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 약속된 휴식과 치맥
“하하하!”
머리가 새하얗게 변한 남자, 브라이언이 20층의 디저트 카페 거리를 걸었다.
“아하하하! 와핫하하하!”
패배를 체험한 남자는 자신의 패배가 기뻤다.
‘이거구나! 이거였어!’
7대 길드의 부길드장이 된 이래로, 심지어는 그 이전에도 이런 패배는 겪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브라이언은 패배했다.
몸과 마음이 완전히 박살 나는 패배.
‘이 느낌이구나! 복수를 준비하는 느낌이 이거였어!’
복수하려면 한 번 넘어지고 굴러떨어져야 한다.
은혁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들려오는 듯했다.
‘브라이언. 나한테 복수하고 싶냐? 그럼 패배를 우선 인정해. 그리고 즐겁게 복수를 준비하든가 해라.’
브라이언은 분노로 이가 갈리면서도 처음 겪는 환희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강은혁. 네놈은 날 도발하고 도망치고 다시 싸우고 네 멋대로 정했지.’
브라이언은 끌려 다녔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이제는 내가 그렇게 널 노릴 거다!’
브라이언은 길드장을 미워했었다.
그래서 길드장을 배신하고 심연으로 추방했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 줄곧 후회했다.
상승 길드를 길드장 대행으로서 다스렸지만, 정작 자기 머리 바로 위에 상대해야 할 목표가 사라진 탓이다.
‘이젠 생겼어! 나는 강은혁을 쓰러뜨릴 것이다!’
상승 길드의 부길드장은 역설적이게도, 나락에 한 번 떨어진 뒤에야 목표를 찾았다.
“아하하하하하!!”
브라이언은 완벽한 복수를 위해 살 것이다.
제삼자의 눈에는 완전히 실성한 것처럼 보였다.
* * *
“이걸로 된 거야?”
염훈이 물었다.
“아마도.”
“녀석이 나중에 복수할 텐데.”
“당분간은 절대 무리지.”
은혁은 브라이언의 정신 상태를 꿰고 있었다.
“놈은 한동안 복수할 권리를 쥐고 있다는 사실에만 취해서, 역으로 바로 복수에 나서지 못할 거야. 한동안 오락가락하겠지.”
“음, 왠지 불쌍하네. 머리카락도 하얗게 변하고, 패배했다는 현실을 완전히 인정하는 대신 복수심이라는 도피구로 도망갔다는 거잖아?”
“자업자득이지. 너무 불쌍히 여기지 마라. 놈이 직접 부당하게 짓밟은 놈들은 수십 명이 넓고, 부길드장 지위로 간접적으로 괴롭힌 것들도 셀 수가 없어.”
“음, 그건 그렇지. 드레이크 길드도 사실 브라이언 놈의 부하였었고.”
염훈은 브라이언에 대한 측은한 마음을 어렵게 거뒀다.
은혁은 그런 염훈에게 이렇게 덧붙였다.
“같이 치맥 먹으러 가자고 했었지? 지금 바로 갈래?”
* * *
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광장에서, 테번에서, 카페에서, 길드 사무소에서, 신문사 입구에서, 그리고 각 건물들 뒤편의 뒷골목에서.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은 죄다 19층의 격전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19층이 완파됐다더군.”
“또 스테이지 수리하느라 한참 걸리겠구만.”
“지금 그게 문제야? 세상에, 브라이언이 정말 졌다고?”
“그냥 패배가 아냐. 미쳤대.”
“미쳤다고?”
“잘은 모르지만 강은혁이라는 놈이 브라이언을 지독하게 박살 낸 모양이야. 아주 작정하고 저질렀다는군.”
“상상이 잘 안 가는데?”
“맞아요. 브라이언은 나도 봐서 알아요. 몸이 불구가 될 정도로 맞아도 굴복하는 성격은 절대 아닙니다.”
“다들 상상력이 부족하구만. 그렇게 무식하게 때리기만 한 게 아니래도.”
“그럼요?”
“복수심에 취하게 만들었대.”
“복수심에 취하게? 음.”
사람들은 잠시 말을 잊었다.
브라이언은 복수의 대상이었다.
약한 길드를 박살 내거나 종속시켰고, 낄낄거리며 약자들을 비웃었다.
사람들이 아는 브라이언은 복수의 대상이지 복수의 주체가 아니었다.
“거, 묘하게 생소하네?”
“그러게요. 브라이언이 복수심에 취했다……?”
“그래서 브라이언은 상승 길드 본부로 돌아가지도 가지 않고, 흰 머리 풀어 헤친 채 59층으로 올라갔다고 하네요.”
상승 길드의 패배한 부길드장이 쉬지 않고 더 높은 층 공략을 하기 위해 나섰다는 뜻이다.
“그럼 강은혁은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는데?”
“그게…….”
* * *
5층의 치킨 골목.
밤 9시는 늦은 시각이 아니라 더 활기찬 시각이었다.
플레이어와 NPC들은 하루 일과를 마치고, 이곳에 들러 치킨과 맥주를 즐겼다.
그중에서도 한국인이 운영하는 것으로 유명한 ‘갈릭 치킨 본점’에는 사람들이 몰렸다.
“자, 들어가자.”
은혁은 약속대로 염훈을 데리고 치맥 맛집으로 왔다.
염훈은 은혁을 따라가며 마음을 굳게 먹었다.
‘오늘 밤은 먹고 즐기기만 하는 게 아니라, 은혁의 과거에 대해 캐묻는 날이야.’
염훈이 은혁을 의심하는 성격은 아니지만, 은혁에 대한 정보가 워낙 적었다.
“어서 오세요, 두 분이신가요?”
아르바이트하는 여성 플레이어가 물었다.
“네.”
“지금 손님이 꽉 차 계셔서 잠시 바깥 벤치에 앉아서 대기하셔야 하는데…….”
“흠, 그래요?”
은혁은 중얼거리며 인벤토리창에 손을 넣더니, 황금알을 꺼냈다.
황금알을 낳는 닭은 은혁이 인벤토리창에서 꺼내지 않아도 알아서 알을 꾸준히 낳았고, 쌓였다.
스윽.
황금알을 높이 들어 올리자, 치킨 호프집 특유의 가게 조명이 반사되어서 반짝였다.
“자리 양보해 주실 분?”
눈치 빠른 중년 플레이어 2명이 얼른 일어났다.
“거기 청년! 여기 앉어! 우린 다 마셨어!”
“근데 그거 진짜 황금이야?”
은혁은 히죽 웃으며 황금알을 던져줬다.
두 중년 플레이어는 활짝 웃더니.
“이야, 진짜네.”
“하하! 잠깐만 기다려봐.”
두 중년 플레이어는 유쾌하게 웃더니, 남은 물수건으로 자기들이 먹던 테이블을 싹싹 닦았다.
“자, 앉으시게!”
“감사합니다. 그렇게 안 치워주셔도 되는데.”
“에이, 뭘! 그보다 청년이 대단하네. 이 황금알은 어디서 구했어?”
두 중년 플레이어는 맥주에 제법 취해 있어서 은혁을 알아보지 못했다.
두 중년 플레이어의 눈에 보이는 은혁은 좀 지저분한 모습으로 귀환한 청년으로만 보였다.
은혁도 능청을 부렸다.
“아, 그야 황금알을 낳는 닭을 먼저 얻으셔야죠.”
“하하핫! 농담도 참!”
“자네가 무슨 강은혁이라도 되나? 하하하하!”
맥주 몇 잔에 취한 중년 플레이어들은 자기들끼리 웃으며 가게를 떠났다.
그 직후, 가게는 조용해졌다.
“저, 저거…….”
“진짜다.”
“진짜 강은혁이랑 염훈이네……?”
소문은 화살보다 빨라서, 가게 안에 있는 이들은 두 사람이 뭘 하고 온 건지 알고 있었다.
“미친. 부길드장 처바르고 와서 치맥 하는 건가.”
“자신감 쩌네. 상승 길드 애들이 복수한다고 안 하나?”
“아닐걸. 지들끼리 부길드장 자리 뺏으려고 하지, 쟤들한테 복수한다고 나서겠냐.”
“하긴, 상승 길드가 강약약강 기질이 좀 있어서…….”
수군거리는 소리를 두 사람은 무시했다.
“자, 앉아.”
은혁은 염훈에게 자리를 권하며 아르바이트생에게 외쳤다.
“일단 후라이드 한 마리! 그리고 생맥 500CC 두 잔이요!”
일단 일반 프라이드치킨 한 마리를 먹고, 다 먹을 즈음 갈릭 치킨을 추가하기로 마음먹었다.
“맥주 먼저 나왔습니다~.”
아르바이트생이 강냉이 한 사발과 맥주 두 잔을 갖고 왔다.
“이렇게 맥주 같이 마시는 건 처음이지?”
“그러게.”
포션은 자주 나눠 마셨어도, 5층 번화가에서 치맥을 느긋하게 즐기는 건 처음이었다.
‘정말 처음이야.’
은혁은 그렇게 생각했다.
회귀 전의 염훈은 지금의 염훈보다 마음이 더 강철 같았다.
동료 없이 20층 높이까지 도달하면서 마음이 마모된 탓이었다.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래서 염훈과 은혁은 회귀 전, 단 한 번도 느긋하게 치맥을 즐겼던 적이 없다.
‘독한 싸구려 술을 퍼먹고 길바닥에서 잠든 적이 있긴 하지만.’
정작 염훈은 성기사라서 숙취가 없었고, 은혁만 숙취로 고생했었다.
그때, 염훈은 은혁의 등을 두들겨 주며 크게 웃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서서히 친구가 되었었다.
“무슨 생각 하냐? 짠 안 하고.”
현재의 염훈이 말했다.
“아, 미안. 건배사는 네가 해라.”
“회식도 아니고 건배사는 뭔 건배사람.”
염훈은 투덜거리는 듯이 말했지만 곧 진지하게 고민했다.
“우리들의 우정을 위하여?”
“왜 의문형이야?”
“우리들의 우정을 위하여!”
“위하여!!”
따딱!!
꽉 찬 맥주잔이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벌컥벌컥벌컥……!
“크하아앗!”
“푸하아!”
두 사람은 앉은 채 부들부들 떨었다.
차디찬 맥주도 묘하게 한국식이라서, 진한 맛보다는 탄산이 강하면서도 목 넘김이 편했다.
염훈은 활짝 웃었다.
“야 씨, 이건 진짜 한국 호프집인데?”
“한국인 사장이 운영하는 곳이니까.”
“100층탑에 끌려온 뒤, 최고의 순간이구만!”
마침 치킨이 나왔고, 두 사람은 정신없이 먹었다.
“크으! 단백질이 몸에 스며드는구만!”
“내가 준 환골탈퇴 덕분이지?”
“그런 의미는 아닌데…… 아니, 실제로도 그런가?”
그랬다.
단순히 압축 근육을 주는 효과뿐만 아니라, 식사를 통해 즉시 회복하는 것도 가능했다.
이미 불패불굴의 성기사라 튼튼하고 회복력도 높은데, 강화된 인공 근육을 보유하고 있으니, 누구도 염훈을 쉽게 죽일 수 없었다.
그리고 맥주가 두 잔째일 때.
‘아차, 내 정신 좀 봐!’
염훈은 본래 목적을 떠올렸다.
‘더 취하기 전에 은혁의 과거 이야기를 들어야 해. 그것도 아주 교묘하게 이야기를 끌어내야지……. 난 할 수 있어…….’
염훈이 마음먹었다.
“야, 은혁아.”
“응?”
“너 탑 들어오기 전에 뭐 했냐?”
다짐과는 다르게 돌직구로 물었다.
“어? 내가 말 안 했던가?”
“안 했어.”
“궁금하냐?”
“엄청!”
“뭐, 딱히 비밀은 아닌데.”
은혁은 턱을 긁적였다.
대답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조용했다.
“…….”
“…….”
옆자리 사람들은 물론, 서빙하는 아르바이트생 플레이어까지 죄다 은혁의 입만 쳐다보고 있었다.
“크흠! 크흠!”
은혁이 헛기침을 여러 번 했는데도 시선을 돌리는 사람은 가게 사장과 점원들뿐이고, 몇몇은 노골적으로 수첩을 꺼냈다.
일부는 가십으로, 일부는 신문 기자에게 팔아먹을 작정인 듯했다.
‘뭐, 딱히 비밀은 아니니까.’
“나는 말하자면…… 일종의 뭐랄까, 너저분하고 풍요로운 백수였는데.”
“너저분한 풍요로운 백수? 그게 뭐야?”
“그러니까…….”
은혁은 허름한 자취방에서 생활했다.
그 자취방은 사실 은혁 명의로 된 건물의 2층 구석방이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3층짜리 낡은 원룸 빌딩을 물려주셨거든.”
은혁의 건물 2층 구석방은 배관 문제인지 여름만 되면 하수도에서 냄새가 올라왔다.
1층이나 3층 방에는 문제가 없었는데 2층에서만 그런 냄새가 나는 이유는 지금도 미스터리였다.
그래서 은혁은 자기가 그 2층 방에서 살고, 나머지 방에서 월세를 받았다.
“거, 건물주 아들이었어?!”
“건물이라고 해봤자 정말로 낡은 원룸이야. 인근 대학교까지 가려면 터널을 지나서 가야 해서 거리도 좀 멀었고. 그래서 공실도 많고 월세도 그저 그랬어. 그래도…….”
은혁은 천장을 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20대 초반 남자가 혼자 사는 것치고는 괜찮은 생활이었지.”
가족도, 친구도 없었지만, 월세는 매월 따박따박 들어왔다.
대학은 가지 않았지만 도서관에서 책은 많이 읽어서 하루가 짧았다.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배달로 시켜 먹거나, 인터넷으로 요리법을 보고 만들어 먹었다.
갖고 싶은 게 있으면 인터넷으로 시켰다.
패션, 자동차, 술, 여자 등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그것만 해도 돈이 꽤 굳었다.
물론, 은혁도 사치를 부리긴 했다.
컴퓨터 조립용 부품을 사거나, 취미 삼아 하는 게임 제작용 리소스를 미국인 디자이너에게서 구매하는 일.
그리고 월수금 낮에 인근 크라브마가 도장에 가서 한 달에 16만 원씩 내고 80분간 혼자 교습받는 것 정도가 은혁의 사치였다.
“그러다가 100층탑에 들어오게 된 거지.”
그 말을 들은 염훈은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뭐야, 의외로 금수저였네?”
“솔직히 금수저까진 아니지.”
“야, 일 안 해도 꼬박꼬박 월세 들어오고, 취미에 몰두하면서 혼자 사는 거면 남부럽진 않은 삶 아니냐?”
“뭐,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지. 다만 내가 노력해서 얻은 건물이 아니라 부모님이 물려주신 거라서 자랑하고 말 것도 없었어. 워낙 작고 낡은 건물이기도 하고.”
“크으! 그래도 부럽다.”
“그나저나 내 과거 이야기는 왜 물은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