 방으로 가는 것도 나쁘지 않긴 한데, 리나가 내가 지내고 있는 호텔 위치를 알고 있는 이상, 굳이하령을그곳으로 데려가서 불편한 상황을 만들 필요는 없을 거 같다.
난 고민이 가득한 표정으로하령을바라봤고,하령은나와 눈이 마주치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진짜 살벌하네. 어차피 대주기로 마음먹어놓고 저렇게 기죽지 않는 것도 쉽지 않을 거다.
흐음, 이런 여자를 어디로 데려가야 하나…….
돈도 시간도 여러모로 여유는 넘치니 그냥 호텔을 예약해서 찾아가는 게 좋겠지만, 이런 싸가지 없는 여자한테 호화스러운 숙소는 아깝단 말이지.
마음 같아선 솔직히 그냥 길바닥에서 따먹어 버리고 싶은데, 대낮에 그런 짓을 하기엔 조금 무리가 있고, 그냥 무난하게 모텔로 가야겠다.
난 저번에수아와함께 갔던 모텔의 위치를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차를 출발시켰다.
"어디 가는 거야."
"알아서 하라며? 궁금하긴 한가 봐?"
난 실실거리며 대답했고,하령은그런 내게 오늘 봤던 표정 중 가장 무서운 표정을 보여줬다.
"내가 지금 너랑 장난이나 치자고 만난 건 줄 알아?"
그건 아니지, 순결을 바치러 온 거잖아.
"그럼 다른 얘기를 하자고, 그 조건인지 뭔지 만났으니까, 이제 얘기해봐."
하령의표정이 조금은 풀린 것 같다.
"……우선 조건은 두 가지야."
흐음? 생각보다 몇 개 안 되잖아? 뭐, 마음에 안 드는 조건이면 가지 수를 떠나서 애초에 들어줄 생각도 없긴 하지만.
난 조용히 차를 몰며하령의이어지는 다음 말을 기다렸고,하령은그런 날 빤히 바라보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첫 번째, 다시는 나한테 이상한 약 같은 거 쓰지 마."
내가 자신을 댓글 명령으로 조종했던 걸 약을 사용했다고 생각하는 건가?
나름 합리적인 판단이네. 그렇게 생각해주는 게 오히려 나한테도 좋고 말이야.
"그래, 뭐…… 일단 알겠어."
"확실하게 대답해."
"알겠어. 그런 짓은 다신 안 할게."
어차피하령에게더 이상 댓글 명령을 사용할 예정은 없었다. 제대로 즐기려면 최대한하령에게내게 간섭하지 않는 편이 좋거든.
물론,하령의전 직업을 생각하면 위험한 순간엔 곧바로 사용할 거지만.
"그럼 두 번째 조건은 뭐야? 얼른 얘기해봐."
이제는 내가 궁금해서 못 참을 지경이다.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하령과내가 타고 있는 차는 지하 주차장에서 빠져나오게 됐고, 햇볕이 차 안으로 들어오게 되자 밝아지는 시야와 함께 입술을 잘근거리며 말하는 것을 망설이는하령의얼굴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확실히하령도예쁜 얼굴을 가지고 있단 말이지.
은퇴했다고 하지만, 어떻게 종합격투기 선수라는 여자가 저런 얼굴을 가지고 있는 거지? 애초에 제대로 활동도 안 한 거 아니야?
그나저나, 두 번째 조건이라는 게 상당히 말하기 불편했는지하령은꽤나길게 뜸을 들이고 있었다.
뜸을 들이는 시간이 너무 길어지자 난하령을살짝 바라봤고, 그녀의 표정은 상당히 곤란해 보였다.
대체 뭔 소리를 하려고 저러는 거야? 너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면 나도 받아줄 생각 없으니까 그냥 속 시원하게 얘기해도 상관없는데 말이야.
그리고, 내 인내심이 바닥날 즈음하령이드디어 입을 열었다.
"두 번째…… 키스는 절대 안 돼."
뒤통수를 망치로 한 대 맞은 느낌이다.
저런 소리를 할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심지어 저걸 조건이라고 내세우다니,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뭐, 얼추 감은 오긴 한다. 내가 너한테 몸은 내주게 될지언정 절대로 마음은 주지 않겠다는 그런 자존심과 관련된 얘기겠지.
이렇게 생각하니 오히려하령의성격이랑 잘 어울리는 조건이네.
어쨌든꽤나당황했던 내가대답을 하지않고 있자하령이긴장한 듯한 목소리로 날 재촉했다.
"……대답해."
"알겠어."
솔직히 내겐 좋은 조건이다.
따져보면 목표가 하나 더 생긴 건데, 즐겁지 않을 수가 없잖아.
어떻게든하령이내게 키스를 애원하도록 만들겠어.
"내 조건은 이게 다야. 그리고, 이 조건들과 별개로 내 영상을 확실하게 정리해 주겠다던 약속도 꼭 지켜. 그게 내가 널 만나기로 다짐한 가장 큰 이유니까."
뭔가 묘하게 말이 많아진 거 같은데?
하령은창밖을 바라보며 내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사실 이렇게 자존심 강한 여자가 협박 좀 당했다고, 순순히 몸을 내주는 게 말이 안 되는 상황이긴 하다.
그럼에도하령이내게 이런 태도를 보이면서도 차에 타서 내게 순결을 바치기 위해 순순히 따라오고 있는 건 아마 서하은의 나에 대한 보증이 제대로 한몫한 거겠지.
자신이 믿고 따르는 언니고, 사회적 지위도 만만치 않은 여자가 날 보증하는데,하령입장에서도 무작정 날 불신할 수는 없었을 거야.
뭐, 결국은 서하은 덕을 제대로 봤다는 것이다.
차 안은 잠시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그래, 그럼 이제 내 조건을 얘기할 차례지?"
내 시선을 피해 창밖을 바라보던하령은다급하게 고개를 돌려 어이가 없다는 눈빛으로 날 쳐다봤다.
"그런 말은 없었잖아!"
"니가나한테 조건을 두 가지나 걸었으니깐, 나도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아야지."
"개소리하지 마! 난 이미 너한테 주기로 약속한 게 있는데……."
"그건 영상을 없애주는 조건일 뿐이잖아.니가새로운 조건을 만들었으니 이건 다른 문제지."
"이, 이 쓰레기 같은 새끼……."
"너무 나쁘게 말하지는 마. 대신 난 조건 하나로 퉁 칠 테니까."
하령은여전히 분노가 가득한 눈빛으로 날 노려보고 있었지만, 조건이 하나라는 사실은꽤나납득할만했는지 잠자코 내 말을 기다리는 듯했다.
후우…… 사나운 짐승이랑 있는 거 같단 말이지. 얼른 자지를 쑤셔 박아야 꼼짝 못 할 텐데.
난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어갔다.
"내 조건은 우리가 다섯 밤을 함께 보내는 거야."
분노에 가득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던하령은아랫입술을 질끈 물었다.
"꺼져. 내가 그딴 걸 받아들일 거 같아?"
"그럼 그냥 내려."
"뭐…?"
"싫으면 차에서 내리라고. 조건 두 가지 받아준 걸로 내가 받아줄 수 있는니 요구사항은 끝난거야."
"……."
하령은벙찐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고, 난 도로가 한산한 틈을 이용해 끝 차선에 잠시 차를 세웠다.
"결정해. 지금 내려서니갈 길 가던가, 내 조건을 받아들이던가."
"이, 이 개새끼…!"
"지금 안 내리고 있는 건 너도 내 조건을 받아들이는 걸로 알면 되는 거지?"
하령은아무 말도 없이 날 쏘아보고 있었고, 난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
저런 부정이 가득한 표정과 눈빛 속에서 긍정이 느껴지다니, 이런 경험은 또 처음이네.
하령이단단히 화가 나게 만들어서일까, 아니면 애초에 용건이 아닌 대화를 나눌 필요가 없었던 걸까.
우리는 모텔에 도착할 때까지 어떠한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도착한 모텔은 무인이었고, 내가 키오스크 앞에 서서 결제하는 동안하령은꽤나불편하고 어색해 보이는 자세로 내 뒤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이제 같이 방까지들어가야 되는데어쩌려고 저러는 거야?
결제를 전부 끝낸 나는 미리 눌러놓은 엘리베이터에 탑승한 뒤 아직도 내게서 멀찍이 서 있는하령에게손짓했다.
"얼른 와. 올라가야지."
"……."
하령은고개를 푹 숙이며 내게 걸어와 엘리베이터에 탔고, 다시 내게서 멀찍이 떨어져 엘리베이터 구석에 섰다.
저런 모습을 보는 것도 은근히 재밌네.
내가하령을바라보며 가볍게 웃자하령은그런 날 쳐다보고 싶지 않다는 듯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렇게 나름대로 재밌는하령의모습을 구경하고 있으니 어느새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하령은멀찍이 떨어져 있긴 하지만 착실하게 날 따라왔고, 그렇게 우리는 드디어 모텔 방에 들어왔다.
내가 신발을 벗고 방 안으로 들어가자하령은그런 날 공격적인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재밌는 점은 그런 주제에 행동은존나게쭈뼛쭈뼛하고 있었다는 거지.
"들어와."
기분 탓일지도 모르지만하령은내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운동화를 벗고모텔 방 안으로 들어왔고, 날 지나쳐 침대 앞에서 딱 봐도 어색해 보이는 모습으로 서 있었다.
난 소파에 풀썩 주저앉아 묘하게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는하령의뒷모습을 바라봤다.
"바지 벗어."
"……뭐?"
대답과 함께 고개와 허리만 돌려 날 바라본하령의몸이 돌아가며 그녀의 옷이타이트해졌고, 그런하령의관능적인 라인은 은은하게 날 자극했다.
확실히 꼴릿한 몸매란 말이지.
"못 들은척할거 없어. 어차피 다 벗을 건데 뭐, 일단 그바지부터벗으라고, 펑퍼짐해서 마음에 안 드니까."
하령은기가 차다는눈빛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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