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7화 〉 놀이공원 (5)
* * *
생각보다 사람이 많은 거 같은데…?
아니지. 개장 시간에 맞춰 왔으니 인원들 대부분 여기 입구에 모여 있는 걸 생각하면 오히려 꽤나 적을 숫자일 수도 있다.
뭐, 결국 직접 들어가서 사람이 별로 안 보이면 나름 성공적이라고 볼 수 있겠지.
후우…… 그나저나, 오월과 함께 이 인파 속을 지나려니깐 묘하게 긴장된다.
일정을 짤 때만 해도 괜찮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떨리잖아.
오히려 당사자인 오월이 더 편안해 보인다.
그도 그럴 게 오월은 선글라스 쓴 채로 별생각 없다는 듯 날 바라보며 싱긋 웃고 있었거든.
긴장된 내 감정이 얼굴에도 묻어났는지 오월은 내 손을 부드럽게 붙잡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요. 여기까지 놀러 와서 주변에 누가 있는지 신경 쓰는 사람은 많지 않을 거에요."
누가 그걸 모를까? 너가 가만히 서 있어도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는 게 문제란 말이야.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도 오월의 몸매는 너무도 뛰어났다.
아름답게 쭉 뻗은 희고 긴 다리, 타이트하게 몸에 달라붙어 라인을 부각시키는 남색 치마와 하늘색 와이셔츠.
후우…… 나 같아도 쳐다볼 수밖에 없겠네.
거짓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이 꼭 한 번씩은 가만히 서 있는 오월을 슬쩍 쳐다보고 가는 것 같았다.
뭐, 내 착각일 수도 있긴 하지만 솔직히 저 골반과 엉덩이, 잘록한 허리를 보고 시선이 안 갈 수가 없긴 하지.
그렇다고 계속 이렇게 죄지은 사람 마냥 눈치 보고 있을 순 없다.
지금이야 가만히 서 있으니 쳐다보는 거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걷기 시작하면 시선이 조금은 분산되겠지.
"알겠어요. 이제 신경 안 쓰고 당당하게 갑니다."
"아니, 그건 좀……."
난 내 손안에 들어와 있던 오월의 손을 붙잡으며 힘차게 걷기 시작했고, 오월은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어이가 없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날 따라왔다.
오월하고 손을 맞잡은 채 게이트를 지나 많은 사람들과 함께 놀이공원 입구로 들어왔다.
많다고 표현하긴 했지만, 놀이공원치고는 사람이 그다지 많은 느낌은 아니다.
확실히 입구에 모여 있어서 사람이 많다는 느낌을 받은 게 컸구나. 뭐, 이 정도면 인파면 내가 예상했던 숫자보단 적은 거 같네.
또 하나, 다행인 점이 있다면 우리와 비슷하게 입는 커플이 상당히 많다는 것이었다.
비슷한 복장의 커플이 많으니 오월이 받게 될 시선도 확실하게 줄겠지.
혼자 특출나게 예뻐서 조금 문제가 있긴 하지만…….
어쨌든 이렇게 오월과 평범한 연인처럼 손을 잡고 있으니 묘하게 야릇한 감정이 느껴지며 꽤나 간질간질하다.
아마 오월도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겠지.
뭐랄까, 말도 안 되는 소리긴 한데, 붙잡은 오월의 손에서 두근거림이 느껴지는 거 같다.
……아니면 내가 두근거리는 걸 수도 있고.
오월의 보드랍고 가느다란 손가락들을 느끼며 걷는 것도 이유 중 하나겠지만, 눈앞에 있는 중세시대 광대 마을같이 생긴 알록달록한 건물들과 가게에서 팔고 있는 화려한 기념품들이 은근히 감성을 자극한다.
흐음…… 저런 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머리띠는 하나 사고 싶네.
당연히 내가 쓸 생각은 아니고, 오월이 쓸 예정이다.
"오월 씨, 잠깐 저기 좀 들러요."
"네? 얼른 가야 줄 안 서요…!"
"얼마 안 걸려요."
오월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날 바라봤지만, 난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붙잡은 손을 잡아당기며 그녀를 끌고 왔다.
바쁘니깐 빨리빨리 움직여야지.
오월을 끌고 온 나는 재빠르게 머리띠 진열장 앞에 섰고, 잠시 주변을 둘러본 오월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시온 씨 이런 거 좋아해요?"
"딱히 좋아하진 않는데, 어차피 놀이기구 타려면 오월 씨 담요 필요하잖아요. 담요 사는 김에 하나 사려고요."
"……."
"오월 씨가 쓴 모습 보고 싶기도 하고."
말문이 막혔는지 입술을 굳게 닫아버린 오월.
"왜요? 쓰기 싫어요?"
내가 싱긋 웃으며 말하자 오월은 귀를 붉히며 말끝을 흐린다.
"누가 싫대요? 골라주던가……."
흐음, 은근히 좋아하는 거 같은데.
난 진열대에 걸려 있는 토끼 머리띠를 하나 꺼내 조심스럽게 오월의 머리에 씌웠고, 이내 오월의 머리 위로 귀엽게 솟아 있는 토끼 귀가 생겼다.
"귀엽네요."
잠시 거울을 보고 이리저리 머리띠를 만지더니 다시 날 바라보는 오월.
"……마음에 들어요?"
내가 싱긋 웃으며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자 오월은 민망하다는 듯 입을 앙다물었다.
진짜 존나 귀엽잖아. 근데, 그 와중에 묘하게 야한 거 같기도 하네…….
토끼 귀 머리띠를 쓰고 부끄러워하는 오월이라니, 어찌 됐든 이건 귀한 모습이다.
오월은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내 시선이 민망했는지 몸을 돌려 거울을 바라봤고, 슬쩍 휴대폰을 꺼내 셀카를 찍기 시작했다.
쪽팔려하면서 은근히 할 건 다 하는구만.
난 사진 찍는 오월을 잠시 흐뭇하게 바라본 뒤 안쪽으로 들어가 진열대에 있는 담요를 토끼 머리띠와 무난하게 어울리는 디자인으로 하나 골라서 챙겼다.
아직도 귀여운 모습으로 사진을 찍고 있는 오월.
조심스럽게 오월에게 다가간 나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오월 씨, 계산해야죠."
"아, 네."
내 말을 듣고 다급하게 머리띠를 벗은 오월은 잠시 뭔가 이상하다 싶은 표정을 짓더니 내 손목을 붙잡았다.
"잠깐, 시온 씨는 안 써요?"
"네…? 전 절대 안 쓰죠. 머리 망가져요."
지금까지 오월에게 온갖 몹쓸 짓을 하며 그녀의 많은 표정을 봐왔지만, 이렇게 미친놈 바라보는 듯한 표정은 처음이다.
심지어 선글라스도 쓰고 있는데 말이야.
살짝 위협을 느끼긴 했지만, 다행히 오월이 지금 쓰고 있는 토끼 머리띠 하나만 계산하고 가게에서 나올 수 있었다.
조건을 하나 걸긴 했는데, 어쨌든 머리띠 쓰는 건 겨우 물렸다.
기껏 열심히 만진 머리 눌릴 바엔 차라리 유압 프레스에 제대로 눌려서 죽는 게 낫지.
어쨌든 오월은 토끼 귀를 살랑살랑 흔들며 내 앞에서 귀엽게 걸어가고 있다.
그나저나, 저거 오히려 더 눈에 띄는 거 같단 말이지…….
머리띠를 씌우고 싶다고 너무 무작정 행동했나?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오늘 아니면 저런 모습 절대 못 볼 텐데 어떻게 그냥 포기하겠어.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오월처럼 머리띠를 쓰고 있는 사람이 상당히 많아서 이 놀이공원 자체에 꽤나 잘 녹아들고 있다는 것이다.
눈에 띄긴 해도, 수상하게 여길 사람은 없겠지.
그렇게 오월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며 걷고 있는데, 눈앞에 이것저것 주렁주렁 달려있는 커다란 나무가 나타났다.
저것도 존나 오랜만에 보네. 학생 때 이후로 처음 보는 건가?
동심에 살짝 발가락 정도 담그는 순간, 오월이 다급하게 내 손목을 붙잡았다.
"어, 저거다. 시온 씨 빨리 와요!!!"
크흠,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기도 전에 오월에게 미친 듯이 끌려가는 중이다.
조금 전엔 내가 오월을 끌고 다녔는데, 그새 반대가 돼버렸네.
오월에 손에 질질 끌려가듯 빠르게 걷다 보니 눈앞에 놀이기구가 하나 나타났다.
"일단 이거부터 얼른 타요."
영어로 더블 락스핀이라고 큼지막하게 쓰여있는 놀이기구.
커다란 그네 같은 느낌인데, 존나게 빙글빙글 돌아댈 건 확실하게 알겠다.
이제 막 개장한 덕분에 줄이 전혀 없어 사람들은 차례차례 탑승하고 있었고, 반쯤 달리던 오월과 나도 곧장 탈 수 있었다.
"오월 씨, 뒷줄에 타요. 그래야 얼굴 안 보이지."
오월은 내 말을 듣고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뒤쪽으로 갔고, 나도 자연스럽게 그녀를 따라가 자리에 앉았다.
흐음, 오월 옆에 누가 앉아 있으려나.
둘이 한 줄로 앉는 놀이기구면 상관없는데, 이렇게 다 같이 앉아야 하는 놀이기구는 위험하단 말이지.
다행히도 오월 옆에는 꽤나 나이 지긋한 아저씨가 있어서 그녀를 알아볼 걱정은 크게 할 필요는 없는 거 같다.
우리는 스피커로 퍼지는 직원의 안내음성을 들으며 벨트와 안전바를 착용했고, 이내 꽤나 텐션 높은 직원의 목소리와 함께 놀이기구가 작동했다.
아, 이거 존나 시시할 거 같은데…….
솔직히 이 놀이기구보다 오월 옆자리에 다른 누군가 앉아 있는 게 더 무섭다.
"우와아아악!!!"
"꺄아아아아!!!"
와, 씨팔 생각보다 더 격하잖아?
놀이공원 하도 안 왔더니 놀이기구가 이렇게 짜릿한 건지 잊고 있었다.
아니 애초에 앞뒤로 계속 미친 듯이 돌아대는데, 짜릿하지 않을 수가 없지.
정신 없는 와중에 고개를 슬쩍 돌려 옆을 바라보니 오월이 즐겁다는 표정으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오월이 이렇게까지 신이 난 모습은 처음 보는 거 같네.
아니지. 게임을 할 때도 살짝 저런 느낌이 나긴 하는구나.
어쨌든 그렇게 다 같이 정신없이 소리를 지르며 머리를 흔들어대는 시간이 끝나고, 놀이기구가 멈췄다.
"후아……."
옆을 보니 머리가 엄청나게 산발이 돼 있는 오월이 있었다.
흐음…… 저 정도면 놀이기구 타다 누가 알아볼 걱정은 안 해도 됐었겠는데?
그나저나, 저건 날 보고 있는 거야. 뭘 보고 있는 거야.
"왜 갑자기 가오나시가 됐어요?"
"……뭐라는 거야…!"
오월은 다급하게 머리카락을 정리하기 시작했고, 이내 예쁜 얼굴이 드러났다.
난 그런 오월을 보고 싱긋 웃었고, 그녀도 날 바라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근데 시온 씨 생각보다 소리 엄청 지르네요?"
"크흠, 그럴 수도 있죠."
"아니, 어제 얘기할 땐 놀이기구는 관심 없는 거처럼 굴었잖아요. 완전 의외네."
"오월 씨 머리 흩날리는 거 보고 귀신인 줄 알아서 그랬던 거에요."
"푸흡…!"
서로 마주 보고 있던 우리는 실소를 터트렸고, 천천히 움직이던 놀이기구는 서서히 멈췄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