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6화 〉 오월이 하고 싶은 거 (1)
* * *
"못할 거 뭐 있어요."
꽤나 자신만만한 내 대답은 오월을 벙찌게 만들었다.
흐음, 나름 진지하게 얘기한 건데 별로 믿음이 안 가나?
"오월 씨가 가고 싶다는데, 가면 되죠."
"그게 그렇게 쉽게 될 리가 없잖아요."
오월은 기운 빠진다는 듯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고, 난 짧게 미소 지은 뒤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적어도 오월 씨가 말한 두 곳은 어떻게든 가게 해줄 테니까, 기다려요."
"뭘 어떡하려고요. 문제 생기면 큰일 나요……."
근심이 가득해 보이는 오월의 얼굴.
하긴, 오월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는 간다.
누가 봐도 연인 같은 모습으로 남자와 데이트를 하는 모습이 인터넷에 퍼진다면 내 생각보다 더 피곤한 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지겠지.
특히 광고 계약 같은 문제는 이미지와 크게 직결되는 금전적인 사항이니 절대 우습게 볼 수 없다.
법 적으로 간다면 내 입장에선 손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고 말이야.
그러니, 더욱더 신중하게 행동할 생각이다.
안 걸리면 되는 거잖아?
"오월 씨의 상황을 가볍게 생각하는 건 절대 아니에요. 저 믿어봐요."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속상해 보이기만 했던 오월의 얼굴에 조금씩 기대감이 생기고 있었다.
뭐, 그렇다고 솔직히 대단한 방법 같은 건 없다.
애초에 코스토코에서 장 보는 건 딱히 어려운 일은 아니지.
제주도에서도 잘만 돌아다녔는데 뭐.
사람 많은 시간만 피해서 대충 얼굴만 가려도 충분히 안전하게 다녀올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놀이공원인데,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을 생각하면 생각보다 간단한 방법으로 해결될 수도 있다.
조금 전에 말했던 것처럼 들키지만 않으면 되잖아?
난 싱긋 웃으며 오월을 바라봤고, 그녀는 한숨 섞인 미소와 함께 내 손을 붙잡았다.
"뭘 어떡하려는 건데요?"
"내일 아침에 설명해줄게요."
어이 없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오월.
"……설마 내일 바로 가려는 거에요?"
"당연하죠. 이런 건 원래 생각 났을 때 즉흥적으로 하는 거에요."
"아니, 가볍게 생각 안 한다면서요!"
"생각은 무겁게, 행동을 빠르게. 몰라요?"
"몰라요!!! 난생처음 들어보는 소리구만!"
"그러겠죠. 저희 중대장님이 자주 하시던 말씀이거든요."
오월이 입을 앙다물고, 손바닥으로 내 팔뚝을 가볍게 한 대 쳤다.
뭐랄까, 괜히 스킨쉽 하는 느낌이랑 비슷하네.
"이씨, 후우…… 그래도 믿어볼게요."
작게 한숨을 쉬며 살포시 눈을 감았다 뜨는 오월.
예쁘긴 진짜 존나 예쁘네. 이런 풍경에서 저런 다양한 표정 변화를 보니깐, 더 컴퓨터 그래픽 같잖아.
그래도 내 실없는 농담 덕분에 오월은 기분이 꽤나 풀렸는지 조금 전보단 상당히 편해 보이는 얼굴로 작게 미소 짓고 있었다.
"나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으니깐, 너무 걱정하지 마요."
걸리면 안 되는 건 이쪽도 마찬가지거든.
물론, 오월만큼 피곤한 문제들이 일어날 정도는 아니지만, 나도 걸리게 되면 나름대로 대참사가 일어난단 말이지.
후우…… 뭐, 결국은 조심해야 한단 소리다.
사실 애초에 그렇게 사람 많은 장소 자체를 안 가는 게 베스트이긴 하지만, 오월이 원한다면 얘기가 달라지지.
나도 오월과 즐거운 추억을 쌓아서 나쁠 건 전혀 없고.
그나저나, 이 풍경을 배경으로 오월을 바라보는 건 도저히 질리지가 않는구만.
부드러운 머릿결이 바람에 가볍게 흩날렸고, 그 기세를 타 자연스럽게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는 오월은 마치 여신 같았다.
생긴 것도 그렇지만, 분위기가 정말로 여신 같다.
그렇게 내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 오월은 민망하다는 듯 다급하게 머리칼을 정돈했다.
근데, 그렇게 하면 더 산발이 되는 거 아니냐.
"근데, 어디로 갈 건데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 기대는 되나 봐요?"
날 짓궂은 표정으로 노려보는 오월.
"당연하죠……. 걱정이 돼서 그렇지."
"흐음, 조금이라도 오월 씨가 걱정을 덜 할 수 있는 곳으로 갈게요."
최대한 넓은 곳으로 가면 아주 조금이라도 사람을 마주치는 횟수를 줄일 수 있겠지.
내 대답을 들은 오월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입술을 뗐다.
"……솔직히 시온 씨가 그렇게 말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뻐요."
"더 기쁘게 해줄테니깐, 기대하고 있어요."
난 오월의 손을 더욱더 꽈악 붙잡았고, 한참 동안 풍경을 구경하던 우리는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그나저나, 저렇게 말하는 거 보면 크게 기대는 안 하고 있는 거 같구만?
뭐, 너무 기대받는 것보단 오히려 이쪽이 더 마음 편하니 딱히 상관은 없다.
어차피 당장 내일 갈 생각이니까.
"이제 슬슬 내려갈까요?"
"네. 얼른 가요. 또 배고파졌어요."
우리는 탁 트여있는 하늘을 뒤로 한 채 다시 나뭇잎에 가려진 길을 걷기 시작했다.
와, 올라갈 땐 몰랐는데 내려오니깐 진이 다 빠지네.
오월과 나는 처음 진입했던 등산로 입구에서 방금 막 빠져나왔고, 사실상 등산은 이제 전부 끝났다.
문제는 아직 집까지 운전해야 하는 일이 남아 있다는 것이지…….
"시온 씨, 많이 힘들어요?"
고개를 돌리니 오월이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아뇨. 괜찮은데요."
"흐음…… 되게 피곤해 보이는데요?"
그러고보니 얘는 왜 이렇게 멀쩡한 거야?
따먹힌 직후엔 똑바로 걷지도 못하던 게 회복력 한번 빠르네.
덕분에 힘든 티도 못 내겠잖아.
뭐, 그래도 평범하게 지친 수준이니 딱히 큰 문제는 없다.
"배고파서 그래요. 끄떡없습니다."
"집에 갈 땐 제가 운전할까요?"
괜히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당당하게 대답하는데 오월의 한 마디가 너무도 매력적으로 들려왔다.
아, 생각해보니깐 오월이 운전도 잘했었지.
오월한테 운전대 맡겨 놓고 느긋하게 가면 좋을 거 같긴 한데…….
크흠, 솔직히 집 가는 길에 운전하는 게 너무 귀찮아서 곧장 거절을 못 하겠다.
내가 미간을 찌푸리며 심각한 고민에 빠져있자 오월이 답답하다는 듯 내 주머니에 있던 차 키를 빼갔다.
"그냥 물어본 거였어요. 제가 운전할게요."
내 차 키를 집어든 오월은 씩씩한 걸음걸이로 차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고, 난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오월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아니, 인마 보험은…….
오월이 운전해주는 내 차를 타고 편안하게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물론, 내 집은 아니고 오월의 집이다.
보험 문제는 어플로 간단하게 해결했고, 휴게소에서 간단하게 간식거리와 마실 걸 사서 대충 배도 채우니 이렇게 좋을 수가 없다.
근데, 이상하게 휴게소에서부터 오월의 표정이 묘하게 안 좋다.
감정변화가 너무 극적인 여자라 진짜 왜 저러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난 묘한 긴장감을 느끼며 침을 꿀꺽 삼킨 뒤 오월에게 말을 걸었…….
"시온 씨."
"네?"
깜짝이야. 하필 말하려는 타이밍에 말을 거냐.
운전대를 양손으로 잡고 똑바로 전방주시를 하고 있는 오월은 날 바라보지 않은 채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
"혹시 여자 형제 있어요?"
갑자기 무슨 소리야…?
"아뇨, 없어요."
잠시 날 바라본 오월은 다시 앞을 바라보며 숨을 짧게 들이마셨다.
"아까 시온 씨 휴게소 갔을 때 물티슈를 찾으려다가 이걸 찾았거든요."
날 보지도 않고 내민 오월에 손엔 알록달록한 머리끈이 하나 들려있었다.
"그리고, 메모리 시트도 2번에 내 걸로 하나 저장해 놓으려는데, 혹시 몰라서 눌러보니 누가 봐도 여자가 앉을만한 세팅이 돼 있더라고요?"
시발…… 이게 무슨 상황이야?
"이게 무슨 상황이죠?"
잠시 사고가 굳어버렸다.
머리끈? 서하은인가? 아니, 서하은이 이런 바보 같은 실수를 할 리가 없지. 저 알록달록한 색깔만 봐도 저건 무조건 리나 거다.
문제가 될만한 물건은 출발 전에 다 치웠다고 생각했는데, 대체 저런 건 어디서 찾아낸 거야?
일단 무작정 되는대로 예상해 보자면 아마 리나가 다음에도 내 차에 탈 걸 생각해서 콘솔박스 넣어놓은 것 같다. 그 상태로 차가 움직이면서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게 됐고, 그 탓에 내가 찾아내지 못한 거겠지.
그 결과 오월이 물티슈를 찾으려다 지금 발견하게 된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리나를 탓할 생각은 전혀 없다.
서하은도 아니고, 리나가 굳이 내 차에서 여자의 흔적을 숨겨야 했을 이유는 전혀 없으니까.
그리고, 메모리 시트…… 저건 분명히 서하은이 맞아.
서하은이 내 차를 자주 타고 다녔으니 그때 불편하지 않도록 미리 세팅해둔 거겠지.
아니, 근데 그걸 떠나서 세상 어떤 여자가 메모리 시트까지 의심을 해…?
서하은도 내가 메모리 시트 때문에 곤경에 빠질 거란 생각은 전혀 못했을 것이다.
이건 누구의 잘못이나 그런 문제가 아니야.
오월이 독특한 여자일 뿐이지.
긴급한 상황이 오니 나도 모르게 초인적인 지능이 생겼는지 미친 듯한 두뇌 회전으로 순식간에 상황을 정리했다.
여전히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오월.
그녀의 차갑고, 날카로운 눈빛은 처음 영상 속에서 마주쳤을 때와 상당히 닮아 있었다.
후우, 이제 남은 건 얼마나 핑계를 잘 대냐는 건데…….
지금 이 상황에선 도저히 이걸 말고는 떠오르는 게 없다. 더 좋은 방법이 있을 수도 있지만, 더 이상 질질 끌 수는 없어. 대답이 늦어질수록 오월의 의심을 커질 것이다.
난 최대한 능청스럽게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엄마가 타서 그래요."
무표정한 얼굴로 차가운 눈빛을 뜨고 있던 오월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날 바라봤다.
"……시온 씨 어머니가 이 차도 타세요…?"
"네. 가끔 끌고 다니세요. 워낙 밟고 다니는 걸 좋아하셔서……."
엄마, 미안해…….
"아, 죄송해요……."
오월은 귀를 빨갛게 붉히며 쪽팔려 죽겠다는 듯 인상을 쓰고 액셀레이터를 깊게 밟기 시작했다.
아니, 부끄러우면 부끄러운 거지 갑자기 과속은 왜 하는 거야?
"오월 씨, 괜찮으니깐 천천히 가요."
"……넵……."
상당히 민망해하고 기가 죽은 오월이 귀엽기도 했지만,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꽤나 양심에 찔렸다.
그 와중에 오월은 날 바라보며 다시 한 번 사과했다.
"정말 진심으로 미안해요. 시온 씨……."
"신경 안 써요. 그러니깐 앞에 보고 운전해요!"
와, 이렇게 창의적으로 의심을 하는 여자가 있을 줄이야.
앞으로 오월을 만날 때는 평소보다 배로 조심해야겠어…….
콩닥콩닥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숨을 고르고 있는데, 오월이 손가락 끝으로 내 손등을 간지럽혔다.
고개를 돌리니 민망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뭔가 굳은 다짐을 한 듯한 오월이 눈에 들어왔다.
난 진짜 기분 상한 거 단 하나도 없는데, 오월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제가 잘 못했으니까, 오늘 밤에 시온 씨 소원 하나 들어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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