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 박병철 참교육 (1)
은혁이 묻자 염훈은 고뇌했다.
“말로는 설명하기가 힘들어.”
“……잘 들어라, 염훈.”
은혁은 팔짱을 끼고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여긴 100층탑이야. 박병철 같은 놈이 처음도 아닐 거고, 마지막도 아니야.”
“그건 알아. 하지만!”
“더 들어봐. 상승 길드는 이번 일에서 꼭 피해자처럼 보이지만, 사실 엄밀히 따지면 크고 작은 박병철 같은 놈들이 연합한 게 상승 길드야.”
은혁의 말에는 거짓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상승 길드 놈들끼리 서로 싸우는 모습이 솔직히 재밌게 느껴질 정도인데.”
배신자 박병철과 기존의 상승 길드원끼리 서로 싸우다 죽으면 오히려 나쁠 게 없었다.
“음…….”
염훈은 미련이 남는 듯했다.
악인이 그냥 죽도록 방치하는 것보다는, 그래도 합당한 처벌을 내리고 참회의 기회를 주고 싶다는 마음이 더 큰 모양이었다.
‘훗. 착한 녀석.’
은혁은 염훈과 반대 입장을 갖고 있었지만 내심 대견했다.
그래서 은혁은 절충안을 내기로 했다.
“그럼 이렇게 하자.”
은혁은 사악한 웃음을 흘리며 제안했다.
“예전에 연금술 상점에서 가르쳐 줬던 응용편 기억 나냐?”
“서, 설마.”
“그래.”
은혁은 싸우고 있는 쪽을 올려다보며 큭큭 웃었다.
“박병철이 죽기 직전, 네가 구해줘라. 그리고 놈으로 하여금 너를 생명의 은인으로 모시게 만들어!”
“아, 아니, 나는 그런 걸 원하는 게 아니라.”
“그 정도가 아니라면 돕지 않겠다.”
“으으으……!”
염훈은 고뇌했다.
하지만 곧 강한 의지를 담아 은혁을 똑바로 마주 봤다.
“그건 왠지 싫어.”
“왜?”
“물에 빠진 인간한테, 구해줄 테니 평생 내 노예가 되라~ 하는 것 같잖아?”
“그건 또 싫다?”
“싫어.”
“고집부리긴.”
은혁은 피식 웃었지만, 염훈의 뜻을 존중하기로 했다.
“그래도 지금 싸움에 끼어들면 3파전이 돼서 곤란하지. 그러니 저쪽이 일단락되는 동안 우린 메인 미션용 열매나 모으자.”
* * *
10분이 지났다.
“[화염 방사].”
화르르륵!!
“우끼끼!”
은혁이 화염 스킬로 원숭이들을 쫓아내고, 염훈은 [신성한 날개]로 짧게 날아가 열매를 모았다.
“좋아. 이제 더 안 모아도 되겠다.”
10분 동안 열매를 70개가량 모은 두 사람은 구름 너머를 올려다봤다.
“슬슬 끝이군.”
싸우는 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상승 길드원들은 여럿이고 박병철은 한 명이었는데도, 체력이 달리는 쪽은 상승 길드원들이었다.
은혁은 미리 띄워 보낸 메탈 서전트와의 시야 공유로 상황을 지켜봤다.
* * *
“허억, 허억.”
“진짜 괴물이야…….”
“얼마 전까지 신규 플레이어 랭킹 1위였던 이유가 있었군.”
상승 길드원들은 이를 갈면서도 감탄했다.
“크크큭…….”
박병철은 피를 흘리며 웃었다.
‘한계다.’
[늑대인간 변신]이 풀린 상태였다.
재생력이 극도로 높아지는 [늑대인간 변신]인데, 그게 자동으로 풀릴 정도면 박병철도 빈사 상태라는 뜻.
‘심장 하나만 빼 먹을 수 있다면 바로 전세 역전인데.’
상승 길드원들도 바보는 아니었기에, 일발 역전의 가능성을 경계하고 있었다.
“전원! 놈이 서 있는 나뭇가지를 노려라!”
아예 박병철이 선 나뭇가지를 통째로 파괴해서 추락사시킬 작정이었다.
그 순간.
“잠깐!! 죽이지 마라!!”
파앗!
[신성한 날개] 스킬을 쓴 염훈이 나타나더니.
“하앗!!”
빠악!!
냅다 이단옆차기로 박병철의 머리를 갈겼다.
“컥?!”
기습을 세게 맞은 박병철은 결국 나뭇가지 아래로 추락해 버렸다.
“아앗?!”
“무슨 짓인가!”
상승 길드원들이 화를 냈다.
“일단 제 소개부터 하죠. 성기사 염훈입니다.”
“아, 염훈이라면…….”
“신규 플레이어 랭킹 3위인 성기사 아닌가?”
“왜 우리 복수를 방해하는 거냐!”
자기들 손으로 박병철을 죽일 수 있었는데, 염훈이 등장해서 멋대로 경험치 스틸을 한 셈이다.
그때, 아래쪽에서 은혁이 말했다.
“오해하지 마십쇼. 박병철은 살아 있습니다.”
“뭣?!”
스윽.
구름을 뚫고 올라왔다.
[그림자 감옥]에 갇힌 박병철과 함께 올라오고 있었다.
“박병철이 추락한 타이밍에 맞춰, [그림자 지배]로 받아냈습니다.”
나뭇가지의 긴 그림자를 끌어모아 그물 형태로 받아내고, [그림자 감옥]으로 가둬서 들고 온 것이다.
“흥, 재주도 좋군.”
“그놈을 내놔.”
상승 길드원들은 은혁에게 말했지만.
“죄송하지만 드릴 수 없습니다.”
“뭐?!”
“우리 걸 스틸할 셈이냐!”
이미 상승 길드원들은 박병철을 사냥감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배신자였으니 죽여도 된다.
아니, 오히려 죽여야 했다.
그 모습을 본 염훈은 눈살을 찌푸리며, 은혁의 말이 옳았음을 실감했다.
‘동료애나 최소한의 정의 때문에 박병철을 죽이려는 게 아니구만.’
박병철이 죽어도 되는 놈이기에, 그리고 박병철을 죽이면 이득이기에 죽이려는 것에 가깝다.
“여러분 걸 스틸하려는 건 아닙니다. 그저, 여러분보다 제가 먼저 매듭지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매듭……?”
“네.”
은혁은 5층 편의점 앞에서 있었던 일을 간략히 소개했다.
“그때, 박병철은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굴욕에 대한 빚은 반드시 갚겠다. 기억해 둬!’
박병철은 떠나기 전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그건 누가 들어도 도전 선언이죠. 따라서 박병철과 저 사이의 문제는 여러분의 문제보다 앞선 일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박병철을 먼저 죽여 버리면, 저와 박병철 사이의 일을 매듭지을 수가 없습니다.”
“그딴 사정을 우리가 왜 일일이 챙겨줘야 하지?”
“그편이 더 재미있을 겁니다.”
“재미라고?”
“신규 랭킹 1, 2위였던 자들이 서로 치고받고 싸우면 구경하는 재미가 있지 않습니까?”
“으음…….”
싸움을 좋아하는 이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상승 길드원들은 싸움 구경 또한 좋아했다.
그보다 좀 더 현실적인 이유는…….
‘휴식 시간이 좀 필요해.’
상승 길드원들은 확실히 무리한 상태였다.
메인 미션만 해도 버거운데, 배신자 박병철을 추격까지 하려니 피로가 극에 달했다.
“뭐, 좋다. 해보든가.”
상승 길드원들이 원을 그리며 물러났다.
그 순간.
파차자자작!
박병철의 늑대 손톱이 [그림자 감옥]을 찢어발기고 나왔다.
‘와우, 제법인데?’
빛과 열, 또는 신성력 정도만이 [그림자 감옥]을 찢을 수 있다.
하지만 박병철은 순수한 야성과 분노의 힘을, 자신의 늑대 손톱에 집중시키고 틈새를 찢었다.
“큭, 크크크…….”
박병철은 늑대처럼 길어진 주둥이로 웃었다.
“멍청한 놈들. [고속 재생] 스킬을 지닌 나를 두고 저들끼리 떠들어대다니.”
박병철은 [그림자 감옥]에 갇힌 상태에서도 냉철하게 재생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덤벼라, 강은혁. 신규 랭킹 1위의 자리를 두고 겨루자. 네놈 심장부터 먹고 나머지 것들을 처리하도록 하지.”
은혁은 피식 웃고 말았지만.
“지랄하네 미친 새끼가.”
염훈은 욕을 박았다.
“뭐?”
“귓구멍은 재생이 덜 됐냐? 추락해서 죽을 지경이던 놈을 은혁이가 구해 줬구만 한다는 소리가 심장을 먹어? 몸뚱이 재생시키기 전에 인간성부터 재생시키지 그래?”
“이 새끼가!!”
박병철은 [늑대인간 변신]을 온몸에 발동시키고, 염훈에게 덤벼들었다.
슈왁!
손톱이 염훈의 얼굴을 노렸지만.
“[2초 무적].”
빠캉!
박병철의 손톱만 박살 났다.
“큭!”
박병철이 물러나자 은혁이 얼른 끼어들었다.
“기습을 하지 않으면 정정당당히 싸울 줄도 모릅니까? 적당히 하시죠?”
“이 새끼야! 저 녀석도 아까 내 머리통 걷어찼잖아!”
“그거야 상승 길드원들 손에 죽는 걸 막으려고 어쩔 수 없었던 거고요.”
은혁은 그렇게 말하고는, 염훈에게 작게 말했다.
“그보다 자기가 맞은 거는 하나하나 기억하다니. 치졸하지 않냐?”
“음? 듣고 보니 그러네? 자기가 남들 심장 뽑아 죽인 건 자신의 성장을 위해 당연한 일인 것처럼 넘어가면서, 정작 자기가 한 대 맞은 건 겁나게 부들거리다니.”
“괜히 구해줬나 보다. 안 그러냐, 염훈?”
“그, 그래도 죽게 방치할 수는 없지. 적어도 자기 죄를 깨닫게 하기 전에는.”
“허어, 이 상황에서도 죽이진 말자고? 역시 그릇이 크구만. 인정한다, 염훈.”
두 사람이 박병철을 앞에 두고 수군거리는 소리는 작았지만,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은 다 들을 수 있었다.
뿌드득.
박병철은 이를 갈았고, 은혁은 얼른 말했다.
“바로 [계약 대결] 들어가죠.”
“조건은?”
“진 쪽은 이긴 쪽의 명령 하나 들어주기?”
“적당하군. 내 명령을 미리 말해 두도록 하지. 내 명령은, 내가 네놈의 목을 물어뜯을 때, ‘감사합니다. 박병철 님’이라고 말하게 하는 거다.”
“안 물어봤고 안 궁금합니다. 참고로 제가 이겼을 때 당신에게 할 명령은, ‘회복한 즉시 5층으로 되돌아가 자수하여 공정하게 재판을 받고, 얌전히 감옥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당신도 은근히 말이 많아서 좀 짜증나니까, 당신을 닥치게 만드는 명령을 한다면 100층탑 전체에 축복이겠죠.”
“뭐, 이 새끼야? 말은 나보다 네가 더 많이 하고 있……!”
“대결 방식은 일대일 대련 방식으로 하죠.”
은혁은 상대 말을 끊고 본론을 이어갔다.
“죽거나 기절하거나 항복한 쪽이 패배. 대결 구역은 13층 전체. 13층 아래로 떨어지거나 위로 올라가면 장외패. 어떻습니까?”
“……동의.”
“너무 길게 하면 지루하니 한 3분 동안만 싸우는 걸로 하죠.”
“만약 3분 내에 결판이 나지 않으면?”
“그 경우에는 무승부로 하고, 무승부가 난 경우에도 제 패배로 하죠.”
“오만한 새끼가 지금 뭐라고 하는 거냐?”
“다시 말해, 당신이 3분 내내 도망만 쳐도 당신이 이긴 걸로 해주겠다는 겁니다.”
“웃기지 마! 내가 네놈한테서 도망치는 경우를 왜 상정하는 거냐!”
“왜냐하면 당신은 이미 나한테 죽을 뻔했잖습니까. 실력을 봤을 때 내 쪽이 위니까.”
“뭐?! 내가 언제 네놈한테 죽을 뻔 했……!”
“조금 전에요.”
은혁은 허공에 [그림자 감옥]을 만들어 보였다.
“당신이 염훈의 발차기 맞고 추락할 때, 내가 당신을 [그림자 감옥]으로 받아냈었죠. 만약 내가 그 스킬을 나뭇가지 바깥에서 해제했다면, 당신은 그대로 추락해서 죽었을 겁니다.”
아무리 재빠른 늑대인간도, 허공에서 방출되면 죽는다.
13층의 나뭇가지에서 11층의 바닥까지 그대로 떨어지면 재생력이 아무리 강해도 즉사 확정이다.
“방금도 당신은, [그림자 감옥] 속에서 당황하지 않고 재생을 하고 있었다고, 크크크 처웃으면서 똑똑한 척 말하셨는데, 그건 사실 내가 그렇게 봐줬기 때문입니다. [그림자 감옥]을 밖으로 내던졌으면 그대로 죽었어요.”
“……!”
“그런 사실은 무시하면서 자존심만 세우고 남의 심장을 뽑아 먹을 생각만 하다니. 늑대로 변신하더니 인성, 지성, 판단력을 완전히 상실하셨나 봅니다? 불만이면 다시 [그림자 감옥] 속에 들어가시든가. 그 상태로 대련 시작해도 난 상관없는데.”
“큭…….”
물론, 아무리 박병철이라도 그럴 수는 없었다.
“조건에 전부 동의하는 거죠?”
“……동의한다.”
“그럼 45초 정도 몸 좀 풀고 시작하죠?”
그 순간.
-[계약 대결]이 발동되었습니다!
-대결 시작까지 45초.
-44초.
-43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