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만 모든 직업-92화 (92/434)

92화 : 일단락

“좋은 승부였다.”

은혁이 악수를 청했지만 브라이언은 거절했다.

“세뇌는 끝났나?”

“아니. 네 두뇌는 멀쩡해.”

그 말에 브라이언은 숨길 수 없는 기쁨을 드러내다가 곧 의심했다.

“그럴 리가. 네가 날 온전히 풀어줄 리가 없는데.”

“맞아. 그래서 은혜의 여신을 이용해 네게 낙인을 남겼다. 손등을 확인해라.”

은혁은 브라이언이 기절한 동안 있었던 일을 간략히 말했다.

브라이언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소문으로는 들었지만, 실제로 이런 게 가능할 줄은….”

“이제 넌 염훈이 시키는 부탁이라면 뭐든 들어줘야 한다.”

은혁은 그렇게 말하고 염훈을 돌아봤다.

“어? 왜 날 봐?”

“왜냐니. 네가 채권자잖아. 넌 브라이언한테 뭐든 시킬 수 있어.”

“음, 그건 너무 막중한 책임인데. 그냥 네가 지시하면 안 되냐?”

“그렇게 하려고 분수대에 갔었는데 은혜가 없다잖아.”

“이 권한, 양도는 안 되나?”

“양도는 안 돼. 그러니 네가 결정해라.”

“음.”

“가령, 브라이언에게 멍멍 짖으면서 네발로 기어 다닐 것, 같은 것을 시켜도 돼.”

뿌드득.

브라이언이 이를 갈았다.

“블릿츠 데바와의 단말이 다시 연결됐다. 작정하고 자폭하기로 하면 너네 다 뒈진다.”

실제로, 브라이언이 남은 수명을 다 바치고 은혁과 염훈을 죽이기로 작정하면, 생존을 장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은혁은 피식 웃었다.

“호오, 그딴 식으로 나오겠다 이거지? 안 되겠네, 염훈. 하고 싶은 대로 해!”

은혁은 브라이언의 협박에 지지 않고 더 도발했다.

“은혁아. 지금 네 모습이 어떻게 보이는 줄 알아? 인화성 물질이 눈에 띄면 일부러 근처에서 담배 피우는 사람 같아.”

“녀석. 그렇게 대놓고 칭찬을 하다니. 고맙다.”

“칭찬으로 들리냐, 이놈아.”

두 사람은 브라이언이라는 시한폭탄을 앞에 두고도 티격태격했다.

그리고 마침내 커피가 나왔다.

은혁은 빙긋 웃었다.

“마침 커피가 나왔군. 다들 신경이 곤두선 것 같으니 커피와 다과를 들면서 진정하자고.”

“네가 할 소리냐!”

브라이언은 은혁이 커피잔을 드는 순간을 노려 다시 또 싸울 기세였다.

하지만 염훈이 자신의 손등을 누르고 ‘은혜 부탁’하는 속도가 더 빨랐다.

“브라이언. 다른 플레이어를 함부로 기습 공격하지 않는 선에서 자유롭게 살아. 그게 내 부탁이다. 이상.”

“뭐?!”

-은혜 채권자가 은혜 채무자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은혜 채무자는 은혜 채권자의 부탁을 이행해야 합니다!

-플레이어 브라이언은 다른 플레이어를 먼저 선제공격할 수 없습니다!

“뭐야, 나름 합리적이네.”

은혁은 예상했다는 듯이 커피를 마저 마셨다.

터텅!

브라이언은 의자를 박차고 먼발치로 거리를 벌렸다.

“뭘 한 거지?!”

“그건 제가 묻고 싶은 말인데요…….”

놀란 NPC를, 브라이언은 신경질적으로 전기 충격으로 기절시켜 버렸다.

NPC는 플레이어가 아니라서 채무와 무관하게 기절시킬 수 있었다.

“말해라! 방금 은혜 부탁은 도대체 뭐였냐!”

그러자 염훈은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

“일단 그 여자 NPC부터 회복시켜.”

“뭐?!”

“내가 너한테, ‘다른 플레이어를 함부로 기습 공격하지 않는 선에서 자유롭게 살아’라고 한 건 NPC는 괴롭혀도 된다는 의미에서 한 말이 아니다. 플레이어에 대한 무분별한 복수나 괴롭힘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려보길 바라서 그렇게 은혜 부탁을 한 거야.”

염훈은 진지한 표정이었다.

“한데 네가 자유를 얻자마자 한 일이 NPC가 시끄럽다고 기절시키는 거라면…….”

염훈은 앉은 채로 손을 검에 얹었다.

“그때는 나도 널 자유롭게 공격해야겠지.”

“큿……!”

브라이언은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는 은혁의 눈치를 많이 보고 있었다.

지금 화를 내는 염훈만큼이나, 조용한 눈길로 상황을 관찰하는 은혁이 더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알았다. 내가 과도하게 경계했군.”

브라이언은 [상급 치유] 스킬로 NPC를 회복시켜줬다.

“미안하군. 사과하지. 일단 물러나 있도록.”

NPC 오델리는 허둥지둥 물러났다.

브라이언은 재차 물었다.

“너, 염훈이라 했던가? 정말로 난 자유인가?”

“네가 남들의 자유를 존중하는 만큼만 자유겠지? 예전처럼 힘으로 약자를 찍어 누르거나, 방심하고 있는 은혁이를 기습 공격하거나 하는 건 금지야.”

“왜지? 왜 그렇게 관대한, 아니, 제기랄, 하여간 이해가 안 가! 왜 날 풀어준 거냐!!”

“허참 풀어줘도 뭐라고 하네. 그러니까 은혁이한테 처맞는 거지.”

“이익……!”

“알았다, 알았어. 진지하게 대답해 줄게. 문제는…….”

염훈은 자기 턱을 문질렀다.

“나도 잘 몰라.”

“뭐?”

“내가 왜 너를 세뇌할 수도 있는데 이렇게 너그러이 해방시켜 준 건지 나도 잘 모르겠다고.”

염훈은 자기 앞 티라미수를 한입에 다 씹어 삼켰다.

“네가 불쌍해서 봐준 건 절대 아니다. 넌 착한 놈이 아니기도 하고, 널 풀어주면 고블린의 신을 상대로 살아남은 경험치 때문에 더 강해져서 우릴 죽이려 들 거라고 했는데. 맞냐, 은혁아?”

“그렇게 말했었지.”

“음, 미안하다, 은혁아. 내가 저놈 멋대로 해방시켜 줘서 화 안 나냐? 네 탑 공략 구상에 방해가 될 수도 있는데.”

“별로. 너도 19층에서 내 지시대로 무조건 따라줬으니까, 이 정도야 의논 없이 네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지. 사실 사과할 것도 없어.”

“크으, 역시 쿨한 놈이야. 아니, 우리 둘 다 쿨하다. 그치?”

“두 번 말할 필요도 없지.”

두 사람은 쿨한 사나이들답게 피스트 범프를 하며 서로를 자랑스러워했다.

“이 새끼들아! 니들끼리만 만족하면 다냐!!”

브라이언이 못 참고 소리쳤다.

선제공격은 금지지만, 뇌력의 힘이 담긴 브라이언의 목소리는 천둥이나 다름없었다.

“어허, 목소리 낮춰.”

은혁이 커피를 한 모금 하며 말했다.

“일부러 널 사람 없는 카페에 끌고 온 이유가 뭐일 거 같냐. 그렇게 소리 높이면 네 체면만 망가진다.”

“크윽……!”

“아, 단순한 체면 문제가 아니지. 네가 다른 플레이어를 선제공격할 수 없다는 게 알려지면, 너한테 억눌려온 놈들이 뭔 짓을 할지 모른다. 그러니 목소리 낮춰라.”

은혁의 말은 전부 사실이었다.

아무리 브라이언이 말 그대로 번개처럼 빠르고 강해도, 선공권이 봉쇄된 이상 약점은 크다.

브라이언은 이를 갈았고, 염훈은 머리를 긁적였다.

“아, 나도 잘 모르겠다. 왜 그런 은혜 부탁을 내린 건지. 은혁아. 네가 대신 설명 해줘 봐.”

“딱히 길게 설명할 것도 없는데?”

은혁은 브라이언을 똑바로 노려보며 짧게 설명했다.

“나는 너랑 싸워서 이겼다. 내가 바란 건 딱 그뿐. 그러니 염훈이 널 자유롭게 풀어주건 말건 난 전혀 상관없어. 그뿐이다.”

부길드장을 꺾었으니, 은혁에게는 상승 길드의 길드장에게 도전할 권리가 생겼다.

‘비공식적 도전권이므로 상승 길드의 길드장은 거절할 권리가 있다. 게다가 상승 길드의 길드장은 심연에 있지만…….’

은혁도 심연에 직접 가본 적은 없었다.

심연에 가는 방법과 심연의 대략적인 지리 기준인 ‘심도’에 관한 지식은 있었지만.

“용건 끝. 넌 다른 사람 함부로 괴롭히지 말고 자유롭게 살면 되는 거야. 커피나 마저 마시고 돌아가라.”

“웃기……!”

“웃기지 말라고 하려고 했지? 네가 뭐라고 말할지는 뻔해. ‘내가 살아 있는 이상, 나는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다’ 뭐 이런 소리겠지.”

은혁의 말은 마치 브라이언의 인생을 이미 한 번 관찰해 온 사람이 할 법한 소리였다.

‘뭐, 실제로도 그렇긴 하지만.’

회귀자 은혁은 코웃음 쳤다.

“넌 자각하지 못한 것 같은데, 그딴 식으로 날 보면서 이를 갈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내가 위라는 뜻이다.”

그 증거로 염훈이 브라이언에 대한 부탁 사용권을 적당히 낭비해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난 이제 너한테 도전하는 입장이 아니다. 네가 나한테 도전해야 하는 입장이지.”

“……!!”

“그나마도 내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넌 절대 우리에게 복수전을 걸 수도 없어.”

그러자 브라이언은 이렇게 반박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자폭할 각오로 덤비면 너넨 확실히 죽는다.”

브라이언의 말은 사실이었다.

은혜 계약은 사실 시스템적으로 100%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구원, 평화, 자유시장 길드의 힘으로 유지된다.

만약 브라이언이 은혜 부탁이고 뭐고 선제공격을 하면 구원, 평화, 자유시장 길드의 부길드장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보복한다.

브라이언이 자폭을 각오한다면, 실제로 은혁과 염훈도 무사하기 어렵다.

“하하하! 그런 식의 출구 전략 없는 엄포를 놓는 것부터가 이미 네가 많이 밀리고 있다는 뜻 아니겠냐? 인정해라. 전투력은 여전히 네가 나보다 위지. 말 그대로 수명을 깎아 가면서 고블린의 신이랑 싸우고 살아남았으니, 휴식을 취하면 훨씬 강해질 거다.”

은혁은 사실을 담담히 읊었다.

“그럼에도 오늘은 네가 패배한 날이다. 19층에서 했던 애원을 기억해라.”

브라이언은 제발 세뇌만은 봐달라고 애원했었다.

“그래서 난 내 동료를 시켜서 널 간접 지배할까 했는데, 내 착한 동료는 그것마저도 싫은지 널 자유롭게 풀어줬지. 최소한의 안전장치만 채운 채 말이야.”

“……!!”

“이 사실들은 너무 자명해서, 네가 자폭을 하건 뭘 하건 뒤집진 못해. 네게 남은 선택지는 몇 가지 있지만, 현실을 부정하면서 ‘웃기지 마!’라든가, ‘자폭을 각오하고 싸우면 너네도 무사하지 못해!’ 같은 소리를 외치는 건 최악의 판단일 거다.”

이를 갈던 브라이언은 그 말을 듣고 일순 절망했다.

‘패배? 이게 패배인가?’

몸과 마음 모두 꺾이고, 그걸 부정할 수 없게 되는 것.

그것이 패배.

브라이언은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은혁은 이렇게 말했다.

“이젠 네 차례가 된 거야.”

브라이언은 그 말을 처음에는 이해를 못 했다.

“……그래, 그렇군.”

브라이언은 서서히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네 말은 내게 복수를 권장하는 거군.”

“눈치챘나?”

은혁도 웃었다.

“복수를 하려면 일단 한 번 뼈저리게 패배해야 하지. 고맙지 않냐?”

“아아……!”

피 튀기게 싸운 사이라서 그런지, 브라이언은 은혁의 말이 이해됐다.

“그런가. 나는……! 나는 아직……!”

“의외로 뼈저리게 패배하고 복수를 해 본 적이 없지?”

그 말대로다.

블릿츠 데바는 강력한 뇌신이었고, 잘 싸우는 자에게 너그러운 성좌였다.

브라이언 또한 탑을 오르고자 하는 열망이 강한 자였다.

그래서 의외로 일대일 승부에서 패배한 적은 없다.

그나마 워잭 정도가 호적수였을 뿐이고, 페넬레시아 같은 자가 자신을 속박했을 뿐.

“이게…… 이게 바로……!”

“패배다.”

은혁은 차갑게 말한 뒤 한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패배는 복수의 어머니지. 잘 생각해봐라.”

은혁의 말에 브라이언은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생각은 잘 되지 않았지만 브라이언은 이미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강은혁. 언젠가 네게 도전하겠다. 그때 내 도전을 받아주겠나?”

“정식으로 하는 도전이라면 받아주지. 기왕이면 내가 7대 길드를 모두 지배한 직후가 어떨까?”

“후, 그것도 좋겠지.”

브라이언은 인정했다.

“네가 길드연합국의 정점에 오른 다음 날, 난 네게 도전할 것이다.”

“그날이 빨리 오길 빌자고, 브라이언.”

그렇게 은혁과 브라이언 사이의 일은 일단락이 됐다.

끼익!

브라이언은 가게 밖으로 나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