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화 〉 오월 등산 (1)
* * *
아직 등산로 입구도 나오지 않았지만, 이미 주변은 꽤나 초록색으로 가득했다.
그렇게 높은 산일 거라 생각하진 않았는데, 벌써부터 이런 분위기면 생각보다 힘들 수도 있겠어.
물론, 힘들어도 절대 티를 낼 생각은 없다.
오월이 앞에서 저렇게 씩씩하게 걷고 있는데, 내가 힘들어하면 가오 상하잖아.
걸음걸이 마저 깔끔하고 예쁜 오월은 살짝 고개를 든 채 주변을 둘러보며 산책하듯 가볍게 걷고 있었다.
편하게 입고, 편하게 걷는 건데 무슨 화보 찍는 거 같네.
시선을 자극하는 오월의 뒷모습은 주변 풍경마저 달라 보이게 만드는 것 같았다.
진짜 현실감 떨어지는 뒤태란 말이지.
그나저나, 이런 곳이 있다는 건 정말 다시 봐도 신기하구만.
고개를 높게 들어 위를 바라보면 좌우로는 높은 나무들과 줄지어 서 있었고, 웅성한 나뭇잎들 가운데로 높은 하늘이 활주로처럼 깔려 있었다.
후우…… 이러나저러나 바람 쐬러 나오니깐 좋긴 하네.
난 빠른 걸음으로 성큼성큼 걸어 앞서 걸어가던 오월과 나란히 섰다.
"여기 자주 와 봤어요?"
"아니요. 오늘이 두 번째예요."
아, 그래서 은근히 두리번거리며 길을 걸었던 거구나.
"설마 우리 오늘 길 잃어버리는 건 아니죠…?"
"저 길치 아니에요. 걱정하지 마세요."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 눈이 보이진 않지만, 입 모양만 봐도 어이없어하는 오월의 눈빛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하긴 오월이 바보도 아니고, 한 번 왔던 곳에서 길을 잃어버리는 실수 같은 건 하지 않겠지.
근데, 그럼 여길 처음엔 누구랑 왔던 거지?
너무 대놓고 물어보긴 조금 그런데…….
흐음…… 슬쩍 돌려서 물어봐야겠다.
"그나저나, 이런 데는 어떻게 알게 된 거에요? 전 이런 곳이 있을 거라고 생각도 못 했어요. 분위기가 진짜 너무 좋네요."
크흠, 솔직히 그 정도는 아닌데, 살짝 오바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오월은 내 반응이 마음에 들었나 보다.
옆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아주 살짝 들뜬 목소리로 말하는 오월.
"그쵸? 제가 찾은 곳은 아니에요. 현정 언니라고…… 흐음, 시온 씨는 모르려나, 어쨌든 친한 언니랑 같이 왔었어요."
현정 언니…? 오월이 친한 사람인데, 이름이 현정이라면 설마…….
"설마 김현정 배우 얘기하는 거에요?"
"…? 네. 맞아요. 누군지 알아요?"
"당연히 알죠."
살짝 어이가 없을 정도네.
오월은 내가 어디 무슨 동굴에서 수련이라도 하다 나온 사람인 줄 아는 건가?
세상일에 딱히 관심 없는 연기를 조금 하긴 했지만, 그 정도는 아니란 말이지.
어쨌든, 지금 오월이 얘기한 김현정이라는 여자는 상당히 유명한 여배우다.
오월이 차갑고 고급스러운 이미지라면, 그쪽은 그냥 고급스러움 그 자체인 여자라고 볼 수 있다.
당연히 외모는 말할 것도 없고, 김현정이 노출이 큰 드레스라도 입는 날엔 늘 인별 광고 계정들의 피드를 가득 채운다.
지금 얘기한 것처럼 한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만한 여배우인데, 그런 사람을 아무리 연예계에 관심이 없어도 모를 리가 없잖아.
내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오월을 바라보자 그녀는 살짝 당황했는지 시선을 피했다.
"그래요? 오늘도 현정 언니가 주소 알려줘서 온 거에요."
아침부터 누구랑 열심히 까톡을 하더니만 그게 김현정이었구나.
이럴때마다 오월이 얼마나 급이 높은 여자인지 새삼 느낀다.
김현정이랑 친한 언니 동생으로 지내면서 등산도 함께 다니는 사이라니, 등산은 흔한 취미지만, 오월과 김현정이 함께 다닌다 생각하면 묘하게 그들만의 리그처럼 느껴진다.
확실히 오월 수준의 인지도와 능력을 갖춘 여자라면 더 대단한 사람들도 알고 지내겠지.
뭐, 그렇다고 딱히 열등감이나 불쾌함을 느끼진 않는다.
애초에 내가 가지고 싶다면 전부 가질 수 있는 것들이니 말이야.
단순히 신기한 감정을 느끼며 이런 고민에 빠져 있을 뿐인데, 오월은 내 기분이 상했다고 생각한 것 같다.
선글라스를 벗은 뒤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날 쳐다보던 오월은 조심스럽게 내 손을 잡았다.
"왜 그래요…? 혹시 기분 상했어요?"
"네? 아니요. 갑자기 기분이 왜 상해요. 그냥 잠깐 멍 때린 거에요."
난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고, 오월은 그런 날 바라보며 안심했다는 표정으로 내 손을 꽈악 쥐었다.
나란히 손을 잡고 예쁜 길을 걷고 있으니 안 그래도 예쁜 오월이 더욱더 예뻐 보인다.
이런 여자의 처녀를 뺐고, 이렇게 사랑까지 듬뿍 받고 있는 걸 생각하면 정말 진심으로 현실감이 없단 말이지.
그렇게 오월과 함께 손을 잡고 나란히 걸으며 연예인 얘기를 하며 한참을 걸었다.
여러모로 참 좋은 점들이 많지만,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오월과 편하게 걸어 다닐 수 있다는 점이 가장 좋네.
그리고, 드디어 등산로 입구에 도착했다.
"와…… 사람이 없을 만 하네요. 여기 안으로 들어가면 바로 등산로 끊기는 거 아니에요?"
"아니거든요. 길도 은근히 잘 돼 있고, 드물긴 하지만 다른 등산객분들도 가끔 마주쳐요."
크흠, 내가 봤을 땐 안에서 아무도 마주칠 일 없을 거 같은데…….
정말 입구부터 꽤나 깊고 높은 산인 게 딱 느껴진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날씨가 선선해서 벌레는 별로 없을 거 같다는 것이지.
후우…… 귀찮긴 하지만, 얼른 출발하자.
내가 작게 한숨을 쉬며 걷기 시작하자 오월은 싱긋 웃으며 날 따라왔다.
"별로 안 높으니깐, 너무 걱정하지 마요."
"걱정 안 해요."
행군도 했던 내가 이 정도 산에 겁먹을 줄 아나.
확실히 산속을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하자 조금 전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상쾌한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울창하다 해야 할 지, 풍성하다 해야 할 지, 초록색으로 시선을 꽉 차는 느낌이 좋긴 하네.
바닥에서 가볍게 올라오는 흙내음도 상당히 기분을 즐겁게 만들어 준다.
느긋하게 풍경을 구경하며 걷고 있으니 딱히 힘들 것도 없었다.
여기 주소는 나도 똑바로 기억해놔야겠어. 다음에 운동 좋아하는 여자들 데려오면 딱일 거 같아.
그나저나, 오월은 이제 선글라스 안 써도 괜찮은 건가? 사람이라도 마주치면 어쩌려고 저러지.
"오월 씨, 선글라스 안 써도 괜찮아요?"
"네. 사람 진짜 얼마 없어요."
하긴 뭐, 사람을 마주친다 하더라도 고개만 살짝 숙이고 지나가는 걸로 충분하겠지.
이런데서 등산하다 마주치는 사람이 오월일 거라고 누가 생각하겠어.
문제는 그런 걸 떠나서 정말 사람을 만날 일도 없을 거 같은 분위기다.
"흐음…… 사람이 그 정도로 없으면 이따가 곰 나오는 거 아니에요?"
내 말을 들은 오월은 작게 실소를 터트렸다.
"한국에 곰이 어딨어요."
솔직히 그냥 가볍게 농담한 건데, 저렇게 반응하니깐 괜히 더 장난치고 싶어진다.
"무슨 소리예요. 한국에 곰이 얼마나 많은데……."
"네…?"
내가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하자 오월은 제자리에 멈춰서 스마트폰을 꺼내 들고 검색을 하기 시작했다.
거짓말 친 건 아니야. 한국에 곰이 많긴 하지. 여기 있을 리는 없지만, 하하.
한참 검색을 하던 오월은 어두운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어…… 시온 씨, 그냥 집에 가죠……."
"풉!"
"왜 웃어요…!"
"아, 미안해요. 여기서 곰 만날 일은 절대 없으니깐, 걱정하지 말고 그냥 가요. 장난친 거였어요."
"네…? 아니에요! 지리산엔 야생곰이 진짜 있대요!"
"오월 씨, 여긴 지리산이 아니잖아요……."
서울 근교에서 그다지 떨어지지도 않은 이런 곳에서 곰을 만날 리가 없지.
장난을 친 것도 좋았고, 놀리는 것도 좋았는데, 문제는 오월이 생각보다 내 농담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덕분에 사뭇 진지하게 오월을 설득하고 나서야 다시 등산을 시작할 수 있었고, 그 덕분에 난 팔뚝을 한 대 맞았다.
"이씨…! 왜 그런 농담을 해요!!!"
민망하다는 듯 귀를 붉히며 성을 내는 오월이 너무도 귀여웠다.
은근히 겁이 많네.
애초에 지리산에서도 엄청나게 보기 힘든 곰을 여기서 볼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근데, 고라니는 진짜로 만날 수도 있어요. 이렇게 인적 드문 곳이면 충분히 가능하지."
"고라니는 안 무섭거든요!"
"만나보면 무서워질 걸요……."
"이상한 소리 그만하고 얼른 와요."
오월은 날 지나쳐 걷기 시작했다.
크흠, 이건 거짓말 아닌데…….
말이 등산이지. 생각보다 전혀 힘들지 않았다.
굳이 표현하자면 가벼운 트래킹 느낌이네.
높이 올라갈수록 웅장해지는 풍경을 보는 것도 즐거웠고, 오월과 즐겁게 수다를 떨며 걷는 것도 즐거웠다.
물론, 그 중 가장 즐거웠던 건 슬쩍 뒤로 떨어져 바라보는 오월의 뒷모습이었다.
산 길이 언덕이기 때문에 오월의 뒤태는 딱 좋은 각도로 내 눈에 들어왔고, 열심히 걸으며 살랑거리는 그녀의 봉긋한 엉덩이는 너무도 꼴릿하고 농염했다.
특히, 저 레깅스.
레깅스가 잘 어울리는 여자들이야 많이 만나봤고, 따먹기도 존나게 따먹었었지만, 오월의 레깅스 입은 뒤태는 정말 날 미치게 한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꼴려서 미칠 지경인데, 언덕을 올라가며 엉덩이를 살랑살랑 흔들어대고 있으니 더 말할 것도 없지.
지금까지는 웅장한 풍경과 오월하고 나누는 이야기 덕분에 최대한 꼴림을 억누르고 있었는데, 이제 더는 참을 수가 없다.
아니, 참고 싶지 않다고 해야 하나.
어차피 올라오는 길 내내 사람을 한 명도 못 봤는데 굳이 쫄 것도 없고, 길에서 살짝만 벗어나면 그 누구도 우릴 볼 수 없을 것이다.
대놓고 오월의 엉덩이를 바라보며 뒤따라 걷던 나는 제자리에 멈춰 섰다.
"좀 쉬죠."
"그럴까요?"
내 앞에 서 있던 오월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내게 다가왔다.
"물 좀 마실래요?"
고개를 끄덕이자 오월은 들고 있던 물병을 내게 건네줬다.
아, 존나 시원하네.
오월 뒤태만 쳐다보고 걷느라 내 손이 이렇게 뜨거워져 있는지도 몰랐다.
물을 마신 뒤 물병을 오월에게 건네주자 그녀도 곧장 입에 물병을 가져다 댔다.
물병 입구에 닿는 오월의 촉촉하고 관능적인 입술, 평상시라면 아무 생각 없이 봤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계속해서 그녀의 레깅스 입은 뒤태를 쳐다보면서 걸었던 탓인지 도저히 그냥 넘길 수가 없다.
짧게 물을 마신 오월은 내게 물병을 다시 내밀었다.
"더 마실래요?"
"아뇨. 괜찮아요."
물을 마신 직후라 더욱더 촉촉하고 꼴릿하게 날 자극하는 오월의 입술,
미치겠네. 그냥 키스 갈기고 싶다.
오월은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민망하다는 듯 웃으며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이 와중에도 날 오월의 예쁜 입술만 바라보고 있었고, 그녀의 입술은 점점 가까워졌다.
뭐지?
눈을 살포시 감은 오월이 내 옷깃을 살짝 붙잡고, 까치발을 들었다.
쪽.
포근하고 말랑하게 내 심장을 간지럽히는 오월의 입맞춤.
짧은 입맞춤이 끝나고,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돌린 오월의 귀가 붉게 달아올라 있다.
"……입술을 왜 그렇게 쳐다봐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