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 콩나무 궁전과 잭 (1)
다른 상승 길드원들과 달리 그는 머리끝까지 화가 난 듯했다.
“이 악마 같은 놈! 이 새끼는 나중에 어쩌면 박병철보다 더 심한 놈으로 성장할 수도 있어! 우리가 여기서 합공해서 처리하자!!”
그가 외치자 다른 길드원들은 머뭇머뭇 그의 곁에 섰다.
그걸 본 은혁은 피식 웃었다.
‘운명이 그렇게 흘러가나?’
박병철의 추락사를 막았더니, 운명은 기묘하게 흘러가 은혁의 추락사를 겨냥하고 있었다.
아니면 단순히 은혁의 성격 탓일 수도 있다.
“뭐, 싸울 거면 싸웁시다.”
은혁은 목에서 뚜둑 소리를 내고 전투를 준비했다.
퍼버벅!
싸움은 5초 만에 끝났다.
“컥, 커컥…… 배신자들아……!”
싸우자고 한 한 명만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었다.
나머지 상승 길드원들은 은혁이 전투를 시작함과 동시에 무기를 내리고 항복했기 때문이다.
“배신자가 아니라 현명한 거라고 봅니다만.”
은혁은 그렇게 말하고 다른 상승 길드원들에게 금화를 조금 나눠줬다.
“저는 이대로 14층에 갈 겁니다. 여러분은 내려가시길.”
“네, 넵!”
그들은 기절한 동료를 데리고 떠났다.
이제 이곳에는 은혁과 콩나무의 이파리와 부러진 나뭇가지만 남았다.
“자, 그럼!”
은혁은 즉시 올라가는 대신, [메탈 워커 소환] 스킬로 메탈 워커를 소환했다.
“일해라!”
일을 시켰다.
“콩나무의 나뭇가지와 열매, 이파리까지 싹 다 모아!”
은혁은 독식하는 자의 본성을 드러냈다.
‘훗날 도움이 될지 안 될지는 모르지만, 콩나무는 귀한 식물이니까. 싹 다 챙겨두자.’
은혁은 특히, 삽목 방식으로 심는 게 가능한 콩나무 나뭇가지를 신경 써서 챙겼다.
‘그 누구도 콩나무 묘목을 꺾꽂이 방식으로 심어서 자라나게 하는 데 성공한 사람은 없지.’
그래도 일단 챙겨두는 게 은혁의 성격이었다.
* * *
은혁은 곧 염훈이 있는 곳으로 올라왔다.
“여어.”
염훈은 오리들에게 음료를 만들어주느라 바빴다.
은혁은 피식 웃으며 다가갔다.
“잘했다, 염훈. 네가 바라던 대로 박병철은 강제로 5층으로 날아가게 됐어. 박병철은 5층의 경비대에 붙잡혀서 재판까지 받겠지.”
“음! 그래야지!”
염훈은 흡족해했다.
“박병철은 마음에 안 드는 놈이지만, 평화적으로 해결되어서 다행이야. 그치, 은혁아?”
“어? 어어, 그렇지. 평화적으로 해결했지, 음.”
은혁은 슬쩍 염훈을 피했다.
“그럼 나도 칵테일 좀 만들어 볼까.”
파바박!
은혁은 칵테일을 적당히 만들어서 오리 왕에게 바쳤다.
“음? 엄청 적당적당히 만든 칵테일이구나?”
오리 왕은 입맛을 다셨다.
“네.”
“그럼 보상도 적당적당인데.”
“아직입니다.”
은혁은 다음 칵테일을 만들기 시작했다.
“음? 똑같은 걸 두 잔?”
의아해하는 오리 왕을 무시한 채, 은혁은 칵테일을 연달아 여러 잔 만들었다.
“얍.”
은혁은 각 칵테일들을, 뚜껑 달린 작은 항아리에 따로 담았다.
“그건?”
“발효 칵테일입니다.”
“그런 건 처음 듣는구나.”
칵테일은 차갑게 즐기는 게 기본이다.
그러니 이미 만들어진 칵테일을 발효시킨다는 건 원래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오직 콩나무의 특수한 일곱 열매로만 만들 수 있습니다.”
“허, 기대되는구나!”
“하지만 시간이 부족합니다.”
“부족?”
“열매를 발효시키려면 미션 제한 시간에 걸립니다.”
“허어, 그렇구나.”
“그러니, 이걸 두고 갈 테니, 합격 판정을 내려주시겠습니까?”
“으음, 근데 발효 칵테일 맛이 그저 그러면 어쩌지?”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설령 저의 발효 칵테일이 실패로 끝나더라도, 오리 왕께서는 열매즙을 이용한 칵테일 말고도 다른 종류의 음료 맛을 추구할 발판을 얻는 것입니다. 바로 경험이지요.”
“흥, 그것도 그렇군. 네 실험 정신을 높이 사서 합격!”
-축하드립니다! 13층 메인 미션을 클리어하셨습니다!
-13층 최초로 발효주를 제작하였습니다!
-단, 미완성이므로 보상은 훗날 오리 왕의 평가에 따라 받으실 수 있습니다!
‘좋았어!’
은혁이 만든 발효주는 인간의 입에는 끔찍하지만, 오리 왕의 입맛에는 잘 맞는 음료다.
은혁은 염훈이 최고 점수를 받게 한 뒤, 일부러 오래 기다려야 하는 발효주를 만들어 진상했다.
‘연달아 최고의 술을 바치면 효과가 적다. 기다림이 클수록 좋아.’
오리 왕이 크게 만족한다면, [바람 지배] 스킬을 전수받을지도 모른다.
물론, 플레이어는 전수받는 것은 가능할지언정 제대로 쓰기 어려운 스킬로 알려져 있지만…….
‘나는 가능할지도 모른다.’
“아, 나는 이제 쉬어야겠군. 두 사람은 어서 다음 층으로 물러가게.”
오리 왕은 날개로 머리를 문지르는 시늉을 하며 물러나더니.
“아차차. 내 정신 좀 보게.”
오리 왕은 뒤뚱뒤뚱 걸어서 은혁과 염훈을 내려다봤다.
‘뭐지?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거지?’
‘이건 내 예상 밖인데?’
염훈과 은혁은 시선을 교환하며 긴장했다.
“늘 대비하도록 하게. 인생의 앞날은 그야말로 ‘오리’무중이니!”
오리 왕이 말하자 오리들이 환호했다.
“역시 오리 왕!”
“격려사에도 오리가 빠지지 않는군요!”
오리들은 저들끼리 좋다고 떠들어대더니 어디론가 와아 하고 사라졌다.
“……진짜 적응 안 되는 것들이네.”
염훈이 소곤거렸다.
“그러게.”
은혁도 동의했다.
그제야 염훈은 은혁의 주먹이 피투성이인 걸 눈치챘다.
“야, 너 주먹…….”
“아차.”
은혁은 들켰지만 오히려 뻔뻔히 나갔다.
“내 피는 아니다.”
은혁은 두 주먹을 자랑스레 들어 보였다.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도대체 사람을 얼마나 두들겨 팬 거냐.”
“사람이 아니라 늑대인간이었는데.”
“뭐야, 결국 평화적으로 끝난 게 아니었잖아.”
“죽이진 않았음.”
두 사람은 그런 대화를 하며 오르막길을 마저 올랐다.
나뭇가지와 나뭇잎을 헤치며 올라가자, 하늘이 보였다.
“하늘…… 말고는 없나?”
염훈은 조금 당황했다.
꼭대기에 올라오긴 했는데 막상 뻥 뚫린 파란 하늘만 보였으므로.
“게다가 이건 구름이잖아?”
14층의 바닥은 놀랍게도 만질 수 있는 구름이었다.
소파의 충전재처럼 탄력 있으면서 부드러웠다.
구름의 섬에는 있을 건 다 있어서, 평야도 있고 언덕도 있고 동굴도 있었다.
“이 구름 위에서 어디로 가라는 걸까?”
“저쪽, 자세히 봐.”
은혁이 가리킨 곳에는 하늘색 궁전이 나무 꼭대기에 얹혀 있었다.
그러자 14층 돌입 메시지가 떴다.
-14층 : 콩나무 궁전.
콩나무 테마의 끝이었다.
“여기서부턴 좀 어려울 거다.”
은혁은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지고의 위상이 있지.’
사실상 ‘몰락한 지고의 위상’ 대우를 받지만, 엄밀히 말해 몰락하지는 않은, 자기 영역을 확실히 구축하고 있는 존재다.
‘14층이면 그래도 아직은 100층 초반부인데, 너무 어려운 보스다.’
은혁이 그렇게 생각한 순간, 미션창이 떴다.
<14층 메인 미션 : 보스에게 들키지 않은 채 게이트로 갈 것.>
-목표 : 14층 보스 몬스터에게 들키지 않은 채 게이트로 갈 것.
-성공 시 보너스 : 15층으로 안전하게 이동.
-실패 시 페널티 : 보스 몬스터와의 대결.
-제한 시간 : 1시간.
“들키지 않고 15층으로 탈출하면 성공이라는 건가?”
“일반적으로는 그런 거지.”
“일반적으로는?”
“가능하다면 죽이고 싶은데.”
은혁은 호전성을 드러냈다.
14층 보스를 죽이고 얻을 아이템 생각에 주먹에서 우드득 소리를 냈다.
하지만 염훈이 헛기침을 했다.
“저기, 안 싸워도 되는 거면 안 싸우면 안 되냐?”
“안 될 거 없지. 하지만 안 들키고 게이트까지 가는 게 오히려 더 어려울 수 있어서.”
은혁은 회귀 전 지식을 떠올렸다.
그때도 많은 이들이 이곳에 도착했으나, 결국 모두가 안 들키고 가는 건 불가능했다.
약한 이들이 들켜서 지고의 위상에게 학살당하는 동안, 나머지 인원이 눈치 빠르게 게이트로 이동해서 클리어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게이트가 어딨는데?”
“저 하늘색 궁전 지하에.”
“네 [그림자 도약]을 응용하면 어떻게든 되지 않겠냐?”
“그것도 가능하긴 한데, 내부 조명이 강한 데다가, 둘이서 [그림자 도약]은 난이도가 높아서 가능할지 모르겠…… 엎드려.”
은혁은 염훈의 머리를 누르면서 얼른 엎드렸다.
쿵…… 쿵…… 쿵……!
구름의 언덕 저편에서부터 땅이 울렸다.
와아아아아……!
인간과는 비교도 안 되는 우렁찬 전투 함성.
염훈은 설마 설마 하면서도 감탄을 연신 터뜨렸다.
“맙소사, 저건.”
클라우드 자이언트들이었다.
그들이 하늘색 성을 향해 돌진 중이었다.
“저렇게 많았어?”
12층에서 상대했던 클라우드 자이언트와 비슷한 덩치를 한 거인들이 우르르 달려가는 모습은 박진감 넘쳤다.
그들은 명백히 하늘색 궁전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그걸 보고 은혁은 씨익 웃었다.
“생각보다 쉬워졌다.”
그 말에 염훈은 어이가 없었다.
“쉬워졌다고? 저렇게 자이언트가 많은데?”
“그래서 쉬워졌다는 거야.”
그 순간.
“아하하하하하하!”
소년의 맑은 웃음소리.
밀짚모자를 쓴 소년은 어느새 하늘색 성 꼭대기에 선 채로, 도끼를 어깨에 걸고 있었다.
소년이 지닌 도끼는 소년의 10배 크기였고, 거인 기준에서도 커다란 크기였다.
“또 왔구나? 아저씨들. 이 성은 절대 못 돌려받는다니깐?”
“닥쳐라!!”
한 클라우드 자이언트가 외쳤다.
“우리의 성과 족장님의 도끼! 모두 돌려받겠다!”
“그게 가능할 리가 없다니까 그러네. 멍청한 아저씨들. 또 내 도끼에 썰려 봐야 정신을 차리지?”
소년의 입가가 초승달처럼 변하자, 클라우드 자이언트들은 주춤거렸다.
“킥킥! 이 쫄보 아저씨들 그럼 내가 먼저 간다!”
소년은 도끼를 쥔 채 가볍게 도약했고.
“얍!”
착지하며 도끼를 휘둘렀다.
콰콰쾅!!
도끼가 구름을 파괴했다.
휘오오오오!
구름에 생긴 구멍으로 바람이 소용돌이처럼 빨려 나갔다.
“흐아아악!”
거인들의 지나치게 무거운 몸무게가 이 경우에는 페널티였다.
구멍이 뚫려서 펄럭거리기까지 하는 구름에 점점 쓸려 내려가더니 추락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아하하! 다이어트 좀 해야겠어, 아저씨들!”
“이놈!”
클라우드 자이언트들도 반격을 날렸다.
부웅!
부우웅!
돌도끼 궤적에 따라 돌풍이 일어날 정도의 위력이었지만.
“얍! 욥, 얍!”
소년은 모든 공격을 날래게 피했다.
“츠라핫!”
역으로 도끼를 회전하며 휘둘러 거인들을 쳐 죽였다.
퍼버벅!
클라우드 자이언트들은 순식간에 죽어 나가기 시작했다.
“제기랄, 퇴각! 퇴각하라!”
클라우드 자이언트 지휘관이 외쳤지만.
퍼버벅!
그 직후 도끼에 맞아 죽었다.
“자아, 이번에야말로 완전히 몰살시켜주지!”
본격적인 학살의 시간이 시작되려던 그 순간.
철컹!
하늘색 궁전에서 큰 소리가 났다.
“뭐……!”
소년이 경악한 순간.
콰콰쾅!!!
한 거인이 발길질로 궁전의 벽을 부수더니, 궁전 내부에서 걸어 나왔다.
“쿠오오오오!!”
클라우드 자이언트들보다 몇 뼘이나 더 큰 거인이 뛰쳐나왔다.
“앗! 족장님!”
“족장님이시다!!”
“와아아아아아!!!”
클라우드 자이언트들이 환호했고 소년은 경악했다.
“아니, 어떻게?! 팔다리를 자르고 감옥에 가뒀는데?”
소년이 묻자 족장은 큭큭 웃었다.
* * *
5분 전.
하늘색 궁전의 긴 복도.
은혁과 염훈은 달리고 있었다.
“괜찮을까, 은혁아?”
“괜찮아. 계획은 있어.”
두 사람은 클라우드 자이언트와 소년이 싸우는 동안, 몰래 하늘색 궁전으로 잠입해 들어왔다.
그리고 은혁은 어디론가 향했다.
“이놈의 복도 엄청 기네?”
달리면서 염훈이 투덜거렸다.
천장도 무지막지하게 높은 것으로 보아, 본래 클라우드 자이언트들이 살던 궁전인 것으로 보였다.
“이쪽이다.”
타탓!
두 사람 앞에 갈림길이 나왔다.
“여기서 좌측으로 가면 게이트가 있는 2층 계단이 나오고, 우측으로 가면 지하 감옥으로 가는 계단이 나와. 어디로 갈래? 참고로 감옥에는 클라우드 자이언트의 족장이 살아.”
“아! 족장이라면 혹시?”
“그래. 12층의 거인이 구출을 부탁했던 그 족장이야.”
“그럼 구해줘야지! 녀석은 우리한테 황금알을 낳는 닭도 양도해 줬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