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 청염백광검
“으으…….”
서영후는 완전히 절망했다.
자기 공격을 일부러 튕겨내는가 싶더니, 스탯창을 보며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은혁이 새로운 직업을 얻는 것까지는 보지 못했지만, 서영후는 자신이 절대 은혁을 못 이긴다는 것을 깨달았다.
“죽이진 않을 테니, 그냥 꺼져라.”
은혁은 서영후 쪽도 쳐다보지 않고 말했다.
은혁이 직접 서영후를 죽이지 않아도, 서영후는 서서히 몬스터로 변하거나, 그 과정을 못 견디고 죽을 터였다.
“그냥 꺼지라고?”
서영후는 부들부들 떨었다.
그는 자신을 부정한 은혁에게 한 방도 제대로 먹이지도 못한다는 현실을 견디기 어려웠다.
그때, 토끼 가면이 통신기로 말했다.
“당신의 쓸모는 여기까지인 것 같군요, 서영후 님. 당신은 이제 쓸모가 없습니다.”
뚜둑.
통신기가 꺼졌다.
남을 등쳐먹으며 성장하려 했던 서영후는 그렇게, 이곳에서도 버림받았다.
“저놈, 좀 불쌍한데……?”
염훈이 왠지 그런 감정을 느낀 순간,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파앗!
서영후가 갑자기 파괴된 펜스 쪽으로 달려가더니, 옥상 밖으로 몸을 날린 것이다.
“앗?!”
염훈이 말리려 했지만 서영후는 완전히 운동장으로 몸을 날렸다.
“키다리 귀신이여!!”
서영후는 자신의 그림자를 글라이더처럼 만들더니 비행하여 키다리 귀신에게 날아갔다.
반쯤 몬스터화가 진행 중인 서영후는 본능에 따라, 몬스터만이 할 수 있는 소리를 했다.
“나 자신을 제물로 바치고 너와 융합하겠다!!”
그림자 악마 형태의 서영후는, 상급 귀신에게 자신을 제물로 바침으로써 융합하는 게 이론상 가능했다.
그렇게 키다리 귀신과 서영후의 그림자가 합쳐진 순간.
파악!!
검은 그림자가 서로를 휘감더니 하나로 합쳐졌다.
휘오오오……!
검은 그림자의 회오리가 휘몰아쳤다.
“뭐……!”
은혁조차도 이 상황은 조금 놀라웠다.
“케켁?! 지금 뭐 하는 겁니까!!”
토끼 가면이 교내 확성기를 통해 고래고래 소리쳤다.
“가뜩이나 통제할 수 없는 키다리 귀신과 합쳐지다니! 이런 미친!!”
토끼 가면이 안달복달하는 동안.
스오오오…….
회오리가 서서히 걷혔다.
-키다리 그림자 귀신이 탄생했습니다!
키다리 귀신과 그림자 악마 서영후가 합쳐진 변종 몬스터였기에, 토끼 가면도 예측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괴물이 되었다.
“캬아악!!”
타앗!
키다리 그림자 귀신은 옥상보다 높이 뛰어올랐다.
“이런, 피해!!”
콰콰쾅!!
키다리 그림자 귀신은 두 사람을 노리지 않았다.
옥상의 게이트를 짓밟아서 파괴했다.
“저, 저게 돼?”
염훈이 기막혀했다.
기껏 메인 미션, 게이트 미션을 다 깼는데, 키다리 그림자 귀신의 깽판이 게이트를 파괴했다.
게이트가 없으면 4층으로 갈 수 없다.
‘흠. 이런 경우는 진짜 드문데.’
은혁도 신기해했다.
일반적인 플레이어나 NPC는 함부로 게이트를 부술 수 없다.
하지만 NPC와 플레이어가 합쳐진 존재인 키다리 그림자 귀신은 규칙을 위반하고 게이트를 파괴했다.
그러자 확성기가 재차 울려 퍼졌다.
“긴급 상황 발생! 교내의 모든 귀신은 저 괴물을 처단할 것!!”
타타탓!
사사사삭……!
학교 곳곳의 귀신들이 모조리 키다리 그림자 귀신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쿠오오오!!”
키다리가 된 만큼, 그림자도 길었다.
가뜩이나 강한 키다리 귀신이 그림자의 힘까지 지니게 되니, 본관의 하급 악령들은 죄다 쓸려 나갔다.
“오우야…….”
옥상 난간에 서서 상황을 지켜보던 염훈이 앓는 소리를 냈다.
반면에 은혁은 태연하게 인벤토리창을 뒤지고 있었다.
“염훈. 너 아까 2층에서 어떤 스킬 얻었냐?”
“어?”
“[정화], [하급 치유], 그리고 하나 더 말하려다 말았잖아?”
“그게.”
염훈이 뒤통수를 긁적이더니 작게 말했다.
“고유 스킬 [2초 무적].”
그랬다.
회귀 전 은혁의 주력 스킬이 [패링]이었다면, 염훈의 주력 스킬은 [2초 무적]이었다.
말 그대로 2초 동안은 무적이 되는, 불패불굴의 스킬.
염훈의 스킬을 확인한 은혁은 확신을 담아 작전을 결정했다.
“염훈. 너도 가세해라.”
귀신들이 싸우는 운동장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햐, 학교의 살인귀들이랑 같이 힘을 합치라고?”
“키다리 그림자 귀신은 그래야 할 정도로 강할 테니까.”
공교롭게도 지금은 밤이었다.
한밤중의 학교에는 그림자가 넘쳐난다.
키다리 그림자 귀신은 그림자를 계속 흡수할 수 있을 것이다.
“넌?”
“난 잠깐 할 일이 있어.”
은혁은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고 있었다.
“조금 걸리니까 최대한 서영후를 막아라.”
“젠장, 근데 이게 의미가 있냐? 게이트가 깨지면 우리 영원히 여기 갇히는 거 아니야?”
“날 믿어.”
“젠장, 믿는다!”
염훈은 다시 [신성한 날개]를 발동해서 하늘을 날았다.
“한번 잡아 봐, 이 개새끼야!”
“쿠오오오!!”
학교 운동장은, 어느새 하급 귀신, 성기사, 키다리 그림자 귀신이 뒤엉켜 싸우는, 그야말로 헬 난이도에 어울리는 지옥 같은 모습으로 변해 버렸다.
“이봐요! 옥상의 당신! 당신은 왜 안 돕습니까?!”
확성기 너머의 토끼 가면이, 옥상의 은혁에게 뭐라고 했다.
은혁은 무시하고 봉인된 마검을 옥상 바닥에 내려놓았다.
‘설마 여기서 쓸 줄은 몰랐는데.’
체리로부터 구매한 봉인된 마검은, 사실 보통 방법으로는 쓸 수가 없었다.
봉인이 워낙 강력하기에 정상적인 방식으로는 봉인을 해제할 수 없는 탓이다.
하지만.
“아깝지만 지금 쓰자.”
물귀신의 마정석을 마검 위에 얹었다.
그리고 플레임 나이프를 꺼낸 뒤, 조심스레 마정석을 내리찍을 준비를 했다.
‘빗나가면 안 된다.’
짧은 [명상]으로 정신을 다잡은 뒤.
“[강타].”
쾅!!
3성급 마법 무기인 플레임 나이프가 물귀신의 마정석을 찍었다.
그 순간.
화아아악!!
물귀신의 힘이 담긴 마력과 액체가 봉인된 마검 속에 흘러 들어갔다.
그리고.
-쿠오오오오……!!
마검 속에 담긴 힘이 울부짖었다.
왜냐하면 봉인된 마검의 정체는…….
‘대천사 미카엘.’
고대의 악마와의 대결에서 승리한 미카엘은, 악에 대한 증오심으로 자신이 타락할 것을 경계했다.
그리하여 자기 자신의 자아를 지우고, 한 자루의 검이 되도록 스스로를 봉인했다.
‘미카엘에 비하면 약하디약한 물귀신이지만, 그 힘을 강제로 주입했으니 반작용이 일어날 수밖에.’
아무리 애를 쓰고 달래도 미카엘은 깨어나지 않는다.
수많은 성직자들이 그렇게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그래서 은혁은, 물귀신의 기운을 냅다 끼얹는 식의 편법으로 깨워서, 미카엘의 힘이 봉인을 내부에서부터 깨고 나오게 하는 게 목적이었다.
물론 이런 식으로 강제로 깨워봤자 1분 정도만 사용 가능할 뿐이다.
‘그거면 충분해!’
쩌적……!
파앗!!
봉인된 마검의 봉인이 해제되었다.
낡고 봉인된 검의 모습은 사라지고, 푸른 화염과 새하얀 빛으로 타오르는 성스러운 검이 나타났다.
너무나도 눈이 부시고 뜨거워서 함부로 잡을 수도 없었다.
그 순간.
-축하드립니다! 최초로 청염백광검의 봉인을 해제하셨습니다!
-아이템 레벨 제한을 무시하고 착용 가능합니다!
덥석!
은혁은 손잡이를 쥐었다.
그러자 빛과 열기가 가라앉으며, 청염백광검의 모습이 드러났다.
-청염백광검 :
5성급 아이템.
빛과 화염의 대천사 미카엘이 검이 되어 봉인된 형태.
푸른 화염과 새하얀 빛을 내뿜는 장검 형태이며, 한 손과 양손, 모두 사용 가능하다.
모든 악 성향의 몬스터에게 특히 효과적인 무기다.
그 누구도 봉인을 완전히 해제하진 못했고, 많은 이들의 기억에서 잊혔다.
단, 강은혁은 100층탑의 3층에서 편법을 동원하여 일시적으로 봉인을 해제한 것이다.
“좋았어.”
은혁은 청염백광검을 한 손에 움켜쥐고, 다른 손으로는 힐링 포션을 마셨다.
벌컥벌컥…….
‘미리 빨기’라는 편법이었다.
체력이 꽉 찬 상태에서 일부러 포션을 잔뜩 빨아두면, 다치면서 줄어든 체력을 미리 빨아둔 포션으로 회복시킬 수 있었다.
“가볼까!!”
타앗!!
은혁은 옥상 펜스를 밟고, 새로 익힌 도적 스킬 [도약]으로 단숨에 키다리 그림자 귀신에게 날아들었다.
하지만 하필 키다리 그림자 귀신은 날뛰는 중이었기에, [도약]을 해도 놈의 허리 높이였다.
“으랴압!!”
촤악!!
청염백광검은 키다리 그림자 귀신의 허리와 허벅지를 길게 세로로 썰었다.
“키에에에엑!!”
화르륵!
상처에서 푸른 불꽃이 확 일어났다.
화륵!
화르르르……!
파아앗……!!
상처가 내부에서부터 화염과 빛을 내면서 점점 벌어졌다.
“뭣?!”
“케켁?!”
염훈과 귀신들이 동시에 놀라서 물러났다.
“[도약]! 연속으로!”
팍! 팍! 팍!
은혁은 [도약]을 한 뒤, 키다리 그림자 귀신을 밟고 재차 도약했다.
팍!
은혁은 키다리 그림자 귀신의 어깨를 밟고 치솟아 오른 뒤.
“하앗!!”
정수리를 향해 청염백광검을 휘둘렀다.
파악!!
쩌저적……!!
화르르르륵!!
‘끝.’
은혁은 타격당한 귀신의 정수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과 열을 등 뒤로 느끼며 안전히 착지했다.
“어, 어떻게 된 거야?”
염훈이 다가와 물었다.
“상성이라는 게 이렇게 무서운 거지.”
은혁은 허허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귀신인 데다가 그림자 속성까지 합쳐졌으니, 청염백광검은 천적 중에서도 천적이다.
게다가 봉인된 마검 특성상, 봉인이 해제된 직후가 가장 위력이 강했다.
그런 청염백광검의 일격을 정수리에 꽂았으니, 그 이상 휘두를 필요도 없었다.
철컥!
은혁은 청염백광검을 칼집에 넣었다.
화르륵!!
키다리 그림자 귀신은 선 채로 타죽었고, 귀신들은 그 빛과 열기에 놀라서 사방으로 도망쳤다.
털썩!
장작 무너지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축하드립니다! 레벨이 상승하셨습니다!
-현재 레벨 : 4.
-전사 숙련도가 2% 증가했습니다!
-현재 전사 숙련도 : 16%.
-도적 숙련도가 3% 증가했습니다!
-현재 도적 숙련도 : 16%.
-축하드립니다! 키다리 그림자 귀신을 처치하셨습니다!
“후욱, 후욱…….”
은혁은 숨을 몰아쉬었다.
기이이잉…….
청염백광검에서는 마치 과열된 기계 같은 소리가 나더니, 봉인이 다시 걸렸다.
‘아무리 그래도 딱 두 번 휘둘렀는데 다시 봉인이 되다니.’
은혁은 투덜거리며 키다리 그림자 귀신의 사체를 뒤적였다.
하지만 어디에도 마정석은 없었다.
완전히 소멸시키다시피 처치했기에, 확률적으로 나오는 마정석조차 나오지 않은 것이다.
“우후훗! 정말 대단하군요!”
학교의 스피커에서 토끼 가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쓸모가 없어진 서영후와 통제 불능의 키다리 귀신까지 모조리 없애다니. 잘해 주셨습니다! 일석이조!!”
토끼 가면의 목소리에는 비웃음이 가득했다.
“하지만 당신들도 끝장입니다. 당신들을 살려 보내면 헬 난이도의 3층의 위명이 더럽혀집니다.”
토끼 가면은 손가락을 딱 튕겼다.
“토사구팽의 시간입니다. 포위해.”
어느새 귀신들이 먼발치에서 포위망을 구성했다.
하늘을 나는 악령 타입의 귀신들까지 운동장 하늘을 포위했다.
토끼 가면이 명령하면, 귀신들은 일제히 덮칠 터였다.
“귀신은 이래저래 귀신인 건가.”
염훈은 이를 갈았다.
“풉. 근데 웃기지 않냐?”
은혁은 왠지 웃음을 터뜨렸다.
“뭐가 웃겨?”
“토끼 가면 놈이 토사구팽을 시전하는 게 좀 웃기잖아?”
토사구팽은 토끼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잡아먹는다는 뜻이다.
토끼 가면을 쓴 놈이 토끼가 잡아먹히는 내용의 경구를 쓰니 묘하게 웃긴 것이었다.
은혁이 설명하자 염훈도 피식 웃었다.
“하나도 안 웃겨.”
“너 솔직히 지금 피식 했잖아.”
“비웃은 거다. 이런 상황에 아재 개그를 하니까 비웃은 거라고.”
“웃기지 마.”
“네가 웃겨 놓고는.”
“웃겼던 건 인정하는 거임?”
두 사람은 낄낄거리며 투덕거렸다.
두 사람의 웃음은 비슷하면서도 조금 달랐다.
‘이런 상황에서도 웃을 수 있다니. 만난 지 얼마 안 됐지만, 이 녀석은 정말 마음이 맞는 친구야. 고맙다, 강은혁.’
염훈의 웃음이 이러했던 반면.
‘푸흡! 푸하하하! 토사구팽 아이고오옼! 나만 웃긴갘!’
은혁의 웃음은 이러했다.
그것을 교장실 모니터로 본 토끼 가면은 화를 냈다.
“감히 어디서 허세를 부리는 거야! 모조리 죽여서 이 학교의 귀신으로 만들어라!!”
그 순간, 은혁은 염훈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림자 도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