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8화 〉 새집 (2)
* * *
느긋하게 오전을 보낸 뒤 서하은은 일정이 생겨 회사로 갔고, 쉬는 것도 슬슬 지루하게 느껴지던 나는 몸을 일으켰다.
그래도 애들 이사 끝냈다는데, 집들이는 한 번 가야지.
어차피 내 집이긴 하지만, 궁금하긴 하잖아?
하령은 집에 있을지 모르겠고, 일단 리나랑 수아는 확실하게 집에 있는 거 같으니 가서 구경이나 좀 해야겠어.
뭐, 이런 이유도 있긴 하지만, 어제부터 리나가 언제 오냐고 너무 칭얼거려서 어차피 가긴 해야 했다.
그냥 호텔에서 쉬는 게 너무 귀찮아서 안 갔던 거지.
차를 몰고 집 근처에 도착하니, 꽤나 멀리서부터 익숙한 실루엣을 한 두 사람이 보였다.
음? 왜 나와 있지.
난 건물 앞에 대충 차를 댄 뒤 창문을 내렸고, 그 너머로 멀뚱멀뚱하게 서 있는 리나와 수아가 보였다.
"너네 여기서 뭐 해?"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날 바라보는 두 사람.
"깜짝이야! 오빠 뭐야…?"
"뭐긴, 너가 오라고 그렇게 난리를 쳐놓고."
난 싱긋 웃으며 말했고, 리나 뒤쪽에 서 있던 수아 나지막하게 혼잣말을 했다.
"올 때 미리 연락하라니까……."
수아는 삐쳤다는 듯 다른 곳을 바라보며 입술을 삐쭉 내밀고 있었다.
……맞아. 그때 무작정 집에 쳐들어가 있을 때 애들이 하도 난리를 쳐서 앞으로는 연락하기로 했었지.
하도 이 여자 저 여자 만나고 다니느라 깜박했다.
"급하게 오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미안해."
내가 최대한 미안해 보이는 표정으로 대답하자 수아의 얼굴이 조금이나마 풀어졌다.
그러고보니, 리나는 완전히 외출 준비가 끝난 상태 같은데, 수아는 집에서 쉬다 잠깐 나온 듯한 복장이다.
그래서 리나 얘는 막무가내로 찾아왔다고 뭐라 안했구만.
"리나 너는 어디 가?"
"아, 난 촬영 있어서 나온 거고, 천수아는 어제 짐 정리하면서 생긴 재활용 분리수거 한데."
왠지 수아만 복장이 가벼워 보인다 싶더라.
흐음, 이렇게 말하면 상황이 안 맞으려나? 노출은 리나가 훨씬 심하니까.
리나의 말이 끝나자 수아는 차가운 표정과 말투로 말했다.
"넌 짐 정리 언제 할 거야? 오늘 오전에 일찍 하면 너도 하고 나갈 수 있었는데, 미루다가 이렇게 된 거잖아."
수아가 정곡을 콕 찔렀는지, 리나는 잠시 날 바라본 뒤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수아에게 조용히 말했다.
"……내가 알아서 할 거거든? 니가 내 거 대신해줄 것도 아니잖아…!"
"같이 사는 사람이 널브러진 짐 보고 거슬릴 거라고 생각은 안 하니?"
"금방 치울 거야!!!"
두 사람은 내가 나타난 지 1분도 되지 않아서 티격태격하기 시작했다.
대충 까톡으로 얘기 들어보면 평소엔 나름대로 잘 지내는 거 같던데, 이쯤 되면 내가 원인인 거 아니야…?
그 와중에 확실히 수아가 생활력이 좋긴 하네.
짐 정리하면서 생긴 쓰레기까지 버리러 나왔으니 수아의 방이 얼마나 깔끔할지 벌써 예상된다.
리나는…… 뭐, 이런 정리를 못 한다는 건 아니지만, 수아가 워낙 깔끔하고 손이 야무진 편이니 상대적인 효과를 조금 보고 있는 거지.
리나도 나름 평범하게 깔끔한 스타일이다.
난 창문 너머로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잠시 바라보다 대충 세워놨던 차를 제대로 주차한 뒤 시동을 껐다.
"앞으로도 이런 식이면, 나 너희 어머니께 다 말씀드릴 거야."
"협박하냐? 그러면 뭐, 내가 쫄 줄 알아?"
이미 충분히 쫄고 있는 거 같은데…….
뭐, 리나 입장에선 애초에 수아와 함께 사는 조건으로 자취를 허락받았으니 이런 말싸움에선 불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난 두 사람의 말싸움을 끊어낼 겸 둘 사이에 바짝 붙어 넌지시 말을 던졌다.
"어머니랑 얘기는 잘 된 거야? 리나야?"
두 번이나 강조해서 말하니 말싸움은 순식간에 끝났다.
이 정도 효과를 기대한 건 아니었는데 말이야.
수아는 별 관심 없다는 듯 시선을 돌렸고, 리나는 괜히 자신의 얇은 팔뚝을 쓸어내리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응. 천수아랑 같이 사는 조건으로 허락받았어."
"그래? 걱정했었는데, 다행이다."
"아니야, 오히려 좋아하셨어. 각자 방도 따로 쓸 수 있고……."
뭐라 더 말하려던 리나는 갑자기 입을 굳게 닫은 채 우물쭈물했지만, 이내 입을 열었다.
"……수아한테 민폐도 덜 끼칠 수 있어서 다행이라더라."
죽어도 뱉고 싶지 않았던 말을 해버렸다는 듯한 리나의 표정에 난 실소를 터트려버렸고, 수아는 뒤에서 민망한 얼굴로 들고 있던 짐을 괜히 만지작거렸다.
"좋네. 나도 사실 침대 하나 있는 집에서 둘이 같이 사는 것 때문에 마음이 계속 불편했었거든. 앞으로는 그래도 여유롭게 지낼 수 있겠네."
사실 따져보면 수아한테 민폐를 끼쳤던 것 맞긴 하니까.
리나가 민폐를 끼쳤다기보단, 무작정 리나를 수아에게 맡긴 내가 민폐를 끼친 거지.
어쨌든 수아도 이젠 더 좋고 넓은 집에서 살 수 있게 됐고, 치안도 그 동네보단 훨씬 좋을 테니 마음이 어느 정도 편해졌다.
내게 뭐라 대답할지 모르겠었는지, 잠시 고민하던 리나는 귀엽게 홍조를 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리나도 수아네 집에 얹혀서 살던 것보단 지금이 더 편하겠지.
난 여전히 민망해하고 있는 수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나 온 김에 집 구경이나 좀 해보자. 둘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네. 수아 씨가 집들이 좀 시켜줘요."
"아, 네. 저 이거 금방 끝나고 같이 들어가요."
"도와줄게요. 그래도 버릴 게 많지는 않네요."
"미리미리 다 치우는 성격이라……."
수아에게 다가가 재활용을 같이 정리해주려는데, 리나가 팔짱을 꼈다.
"집들이는 나중에 나도 같이해야지…!"
내게 바짝 붙어 날 노려보는 리나.
"아, 그냥 가볍게 한 말이야. 그냥 구경만 하고 나올 거야. 집들이는 나중에 제대로 하자."
리나는 아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수아를 빤히 쳐다보더니 이내 내게 말했다.
"나도 같이 들어갈 거야."
"응? 리나, 너 촬영 있다고 하지 않았어? 얼른 가야 하는 거 아니야?"
"……텀블러 놓고 나왔어."
평소에 텀블러 같은 거 들고 다니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데…?
뭐라 따지고 들려다 더 피곤해질 거 같아서 그냥 말았다.
셋이서 수아의 재활용 정리를 돕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중이다.
그 와중에 그 잠깐 도와주면서 수아에게 자기 내일 짐 정리 할 때 꼭 도우라는 약속을 받아내는 리나가 꽤나 인상적이었다.
분위기 보니 수아는 그런 약속 없어도 리나는 도와줄 생각이었던 거 같지만.
그런 두 사람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가 나왔고, 그 미소를 오래가지 못했다.
"너 뭐냐?"
리나와 수아를 양쪽에 끼고 복도를 걷던 중 하령을 마주쳤다.
방금 씻었는지 젖은 머리와 짧은 반바지와 널널한 반팔을 입고 있는 하령.
그냥 평범하다고 볼 수도 있는 복장인데, 건강미가 느껴지는 허벅지와 은은하게 풍기는 샴푸 향을 맡고 있으니 묘하게 꼴리네.
애가 처녀를 따놓으니 이젠 저런 모습으로도 농염함을 뿜어내는구나.
일단,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다.
어느 정도 예상한 상황이긴 하지만, 딱히 대처할 생각은 없었던 터라 없었고, 나도 모르게 당황해버렸다.
심지어 은은하게 관능미를 뿜어내는 하령을 보고 있으니 더 당황스럽네.
이런 이유들로 잠시 굳어 있는데, 리나가 입을 열었다.
"어? 언니! 언니도 여기 살아요?"
후우…… 리나랑 아는 사이였구나, 다행이다. 리나 덕분에 바보 같아 보일 뻔한 상황 하나 넘겼네.
리나가 반갑게 아는척하자, 날 노려보다 일단은 인사를 받아주는 하령.
"리나 안녕? 이사 온 지 며칠 안 됐어."
하령은 능글맞게 말했고, 수아는 리나에게 작게 속삭였다.
"누구셔…?"
"아, 같은 소속사 언니야. 언니, 애는 수아라고 애도 같은 회사예요."
수아는 하령에게 고개를 살짝 숙여 다소곳하게 인사했다.
"응, 수아 알고 있어."
알고 있다는 대답에 수아는 쑥스러웠는지 볼을 살짝 붉혔고, 리나와 하령은 가벼운 안부를 나눴다.
둘은 이미 아는 사이였구나.
하긴, 리나는 붙임성이 꽤나 좋으니 같은 회사 소속 뉴투버들과 친분이 있을 수밖에 없겠지.
일단, 이 상황을 넘겨야 한다.
하령은 리나와 나누고 있는 저 대화가 끝나면 분명히 내게 다시 말을 걸 테니까.
이런 생각을 하자마자 하령과 눈이 마주쳤고, 난 미간을 살짝 찌푸린 뒤 턱짓으로 가라는 뉘앙스를 취해 보였다.
알아들었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내게 다가오는 하령.
"뭐하냐? 왜, 애들한테는 잘 해주나 봐?"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그냥 가, 다음에 얘기해."
화기애애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차갑고, 어두워졌다.
홍조를 띠고 있던 수아와 웃으며 대화하던 리나.
두 사람의 얼굴에선 표정이 사라졌고, 그 모습은 꽤나 무서웠다.
미소를 감춘 리나는 곧장 하령에게 질문했다.
"언니, 오빠랑 무슨 일 있었어요?"
하령은 능글맞은 말투로 가볍게 웃었다.
"별일 아니야. 나 수업 있어서 먼저 갈게. 또 보자 애들아."
하령은 날 스쳐 지나갔고, 리나와 수아는 아무말 없이 하령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날 지나쳐간 하령의 표정은 상당히 복잡해 보였다.
아니, 그건 분명 화가 난 표정이었어.
괜히 나까지 감정이 복잡미묘해지는 기분이다.
문제는 지금 내게 중요한 건 이게 아니라는 거지.
고개를 살짝 돌리니 아랫입술을 질끈 물고 있는 수아와 어이가 없다는 눈빛으로 날 노려보는 리나가 있었다.
……씨발 진짜, 타이밍 미쳤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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