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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만 모든 직업-91화 (91/434)

91화 : 은혜의 분수

-궤도 폭격 요청 휴대폰 :

S급 아이템.

겉보기에는 구형 휴대폰이지만, 그 정체는 포격 지원 명령권이 내장되어 있는 유도 장치다.

100층탑 관리국이 직접 관리하는 [정화 폭격포]의 사용을 요구할 수 있으며, 범위와 위력도 조절할 수 있다.

시간 장소 무관하게 반드시 작동하므로, 매우 귀한 물건.

1회용.

주의 : 벽돌처럼 생겼다고 해서 실제로 다른 사람 머리를 가격하는 용도로 쓰지 말 것.

높은 곳에서 차원을 뚫고 날아오는 궤도 폭격을 요청하는 휴대폰이었다.

관리국이 말 안 듣는 하급 몬스터를 멸종시킬 때, 또는 강력한 게이트를 지키는 보스 몬스터를 즉살할 때도 쓴다.

‘랜덤 상자는 늘 새롭다니까.’

100층탑 관리국이 직접 관리하는 물건조차 때때로 담겨 있는 게 랜덤 상자였으므로.

‘좋은 거니까 됐지, 뭐!’

은혁은 그 물건을 소중히 챙겨 뒀다.

“자, 그럼 바로 20층으로 가자.”

나머지 플레이어들이 어떻게 있건 관심 없다는 듯이 은혁은 [그림자 감옥]을 들고 염훈과 20층으로 갔다.

* * *

-20층 : 은혜의 분수 공원.

평화 길드와 구원 길드, 그리고 자유시장 길드가 대략 3분의 1씩 지분을 나눠 갖고 있는 평화로운 공원.

그것이 은혜의 분수 공원이었다.

5의 배수에 해당하는 층답게 매우 평화로운 장소였다.

“와우.”

염훈은 감탄했다.

프랑스를 배경으로 한 애니메이션에 나올 법한 공원과 상점가였다.

커다란 분수가 있는 중앙 공원에 있었고, 상점가가 둥글게 세워져 있었다.

상점가에서 파는 것은 주로 디저트 계열이었다.

다양한 색상의 마카롱,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초코 크루아상, 계핏가루 많이 뿌린 티라미수, 녹차 쇼콜라 케이크 등등.

단 음식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눈이 휘둥그레질 만한 상점가였다.

“와오…….”

특히 염훈이 그랬다.

브라이언과의 대결을 돕느라 신경이 유난히 날카로웠던 염훈은 달콤한 디저트 상점을 보자 녹아 버릴 것 같았다.

‘회귀 전에도 그랬지.’

은혁과 염훈은 20층에서 스쳐 지나간 적이 있다.

그때도 염훈은 근엄한 성기사처럼 생긴 주제에, 진열장 너머로 단 음식을 꽤 오래 구경했었다.

은혁은 그 모습을 왠지 눈여겨보고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21층에서 다시 만나, 24층까지 이어지는 통합 층 메인 미션을 클리어하면서 의기투합했다.

“염훈. 이쪽으로 와. 정신 팔리지 말고.”

“음…….”

염훈의 시선은 바닐라 쉐이크맛 프로틴으로 토핑한 당근 케이크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때, 미션창이 떴다.

<20층 메인 미션 : 은혜의 분수대>

-목표 : 은혜의 분수대에 동전을 던져 넣을 것. 금화, 은화, 동화 중 무엇을 던져 넣느냐에 따라 보상이 다름.

-성공 시 보너스 : 어떤 화폐를 얼마나 던져 넣었는가에 따라 다른 서비스를 제공받는다.

-실패 시 페널티 : 없음.

-제한 시간 : 없음.

“읏차.”

은혁은 은혜의 분수대 앞에 섰다.

그리고 18층에서 얻은 다크 드워프의 금화 100개를 양손으로 꺼내서 분수대에 뿌렸다.

촤르르!

풍덩! 풍덩! 풍덩……!

-축하드립니다! 20층 메인 미션을 클리어하셨습니다!

-막대한 금화 투척 확인!

-보상을 확인 중입니다……!

일반 금화를 100개 던져도 큰돈인데, 멸망한 다크 드워프의 진귀한 금화를 100개나 던졌으니 최상급 미션 보상은 확정이라고 봐야 했다.

-축하드립니다! 은혜의 여신 접견권을 획득하셨습니다!

“은혜의 여신이여, 나와 주소서.”

파앗!

구원, 평화, 자유시장 길드가 연합해서 창조한 데이터 기반의 인공 성좌가 나타났다.

사실상 홀로그램 AI다.

-은혜의 분수에 진귀한 금화로 기부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는 은혜의 여신이라 합니다.

하늘거리는 헬레니즘 양식의 여성 복식과 비슷한 옷차림을 한 여인이 우아하게 인사했다.

-관대한 기부를 하셨으니, 최상급 은혜 측정 서비스를 받으실 수 있습니다. 자세한 설명을 원하십니까?

“아니오. 스킵 하겠습니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플레이어 강은혁과 브라이언의 은혜를 계산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어느 쪽이 더 많은 은혜를 지고 있는지도 알려주십시오.”

-사용자 인식을 해주십시오.

은혁은 [그림자 감옥]에서 꺼낸 브라이언의 손을 꺼냈다.

첨벙! 첨벙!

그리고 자신의 손과 함께 분수대 안에 넣었다.

-측정 중…….

-6층부터 19층 구간에 걸친 은혜만 계산이 가능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양쪽 모두 서로에 대한 은혜 없음 판정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럴 리가. 우린 목숨을 건 대결을 한 사이입니다. 그럼에도 상대를 안 죽이고 끌고 왔죠. 그런데 은혜 없음이라고요?”

-과도한 폭력 행사로 인해, 목숨을 살려준 것이 은혜로 판정되지 않습니다.

이 은혜의 분수대가 내리는 ‘은혜’의 판단 기준은 일반인의 은혜랑은 조금 달랐다.

구원 길드, 평화 길드, 자유시장 길드가 세운 은혜의 기준이 곧 기준이었다.

그러므로 은혁의 과도한 도발, 복잡한 작전, 무지막지한 폭력 등을 종합한 경우, ‘은혁이 브라이언을 죽일 수 있음에도 안 죽인 것’은 전혀 은혜로 판정되지 않았다.

-덧붙이자면, 플레이어 브라이언의 강은혁에 대한 원한은 측정 불가 수준인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안 물어봤고 안 궁금합니다.”

은혁은 냉담한 어조로 말하며 분수대에서 손을 뺐다.

“하는 수 없네. 염훈. 네가 해봐라.”

은혁은 대략적인 방법을 가르쳐 줬다.

염훈도 은혁이 한 것과 같은 액수의 금화를 집어넣은 뒤, 자신과 브라이언의 손을 집어넣었다.

-매우 높은 수준의 은혜가 감지되었습니다!

-플레이어 브라이언은, 플레이어 염훈에게 은혜를 갚아야 합니다!

“은혁아, 이거 뭐냐?”

“뭐긴 강제로 은혜를 측정하고 갚게 하는 장치지.”

은혜의 분수에 두 플레이어가 손을 넣으면, 둘 중 누가 더 갚아야 할 은혜가 많은지 측정해준다.

원래는 은혜를 갚으라 마라, 은혜의 분수가 메시지를 보내긴 하지만 강제력은 없다.

단, 염훈 같은 경우는 막대한 금화를 투자했기에, 브라이언이 염훈에게 은혜를 갚는 일이 강제성을 띤다.

-그럼 은혜의 낙인을 두 분께 남겨드리겠습니다.

은혜의 여신은 염훈과 브라이언의 손을 각각 붙잡고, 앵두 같은 입술을 손등에 댔다.

꽈악! 꽈악!

두 손등을 냅다 깨물었다.

“아얏!”

-은혜의 낙인이 새겨졌습니다.

“아니, 이건 그냥 깨물기잖아! 겁나 아프네.”

은혜의 여신이 남긴 이빨 자국, 또는 은혜의 낙인 밑에 아주 작은 글씨로 ‘채권자’ ‘채무자’라고 각각 적혀 있었다.

-채권자는 언제든 채무자에게 한 가지 은혜를 갚게 할 수 있습니다.

“은혜의 여신님? 은혜 갚기라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겁니까?”

염훈이 손등을 문지르며 묻자 은혜의 여신은 빙긋 웃었다.

-은혜 갚기는 보통, ‘상대의 어떤 부탁이건 하나 들어주기’ 형태가 일반적입니다.

“와 씨, 소름. 평화로운 분수대처럼 생겨서 엄청 무서운 장소였네요.”

-귀한 종류의 금화를 많이 내셨기 때문에 얻으실 수 있는 프리미엄 혜택입니다, 고객님.

“와, 대놓고 돈 밝혔어! 원래 이런 곳이었어요?”

-더 다양한 조언을 원하신다면 추가로 은화를 지불하셔야 합니다, 고갱님.

“아, 아뇨. 잠시만요.”

염훈이 은혁을 돌아봤다.

“이제 어쩌지?”

“네가 할 건 다 했어.”

은혁은 히죽 웃었다.

자기가 생각해도 은혜의 분수를 잘 활용한 것 같아서 자랑스러웠다.

두 사람은 분수에서 멀어졌다.

“자, 그럼 보는 눈이 늘어나기 전에 좀 조용한 곳으로 가자.”

모두가 보는 앞에서 브라이언에게 굴욕을 주기 싫었던 은혁은, 브라이언을 데리고 카페로 들어갔다.

‘뭐, 굴복시키긴 할 건데, 구경꾼 앞에서 조리돌림 하면 브라이언 같은 놈한테는 역효과라서.’

은혁은 브라이언의 정신을 완전히 굴복시킬 곳을 찾았다.

‘인적이 드문 카페를 한 곳 알고 있지.’

* * *

카페.

커피를 파는 곳으로, 현대인의 대표적인 휴식 공간이다.

20층에도 카페는 적지 않았다.

20층의 프랑스 테마 카페인 ‘해피 프랑스’에는 방문객은 그리 많지 않았다.

5층에도 카페는 많았고, 해피 프랑스는 좀 과도하게 소녀틱한 프랑스 테마의 인테리어 때문에 손님이 적었던 것이다.

카페의 사장 NPC인 오델리는 귀퉁이 의자에 앉아, 두 손을 치마 위에 모은 채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오늘도 손님이 별로 없네.’

자유시장 길드가 운영하는 프렌차이즈 카페가 훨씬 더 싸기 때문이다.

‘임대료는 어쩌지.’

그때, 문이 덜컹 열렸다.

“아!”

오델리가 얼른 일어났다.

“어서 오세요, 해피 프랑스입니…….”

그녀의 앞에 선 사내들은 수라장을 막 뚫고 온 사람처럼 험악해 보였다.

앙증맞게 인테리어된 그곳에 들어온 험악한 몰골의 세 남자는 기절한 브라이언, 은혁, 염훈이 있었다.

“중요한 사업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좀 조용한 자리로 부탁합니다.”

은혁이 말했는데도 오델리는 바로 대답을 못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은혁의 외모가 가장 지저분했고, 싸움의 여운이 남아 있어서 살기가 등등했던 탓이다.

“자리 없어요?”

“아! 죄송합니다, 이, 있습니다.”

오델리가 자리를 안내했다.

은혁과 염훈이 자리에 앉고, 기절한 브라이언을 테이블 위에 엎드리게 했다.

그것만 봐도 NPC 오델리의 눈에는 이들이 평범한 이들이 아닌 것으로 비쳤다.

‘침착해. 저분들은 손님이야.’

카페의 주인 NPC로서, 오델리는 저들에게 최고의 휴식 시간과 커피를 대접할 책임이 있었다.

‘최대한 담대하고 친절하게.’

오델리는 오랜만의 손님인 이들을 향해 다가갔다.

“여기 메뉴판 있습니…….”

“커피 셋.”

은혁은 보지도 않고 은화를 건넸다.

오델리는 순간 표정 관리 못 하고 좀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다.

은혁은 그 표정을 오해했다.

“아, 디저트도 시켜야 하나? 티라미수 셋 추가요.”

은혁은 은화 몇 개를 더 지불했다.

오델리가 빨리 자신들에게서 멀어지기를 바라는 기색이 역력해서 오델리는 얼른 물러났다.

“염훈. 그보다 브라이언이 깨어나면 어떤 ‘부탁’을 할 생각인지 물어도 될까?”

“그건 아직 결정 안 했는데.”

염훈은 대답하다가 은혁에게 묻기로 했다.

“은혁아. 넌 나보다 브라이언에 대해 잘 알지?”

“물론.”

“그럼 브라이언에 대해 좀 알려줘 봐. 아직도 감이 잘 안 잡히네.”

“문제가 많은 새끼지. 설명 끝.”

“음. 원래 문제가 많은 새끼야? 아니면 상황이 그렇게 몰고 가서 문제가 많은 새끼야?”

“아마 둘 다겠지. 난 둘 다 마찬가지라고 보는 편인데.”

“흠.”

염훈은 고뇌하는 표정을 지었다.

염훈은, 상황이 사람을 개새끼로 만들었다면, 최소한 한 번은 정상참작을 해줘야 한다고 믿는 쪽이다.

“자자, 그보다 깨우자.”

은혁과 염훈은 치유 스킬을 함께 써서 브라이언을 깨웠다.

“으으……!”

브라이언은 커피 향 가득한 곳에서 눈을 뜨자마자 상황을 파악했다.

“……꿈이 아니군. 내가 정말 졌군.”

브라이언은 체념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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