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8화 〉 하령 길들이기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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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켜 놓은 간식거리들이 금방 도착했고, 하령과 난 소파에서 서로 멀찍이 떨어져 앉아 티비를 보고 있다.
물론, 난 이렇게까지 떨어져 있을 생각은 없다.
하령이 저 멀리서 내게 가까이 오지 않는 거지.
"야, 거기 그렇게 쭈그러져서 앉아 있으면 안 불편하냐?"
"편하거든? 신경 끄지?"
조각 케이크를 손에 든 채 포크로 조심스럽게 떠먹으며 날 노려보는 하령.
기존에 외출할 때 입고 있었던 옷도 마음에 들지만, 지금 입고 있는 짧은 반바지와 널널한 반팔도 꽤나 좋다.
편한 잠옷 같아 보이긴 하는데, 쭈그려 앉아 은은하게 드러나는 허벅지 뒤쪽이 상당히 야릇하다.
"그러시던가, 참고로 난 침대에서 잘 거다."
케이크를 입에 넣은 채 오물거리던 하령은 말문이 막힌 듯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너 진짜 미쳤냐? 그럼 난 어디서 자라고?"
"같이 침대에서 자면 되지. 이미 거기서 별짓 다 했는데 같이 자는 게 어려워?"
"말을 말자, 그냥 내가 소파에서 잘게."
"그러시던가."
난 하령을 비웃으며 다시 티비를 바라봤고, 그녀는 한동안 날 노려보고 있었다.
오늘은 더 이상 섹스할 생각 없어서 진짜 잠만 잘 생각인데, 굳이 거절하네.
뭐, 하령한텐 나랑 섹스하는 것보다 나와 함께 자는게 더 불편할 수도 있겠지.
저번엔 모텔에 혼자 버리고 왔으니 오늘은 나름대로 배려하는 느낌으로 아침까지 함께 있어주려 했는데 말이야.
그렇게 하령의 따가운 시선을 받던 중, 벨 소리가 울렸다.
내 전화는 아니었고, 벨 소리가 울린 건 하령의 핸드폰이었다.
핸드폰을 들고 잠시 내 눈치를 보더니 내게 나지막하게 말하는 하령.
"……아이씨, 야 너 조용히 하고 있어라."
난 어깨를 으쓱하며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하령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인상을 쓰더니 잠시 후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대체 무슨 전화길래 저렇게 눈치를 보면서 받는 거야?
내가 의아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나와 눈이 마주친 하령은 입술에 검지를 대고 한 번 더 조용히 있으라는 어필을 했다.
"응, 엄마. 지금 집이지."
아, 엄마한테 온 전화여서 그랬구나.
하긴, 집에 외간 남자 들여놓고 섹스까지 실컷 했으니 엄마 전화받기 눈치 보일 법도 하지.
"이사 준비? 응. 잘하고 있어. 다음 달 안엔 나갈 거 같아."
나긋나긋하게 통화하는 하령의 모습이 묘하게 낯설었지만, 꽤나 보는 재미가 있었다.
"아쉽긴 한데, 어쩔 수 없지. 본인이 들어와서 산다고 하니까……."
그나저나, 대충 얘기하는 거 보니깐 이거 생각보다 일이 잘 풀릴 수도 있겠는데?
난 통화에 귀를 기울였고, 그 내용에서 하령이 이사를 가야 한다는 걸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응. 열심히 알아보고 있어. 대충 정해지면 연락할게."
심지어 반강제로 가게 되는 이사 같은데, 하늘이 날 돕는구나.
엄마와 몇 마디 안부를 더 나눈 하령은 전화를 끊은 뒤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아……."
"너 이사 가냐?"
민망하다는 듯 날 노려보는 하령.
"내가 조용히 하고 있으랬지, 훔쳐 들으라는 말은 안 했거든?"
"그렇게 예민한 내용도 아니잖아? 얘기 좀 해봐. 내가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됐네요. 내가 널 어떻게 믿고……."
"딱히 못 믿을 것도 없잖아. 어쨌든 난 너한테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는 거야."
"……그런 새끼가 그새를 못 참고 키스했냐?"
크흠, 그렇게 얘기하면 내가 할 말이 없지.
나도 민망하긴 했지만, 하령도 자신이 뱉은 말이 부끄러웠는지 고개를 휙 돌렸다.
"난 그것도 나름대로 해결하려고 했어. 너가 확실하게 하자고 거절한 거지. 집은 서하은하고도 관계있는 거니깐, 그냥 얘기해봐."
적어도 서하은은 확실하게 믿을 수 있겠지.
믿음 가는 이름이 나오자 하령은 꽤나 복잡한 표정을 지었고,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하아…… 집주인이 바뀌어서 이번 계약기간 끝나면 나가야 해. 아직 집은 못 구했고, 이게 다야."
뭐, 그 정도면 나름 평범한 문제네.
딱히 복잡할 것도 없이 내가 해결해줄 수 있다.
"그러니깐, 아직 들어갈 집을 못 구했다는 거지?"
"어."
"잘됐네. 이번에 신축 빌라 하나 구했거든, 공실도 많으니깐 들어와서 살아."
"……뭐?"
하령은 토끼 눈을 뜬 채 날 바라봤고, 난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방 3개에 화장실도 2개 있고, 여기보단 확실히 지내기 좋은 거야. 이 근방이니 위치 문제도 없을 거고."
"아니, 그 정도 집에 못 들어가."
이유는 모르겠지만, 부끄럽다는 듯 거절하는 하령.
집이 넓어서 부담스럽다는 거야? 아니, 그게 말이 되나?
예상치 못했던 거절에 당황하고 있는데, 하령이 다시 입을 열었다.
"……금액이 맞아야 가지……."
아, 뭔 소리 하나 했더니 그거 때문이었구나.
하긴, 우리 집에 제대로 계약을 해서 들어오려면 전세도 만만치 않을 테고, 월세는 보증금도 그렇지만 달마다 나가는 금액이 꽤나 부담스럽겠지.
어쨌든 하령은 아직 20대 초반이니까.
난 민망해하는 하령에게 넌지시 툭 던졌다.
"내가 언제 너한테 돈 받겠데? 그냥 들어와서 살라고."
"……응?"
"내 건물이라고 했잖아. 때 되면 이삿짐만 너가 해결해서 들어와."
하령은 이제 충격받은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너,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진심이지. 넌 나한테 순결까지 바쳤는데, 내가 이 정도도 못 해주겠어?"
하령의 얼굴이 순식간에 귀까지 붉어졌다.
"……씨발, 좆같은 소리 좀 하지 마. 진지하게 얘기해줬더니 장난치면 재밌냐?"
"나 장난치는 거 아닌데, 허락은 내가 했으니깐 나머지 자잘한 문제들은 니가 서하은하고 직접 얘기해서 해결해."
잔뜩 붉어진 얼굴로 날 노려보던 하령의 표정이 점점 풀어지기 시작했다.
진심이라니깐, 말을 못 믿어.
뭐, 못 믿을 정도로 좋은 조건이긴 해.
하지만, 나도 건물에 빨리 내 여자들은 채우고 싶으니 서로 윈윈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난 몰라도 서하은에겐 신용과 신뢰가 있으니 받아들이겠지
"대체 너 뭐하는 새끼야…? 아니, 설마 너 또 무슨 개 같은 조건 만들려는 거 아니야?"
하령은 당황한 채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말했고, 난 실소를 터트려버렸다.
"만들어줘? 후우…… 그냥 순수한 호의라고 생각해. 어차피 서하은도 관련된 집이고, 당장 상황이 급해진 회사 식구한테 못 내줄 이유도 없으니까."
하령의 표정이 상당히 복잡해졌다.
그래도 이젠 어느 정도 납득하고 있는 거 같네.
"……일단, 생각 좀 해볼게. 원래 본가에 들어갈 생각도 하고 있었거든, 엄마랑 얘기해봐야 하고……."
엄마랑 얘기를 한다니, 하령도 입이 거칠어서 그렇지, 확실히 그냥 여자애긴 하구만.
난 싱긋 웃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래, 너 편한 대로 해. 마음 정해지면 연락은 서하은한테 하면 돼."
애초에 들어올 게 뻔하긴 하지만.
이런 훌륭한 조건을 지가 무슨 수로 거절하겠어?
소파에 앉아 간단하게 배를 채우며 티비를 보고, 평상시 였다면 하령과 상상도 못 할 느긋한 일상을 보낸 뒤 난 침실로 향했다.
나름 여행 갔다 온 상태라 피곤하거든.
"난 먼저 자러 간다."
"그러던가……."
여전히 띠꺼운 반응이긴 한데, 집 얘기가 나온 뒤로 조금, 아주 조금은 유해진 거 같다.
침실에 들어가려던 나는 여전히 소파에 쭈그려 있는 하령에게 다시 한 번 말을 걸었다.
"진짜 거기서 잘 거야? 잘 땐 안 건드릴 테니깐 그냥 침대로 와. 저 넓은 침대 놔두고 뭐하러 불편하게 소파에서 자."
최대한 다정하게 말했음에도 하령의 표정은 일순 굳어버렸다.
"……씨발, 적당히 참견하지?"
유해졌다고 말한 건 취소다.
여전히 지랄 맞은 성격이네.
"그래, 알아서 해라. 난 들어가서 잔다."
집 문제도 해결해줬더니 여전히 욕지거리를 해대는 하령이 어이없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해서 그냥 바로 침대에 드러누우려다 난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웬만하면 그냥 침대에서 같이 자지? 어차피 나 피곤해서 계속 잘 거야. 너한테 손댈 일 없어."
"……그럼 지가 소파에서 자던가……."
하령은 입술을 삐쭉 내민 채 툴툴거렸다.
솔직히 얘기하면 그래도 되긴 하지만, 하령에겐 도저히 뭔가 양보해주고 싶지가 않다.
"난 소파에서 못 자. 너 그거 쓸데없는 고집이니깐 대충 정리하고 들어와 옆자리 비워둘게."
난 빠르게 말한 뒤 침실로 들어가버렸고, 하령은 내 뒤통수를 향해 윽박질렀다.
"개소리야, 너랑 같이 잔다고 안 했거든!!!"
침대에 이불 덮고 누워서 폰을 만지작 거린지 10분 정도 지났을까, 방으로 들어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안 온다더니, 이럴 거면 왜 그렇게 화냈어?"
"닥쳐, 씨발…… 나 소파에서 자면 허리 아프단 말이야……."
어린 게 뭔 허리가 아픈가 싶었지만, 운동을 업으로 삼았던 게 뒤늦게 떠올랐다.
"그래, 그래. 얼른 옆에 와서 누워."
하령은 망설임이 가득한 발걸음으로 천천히 내게 다가왔고, 거실 너머로 들어오는 은은한 불빛이 비치는 그녀의 얼굴은 상당히 민망해 보였다.
하긴, 그래도 본인을 도와주려 했던 나한테 그렇게 성질을 부렸으니 민망해할 법도 하지.
"씨발, 너 진짜 존나 싫어."
하령은 이불 속에 들어와 내게 최대한 떨어진 곳에 누워 등을 돌렸다.
"개새끼, 여기 원래 내 집이고 내 침대인……."
"피곤하니깐, 얼른 자자."
난 징징거리는 하령의 말을 끊어버렸고, 그녀는 꽤나 화가 났는지 이불을 머리까지 확 뒤집어썼다.
진짜 웃기는 년이라니까.
아침.
눈부심을 느끼며 잠에서 깨니, 하령이 내 팔을 베고 품에 안겨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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