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 9층 히든 루트 (2)
“전투 준비.”
“오케이.”
끼기기긱…….
은혁이 철문을 열자, 넓은 공간이 나왔다.
그곳에는 한 노인이 진흙처럼 끈적한 늪 위에 누워 괴로워하고 있었다.
“으으…… 도와다오…….”
노인의 목소리는 절절했다.
성기사인 염훈은 즉시 도우러 가려 했지만.
“속지 마라.”
은혁이 말했다.
“하, 하지만….”
염훈이 망설이는 순간, 히든 미션 전용 버프가 빛을 발했다.
기이이잉……!
[신성력 저항]의 힘으로 염훈은 이성을 되찾았다.
“크크크. 속지 않는 건가…….”
노인이 몸을 일으켰다.
주르르륵.
노인의 몸 전체가 끈적한 점액질로 변하더니, 늪과 동화되었다.
쿠르르르…….
곧이어 늪 전체가 거대한 거인의 형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타락한 수호신, 늪의 거인이 나타났습니다!
“요령은 지난번 물귀신이랑 비슷하다.”
은혁이 염훈에게 귀띔해줬다.
“좌우 협공으로 가자!”
은혁은 좌측으로, 염훈은 우측으로 돌진했다.
“캬아아아!!”
늪의 거인이 양팔을 휘둘렀다.
“[그림자 도약].”
“[신성한 날개].”
팟!
투쾅!
은혁과 염훈은 각자 자신 있는 스킬로 늪의 거인의 공격을 피했다.
“[염열파]!”
화르르륵!
은혁의 화염 공격이 늪의 거인의 등을 훑었다.
“쿠오오오!!”
튜토리얼 시절에 이미 수영장의 물을 빠르게 기화시켰던 위력이다.
더욱 강해진 은혁의 공격에 늪의 거인은 울부짖었다.
그 틈에 염훈은 늪의 거인의 다리를 노렸다.
“[신성한 일격]!”
콰쾅!!
신성력을 머금은 염훈의 일격은 늪의 거인의 다리를 폭발시키다시피 했다.
쿠쿵!
늪의 거인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지금이다!’
은혁은 [도약]으로 높이 치솟아 올라 늪의 거인의 머리를 노렸다.
“[강타]!!”
키이잉!
헤비 체인 소드의 회전 칼날이 [강타] 스킬의 힘을 머금은 채, 늪의 거인의 머리에 작렬했다.
푸확!!
박힌 헤비 체인 소드의 칼날이 회전하며 갈아 버렸다.
키이이이잉!!
“쿠…… 크아아……!”
늪의 거인은 선 채로 부들부들 떨며 체력이 깎였다.
아무리 늪의 거인이라 해도 헤비 체인 소드가 머리에 박힌 채 회전하는데 견딜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흡!”
은혁은 그대로 칼날을 거칠게 뽑았다.
털썩!
늪의 거인은 쓰러졌다.
“이긴 건가?”
염훈이 물었다.
“아직!”
위이잉! 키이잉!
은혁은 헤비 체인 소드를 재차 휘둘러 늪의 거인의 몸 중심에 있던 마정석을 꺼냈다.
“[정화] 부탁한다.”
“음!”
염훈이 늪의 거인의 마정석을 정화했다.
그 순간.
-축하드립니다! 9층 히든 미션을 클리어하셨습니다!
-늪의 거인의 마정석이 정화되어, 개울가의 수호신의 마정석으로 변화합니다!
-성공 시 보너스로 개울가의 수호신을 마정석을 이용해 부활시킬 수 있습니다!
“흠, 별로 좋은 보상은 아닌 것 같은데? 꼭 부활시켜야 하나?”
염훈이 고개를 갸웃하자, 은혁은 피식 웃었다.
“개울가의 수호신이니까, 부활시키면 은혜를 갚으려 하겠지. 부활시키자.”
“쩝, 그러든가.”
두 사람은 부활시키기로 선택했다.
-개울가의 수호신이 부활합니다!
파앗!
“오, 우오오오……!”
새하얀 옷을 입은, 딱 산신령 느낌의 노인이 몸을 일으켰다.
마치 끔찍한 악몽 속에 있다가 막 깨어난 사람 같았다.
“아아, 그대들이 나를 구해줬구려. 고맙소.”
개울가의 수호신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금방 시무룩해졌다.
“하지만 이 오염은 그치질 않으니…… 나는 곧 다시 타락할 것 같구려.”
“엥?”
염훈은 기가 막혔다.
“그러니 속히 떠나시오. 내가 또 타락하기 전에.”
“아니, 그런 게 어딨어요!”
염훈이 화를 냈다.
일부러 마정석까지 써가며 구해줬더니, 또 타락할 것 같다고 한다.
염훈 입장에서는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개울가의 수호신도 할 말은 있었다.
“위에서 아래로 끊임없이 오염물질이 쏟아지고 있소. 이걸 어찌 견디겠소?”
개울가의 수호신이 더 깊은 곳에 위치한, 천장의 큰 구멍을 가리켰다.
지름이 1미터쯤 되는 오염물질 배출구가 여러 개 달려 있었다.
콸콸 쏟아지고 있는 배출구도 있었고, 줄줄 흐르는 배출구도 있었다.
“오염 물질을 정화시키는 힘이 내게도 있었으나, 고블린 놈들이 어떤 수를 쓴 건지, 공장의 오염물 배출구를 대놓고 내가 사는 곳으로 연결시켰소. 나도 휴식을 취해야 하는데, 휴식 장소를 통째로 오염시킨 거라오.”
개울가의 수호신이 하소연을 했다.
염훈은 여전히 분통을 터뜨렸다.
“아니, 수호신이면 그래도 어떻게든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험험, 수호신이라는 명칭을 갖고 있긴 하지만, 소위 성좌로 분류되는 진짜배기 신은 아닌지라…….”
“그럼 수호신 타이틀이나 떼시죠.”
“왜 그리 야박한가?”
“수호신이라면서요!”
“거, 수호신이라는 용어에 겁나게 집착하는구만?!”
“내가 집착하는 게 아니라 그게 정상이죠!”
“하! 그래? 그럼 이건 어떤가?”
수호신은 예시를 들기 시작했다.
“인간들의 야구팀 중에 ‘와이번스’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야구팀이 있지? 그렇다고 실제 야구 선수들의 종족이 와이번이던가? 농구팀 중에 ‘불스’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농구팀이 있지? 그렇다고 실제로 선수들이 황소던가? 아니지! 일종의 비유 아닌가!”
“그거랑 이거랑 같습니까! 다르죠!”
“다르긴 뭐가!”
두 사람은 수호신이라는 호칭과 권능의 불일치 현상에 관해 말다툼을 벌였다.
“흠흠, 잠시 진정하시죠.”
은혁이 슬쩍 끼어들었다.
염훈과 개울가의 수호신은 각자, 은혁이 자기 편을 들어주길 내심 기대하며 말다툼을 멈췄다.
“일단, 현재 개울가의 수호신 님이 약해지신 것만은 사실입니다. 고블린 놈들이 밤낮 가리지 않고 오물을 퍼부어대는데, 그동안 버티신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지요.”
“험! 이 친구는 뭘 아는구만.”
개울의 수호신이 기뻐했다.
하지만 은혁은 엄격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동시에, 제 친구 염훈의 지적도 일부 사실입니다. 진정한 개울의 수호신이라면, 견디는 능력보다는 사태 해결을 위해서, 보다 적극적인 대처를 해야 하셨지 않는가, 라는 점이지요.”
“그렇지!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게 바로 그거였어!”
염훈도 기뻐했다.
“따라서.”
은혁은 그럴듯해 보이는 중재안을 제시하기로 했다.
“개울가의 수호신 님. 저희가 도와드릴 테니, 수호신 님도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음? 어떻게 말인가?”
“고블린 공장장을 처치하러 갈 테니, 수호자님의 권능으로 저희를 그곳으로 옮겨 주십시오.”
은혁은 하수관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약해진 수호자라도, 하수관을 통해 두 사람을 안전하게 공장 내부로 보내주는 것은 가능했다.
‘저 하수관으로 가면, 5분 늦게 출발한 것 정도는 단숨에 뒤집는다.’
은혁은 공장의 평면도를 간단히 머리로 그리며 생각했다.
그러자 개울가의 수호신이 머뭇거렸다.
“자네들을 안전히 공장 안으로 옮기는 건 어렵지 않지만 미봉책이라네.”
“어째서입니까?”
“고블린 공장장을 처치해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리스폰 된다네. 알잖는가?”
“맞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하려는 건 단순히 고블린 공장장을 처치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아니라……?”
“잠깐 귀 좀.”
은혁은 개울가의 수호신 귀에 대고 속닥속닥 의견을 말했다.
“뭣?! 나를 공장장으로 앉혀서 고블린 공장장의 리스폰을 시스템적으로 막겠다고?!”
“어휴, 그렇게 큰 소리로 말하면 귓속말을 한 의미가 없잖습니까.”
“아, 아니, 너무 충격적이라.”
개울가의 수호신은, 은혁의 제안이 뭘 의미하는지 깊이 생각해 보려 했다.
하지만 은혁의 설득은 그치지 않았다.
“개울가의 수호신 자리가 공석이 되는 게 두려우신 거죠?”
“으, 으음. 그렇다네. 내가 자리를 비우면…….”
그때, 염훈이 끼어들었다.
“비우건 말건 상관없잖습니까.”
“뭣?”
“당신이 있건 없건 개울은 정화가 될 수준이 아니잖아요. 실제로 우리가 당신을 구하지 않았으면 몬스터처럼 살았을걸?”
“그, 그건 그렇지만.”
“차라리 당신이 공장장이 되어서 공장을 깨끗하게 운영하는 게 100배 나을 텐데? 그럼 딱히 개울가에 수호신이 필요하지도 않을 거 아닙니까?”
“으음, 애초에 수호신이 필요 없을 정도로 공장을 깨끗하게 장악하라는 건가.”
“바로 그거죠. 제 귀에는 은혁이 제안이 100배 합리적으로 들리는데요?”
“으음.”
염훈의 지적은 무례했지만 사실이긴 했다.
실제로 은혁과 염훈이 오늘 오지 않았다면, 개울가의 수호신은 머지않아 말하는 법조차 잊고 완전히 괴물로 변했으리라.
“제 친구가 입은 거칠지만, 맞는 말만 합니다.”
은혁이 슬쩍 염훈의 설득 위에 올라탔다.
“개울가의 수호신 님. 진정으로 수호신으로 남고 싶으시다면, 역설적이지만 수호신 직위를 버리셔야 합니다. 공장장이 되어서, 수호신보다 위대한 공장 운영을 하셔야 합니다.”
“허참. 맞는 말처럼 들리긴 하지만 너무 급하고, 또 전례가 없는 제안인지라…….”
그때였다.
꾸궁……!
폭발음과 함께 천장이 떨렸다.
“뭐, 뭐지?”
“시작됐군요.”
* * *
콰콰쾅!!
올리버가 이끄는 공략대는 공장 건물 내부에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큭. 너무 오래 걸렸어.’
예상보다 긴 15분 가까이 걸렸다.
“캬캭! 히든 던전에 침입자가 들어갔다고 한다!”
“막아라! 놈들이 정화 방류 플랜트까지 노린다!”
“오염된 진흙 괴물을 모조리 풀어라!!”
그랬다.
은혁과 염훈이 히든 던전에 들어간 순간부터, 그 여파로 각종 히든 이벤트가 발생하고 있었다.
한 명이라도 히든 미션을 발동시키면, 9층 전체의 난이도가 상승하게 되는 히든 이벤트였다.
고블린 공장장은, 평시에는 꺼내지 않는 오염된 진흙 괴물까지 소환해가며 시간을 끌었다.
‘왜 이렇게 놈들의 저항이 거세지?’
올리버는 그 사실을 몰랐기에 힘겹게 싸우고 있었다.
“뭐야, 이거!”
“이봐요! 대장! 공략이 왜 이렇게 빡센 겁니까!”
“안전한 루트로 간다며!”
올리버를 따르기로 한 다른 플레이어들이 투덜거렸다.
돈을 내고 공략대에 참가했는데도 난이도가 급격히 오른 탓이다.
“이봐, 올리버!”
올리버와 비슷하게 부감독급인 플레이어가 외쳤다.
“오늘 조짐이 좀 이상해!”
“그건 저도 압니다!”
“우리 중 누가 트리거를 건드렸나 봐!”
동일한 9층이라도, 특정 조건에 따라 난이도나 진행 양상이 바뀐다.
여름에 북극을 공략할 때와 겨울에 북극을 공략할 때가 다른 것처럼, 변수에 따라 동일한 층이라도 다른 결과를 직면할 수 있었다.
“그럴 리가요! 평소와 다른 짓은 전혀 안 했……!”
말하던 올리버는 흠칫했다.
‘설마 내기 때문에? 아니면?’
올리버는 내기를 하기로 한 은혁이 뒤에서 무슨 수를 썼으리라고 짐작했다.
물론, 그게 무슨 수인지는 짐작할 수도 없었다.
‘돌파하는 수밖에 없어!’
“위대한 가브리엘이여!!”
올리버는 [수호의 영역]을 더욱 강하게 썼다.
올리버의 절박함만큼이나 스킬의 힘 또한 강력했다.
하지만.
쿠쿵!
공장 1층 천장이 박살 나더니, 무언가가 떨어졌다.
쿠쿠쿵……!
와르르르……!
건물 파편과 먼지 때문에 공략대는 주춤했다.
공략대의 베테랑 마법사들이 [거스트 오브 윈드] 따위의 주문으로 먼지를 날려 보내고 나서야 천장을 부수고 떨어진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뭐……!”
“이런 건 처음 보는데……?”
“말도 안 돼.”
플레이어들이 경악했다.
나타난 것은 로봇이었기 때문이다.
“키키킥. 오래 기다렸다.”
로봇에 탑승한 고블린 공장장이 웃었다.
로봇의 외형은 검은 고블린 같았고, 3미터 정도였다.
오염된 마정석과 강철로 제작되었으며, 단순한 만큼 강해 보였다.
“오염된 마정석을 이용해 만든 고블린 전용 로봇! 커럽티드 엔진 로보 초호기! 줄여서 커엔로보 초호기!!”
커엔로보 초호기가 포즈를 취했다.
취이이익……!
로봇이 검은 증기를 내뿜었다.
“오오!”
“캬캭! 해내셨군요, 공장장님!”
“이 위대한 모습이라니!”
고블린들이 환호했다.
“감히 히든 던전을 열어젖힌 오만한 인간들아! 이 첨단 병기로 너희를 모조리 멸해주마! 캬캭!”
고블린 공장장이 외치자 플레이어들이 동요했다.
“히든 던전? 그게 무슨 소리야?”
“여긴 정규 공략 루트 아니었어?”
플레이어들이 공략대의 대장인 올리버를 돌아보며 당혹해했다.
올리버야말로 당혹스러웠다.
수도 없이 공략대를 이끌어왔지만 이런 시나리오가 튀어나온 것은 처음이었다.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나서서 수습해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