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8화 〉 메이드 서하은 (1)
* * *
"나랑 같이 앉아."
차에 타기 위해 걷던 중 뒷좌석에 앉아있는 로렌에게 갑자기 붙잡힌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뒤에 나란히 앉아서 같이 가자고…? 그렇게 되면 서하은을 너무 운전기사 취급하게 되는 느낌이잖아…….
물론, 서하은이 이 정도일 가지고 내게 삐치거나 불쾌함을 느낄 거라 생각하진 않지만, 내 입장에선 불편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메이드니 노예니 해도 하은이도 내가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여자다.
서하은을 그런 식으로 푸대접하는 듯한 상황은 만들고 싶지 않은데…….
가만히 서서 고민하던 나는 날 올려다보고 있는 로렌과 다시 눈을 마주쳤고,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묘한 불만과 긴장감을 품고 있었다.
후우…… 저 눈빛 때문에 거절하기도 힘들다.
서하은을 생각해서 조수석에 앉아버리면 로렌이 분명 속상해할 테니까.
어지간하면 이런 로렌의 감정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겠지만, 2박 3일간 여행을 다녀오면서 그녀가 내게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확실하게 알게 된 이상 내 마음 가는 대로 무작정 행동하는 게 쉽지 않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계속 멍하니 망설이고 있는데, 차 안에서 밝은 서하은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온아, 얼른 타."
"아, 응."
크흠, 결국 하은이한테 또 도움을 받았네.
넓은 아량인지, 메이드로서 주인에게 충실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덕분에 불편한 상황은 하나 넘겼어.
뒷좌석에 타기 위해 허리를 숙이자 로렌은 자연스럽게 안쪽으로 들어가 내가 앉을 수 있는 자리를 만들었고, 난 재빠르게 차에 탔다.
예쁜 여자 둘이 비싼 차 옆에 서 있던 시간이 너무 길었던 탓일까, 시선이 너무 집중돼버렸다.
"얼른 출발하자. 운전해줘서 고마워."
"응? 아니야, 애초에 그러려고 온 건데, 뭘."
뒤를 살짝 돌아보며 해맑게 웃는 서하은.
그런 그녀를 보며 로렌도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답했다.
"저도 감사해요, 하은 씨. 덕분에 편하게 가네요."
"아니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빠르게 대답한 뒤 다시 앞을 바라본 서하은은 곧장 차를 출발시켰다.
말 그대로 보면 굳이 생색내지 않고 배려하는 느낌인데, 묘하게 너 때문에 온 거 아니니 고마워하지 말라는 듯한 서하은의 감정이 느껴지는 것 같다.
후우…… 가는 길 내내 엄청 불편하겠구만.
벌써부터 분위기가 무거워…….
내 예상과 다르게 공항에서 벗어나자마자 대화가 끊이질 않았다.
서하은은 계속해서 내게 여행에 관한 질문들을 했고, 나름대로 즐겁게 놀다 왔던 나는 기억에 남았던 에피소드들을 짤막짤막하게 이야기해줬다.
"진짜? 시온이 너 그런 거 별로 관심 없지 않아?"
"그렇긴 한데, 확실히 장소가 다르니깐 느껴지는 감성이 다르더라."
"나도 가보고 싶다! 관람차 타고 보는 야경 완전 예쁠 거 같아."
"가면 되지, 비행기 타면 금방이야. 시간이 얼마 안 걸려서 그런지 오고 가는데 딱히 피곤한지도 모르겠더라."
이런식으로 운전하는 서하은과 사이좋게 여행 얘기를 하며 이동하니 분위기가 어둡진 않았지만, 문제는 로렌이 입을 닫고 있다는 점이다.
크게 불만을 품고 있는 표정은 아닌데, 뭔가 불편해 보인단 말이지…….
"시온이 그럼 가서 초밥도 많이 먹었어? 초밥 엄청 좋아하잖아."
"많이 먹었지. 가격 생각하면 진짜 괜찮더라."
"그래? 그렇게 얘기하니깐 더 궁금하네."
가볍게 대화를 나누며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로렌을 힐끗힐끗 바라보던 중, 조용히 있던 로렌이 내 손을 꼬옥 붙잡으며 입을 열었다.
"하은 씨도 시온이랑 자주 놀러 갔었나 봐요?"
"그렇진 않아요. 저희는 시간이 잘 안 맞아서요."
"그래요? 근데도 서로 되게 잘 알고 있네요."
"아, 그럴 수밖에 없을 거에요. 제가 시온이가 같이 있는 시간이 워낙 길거든요."
서하은의 대답과 함께 다시 분위기가 싸해졌다.
크게 티는 안 나지만, 미묘할 정도로 살짝 굳어버린 로렌의 표정.
후우…… 왠지 분위기가 괜찮더라, 사실 로렌이 서하은과 내 대화를 조용히 듣고 있을 때부터 불안하긴 했다.
일단 집까지 이러고 갈 수는 없으니 상황을 조금 정돈해야겠어.
"두 사람은 언제부터 알게 된 사……."
"시온이가 엉덩이 만지는 거 엄청 좋아하더라고요. 하은 씨한테도 그래요?"
분위기도 풀고 궁금한 것도 물어볼 겸, 말을 했는데 느닷없이 때려 박는 로렌의 직구에 입이 다물어졌다.
난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로렌을 바라봤지만, 그녀는 무덤덤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서로 관계를 다 알고 있으니 굳이 숨길 필요는 없긴 한데, 너무 빡센 거 아니야…?
난 그래도 서하은과 대화하며 로렌과 있었던 성적인 얘기는 제외하고 있었는데, 로렌이 지금 스타트를 끊어버린 것이다.
"뭐, 그렇죠? 사실 저한테 안 그러기도 힘드니까요."
조금은 당황할 법도 한 상황임에도 여유롭게 대답하는 서하은.
그런 서하은의 반응에 로렌도 조금은 당황했는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내 손을 꽈악 쥐었다.
"……하하, 넌 진짜……."
아야, 이건 살짝 아프네…….
서하은은 룸미러로 잠시 우리를 살펴보더니 이내 다시 해맑게 입을 열었다.
"로렌 씨는 그냥 엉덩이 만지는 걸로 끝나나 봐요? 전 가끔 맞기도 하는데……."
"그럴 리가요, 난 아직 손바닥 자국도 남아있는 거 같아요. 혹시 하은 씨도 그래요?"
로렌이 느닷없이 꺼낸 성적인 얘기 덕분에 받았던 충격도 아직 가시지 않았는데, 이젠 아예 이상한 대화가 시작돼 버렸다.
저게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대화야…….
"전 다 없어졌죠. 로렌 씨가 2박 3일이나 빌려 갔잖아요?"
"빌려 갔다뇨? 하은 씨가 시온이 여자친구는 아니지 않아요?"
"……그건 아니지만, 로렌 씨가 빌려 간 건 맞아요. 시온이가 로렌 씨 소유는 아니잖아요."
"하긴, 그건 그렇겠네요. 애가 워낙 여자들은 주변에 잔뜩 두고 있으니깐."
갑자기 대화의 화살이 내게 날아오는 거 같아 난 다급하게 말했다.
"그 정도는 아니거든요?"
아니지, 그 정도 맞으려나…?
난 괜히 느껴지는 불편함에 다시 입을 꾹 닫았고, 그런 내 모습을 보며 룸미러 너머로 서하은이 미소 짓고 있었다.
"로렌 씨는 이해하기 힘든 문젠가 봐요? 전 시온이가 뭘 해도 괜찮은데."
"저도 다 이해할 수 있어요. 대신 하은 씨나 다른 여자들도 제가 이렇게 시온이를 며칠간 독차지해도 절 이해 해야겠죠?"
"하긴, 로렌 씨는 유부녀라 시온이 볼 시간이 많지 않으니 이해받을 필요가 있겠네요……."
슬프다는 듯 나지막하게 말하는 서하은 탓에 조금 전보다 훨씬 더 무거운 분위기가 찾아왔다.
로렌은 살짝 인상을 쓴 채 작게 한숨을 쉬었고, 대답이 들리지 않자 서하은은 다시 입을 열었다.
"로렌 씨…… 아니, 그냥 언니라고 할게요. 괜찮죠?"
하은아, 이젠 나이까지 공격하는 거야…?
잠시 평정심 잃은 듯한 로렌이었지만, 그녀는 이내 능청스럽게 답했다.
"편한 대로 해요. 근데, 하은 씨는 다른 구멍으로는 시온이랑 안 해봤죠?"
"네…?"
"뒤쪽으로 해봤냐는 얘기예요."
"……."
"반응 보니 그건 안 해봤나 보네요. 되게 좋은데…… 하은 씨가 그 감정을 모른다는 게 아쉽네요."
이번엔 서하은이 완벽하게 굳어버렸다.
드디어 평소같이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 로렌.
결국 우리 세 사람은 목적지까지 별다른 대화 없이 향하게 될 거 같다.
불편하지만, 묘하게 즐거웠던 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로렌의 집 근처에 도착했다.
"저 가볼게요, 하은 씨. 데려다 줘서 고마워요."
"네. 대화 즐거웠어요, 언니."
아직도 은근한 기 싸움이 느껴진다.
그나저나, 로렌은 오키나와에서 내게 진심을 고백했으니 심경에 변화가 크게 왔다고 쳐도, 서하은이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오월 때도 그렇고, 수아나 리나 때도 그렇고, 늘 차분하게 다른 여자들을 대했었는데, 오늘은 확실히 반응이 다르다.
직접 눈앞에서 보니 감상이 다른 건가?
후우…… 뭐, 여차하면 댓글 명령이 있으니 감정싸움이 심해지면 강제로라도 해결하는 수밖에.
서하은과 인사 같지 않은 인사를 마친 로렌은 내 손목을 붙잡아 당겼다.
쪼옥.
고개를 살짝 틀어 내게 진득하게 입맞춤을 하는 로렌.
길고 진한 뽀뽀가 끝난 뒤, 로렌은 부드럽게 입술을 뗐고, 난 멍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또 봐, 시온아."
"응."
로렌과 내 모습을 본 서하은은 복잡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난 트렁크에서 짐을 내려주기 위해 곧바로 로렌을 따라 차에서 내렸다.
로렌이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살짝 떨어진 곳이긴 하지만, 혹시나 모를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난 빠르게 짐을 내려서 그녀에게 건네줬다.
"조심히 들어가, 누나."
예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 로렌은 방금 막 차에서 내린 서하은에게도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캐리어를 끌고 걸어가는 로렌이 점점 멀어지던 중 멍하니 서 있던 서하은이 내게 다가왔다.
"왜 그래?"
날 마주 보고 서서 떨떠름한 표정으로 손을 들어 올리는 서하은.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의 옷깃으로 내 입술을 닦아냈다.
"아니, 그냥…… 기분이 좀……."
말 끝을 흐리며 내 입술을 부드럽게 닦아내는 서하은은 꽤나 혼란스러워 보였다.
하긴, 내가 다른 여자와 애정이 듬뿍 담긴 스킨쉽을 하는 모습은 서하은도 처음 보는 걸 테니 혼란스러울 법도 하지.
서하은은 내 입술을 만족할 만큼 닦았는지 반대편 손으로 내 손을 붙잡으며 슬픔이 섞인 듯한 미소를 지었다.
"가자, 시온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