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4화 〉 로렌 오키나와 (14)
* * *
오키나와 둘째 날은 라멘집에 늦은 아침을 먹는 걸로 시작했다.
아니지, 먹는 걸로 따지자면 로렌을 따먹은 것부터 시작이겠구나.
어쨌든 제대로 해장을 하고 나온 로렌과 나는 무작정 길을 걸었다.
"뭐라도 먹으니깐, 좀 살겠네."
기지개를 켜며 혼잣말을 하는 내게 로렌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난 아직도 엉덩이 아파서 죽겠거든?"
"미안해요."
내가 실실거리며 대답하자 날 노려보는 로렌.
그렇게 쳐다보면 엉덩이 또 때려주고 싶은데…….
조금 전 호텔에서 모닝 섹스를 하며 후배위 자세일 때 엉덩이를 몇 대 때렸더니 아프다고 저렇게 앙탈을 부리고 있다.
뭐, 내가 조금 흥분한 탓에 평소보다 세게 때리긴 했지만.
난 레깅스를 입고 있는 로렌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토닥토닥 두들겼다.
"식사는 맛있게 하셨어요?"
"……느끼해."
"네? 제가요?"
"아니, 라면이 느끼했다고…!"
어이없다는 듯 날 쳐다보던 로렌은 피식 웃었다.
웃는 것도, 인상 쓰는 것도, 다 예쁘단 말이지.
"저도 그랬어요. 근데, 오히려 느끼해서 속은 제대로 풀었어요. 묘하게 익숙한 맛이라 불편한 것도 없었고."
"한국에도 라멘집은 많으니깐, 그래서 익숙한 거 아닐…… 이제 그만 좀 만져줄래…? 사람들이 쳐다보잖아……."
자연스럽게 나와 대화를 나누던 로렌은 주변에 몇몇 사람들의 시선을 눈치채고 다급하게 자신의 엉덩이를 만지던 내 손을 붙잡았다.
"뭐 어때요. 아는 사람들도 아닌데."
"부끄럽단 말이야……."
로렌은 수치스럽다는 듯 내 손을 잡고 빠르게 걷기 시작했고, 난 그런 그녀를 뒤따라 걸어가며 흐뭇하게 웃었다.
귀엽다니까, 진짜.
근데 로렌은 모르겠지?
그렇게 남자한테 엉덩이 만져질 때 손으로 다급하게 가리면 보는 입장에선 더 야해 보인다는 거.
로렌의 뒤태를 감상하듯 따라 걷던 나는 걸음을 재촉해 나란히 서서 그녀의 손을 꽉 붙잡았다.
"밥 먹은 김에 소화 시킬 겸 게임이나 하러 갈까요?"
"싫거든."
"쫄?"
잔뜩 부끄러워하며 걸음을 재촉하던 로렌이 제자리에 멈춰 섰다.
"후우…… 그래 가자. 오늘은 너가 엉덩이 맞을 줄 알아."
"그래요."
난 싱긋 웃으며 답했고, 로렌은 굳은 다짐을 한 표정으로 날 노려봤다.
"안 먹어요? 완전 맛있게 생겼는데."
게임을 실컷 하고 밖으로 나온 로렌과 나는 푸드트럭 느낌이 나는 조그마한 가게에서 타코야끼를 포장해 근처 벤치에 앉았다.
울상은 지은 채 앉아서 내 시선을 피하는 로렌.
낮에는 햇볕이 뜨거워서 이렇게밖에 앉아서 뭔가를 먹을 생각은 없었지만, 가게는 워낙 작고, 로렌이 타코야끼는 또 먹고 싶어 해서 마땅한 선택지가 없었다.
"먹고 싶다더니 안 먹어요?"
"……아직 뜨거워서 못 먹거든."
로렌이 저렇게 심통이 나 있는 이유는 오늘도 나한테 게임을 한 판도 못 이겨서다.
이기려고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고 한 판은 져줄까 했는데, 내 본능이 도저히 그걸 용납을 못 했다.
그래도 오늘 엉덩이는 안 때렸다.
이길때마다 주물럭거리긴 했지만.
난 타코야끼를 하나 꼬치로 집어서 호호 불어 식힌 다음 여전히 심통 난 표정을 짓고 있는 로렌에게 살짝 내밀었다.
"식혔으니깐, 먹어요."
날 흘겨보던 로렌은 결국 입을 벌렸고, 난 그녀의 입속으로 조심스럽게 타코야끼를 넣었다.
자지 넣을 때도 존나 거칠게 넣는데, 이 정도면 진짜 잘 해주는 거야.
귀엽게 오물오물 거리며 타코야끼를 삼킨 뒤 퉁명스럽게 말하는 로렌.
"맛있네."
나도 로렌이 먹는 동안 열심히 식힌 타코야끼를 입에 넣었다.
"진짜 맛있네요. 살면서 먹어본 타코야끼 중에 제일 맛있는 거 같은데?"
"그래서 먹으러 온 거야. 평이 좋길래."
난 아직도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는 로렌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으려고요? 기분 좀 풀어요."
"치이…… 어떻게 한 판도 안 져주냐…!"
로렌은 입술을 삐죽 내밀고 삐친 말투로 말했고, 난 씨익 웃었다.
"날 이기겠다는 상대한테 일부로 져주면 그것도 예의가 아니죠."
"다음에 꼭 이길 거야."
"그래요. 오늘만 날은 아니잖아요. 다음에 또 같이 놀러 가서 게임하면 되지."
다음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들었는지 로렌의 표정이 조금 풀렸고, 마주 보고 있던 내가 미소 짓자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꼭이야."
"당연하죠."
기분이 풀린 로렌과 길거리 벤치에 앉아 타코야끼를 맛있게 먹은 뒤, 주변 건물과 사람들을 구경하며 즐겁게 수다를 떨었고, 지금은 내 수영복을 사면서 구경도 조금 할 겸 큰 건물로 들어왔다.
백화점 같은 느낌이 나긴 하는데, 전체적으로 보면 평범한 상가 같네.
그래도 크기는 상당히 크다.
가게들을 구경하며 걷던 중 로렌이 걸음을 멈췄다.
"옷 사게요?"
"그건 아닌데, 그냥 구경 좀 하고 싶어서."
로렌이 멈춰선 곧은 꽤나 큰 옷 가게 앞이었고, 그녀의 손을 잡고 있는 나는 그대로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살짝 당황한 듯했지만, 이내 자연스럽게 내게 이끌려 오는 로렌.
"시간도 많으니깐, 느긋하게 구경하고 가요."
"응."
이 큰 건물에 사람이 왜 이렇게 없나 했더니 다들 여기 있었구만.
옷 가게는 나름대로 규모가 있는 매장인지 세팅 자체가 상당히 잘 돼 있었고, 직원 수도 꽤 많았다.
나야 뭐, 딱히 구경할 것도 없으니 난 이것저것 훑어 보는 로렌의 뒤를 따라 걸으며 그녀가 슥슥 만지는 옷들을 쳐다봤다.
"뭔가, 오히려 이런 매장은 한국이랑 진짜 큰 차이가 없네요. 그냥 가격만 엔으로 쓰여 있는 거 같아."
"그치? 되게 익숙한 느낌이네."
그렇게 대충 가벼운 수다를 떨며 옷 구경을 하던 중 귀여운 캐릭터가 하나 그려져 있는 후드 티가 눈에 들어왔다.
"누나 이리 와 봐요."
"왜?"
난 옷걸이 채로 후드티를 들어 로렌의 목 밑에 가져다 댔고, 그녀는 당황스러움과 부끄러움이 섞인 듯한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귀엽네."
사이즈가 커서 입으면 더 귀여울 거 같아.
"……그럼 이거 하나 사서 갈까?"
대놓고 설레는 표정을 짓고 있는 로렌도 이 후드티만큼이나 너무 귀엽다.
"그러죠. 제가 골랐으니 사줄게요."
"응? 아니야, 괜찮아. 내가 살게."
"됐어요. 온 김에 선물 하나 주고 싶어서 그래."
"……고마워."
손에 들고 있던 후드티를 팔에 건 나는 카운터 쪽으로 몸을 돌렸고, 로렌은 그런 날 붙잡아 세웠다.
"시온아, 잠깐만."
왜 그러지?
의아한 표정으로 몸을 돌리니 내가 골라준 것과 똑같은 후드티를 더 큰 사이즈로 집어든 로렌이 날 살짝 올려다보고 있었다.
조금 전 내가 자신에게 했던 행동을 똑같이 하는 로렌.
"……너도 귀엽다. 난 이거 사줄래."
내 목 밑에 옷걸이와 옷을 가져다 대고 있는 로렌은 귀를 잔뜩 붉히고 있었고, 난 결국 흐뭇하게 웃어버렸다.
"그래요. 좋네."
사실 로렌과 내 벌이를 생각하면 이런 옷 정도는 선물이라 부르기 민망한 수준이지만, 그래서인지 더 값지게 느껴진다.
뭐, 솔직히 유부녀랑 같이 산 커플티가 뜻깊지 않을 수가 없잖아?
로렌과 나는 묘하게 간지러운 대화들을 나누며 계산을 마치고 매장 밖으로 나왔고, 서로 사이좋게 한 손에 똑같은 쇼핑백을 들고 있었다.
"이제 수영복 사러 가야죠? 근데, 그냥 여기서 대충 편한 반바지 사도 됐던 거 아니에요?"
여전히 나와 커플티를 맞췄다는 게 쑥스럽다는 듯 얼굴을 붉히고 있던 로렌이 급정색을 했다.
"안돼. 나 수영복도 구경하고 싶단 말이야. 참고할 게 있으면 해야지."
아, 맞다. 로렌은 수영복 사업도 하고 있었지.
저번에 여름휴가 파티에서 입고 있던 모노키니를 내게 샘플이라고 줬던 게 생각난다.
근데, 그 수영복은 내가 어쨌더라…?
흐음…… 뭐, 서하은이 알아서 잘 챙겨놨겠지.
"스포츠웨어는 위층으로 가야 있을 거에요. 올라가죠."
"잠깐만!"
앞장서서 걸으려는데, 로렌이 내 손을 꽈악 붙잡아 당겼다.
아니, 이 여자는 잠깐만 엄청 좋아하네.
이번엔 살짝 어이없어하는 눈빛으로 고개를 돌리니 로렌이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어딘가를 예쁜 손가락 끝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뭐 때문에 그러는 거야? 아…….
로렌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엔 스티커 사진 기계가 있었다.
"저거 찍고 싶다고요?"
귀엽게 고개를 두 번 끄덕이는 로렌.
여자들 진짜 사진 찍는 거 좋아한다니까.
"알겠어요."
내가 싱긋 웃으며 대답하자 로렌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렇게 마음에 들어요?"
"응."
로렌은 우리의 모습이 여럿 담겨 있는 스티커 사진을 세상 소중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크흠, 저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평소에도 같이 사진 좀 찍어줄 걸 그랬나.
우스꽝스러운 낙서와 여러 가지 표정과 몸짓이 담긴 사진을 배시시 웃으며 바라보던 로렌은 자신을 쳐다보는 내 시선을 느끼며 민망하다는 듯 고개를 휙 돌렸다.
그 와중에 이 여자는 저렇게 느닷없이 찍게 된 사진 속에서 존나게 예쁘네.
"그렇게 들고 다니다 잃어버리겠어요. 얼른 가방에 넣어요."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거든."
로렌은 민망함 때문인지 괜히 틱틱대며 가방 속에 아주 조심스럽게 사진을 넣었고, 그 과정에서 드러난 그녀의 귀를 여전히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고작 스티커 사진 한장 가지고 그렇게 좋아하니까, 너무 애잔하잖아.
난 로렌의 손을 부드럽게 잡으며 최대한 다정하게 말했다.
"남은 일정 동안 이렇게 둘이서 사진 좀 자주 찍죠."
토끼 눈을 뜨고 날 바라보는 로렌.
"그래도 돼?"
로렌도 유부녀인 만큼 사진 가지고 문제를 만들 일도 없을 거고, 이 정도까지 관계가 가까워졌으면 이제는 나도 그녀에게 신뢰가 생길 법도 하다.
이 전에 오월과 찍었던 사진도 아무 문제 없었으니 괜찮겠지.
"당연하죠."
내 흔쾌한 대답에 로렌은 입을 앙다물었고, 그 표정엔 만족스러움과 설렘이 담겨 있었다.
이런 모습 보면 내 또래 여자애들보다 더 어리게 느껴진단 말이지.
"일단 얼른 수영복 보러 가죠."
"응."
로렌의 대답이 묘하게 활기차졌다.
아무리 봐도 평범한 반바지 같아 보이는 수영복을 산 나는 로렌과 호텔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었고, 혼자 먼저 루프 탑에 있는 수영장에 도착했다.
어지간하면 로렌을 기다리려고 했는데, 풀에 들어가려면 머리도 뭐 어떻게 해야 하고, 화장도 다시 고쳐야 한다길래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릴 거 같아 지루하기도 해서 먼저 올라왔다.
수영복 입은 로렌을 조금이라도 빨리 보고 싶긴 했지만, 높은 건물 루프 탑에 있는 수영장은 어떤지 궁금하기도 했으니 말이야.
일단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가족 단위로 보이는 두 팀과 커플로 보이는 몇 명 정도.
그 외엔…… 아, 다른 건 모르겠다, 일단 넓은 풀장 너머로 보이는 에메랄드 빛 바다는 진짜 끝내주네.
선베드에 반쯤 누워 멍하게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로렌에게 까톡이 왔다.
로렌 어디야?
나 저 입구 근처에 있어요 누나는?
로렌 나도 입구야
입구에 있다는 까톡으로 보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리니 큰 수건으로 쑥스럽다는 듯 몸을 가리고 있는 로렌이 보였고, 그녀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부끄러워하며 몸을 가리고 있는 수건이 유려한 어깨를 타고 천천히 흘러내리게 했다.
마치 조심스럽게 커튼을 걷듯 은은하게 드러나는 로렌의 몸.
와, 씨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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