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2화 〉 하령 길들이기 (1)
* * *
내가 다가온 하령은 흰색 셔츠블라우스 위에 옅은 갈색에 뷔스티에 미니 원피스를 레이어드 해서 입고 있었다.
색감과 분위기 자체는 꽤나 단정한 느낌인데, 정작 치마는 허벅지가 다 드러날 정도로 짧아 묘하게 조화롭지 못한 색기를 뿜어내고 있다.
나오기 싫다고 난리를 치길래 대충 츄리닝이나 걸치고 내려올 줄 알았더니 저렇게 입고 나타날 줄이야.
상상도 못했네.
"뭘 보냐고…!"
하령은 내가 자신의 옷차림과 야릇하게 드러난 허벅지를 쳐다보고 있다는 걸 눈치챘는지 괜히 발끈하며 언성을 살짝 높였다.
"그냥, 의외여서."
"……뭐가 의외라는 거야."
얼추 내 말을 눈치챘는지 민망하다는 듯 시선을 살짝 피하는 하령.
그나저나, 제대로 드러나 있는 건 다리뿐인데도 묘하게 꼴리네.
운동한 몸이라 그런지 확실히 각선미가 상당히 훌륭하고, 허벅지에서 마치 윤기가 나는 거 같다. 물론, 밝은 조명 탓도 있긴 하겠지만.
여긴 주차장이 뭐가 이렇게 밝냐.
계속 쳐다보고 있으면 또 하령이 성질을 부릴까 봐 난 고개를 돌렸다.
"별거 아니야. 너 저녁은 먹었어?"
"당연히 안 먹었지."
"이 시간까지 저녁도 안 먹고 뭐했냐."
"딱 먹으려 했는데 니가 전화했잖아!!!"
아오, 진짜 성질은.
그래도 혼자 안 먹고 기다린 게 기특하네.
난 씩씩거리는 하령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고, 어이없다는 듯 날 지나쳐 걸었다.
"아, 나랑 같이 먹으려고 기다린 거야?"
"……진짜 지랄하지 마."
하령의 반응에 난 결국 실소를 터트려버렸다.
일단 애가 저녁을 안 먹었으니 얼른 가야겠네.
이미 한 번 내 차에 타본 경험이 있는 하령은 알아서 주차된 차를 향해 걸어가 조수석 문을 열었고, 나도 빠르게 운전석에 앉았다.
차에 타서 보니 화장도 저번보다 열심히 하고 나온 거 같네.
하령도 예쁜 얼굴이긴 해.
난 시동을 건 뒤 핸드폰을 만지며 하령에게 나름 다정한 말투로 말을 건넸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아무거나 상관없어."
하령의 틱틱 거리는 대답에 조금 전 나눴던 대화 때문에 그런가 싶었는데, 나한테 원래 이런 태도였던 걸 깨닫고 신경 끄기로 했다.
흐음…… 그나저나 뭘 먹지.
배가 많이 고프진 않은데, 섹스를 며칠 내내 실컷 해서 그런가 고기가 땡기는 거 같다.
"그럼 고기나 먹으러 가자."
"……뭐?"
이제는 꽤나 익숙해진 경멸의 눈빛으로 날 바라보는 하령.
"왜, 너 고기 싫어해?"
"아니…… 야, 기껏 이렇게 입고 나왔……."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충분히 꾸며서 나왔다는 걸 실토해버린 하령은 스스로에게 놀랐는지 당황한 표정으로 입을 닫아버렸다.
"크흠, 옷에 냄새 배게 무슨 고기야."
"뭐 어때, 어차피 대충 챙겨 입는 거 아니었어? 집 가서 빨면 되지."
"이런 씨…… 니 마음대로 해!!!"
딱 보니 예쁘게 챙겨 입고 나왔는데 기껏 가는 게 고깃집이라 불만인 거 같네.
근데, 내가 그게 무슨 상관이냐?
오히려 니가 그런 식으로 나오면 더 가야지.
난 씨익 웃으며 차를 출발시켰다.
그래도 내가 실컷 따먹었고, 앞으로 따먹을 여자를 데려가는 건데, 아무 가게나 갈 수는 없어서 저번에 로렌하고 다녀왔던 고깃집으로 왔다.
처음엔 대놓고 불만스럽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하령은 몇 번 젓가락을 깨작거리더니 내가 구운 고기가 마음에 들었는지 잠시 후 꽤나 본격적으로 식사를 시작했고, 우리 두 사람 배를 흡족하게 채운 채 가게에서 나올 수 있었다.
"맛있었지?"
"……괜찮네."
조금은 기분이 풀렸는지 아까 전보단 부드러워진 하령의 표정과 목소리.
뭐, 당연히 그랬겠지. 로렌이 추천해준 가게 중에 맛없는 곳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물론 그만큼 가격이 세긴 하지만, 딱히 돈 걱정할 처지도 아니고, 안 그래도 하령한테 맛있는 것 좀 사주려고 했던 터라 문제 될 건 전혀 없다.
그렇게 따먹고 괴롭혔으면 대접할 필요가 있지.
난 흡족한 기분을 느끼며 앞서 걸어가는 하령을 따라 걸었다.
주차해둔 차를 향해 원피스 치마 끝을 흔들며 살랑살랑 걸어가는 하령의 뒷모습을 보며 따라 걷고 있으니 치마를 들추고 싶은 욕망이 들끓었지만, 주변에 사람이 있어서 참았다.
그래도 뭔가 괴롭히고 싶단 말이지.
하령에게 가까이 다가간 나는 그녀의 블라우스 팔 부분을 살짝 잡아 냄새를 맡았다.
"냄새도 별로 안 뱄네."
화들짝 놀라며 뒤돌아 토끼 눈을 뜬 채 날 바라보는 하령.
"뭐, 뭐해!!! 이 미친…!"
"뭘 그렇게 오바야. 잠깐 냄새 좀 맡은 가지고."
난 왜 그러냐는 눈빛으로 무덤덤하게 말했고, 하령은 얼굴을 붉히며 빼액 소리를 질렀다.
"……꺼져!!!"
진짜 존나 재밌다니까.
하령은 잔뜩 신경질을 내며 조수석 문을 열어 차에 탔다.
부끄러워서 저러는 건지, 화가 나서 저러는 건지 모르겠네.
흐음…… 둘 다인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차에 탄 나는 곧장 시동을 건 뒤, 차를 출발시켰다.
"어디 가냐?"
"어디 가긴, 근처 모텔이나 호텔로 가야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하령.
"……장난해? 분명 저녁 먹자고 했잖아."
"그게 끝일 리가 있겠니?"
"아니, 말을 해줘야 할 거 아니야!"
"너도 아닌 거 알고 있었으니깐 그렇게 입고 나온 거 아니야?"
"아 진짜, 씨발 뭔 개소리야! 너 좋으라고 입은 줄 알아?"
하령은 괜히 오버하는 듯한 말투로 말하며 얼굴을 붉히기 시작했고, 난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 만나는데 입고 온 거면 당연히 나 좋으라고 입고 온 거 아니냐? 안 그래도 너 도착하면 충분히 힘들 텐데, 쓸데없이 말싸움하지 말고 얌전히 가자."
"……싫거든? 그리고 너한테 예뻐 보이고 싶어서 입은 거 아니라니까!!!!!"
아오, 아니면 아닌 거지. 진짜 개지랄을 하네.
"그래, 아님 말고. 근데 일단 서로 합의 본 조건은 지켜야지?"
"……씨발 새끼. 왜 그 얘기 안 하나 했다."
"니가 곱게 말 들으면 이런 얘기 할 일도 없어."
"됐어. 애초에 너한테 기대도 안 했으니깐."
그렇게 말 한 거 치곤 묘하게 속상해 보이는 얼굴이다.
후우…… 이거 또 도착할 때까지 한 마디도 안 하겠구만.
작게 한숨을 쉬며 주차장에서 빠져나오니 하령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할 거면 우리 집으로 가."
뭐지? 먼저 이런 말을 할 거라고는 예상 못 했는데.
"……집에 뭐 함정 같은 거 설치해놨냐?"
"너 지금 진짜 병신 같은 거 알아? 그럼 그냥 모텔이나 가던가……."
하령은 제대로 기분이 상했는지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휙 돌렸다.
뭔가 반응이 삐친 여자 같은데…… 설마 꼴에 의심받았다고 속상해하는 거야?
진짜 어이가 없네. 평소에 그렇게 욕지거리를 해대는데 내가 어떻게 의심을 안 하겠어.
후우…… 그래도 참아야지. 지금 따지면 더 피곤해진다.
"장난친 거야. 알겠어 너네 집으로 가자."
"그러던가."
하령은 툭 쏘아붙이듯 대답했고, 이내 길게 한숨을 쉬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집에 이상한 짓을 해놓은 게 아니라, 모텔이나 호텔 같은데 불편해서 그래."
아, 그래서 그랬구만.
하긴, 하령도 나름 얼굴이 알려져 있는 뉴투버 인데, 남자랑 단둘이 대놓고 그런 곳을 드나들게 되면 분명 피곤한 일이 생길 것이다.
뭐, 사실 저런 부분은 다른 여자들도 마찬가지니 내가 나름대로 배려해서 조심히 행동했었지만, 하령하고 모텔에 갈 땐 전혀 그러지 않았으니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겠지.
앞으로는 조심 좀 해줘야겠어.
물론, 그렇다고 지금 조심해서 모텔이나 호텔에 갈 생각은 전혀 없다.
기껏 집에 초대받은 기회를 내가 걷어찰 리가 없잖아?
"이해해. 굳이 그런 게 아니어도 앞으로는 여러모로 신경 써 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미친놈, 죽을 때가 다 됐나……."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 나왔다.
이 씨발년…… 넌 집 도착하면 진짜 뒤졌어.
본인을 어떤 식으로 괴롭힐지 열심히 생각하고 있는데, 내게 다시금 말을 거는 하령.
"너, 커피 같은 건 안 마시냐?"
"마시지. 왜, 카페 들렀다 갈까?"
"……어."
한 번 헛웃음이 터져 나온 상태라 그런가 나도 모르게 조금 크게 웃어버렸고, 하령은 날 차갑게 노려보기 시작했다.
"왜 쳐 웃냐?"
"나랑 있는 거 싫어하는 줄 알았더니."
"씨발, 싫거든? 너 같은 새끼한테 얻어먹기만 하는 게 더 싫어서 그런다!!!"
"가서 계산도 하려고? 완전 감동이네."
"됐다, 말을 말자. 운전이나 해."
"네에. 이 근처에 괜찮은 카페 알아?"
"…….앞에 사거리에서 우회전……."
잔뜩 성질을 부려놓고 위치를 알려주는 모습이 자기가 생각해도 민망했는지 하령은 다급하게 창밖을 바라봤다.
은근히 귀여운 면이 있네.
뭐, 그래도 좋긴 해. 밥을 먹었으면 커피를 마셔야지.
오늘 커피를 한 잔도 못 마시기도 했고.
카페에서 시간이나 조금 때우며 하령이나 더 놀릴까 했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냥 사서 나왔다.
그렇게 지금 하령이 살고 있는 오피스텔 주차장에 다시 도착했다.
오는 길 내내 재밌는 점이 하나 있었는데, 집에가까워질수록점점 긴장감이 감도는하령의얼굴이었다.
"뭐해. 올라가야지."
"안 그래도 내릴 거였거든?"
까칠하긴, 괜히 쫄리니깐 저러는 구만.
차에서 내려 하령을 따라 건물 입구로 들어간 나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며 말했다.
"근데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 섹스하는 건 싫다면서 옷은 왜 그렇게 입었어?"
그런 긴장된 표정을 하고 있으면 내가 안 놀리고 버틸 수가 없잖아.
섹스라는 단어가 나오자 흠칫 놀라며 날 노려보는 하령.
"……이 미친, 제발 옷 얘기 좀 그만해. 그냥 평범하게 입은 거야."
"그래? 다리는 허벅지까지 다 드러내고 있으면서 그게 아무 뜻도 없다고?"
"없다고, 이 미친 새끼야!!!"
하령은 얼굴을 잔뜩 붉히며 괜히 엘리베이터 버튼을 다급하게 눌러댔고, 난 그 모습을 바라보며 피식 댔다.
"뭐 어쨌든, 예뻐서 보기 좋아."
"……좀 닥쳐……."
내 말을 들은 하령이 고개를 푹 숙이며 그녀의 빨개진 귀가 드러나자 동시에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며 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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