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뉴투브속 그녀들을 내 마음대로-241화 (241/273)

〈 241화 〉 로렌 오키나와 (11)

* * *

마음에 드는 분위기, 꽤나 맛이 괜찮은 안주, 묘하게 맛없는 술.

가벼운 대화를 나누며 한 잔씩 마시다 보니 어느새 로렌과 나 둘 모두 취기가 꽤나 올랐다.

로렌이 생각보다 술을 잘 마시네.

여름휴가 때는 술자리에서 같은 테이블에 있긴 했지만, 로렌이 유부녀인 걸 알고 있는 사람들이 주변에 잔뜩 있는 상황이라 조심스러운 마음에 딱히 관심을 가지지 못했고, 낮에 초밥집에서 맥주를 마셨던 건 주량을 확인할 정도는 아니었으니 나름대로 로렌의 새로운 정보를 알게 된 셈이다.

"정신없이 마시느라 몰랐는데, 누나 생각보다 술 잘 마시네요."

얼굴이 살짝 벌게진 로렌이 의아한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응? 잘 마신다고 할 정도는 아니야. 그냥 적당히 마시는 거지."

"그래요? 그럼 연륜에서 나오는 주량인 건가…?"

"죽을래? 너랑 나랑 나이 차이 그렇게 많이 안 나거든?"

로렌은 인상을 찌푸리며 날 흘겨봤고, 난 싱긋 웃었다.

"뭐, 누나가 그렇게 생각하면 어쩔 수 없죠."

"……나 진짜 삐진다?"

삐졌다는 듯 귀여운 표정을 짓는 로렌.

"아, 농담이에요. 생긴 것만 보면 내 동생 같긴 해."

"그건 아니거든? 오바 좀 하지 마!"

"넵."

로렌과 나는 조용한 가게 분위기에 맞춰 작게 웃었고, 나와 눈을 마주치고 있던 그녀는 이내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내 주량은 그렇다 치고, 시온이 너는 술 엄청 못 마시지 않아?"

뭐지? 갑자기 자존심을 건드네.

"제가요? 차라리 못 생겼다고 욕을 해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아니, 너 여름에 하은 씨네 펜션 놀러 갔을 때 금방 뻗어서 들어가 버리던데?"

크흠, 맞아 그랬었지.

이제보니 그때 끝까지 테이블에 남아 있지 못해서 로렌의 주량을 내가 몰랐던 거 같다.

근데, 그건 노골적으로 니들이 나만 맥인 거였잖아.

"……그땐 사정이 있었어요."

"사정은 무슨 나도 그때 같은 테이블에 있었거든?"

"그럼 누나도 봤겠네. 테이블에 앉은 여자들이 죄다 나한테만 짠하자고 잔 들이미는데 무슨 수로 안 취해요."

"본인이 좋아서 먹어놓고 핑계 대기는……."

재밌다는 듯 날 보며 웃고 있던 로렌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크흠, 어쨌든 그건 드문 경우에요. 평소 같았으면 그렇게 안 취한다고."

"그래. 좋겠다."

반응이 왜 저래?

분위기가 완전 삐진 거 같은 느낌인데…….

난 로렌의 묘한 표정을 보며 괜히 장난치듯 말했다.

"오늘 누가 끝까지 남나 한 번 해봐요?"

"됐거든, 내일 일정도 있는데 무슨……."

"휴양 목적으로 놀러 온 건데, 뭐 어때요. 먹고 싶으면 먹고,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그러고 노는 거지."

"됐다고, 난 그렇게 시간 보내기 싫어."

표정만 봐도 알겠다, 삐진 거 맞네.

애초에 휴양 여행 얘기할 때 나보다 더 신나 있던 사람이 저러면 내가 눈치를 못 챌 수가 없잖아.

난 우울해 보이는 로렌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고, 내 시선을 느낀 그녀는 어깨를 살짝 움츠리더니 나지막하게 말했다.

"……미안해. 그냥, 그때 너 여자들이랑 사이 좋게 수다 떨고, 장난치고 놀았던 거 생각하니깐 갑자기 기분이 안 좋아졌어."

이게 이유일 거 같았다. 잠깐이지만 저번에도 한 번 얘기했었고, 그때 당시 취해서 단편처럼 끊겨 있는 기억이지만, 로렌의 표정이 좋지 않았던 게 분명히 남아있다.

로렌은 유부녀인 본인 입장 생각하느라 나랑 말 한마디도 제대로 못 나누는 상황인데, 난 다른 여자들 옆에 끼고 개 취해서 실컷 놀았으니 기분이 안 좋을 만도 하지.

하지만, 그때 당시엔 로렌이 이렇게까지 속상해할 줄은 전혀 몰랐다.

그녀가 내게 이렇게까지 빠져 있는 건 전혀 몰랐으니까.

난 테이블 위에 있는 로렌의 손등을 살포시 붙잡았다.

"지금 내 옆에 있는 건 누나잖아요. 어떤 마음인지 이해하니까, 기분 풀어요."

"……몰라."

"모르긴 뭘 몰라요. 단둘이 일본에 여행까지 와놓고."

표정이 조금 풀어진 거 같긴 한데, 아직 애매하다.

그나저나, 로렌도 취하면 이렇게 앙탈을 부리고 찡찡거리는 구나.

내일 오전에 술 깨고 나면 얼마나 민망해하려는 거야?

그 와중에 이것도 새로운 모습이라고 존나게 귀엽네.

난 씨익 웃으며 로렌의 손등을 간지럽혔다.

"나 그래도 이렇게 일본으로 여행 와본 건 누나가 처음인데, 계속 그렇게 별거 아니었던 술자리로 속상해할 거에요?"

"……안 그래도 이제 그만 하려고 했거든? 나 취하니까 진짜 별소릴 다 하네. 쪽팔려……."

로렌은 아랫입술을 귀엽게 삐죽 내밀었고, 난 그 모습을 보며 실소를 터트렸다.

여기서 술을 더 마시다간 진짜 호텔까지 똑바로 못 찾아갈까 봐 계산하고 밖으로 나왔다.

야심한 밤, 관광객과 화려한 조명으로 가득 차 있던 거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은은한 가로등의 불빛만 남은 채 텅텅 비어있었다.

근처 가게들이 전부 다 문을 일찍 닫는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 일 줄은 몰랐네.

마땅히 할 게 없으니 관광객들도 다 숙소로 들어갔겠구나.

그렇다고 허전하거나 쓸쓸한 느낌이 드는 건 절대 아니다.

애초에 너무 화려한 것보단 이런 분위기가 더 내 취향이란 말이지.

심지어 옆에 날 한 없이 사랑하는 예쁘고 꼴리는 여자도 있으니 쓸쓸함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있을 리가.

꽤나 취기가 올라 달아오른 로렌은 내게 바짝 붙어 팔짱을 낀 채 내 팔뚝에 머리를 기댔다.

"날씨 너무 좋다."

그러네.

가게에 들어오기 전 조금 쌀쌀하게 느껴졌던 날씨는 술기운 때문인지 이젠 시원할 뿐이었다.

심지어 로렌한테 겉옷도 벗어준 상태인데, 이 정도면 내가 존나 취했거나, 그게 아니면 바람이 조금 죽을 걸 수도 있겠네.

난 살짝 흘러내려 로렌의 어깨를 드러나게 하고 있는 내 겉옷을 끌어올렸다.

"그래도 옷 잘 챙겨 입고 있어요. 감기 걸릴라."

"시온이 너는 안 추워?"

"전 더운데요. 입수도 가능할 듯."

로렌은 재미있다는 듯 배시시 웃었고, 난 그녀의 어깨를 감싸 더욱더 세게 안았다.

"호텔 가서 한 잔 더 할 거야?"

"전 상관없어요. 방에서 먹으면 편하긴 하겠네."

"그럼 편의점 들려서 술이랑 먹을 거 사가자. 나 여기 편의점 음식도 먹어보고 싶어."

"저도요. 좀 가벼운 거 먹으면 좋을 거 같아."

그렇게 로렌과 다정한 모습으로 수다를 떨며 한산한 거리를 단둘이 걷고 있으니 이내 환하게 빛나는 편의점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누가 봐도 연인 같아 보이는 모습으로 편의점에서 간단하게 장을 본 뒤 나왔다.

조금 전 가게에서 먹었던 아와모리랑 맥주, 그리고 간단한 안줏거리들.

솔직히 다 똑같은 편의점 음식일 텐데, 다른 나라말이 쓰여 있으니 괜히 궁금하네.

봉투에 한가득 물건을 담은 뒤 한 손에 들고, 반대 팔엔 팔짱을 낀 로렌을 달고 호텔 방향으로 가려는데 그녀가 내 팔을 잡아당겼다.

부끄러운 표정으로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내 입술을 떼는 로렌.

"시온이 너 진짜 괜찮으면 아까 봤던 바닷가에서 맥주 한 캔 마실까?"

흐음…… 귀찮긴 한데, 분위기는 좋을 거 같네.

뭐, 나쁠 건 없으니까.

"그래요."

나름 흔쾌한 표정으로 대답했는데, 로렌은 뭔가 불편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진짜 안 추운 거 맞지? 나 때문에 억지로 안 가도 돼……."

"제가 억지로 뭘 하겠어요?"

"……그건 그렇다. 그럼 갈래!"

로렌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고, 난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목적지를 틀어 잠시 걸으니 낮에 봤던 에메랄드빛 바다가 나타났다.

물론, 낮에 그랬다는 거고, 지금은 존나게 시꺼멓다.

모래 사장 외엔 아무것도 안 보이네, 파도 소리도 잘 안 들리고

그래도 분위기 자체는 오늘 느꼈던 것 중에 가장 좋은 거 같다.

걸을때마다 들리는 모래가 무너지는 소리도 나쁘지 않아.

로렌이 가고 싶어해서 귀찮음을 무릎 쓰고 온 거였지만, 생각보다 너무 마음에 든다.

"저쪽에 앉을까요?"

"응."

난 걸터앉을 수 있을 만한 옆으로 쇠로 된 옆으로 길쭉한 차단봉을 가리켰고, 내 손을 붙잡고 있는 로렌은 곧장 날 따라 걸었다.

바다 쪽으로 더 가까이 오니 약하게 치는 파도 소리가 꽤나 잘 들렸다.

의자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편하게 걸터앉은 나와 로렌.

난 물건이 가득 든 봉투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맥주 한 캔을 꺼낸 뒤 따서 로렌에게 건네줬다.

"고마워."

수줍은 미소를 짓는 로렌을 보고 있으니 가슴 속에서 무언가 일렁이는 듯하다.

얼른 술 더 마셔야겠네.

난 곧장 내 맥주도 하나 꺼낸 뒤 캔을 따서 정면의 바다를 바라본 채 로렌에게 스윽 내밀었다.

뭉툭한 소리와 함께 맥주가 가득 든 캔이 부딪혔고, 난 곧장 시원하게 한 입 들이켰다.

으, 입안이 뜨거워서 그런가 존나 시원하네.

로렌도 맥주를 한 입 마신 뒤 나와 비슷한 기분을 느끼고 있는지 머리가 아프다는 듯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어떻게 저런 표정마저 귀엽냐.

흐뭇한 표정으로 로렌을 바라보고 있는데, 고개를 잠시 휘저은 그녀가 눈을 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허리를 살짝 숙인 채 조금 전과 사뭇 다른 진지한 눈빛으로 날 올려다보는 로렌.

로렌은 무언가 망설이고 있는지 입술을 몇 번 달싹이더니 힘겹게 말을 꺼냈다.

"……시온아, 나 너한테 물어보고 싶은 거 있어."

갑자기 또 왜 이래…?"

혹시 무슨 일이 있나 걱정스러운 마음이 생겼지만, 로렌이 술에 꽤나 취해 있다는 걸 떠올린 나는 덤덤하게 답했다.

"뭔데요?"

"너는…… 나, 가벼운 여자라고 생각하지?"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