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 계약 대결 (2)
“모처럼 [계약 대결]이니까요. 진 쪽에게 진실을 모두 밝히라는 페널티 정도는 줘야죠. 어떻습니까, 시청자 여러분?”
은혁이 제안하자 채팅창은 더 뜨겁게 타올랐다.
치킨좋아의 오두방정이 일으킨 관심이 모닥불 크기였다면, 은혁이 지핀 관심의 크기는 산불 크기였다.
-진 쪽은 불리한 비밀을 카메라 앞에서 다 밝히는 거임?!
-붙어라! 붙어! 개꿀잼각ㅋㅋㅋㅋ.
-치킨좋아가 이길 거라 믿는다. 미리 후원한다.
-그럴까? 요즘 치킨좋아는 수련장에서 좀 약해 보이는 애들 위주로만 싸우지 않았음?
-오, 그러게요. 근데 저 강은혁은 바로 며칠 전에 [계약 대결]로 드레이크 길드 밟은 사람이죠?
-치킨좋아가 좀 후달리는 거 같은데.
-치킨좋아 안티들 졸 많넼ㅋㅋㅋㅋ.
-이건 진짜 싸워 봐야 알 듯. 어느 쪽이 이기건 꿀잼.
채팅창은 대결 조건을 기정사실화했다.
그리고 누가 이기냐를 가지고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런 시발.’
치킨좋아는 속으로 욕을 했다.
하지만 곧 냉정을 되찾았다.
‘후원금이 엄청 들어오고 있어.’
후원금이 곧 체력 재생 버프였다.
영구적인 버프는 아니지만, 적어도 방송 중 재생력은 자이언트 트롤보다 더 높을 것이다.
‘나쁘지 않아.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시청자 관심을 끌었어. 후원금도 그만큼 많이 들어오고 있고.’
즉, 졌을 때의 리스크는 커졌지만, 후원금 버프로 여간해서는 질 것 같지도 않았다.
‘하자.’
“좋습니다.”
치킨좋아는 카메라를 보며,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시청자 여러분께서 그토록 원하신다면, 강은혁 님의 제안을 받아들이죠!”
“븅신.”
“뭐, 뭣?!”
치킨좋아는 은혁을 돌아봤지만.
“아, 저 아닙니다.”
은혁이 쉬고 있는 염훈을 손으로 가리켰다.
“아, 욕하면 안 되는 방송인가? 죄송.”
염훈은 히죽 웃었다.
그 웃음은 지뢰를 밟은 적군 병사를 보는 것 같은 웃음이라 꺼림칙했다.
“비매너 행위 자제요.”
치킨좋아는 겨우 한마디 했다.
은혁과의 싸움이 긴장돼서 오도방정 떨며 염훈을 욕할 기력도 없었다.
“자, 그럼 상호합의 하에 [계약 대결] 성립!”
자잘한 조건을 갖추고, 두 사람은 대련 자세를 취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벽에 붙었다.
-[계약 대결]이 발동되었습니다!
제한 시간은 3분.
“시작하시죠.”
“으음.”
치킨좋아는 침음성을 흘렸다.
은혁은 태연히 서 있었지만 빈틈이 없었다.
‘왜지?’
치킨좋아는 미칠 것 같았다.
후원금만큼 재생력 버프를 지닌 치킨좋아는, 초반에 좀 맞더라도 재생해서 역전할 수 있었다.
초반에 맞을수록 아슬아슬한 재미가 더해졌고, 그만큼 격려 후원금을 많이 보내므로 역으로 재생력은 증가했다.
즉, 상대가 누구건 간에 먼저 달려들어서 맞으면서 싸우는 게 필승 패턴이다.
하지만.
‘뭔가가 다르다.’
그때, 은혁이 입을 열었다.
“선공권은 양보하죠.”
“네?”
“그리고 첫 공격 3회에 대해서는 반격하지 않고 막거나 피하기만 하겠습니다.”
과도한 도발이었다.
“이 새끼가 진짜!”
치킨좋아가 돌진했다.
부웅!
돌진력이 담긴 훈련용 철검이 은혁의 목을 노렸다.
“[화염 방패].”
터텅!
일부러 방어력을 낮춘 [화염 방패]로 비스듬히 막았다.
퍼펑!
“윽!”
[화염 방패]가 깨지면서 불티가 치킨좋아의 상체에 튀었다.
옷에 붙은 불티를 털어내는 추태를 보이는 동안 채팅창에서도 불이 났다.
-뭐임 저 븅신 짓거리는ㅋㅋㅋㅋ.
-지가 먼저 때려놓고 비틀거리는 거?
-불티 좀 튄 거 가지고 쫄지 마라.
-그냥 불티 좀 뒤집어쓴 채로 계속 싸워! 어차피 두 방 남았잖아! 어휴 갑갑하다!!!!!!!!
시청자들도 냉혹해서, 조금만 마음에 안 들면 혹평을 쏟아냈다.
“두 방 남았습니다. 쳐보시죠.”
“크아앗!!”
이번에는 은혁의 정수리에 칼날이 날아들었다.
‘지금이다!’
터텅!
은혁은 맨손으로 철검을 튕겨냈다.
“뭐, 뭐야!”
“지금 맨손으로?!”
구경하던 이들이 경악했다.
‘해냈다! 맨손 [패링] 성공!!’
은혁은 회귀 전부터 죽어라 [패링]만 했었고, 90층 무렵에서는 나뭇가지로 와이번의 맹독 꼬리를 쳐내는 것도 가볍게 해냈다.
‘하지만 맨손 [패링]만은 불가능했지.’
전사의 시스템적 한계였다.
‘지금의 나는 무투가이면서 전사다.’
무투가의 맨손은 일반 무기 판정을 받을 수 있었다.
즉, 은혁이 집중만 하면, 무투가의 손으로 전사의 [패링]을 쓰는 것도 가능하다는 뜻이다.
‘게다가 전사의 숙련도랑 무투가의 숙련도가 시너지를 일으켜서 그런지 딱히 힘들지도 않아.’
은혁은 느긋하게 손을 털어 보였다.
“마, 말도 안 돼.”
치킨좋아조차도 맨손 [패링]을 보고 내심 기겁했다.
“이걸로 두 방. 한 방 남았군요.”
그제야 치킨좋아는 깨달았다.
은혁이 세 수 접어준 게 많이 접어준 게 아니었다는 것을.
“으, 으와아아!!”
치킨좋아는 필사적으로 여러 번 연속 공격을 펼쳤다.
하지만 은혁은 ‘모든 직업의 가능성’을 지닌 자였다.
왼손으로 [화염 방패], 오른손으로 맨손 [패링]을 펼쳐서 모두 튕겨냈다.
터터텅!
치킨좋아가 멈칫한 순간.
“크윽……!”
“그럼 이제 제가 반격 갑니다.”
은혁은 맨주먹으로 자세를 낮췄다.
‘히익.’
치킨좋아는 은혁이 뭘 하려는 것인지는 몰랐지만 겁에 질렸다.
“[화염 방패]!”
화륵!
왼손에 [화염 방패]를 띄웠다.
“거기다 [광풍돌진권] 연계.”
은혁은 8층에서 복도에 있던 홉고블린 무리를 쓸어 버린 퓨전 스킬을 썼다.
단, 이번에는 몸 전체에 휘감듯이 쓰는 대신, 압축해서 주먹에만 모았다.
-히든 이펙트 발동!
“[블레이징 러시].”
화륵!!
광풍처럼 돌진하는 은혁이 일으키는 화염의 궤적이 잔상처럼 남더니.
콰콰콰쾅!!
화염폭풍의 힘과 돌진력이 실린 주먹이 치킨좋아의 몸통에서 폭발을 일으켰다.
콰르르르……!!
블레이징 러시를 맞고 터져 나간 치킨좋아는 한참 뒤편으로 튕겨 나갔다.
콰콰콰콰쾅!!!
치킨좋아는 처참한 몰골로 벽에 박혔다.
은혁의 주먹이 꽂힌 복부는 말 그대로 폭발해서 내장이 밖으로 비죽 튀어나왔지만, 대련 시작 때 받아 둔 후원의 힘으로 재생력을 강화시켰다.
“커컥……!! 커흑……!!”
“와, 재생력이 좋긴 좋네.”
은혁은 감탄했다.
즉사하지 않게 일부러 몸통 쪽에 꽂아 넣은 은혁이었지만, 그래도 내장이 지글지글 불타면서도 회복되는 게 눈에 보였다.
“어떻게, 좀 더 싸울 겁니까?”
“으아…… 으으……!”
“항복으로 간주해도 되겠죠?”
그 순간.
-승자는 강은혁 님!
시스템 메시지가 TKO 선언을 내렸다.
-패배자 치킨좋아 님은, [계약 대결]의 규칙에 따라, 진실만을 말해야 합니다!
그 순간.
‘어라?’
시간이 멈췄다.
‘설마 또 직업 카드 선택권이?’
-축하드립니다! ‘모든 직업의 가능성’이 새로운 가능성을 개화합니다!
-새로운 직업 카드를 뽑아주십시오!
은혁은 정지된 시간 속에서 고개를 갸웃……하려 했지만 고개도 꼼짝할 수 없어서 마음속으로만 그렇게 했다.
‘흠. 상대 플레이어가 그리 강적은 아니었는데도 직업 선택창이라. 과거에 안 좋은 인연이 있었기 때문에 발동하는 건가? 아니면 그냥 확률?’
은혁은 의아해하면서도, 허공에 뜬 12장의 직업 카드를 노려봤다.
그때였다.
둥실둥실…….
패배한 치킨좋아의 몸에서 직업 카드가 떠오르더니 날아왔다.
그리고 기존의 전사 카드와 충돌하더니, 두 장 다 공개됐다.
-모든 직업의 가능성이 선택권을 제시합니다!
-본래 갖고 있던 전사의 가능성과 지금 쓰러뜨린 플레이어가 지니고 있던 전사의 가능성 중 원하는 것을 고르십시오!
이번에도 서영후, 드레이크를 꺾었을 때와 비슷했다.
A. E급 직업 ‘노력하는 전사’. (본래 지니고 있던 가능성)
B. D+급 직업 ‘후원 풍선을 재생력으로 바꾸는 전사’. (치킨좋아를 쓰러뜨리고 복사한 가능성)
‘아, 뭘 고를까.’
재생력을 외부로부터 공급받는 전사는 좋아 보이지만, 시청자 의존적이라는 점에서 한계가 컸다.
카메라가 부서지거나 통신이 불안정해지면 끝장이니 한계가 극명하다.
‘그러고 보니 노력하는 전사는 왜 E급인 걸까?’
노력하는 전사도 꾸준히 노력하면 전사 스킬만으로도 꽤 강해지는데 평가가 좀 박하다 싶었다.
‘뭐, 고유 스킬을 따로 주지 않는다는 단점이 크지. 게다가 100층탑의 시스템은 노력보다는 결과를 중시하는 경향이 강하고.’
노력만 하다 패배하는 처량한 가능성을 품은 직업이라 그런지 노력하는 전사는 E급으로 책정된 듯하다.
하지만.
‘바꾸지 않는다.’
은혁은 ‘노력하는 전사’를 한 번 더 고르기로 했다.
‘왜냐면 나는 이 직업이 마음에 들거든.’
사실, 회귀 전 뮤비즈에 의해 죽을 때는 회한에 가득 찼었다.
몇 차례의 추가 각성과 이후의 승급을 통해 노력하는 검성까지 되었지만 후회는 막급이었다.
‘처음부터 A급 직업을 뽑았더라면 2차, 3차 각성할 때 더 빨리 성장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런 후회는 은혁의 마음속에 깊이 박혀 있었고, 죽기 직전까지도 그러했다.
하지만 막상 회귀를 하고 나니, 회귀 전 자신의 노력과 업적이 그리 무시할 만한 게 아니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이 직업은 애착도 있고, 내 정체성이기도 해. 그러니 끝까지 끌어안고 간다. 그리고 회귀 전처럼 등급 올리고 검성으로 승급하자.’
은혁은 노력하는 전사 직업 카드만큼은, 그 어떤 S급 전사 카드를 얻을 기회가 와도 포기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래서 A를 택했다.
-E급 직업 ‘노력하는 전사’를 선택하셨습니다!
은혁이 A를 고른 이유는 또 있었다.
‘같은 직업을 또 고르면 어떻게 될까?’
은혁은 이미 노력하는 전사였고, 기존 직업에 대한 애착 때문에 같은 걸 또 골랐다.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보자.’
이런 경우는 100층탑의 시스템이 보기에도 극히 드문 경우인 모양이었다.
-모든 직업의 가능성이 가능성의 중첩을 확인했습니다!
-노력하는 전사의, 중첩되어 넘치는 기운이 일시적으로 시스템을 역류하여, 전사 직업에 호의를 품고 있는 성좌들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좀 불안하네?’
초반 선택이 성좌들에게 낱낱이 알려지는 건, 엄청 좋거나 엄청 안 좋거나 둘 중의 하나였다.
-축하드립니다! 광기의 성좌, 매드니스가 선물을 보내왔습니다!
-광전사의 가면을 획득하셨습니다!
-광전사의 가면 :
6성급 저주받은 아이템.
가면을 착용하는 즉시, 모든 능력을 잃고, 대신 4차 각성한 ‘광기 충만한 광전사’가 된다.
그 상태로 5분이 지나면 자동 해제된다.
1회용.
‘절대 안 쓴다.’
순간 전투력은 팍 올려주지만, 5분 동안 자기 통제력을 잃는다.
게다가 은혁의 강점은 여러 직업을 쓰는 건데, 순수한 광전사가 되어 버리면 득보다 실이 더 클 수 있다.
‘이건 인벤토리 깊숙한 곳에 숨겨놓고 나 자신도 그냥 잊어버리자.’
그 순간, 시간이 다시 정상으로 흘렀다.
“자아, 그럼.”
은혁은 치킨좋아의 부하들을 돌아봤다.
“치킨좋아 님이 깨어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은데, 그동안 여러분도 심심하시죠?”
은혁이 묻자 치킨좋아의 부하들이 주춤거렸다.
“에……?”
“저희는 이만 나갈게요…….”
은혁은 고개를 저었다.
“들어오는 건 자유지만 나가는 건 아니란다.”
“그런!”
그들은 나가려 했지만 은혁이 카메라 앞에 서는 게 더 빨랐다.
“시청자 투표로 결정하죠.”
-찬성.
-붙어라.
-5 대 1로 붙어 봐랔ㅋㅋㅋ.
후원금이 마구 쏟아져 들어왔다.
이제 와서 거절할 수도 없었다.
“같은 조건으로 [계약 대결] 하는 걸로.”
그렇게 5 대 1 대련이 시작됐다.
퍼버버벅!!
콰콰쾅!!
그 결과, 1분도 걸리지 않아서 모두 정리됐다.
“염훈. 네 차례다.”
“야, 너 언제부턴가 나를 힐링 셔틀로 쓰는데…… 읍읍……!”
이번에도 은혁의 입틀막이 빨랐다.
“쉿. 믿고 해봐. 시청자가 많으니까 최대한 경건한 태도로 해.”
은혁이 염훈의 싸움을 말린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악을 용서하는 최대한 선량한 성기사의 면모를 드러내야 한다. 가급적 많은 시청자 앞에서!’
일종의 언론 플레이 목적이었다.
“어휴, 젠장.”
염훈은 투덜거리면서도 희생자(?)들에게 [중급 치유]를 걸어줬다.
화악……!
신성한 빛이 마구 터졌다.
-어? 정말 치료해 주는 거?
-근육 성기사가 의외로 착한 놈이었네. ㅋㅋㅋㅋ.
-그러게. 저 강은혁인가 하는 인간에 비하면 천사다, 천사.
-그러고 보니 저 성기사, 드레이크 길드 처바른 다음에도 일일이 다 치료해줬다죠?
채팅창은 염훈에 대한 호의적인 내용으로 도배됐다.
‘아, 짜증 나. 내 원래 성격대로라면 이 녀석들을 처바르는 건 내 역할인데.’
염훈은 자기도 모르게 괴로운 표정을 지었고, 그 와중에도 치유 스킬의 섬광은 얼굴을 환하게 비췄다.
그러자 그 모습이 더 성스럽게 내비쳤다.
-음, 치료하느라 힘든가 봐.
-그래도 이를 악물고 치료하네.
-나는 저 사람한테 후원하고 싶은데 계좌 좀?
채팅창을 통해 경건함(?)이 전달되자, 염훈의 성기사 숙련도는 미친 듯이 올라갔다.
-성기사 숙련도가 1% 증가했습니다!
-성기사 숙련도가 1% 증가했습니다!
……
……
-성기사 숙련도가 1% 증가했습니다!
-성기사 숙련도가 1% 증가했습니다!
-현재 성기사 숙련도 : 98%.
-성기사 스킬 [상급 치유]를 획득하셨습니다!
-성기사 스킬 [광역 치유]를 획득하셨습니다!
-성기사 스킬 [신성한 오러]를 획득하셨습니다!
-성기사 스킬 [신성한 속박]을 획득하셨습니다!
-성기사 스킬 [광역 축복]을 획득하셨습니다!
-성기사 스킬 [광역 정화]를 획득하셨습니다!
-성기사 패시브 스킬 [질병 저항]을 획득하셨습니다!
-성기사 패시브 스킬 [독성 저항]을 획득하셨습니다!
치료를 마친 순간.
“오오옷! 갑자기 힘이 솟는다!”
염훈은 자기도 모르게 [신성한 오러] 스킬을 썼다.
파앗!!
더없이 경건한 기운이 염훈의 몸을 감쌌다.
그동안 무의식적으로 발현하던 신성력을, 이제는 의식적으로 집중해서 쓸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신성한 오러]를 눈에 집중시키면 사특한 것, 오염된 것을 단숨에 걸러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