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 신규 랭킹 1위 강은혁
‘레나랑 싸우길 잘한 것 같군.’
사실, 레나와 싸우는 건 둘째 치고, 올리버의 부관들이 무단 촬영할 때, 은혁은 조금 고민했었다.
‘적당히 져줄까 고민했었지만 그냥 이기길 잘했다.’
부길드장을 일대일로 쓰러뜨린 명성은 쓸모가 많을 터였다.
은혁은 이제 7대 길드가 강짜를 부려도, 싸워서 이길 수 있다는 걸 널리 알린 것이므로.
“다들 비켜주시죠.”
은혁은 딱 한마디하고는, 염훈과 함께 [그림자 도약]으로 인파의 후방으로 이동했다.
“앗, 사라졌다!”
“제길, 어디로 갔지?”
“이게 다 당신들이 너무 몰려들어서 그런 거잖아!”
은혁을 영입하려던 이들은 자기들끼리 투덕거리기 시작했다.
* * *
그날 밤.
“크악! 크아아악!!”
행운 테번에 괴성이 울려 퍼졌다.
많은 이들이 깜짝 놀라서 잠에서 깼다.
“크아악! 강은혁! 이 나쁜 놈아! 아이고오!!”
괴성의 주인은 염훈이었다.
잠들기 전, 은혁은 염훈에게 신신당부했다.
‘이 나노강화제를 맞으면 몸이 재구성되어서 꽤 아플 거야. 그러니 미리 힐링 포션과 마나 포션을 준비하고 마셔.’
은혁의 신신당부를, 염훈은 고맙게 받아들였다.
그때는 고마웠는데, 이제 보니 보통 신신당부가 아니었다.
“끄아아! 이 나쁜 놈아!!”
그때, 옆방의 은혁이 벽을 툭툭 쳤다.
“염훈. 괜찮아?”
“괜찮게 들리냐?! 근육이랑 뼈가 뒤틀리고 있다고!!”
우드득, 드드득.
실제로 환골탈태, 또는 환골탈퇴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생으로 버티지 말고 [2초 무적]을 중간중간에 써.”
“아, 그랬지!”
염훈이 [2초 무적] 스킬을 쓰자 고통이 싹 사라졌다.
물론, 2초 동안만.
“크아악!”
“쿨타임 끝나면 또 써라. 그리고 네 성기사 스킬을 아끼지 말고 써.”
은혁은 진지하게 조언해 줬다.
그렇게, 염훈은 성기사 숙련도를 25%+까지 올렸다.
* * *
다음 날.
벌컥.
은혁은 염훈의 방에 들어섰다.
염훈은 새벽에 겨우 잠들었고, 침대에 엎드려 있었다.
“몸은 좀 어때?”
“으으, 어때 보이냐, 이 나쁜 놈아.”
“강해 보인다.”
본래 근육질이었던 염훈이다.
단, 그것은 헬스장 자주 다니던 대학생의 근육질이었다.
‘이건 뭐 진짜 전투 근육이구만.’
피부는 순정만화 속의 기사님처럼 새하얗게 변했고, 햇빛 아래에서는 약간 사기그릇 같은 질감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꾹꾹.
은혁은 손가락으로 염훈을 눌러봤다.
“음, 강화 근육으로 꽉 찼군.”
“야, 멋대로 누르지 마!”
“뼈는 어때?”
은혁은 질문하며 뼈를 눌러봤다.
“바이오 티타늄으로 변했구만.”
전기톱에도 썰리지 않는 뼈인데, 고속 회복 기능까지 강화된 것이 염훈의 팔다리뼈였다.
“불패불굴에 한 걸음 더 다가간 걸 축하한다.”
“으으, 환골탈태가 이렇게 힘든 건 줄 몰랐다.”
“아니야.”
“뭐가 아니야?”
“네가 한 건 환골탈태가 아니야.”
“그럼?”
“환골탈퇴다.”
은혁은 나노강화제의 공식 명칭을 간단히 설명했고, 염훈은 베개를 집어 던졌다.
* * *
아침 식사를 마친 은혁과 염훈은 광장으로 향했다.
“네가 앞장서.”
은혁이 염훈에게 말했다.
“내가? 왜?”
“네가 더 눈에 띄니까. 당당하게 걸어.”
염훈은 고개를 갸웃하고 시키는 대로 했다.
“와…….”
“저 성기사 좀 봐.”
“정의 길드의 워잭 느낌도 좀 나는데?”
“저 사람이 강은혁의 동료……!”
환골탈퇴(?)를 겪은 염훈은 성기사로서의 역량도 덩달아 향상됐다.
스킬을 발동하지 않아도 성기사 특유의 경건함과 용기의 아우라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그래서 어제와 달리 은혁에게 마구잡이로 달라붙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게시판에 사람들이 많은데. 잠깐 보고 가자.”
게시판에는 NPC나 플레이어가 개인적으로 거는 사이드 미션이 적혀 있을 때도 있다.
하지만 그쪽은 무시하고, 신규 플레이어 랭킹을 봤다.
“오오! 은혁아! 이제 네가 1위야!”
“길드연합국 통합 랭킹이 아니라 신규 랭킹이잖아.”
“그래도!”
신규 랭킹 1위였던 박병철이 2위로 떨어졌다.
염훈은 신규 랭킹이 그대로 유지되어, 현재 3위였다.
그래도 염훈은 크게 개의치 않는지 박병철에 대한 호기심만 드러냈다.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네.”
‘곧 만나게 될 거야.’
은혁은 그렇게 생각하며 11층 전용 게이트 앞으로 갔다.
“어서 오십시오. 여긴 11층 전용 게이트입니다.”
기존과 다르게, 명단을 살펴봤다.
“음, 오늘 오전은 인원이 꽉 찼습니다.”
11층 참가 인원은 250명이었다.
“오후는요?”
“오후에는 아직 빈자리가 많이 있습니다만, 상승 길드원들이 과반수여서요.”
게이트 관리자가 말끝을 흐렸다.
‘아하, 상승 길드 공격대 2군이구만.’
대다수 길드가 그러하듯, 공격대는 1군, 2군, 훈련반으로 나뉜다.
상승 길드는 2군과 훈련반을 섞어서 운영했다.
‘2군에는 박병철이 있다.’
아직 외부에 알려진 사실은 아니지만, 어젯밤, 신규 플레이어 랭킹 1위인 박병철은 상승 길드에 가입했다.
‘엄청 오만한 조건으로.’
박병철은, 자신이 11층부터 14층까지 역대 클리어 타임 1위로 클리어하면 2군 감독 지위를 달라고 했다.
상승 길드의 부길드장 브라이언은 웃으며 허락했고, 2군에 배속되어 11층에 도전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오후반에 참가하시면, 상승 길드원들 사이에서 함께 활동하셔야 하는데…….”
“상관없습니다. 오후반에 저희 두 사람 올려주세요.”
“알겠습니다.”
“예약을 하시려면 이 게시물을 읽어 보시고, ‘읽었음’ 칸에 서명을 해 주셔야 합니다.”
그러자 염훈이 어리둥절해했다.
“도대체 11층이 뭐기에 이렇게 거창한 겁니까?”
염훈은 11층이 미심쩍었다.
“읽어 보자.”
은혁과 염훈은 11층 전용 게이트 앞 게시물을 읽었다.
<11층 도전자 공지.>
11층부터 14층까지는 하나의 시나리오로 이어진, 통합 미션 층입니다.
과다한 참가자 쏠림 현상을 막기 위해 사전 등록 제도를 시행하오니, 도전하려는, 레벨이 20 이상인 플레이어께서는 사전 등록을 꼭 하시길 바랍니다.
“허. 11층부터 14층까지가 통합층이었구나.”
염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도 길드연합국 소속 다른 플레이어들이 59층 이전 층의 게이트 미션을 다 클리어해왔기에, 은혁과 염훈은 따로 게이트 미션을 치르지 않았다.
특히 통합층은 게이트 미션이 없었다.
“그렇습니다.”
게이트 관리자 NPC가 말을 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비밀입니다만, 단숨에 진행된다는 점에서는 튜토리얼인 1층부터 4층까지와 조금 비슷하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렇구만.”
염훈은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럼, 도중에 5층으로 쉬러 내려올 수 없다는 뜻이겠네요?”
염훈이 구체적으로 묻자, 게이트 관리자 NPC는 곤혹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지금까지 말한 것 이상으로 구체적인 미션 내용을 누설할 수는 없다는 것 같았다.
“뭐 조언 없어요?”
염훈은 왠지 장난기가 들었는지, 곤혹스러워하는 NPC에게 웃으며 물었다.
NPC는 조금 진지한 표정으로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고 보니 편의점에서 파는 공략집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만…….”
“공략집을 편의점에서 팔아요?”
염훈은 감탄했다.
“은혁아. 빨리 편의점으로 가자. 그 공략집 보면서 공부해야지!”
그러자 NPC가 조금 만류하려는 몸짓을 보였다.
“저어, 잠시만요, 성기사님. 그런데 그 공략집에 관한 소문이…….”
“아아, 됐어요. 고마워요.”
염훈은 남들이 들을세라 은혁을 데리고 편의점으로 갔다.
* * *
5층의 편의점은 바깥 세계의 편의점과 매우 비슷했다.
다양한 탄산음료가 존재했고, 1920년대 스타일 클래식 코카콜라도 가끔 기간 한정으로 파는 등 바깥 세계의 편의점보다 우수한 점도 있었다.
제육볶음 맛 삼각김밥도 있고, 치킨 샌드위치도 팔았으며, 칫솔, 속옷, 신문도 다 팔았다.
가끔 민트초코 맛 삼각김밥 같은 괴식이 섞여 있다는 점만 빼면, 완벽한 편의점이었다.
“공략집은 분명 숨겨져 있겠지.”
편의점에 들어온 염훈은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편의점 구석을 뒤지기 시작했다.
반면에 은혁은 쇼핑용 바구니를 들고는 삼각김밥, 샌드위치, 페트병 녹차 따위를 제법 많이 구매했다.
“뭘 그리 많이 사?”
“아, 신경 쓰지 마. 그보다 염훈. 너는 어떤 음료수가 가장 좋냐?”
“나? 프로틴 말고?”
“프로틴 말고.”
“글쎄. 그냥 평범한 사이다?”
“시원한 거?”
“차가운 거!”
“오케이.”
은혁은 냉장고 가장 깊은 곳의 사이다 캔을 꺼냈다.
그때, 편의점 직원 NPC가 염훈 곁에 와서 말을 걸었다.
“저, 손님? 찾으시는 물건 있으신가요?”
“아, 그게.”
염훈은 솔직히 11층 공략집을 찾으러 왔다고 했다.
“아, 그거요?”
NPC가 잡지 판매대를 가리켰다.
잡지만 파는 줄 알았던 염훈은 깜짝 놀랐다.
‘실전 공략! 11층부터 14층까지! 상승 길드 1군 감독의 철저 해부!’
‘통합층 공략이 제일 쉬웠어요.’
‘연속층 스피드런 공략!’
오히려 잡지가 소수고, 대부분 공략집이었다.
“와, 이렇게 대놓고 파는 거였구나.”
히든 미션, 히든 아이템 같은 걸 떠올린 염훈은 조금 놀랐다.
“하나 드릴까요?”
편의점 직원 NPC가 물었다.
“아, 좀 더 구경하고요. 그나저나 대부분 상승 길드 마크가 찍혀 있네요?”
상승 길드의 최우선 목적이 100층 공략이니만큼, 그들이야말로 공략 관련 정보를 가장 많이 알고 있었다.
‘물론, 핵심 정보는 이런 공략집에 적혀 있지도 않지만.’
은혁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눈을 초롱초롱 빛내는 염훈을 보니 초를 치고 싶진 않았다.
“내가 계산할게. 공략집 하나 주세요.”
은혁이 염훈 대신, 쇼핑 바구니에 든 물건과 함께 공략집도 계산했다.
그리고 공략집을 염훈에게 선물했다.
“자.”
“오오, 먼저 읽어도 돼?”
염훈은 기뻐하며 은혁이 구매한, ‘11층부터 14층까지 경험자가 직접 쓴, 핵심 공략집’을 펼쳤다.
“……아니, 뭐야 이거!”
‘공략을 하려면 좋은 직업, 좋은 장비, 높은 레벨과 숙련도가 최우선!’
누구나 아는 이야기를 글씨 크기 20포인트짜리로 써서 한 페이지를 통째로 잡아먹고 있었다.
다른 페이지도 그런 식이었다.
‘동료는 내 목숨 다음으로 소중하다!’
‘동료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11층에서는 우정과 경계심을 모두 놓치지 말 것!’
정말로 하나 마나 한 이야기였다.
“공략집이라서 샀더니만, 읽으나 마나 한 이야기뿐이잖아!”
특히 마지막 페이지에는, ‘더 자세한 공략 정보를 알고 싶다면, 상승 길드 본부로 직접 방문해 주시길 바랍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철썩!
염훈은 공략집을 바닥에 내던졌다.
편의점 직원 NPC는 머쓱해했다.
“그렇게 별로인가요? 저야 NPC라 5층 밖으로는 가본 적이 없어서…….”
“으그그극.”
염훈은 편의점 직원에게 화를 내려 했지만, 직원은 NPC로서 정말로 다른 층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그래서 염훈 혼자 씩씩거렸다.
“이거라도 마시고 좀 속 풀어.”
은혁은 미리 예상이라도 한 사람처럼 차가운 사이다 캔을 염훈에게 내밀었다.
“야! 너는 화도 안 나냐! 네 돈으로 계산한 공략집이 이렇게 쓸모없는 쓰레기인데!!”
“됐고, 한 모금 마시고 진정해라.”
은혁이 캔을 따서 염훈의 입가에 들이밀었다.
“고작 사이다 갖고, 읍! 읍읍, 꿀꺽꿀꺽…….”
처음에는 싫다는 듯이 저항했지만, 막상 입안에 차갑고 달콤한 사이다가 들어오자 전부 마셔 버렸다.
“진짜 잘 마시네.”
“허억, 허억. 젠장. 화도 못 내겠네.”
사이다의 청량함 때문에 강제로 상쾌해져 버린 염훈이었다.
“쳇. 오후에 바쁠 테니까 열 내는 것도 바보 같지.”
“열 받으면 편지라도 보내는 건 어때?”
“어?”
“상승 길드에 엽서 보내자고.”
은혁은 공략집을 흔들어 보였다.
공략집의 맨 뒤편에는 독자 엽서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