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0화 〉 놀이공원 (8)
* * *
이 씨팔! 나한테 왜 이래!!!
오월과 애들한테 집중 공격을 정신없이 한참 동안 당하고 있던 중 드디어 범퍼카가 작동을 멈췄다.
진짜 뒤지는 줄 알았네.
안도의 한숨을 내 쉬니 살짝 떨어져 있는 오월이 아쉽다는 듯 입 맛을 다시며 이미 멈춰버린 범퍼카의 핸들을 이리저리 돌리고 있었다.
저거 저번에 격투 게임 졌던 거 오늘 화풀이하는 거 아니야…?
후우…… 뭐가 됐든 일단 끝났다.
범퍼카에서 내려 출구로 빠져나가니 같이 탑승했던 초등학생들이 재밌었다는 듯 까르르 웃고 있었다.
어우 씨팔, 저 잼민이 새끼들 진짜 꿀밤 한 대 갈겨주고 싶네.
내가 애들을 쳐다보고 있자 뒤에 서 있던 오월이 내게 팔짱을 끼며 바짝 붙었다.
그 과정에서 오월의 풍만한 가슴이 내 팔꿈치가 찌르게 되자 나도 모르게 화가 사르르 녹아드는 거 같았다.
"완전 재밌었죠?"
배시시 웃으며 날 올려다보는 오월.
넌 재밌었겠지, 인마. 난 몇 번 움직이지도 못했어.
그래도 저렇게 좋아하는 거 보니 기분이 썩 나쁘지 않네.
"머리가 조금 울리는 거 같긴 한데…… 뭐, 재밌긴 했어요."
솔직히 얘기하면 오월 기분 풀어주려 탔다가 내 몸이 다 털린 기분이긴 하다.
"시온 씨 상태 보면 머리만 울리는 게 아닌 거 같은데요."
오월은 여전히 재밌다는 듯 미소 지으며 내게 바짝 붙어 더욱더 다정한 모습은 연출했고, 난 팔을 크게 움직여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그래 보이면 부축 좀 해줘요."
"네. 저기 의자에 앉혀 드릴까요?"
내 허리를 감싸며 능글맞은 표정으로 웃는 오월.
반응 보니깐 기분은 확실히 다 풀린 거 같네.
"……됐거든요."
어이 없다는 듯한 내 대답과 함께 오월과 나는 실소를 터트렸고, 이렇게 서로 다정한 모습을 하고 있자 조금 전 범퍼카를 같이 탔던 초등학생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집중됐다.
그래도 쟤네가 웃기지도 않은 짓거리를 해준 덕분에 오월이 더 즐거워 졌으니 고마운 마음도 드네.
내가 애들 있는 쪽을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자 오월도 이내 그쪽을 바라보게 됐고, 그녀는 애들을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오월에게 인사를 받자 난리를 치며 허둥대기 시작하는 아이들.
확실히 아이돌이어서 그런가 팬 서비스도 좋구만.
아니지, 다 같이 범퍼카 타고 날 때려 박았으니 난 모르는 동료애라도 있는 건가?
뭐 어쨌든, 너흰 오늘 그냥 예쁜 누나가 아니라 엄청난 누나한테 인사받은 거니까 평생 추억으로 간직해라.
정신 없는 건 범퍼카에서 이제 끝인 줄 알았는데, 아직 더 남아 있었다.
이름도 제대로 기억 안 나는 후룸라이드를 타며 물을 한 바가지 얻어맞고, 곧바로 바이킹까지 두 번 연달아 탄 뒤 진이 다 빠져서 터벅터벅 걷고 있다.
시발, 이거 언제 마르냐. 아직도 축축하네.
내 옆에서 걷고 있는 오월도 이제는 조금 기운이 빠졌는지 당장이라도 앞으로 뛰쳐나갈 거 같던 초반에 비하면 꽤나 지쳐 보였다.
줄 서는 시간이 은근히 길었으니 서 있던 시간도 꽤나 고역이었겠지.
그 와중에 얘는 왜 이렇게 뽀송뽀송하냐? 나만 물 맞고 오월은 한 방울도 안 맞은 게 존나 어이없네.
예쁜 여자는 망가지지 말라고 물도 피해 가는 거냐?
어찌됐든, 진짜 하얗게 불태웠다.
그나저나 아직 탈 게 더 남았으려나?
나는 긴장되는 마음으로 오월을 슬쩍 바라봤다.
"이제 어디 갈 거에요?"
꽤나 지친 듯한 모습이지만, 아직은 설렘이 잔뜩 남아있는 오월의 눈빛.
"시온 씨가 동물 보고 싶다고 했으니깐, 그쪽으로 가려고요."
크흠, 솔직히 이제 안 보고 싶어졌는데…… 다리 존나 아프단 말이야.
그래도 이제 와서 어쩔 수 없다. 날 바라보며 말하는 오월의 눈이 너무 초롱초롱했거든.
후우…… 가깝기라도 해라, 도저히 멀리는 못 가겠다.
"엄청 기대되네요. 혹시 많이 멀진 않죠?"
"……기대되는 거 맞아요?"
대답을 너무 무미건조하게 했는지 오월이 수상하다는 눈빛으로 날 바라본다.
아니, 여기가 진짜 존나게 넓어서 그래…….
"당연하죠. 사막여우 귀엽겠다."
"아니, 무슨 로봇이에요…?"
로봇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나도 모르게 어이가 없어서 웃어버렸고, 오월도 덩달아 나와 함께 웃었다.
확실히 이러니저러니 해도 놀러 오니깐 좋긴 하네.
"그래서 사막여우는 얼마나 걸어야 볼 수 있는데요."
"프흡…!"
그렇게 우리는 다시 웃고 떠들며 즐겁게 걷기 시작했고, 시간이 조금 지나자 처음 놀이공원에 들어오며 봤던 큰 가짜 나무가 나타났다.
아까 봤을 땐 오월이 급발진해서 갑자기 끌고 간 덕분에 제대로 구경도 못했었지.
근데 뭐, 막상 보니깐 딱히 구경할 거리도 없다.
그냥 존나게 큰 브로콜리에 뭐가 이것저것 주렁주렁 달려있네.
나란히 걸으며 나와 마찬가지로 나무를 바라보던 오월이 뒤편을 가리켰다.
"저 뒤쪽에 있는 리프트 타고 내려가면 바로 도착이에요. 제가 금방이라 했죠?"
크흠, 우리 둘이 생각하는 금방의 가정이 조금 다른 거 같은데…….
뭐라 따질까 했지만, 오월이 너무 기세등등하게 말해서 곧바로 포기했다.
"넵. 금방이네요."
나무에 점점 가까워지니 그 밑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사람들이 몇몇 보였고, 오월은 그 모습을 빤히 쳐다봤다.
흐음…… 오월도 저기서 사진 찍고 싶으려나?
은근히 이런 거 말을 잘 못하는 성격인 거 같은데, 내가 슬쩍 얘기해봐야겠다.
근데, 저 사람들 혹시 우리 쪽으로 오는 건가? 그냥 단순히 내 착각인 거 같기도 하고…….
살짝 떨어진 곳에서 커플로 보이는 두 사람이 우리가 있는 방향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일단은 그냥 지나가는 길 일수도 있으니까 신경 끄자.
오월에게 넌지시 사진에 대한 말을 하려는데, 어느새 눈앞까지 다가온 커플에게 선수를 빼앗겼다.
"저기요. 죄송한데…… 저희 사진 한 장만……."
나무 근처에 서 있던 어려 보이는 커플, 우리한테 오는 거 맞았네.
혹시나 제주도 식물원에 있을 때처럼 오월이 굳어버렸을까 싶어 옆을 돌아봤는데, 다행히 이번엔 커플이 다가오는 모습을 보고 대충 상황을 예측하고 있었는지 편안하고 여유로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한 번 겪어봤다고 이제는 당황 안 하네?
난 오월을 슬쩍 보고 흐뭇하게 웃은 뒤 다시 앞을 바라봤다.
일단 이거부터 해결해야지.
눈앞에 커플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대여한 듯한 옷을 맞춰 입고 있었고, 쑥스럽다는 표정으로 내게 핸드폰을 내밀고 있었다.
꽤 어려 보이는데, 아직 학생인가?
내가 두 사람을 빤히 쳐다보고 있자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콕 찌르는 오월.
"시온 씨가 찍어 드려요."
"네 그럴게요. 폰 주세요."
내가 손을 내밀자 커플 중 귀엽게 생긴 여자애가 내 손바닥 위에 폰을 얹으며 해맑게 인사했다.
"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와 오월에게 인사를 마친 두 사람은 커다란 가짜 나무 앞에 서서 어색하지만 나름대로 다정해 보이는 포즈를 취했다.
남의 핸드폰을 들고 사진을 찍는 내 모습이 재미있는지 아랫입술을 질끈 물고 웃음을 참는 오월.
쟤는 자기가 나보고 찍어주라더니 왜 저러는 거야…….
그나저나, 저번에 식물원에서도 딱 지금 이런 느낌 나는 커플이 사진 찍어달라고 부탁을 하더니 오늘도 이러네.
우리가 사진을 잘 찍게 생겼나?
뭐, 좋은 게 좋은 거겠지.
두 사람의 겉모습도, 부탁하는 태도도 꽤나 마음에 들었기에 나름대로 최대한 예쁘게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노력했고, 오월은 그런 내 모습을 흐뭇하다는 듯 보고 있었다.
흐음, 이 정도면 나름 잘 찍어준 거 같다.
원하는 만큼 찍었는지 커플을 쭈뼛대며 우리에게 다가왔고, 난 두 사람에게 핸드폰을 건네줬다.
"최대한 열심히 찍었는데, 마음에 들지 모르겠네요."
"아니에요. 완전 마음에 들어요!"
"……아직 사진도 안 보셨는데요…?"
"아…!"
귀를 붉히며 잔뜩 당황한 채 허둥지둥 자신의 핸드폰을 다급하게 만지는 여자.
눈앞에 있는 여자의 귀여운 반응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얼른 확인해 보세요. 별로면 다시 찍어 드릴게요."
"괜찮아요! 혹시 두 분은 사진 안 찍으세요…?"
크흠, 어떻게 이것마저 식물원에 있을 때랑 패턴이 똑같냐?
저번엔 거절했었는데, 오늘도 거절해야 하나? 어떡하지…?
오월이 평범한 여자라면 나도 부담 느낄 거 없이 그냥 찍었겠는데, 그렇지 않으니 고민이다.
사진이야 회전목마에서도 실컷 찍었고, 그때를 생각해보면 큰 문제가 없을 수도 있겠지만, 그건 우리가 서로의 사진을 직접 찍어줬던 것이다.
지금은 찍어주는 사람도 다른데다 둘이 나란히 서서 함께 찍는 거니 경우가 조금 다르다고 볼 수 있지.
하지만, 이런 걱정들 전부 다 내 기우일 수도 있긴 해. 의외로 아무 일 없이 넘어갈 수도 있는 거니까.
후우, 모르겠다. 오월이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했던 모습을 생각하면 무작정 거절할 수도 없고…….
결국 직접 물어보는 수밖에 없겠네.
"어…… 우리도 찍을까요?"
난 머리가 아프다는 표정으로 오월을 바라봤고, 그녀는 부드럽게 웃으며 내 손을 붙잡았다.
"네. 그래요."
살짝 날 올려다보며 미소 짓는 오월.
너무도 사랑스러운 오월을 보고 있자,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간다.
진짜 예쁘네. 감정을 조종당하는 거 같아.
그리고, 이런 우리 둘의 모습을 볼에 홍조를 띠며 바라보던 여자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완전 아이돌……."
"예?"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