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 워잭 암살 미수 사건 (2)
촤르르르르륵……!!
주르르륵……!!
흰색 콘크리트와 피눈물이 함께 녹고, 엉겨 붙더니 핑크색 점토처럼 변해 버렸다.
-히야아아흐아아아……!
피눈물의 성모는 한껏 울어 후련해졌다는 듯이, 방긋 웃었다.
파앗!
그리고 사라졌다.
* * *
길드연합국 건국 이래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지고의 위상, 피눈물의 성모가 강림하여 정의 길드 본부를 초토화시킨 사건.
정의 길드의 워잭과 그 부하들이 신속하게 반응한 덕분에 사상자는 20명 이하였지만, 그나마 정상적인 길드로 여겨지던 정의 길드 본부가 초토화되는 것은 매우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피눈물의 성모는 그냥 나타난 게 아니야. 내부자가 유도한 게 확실해.”
연구 길드의 길드장 빌이 현장에 나와 손수 피눈물 샘플을 채집하면서 중얼거렸다.
“7대 길드의 길드장들이 연합하여 [맹세] 스킬을 맺어 둔 상태라서, 강력한 성좌의 본체라 해도 멋대로 허락 없이 5층에 침입은 못 해. 즉, 누군가가 지고의 성좌를 강림하도록 유도했다는 거지.”
“그게 누굴까요?”
워잭의 비서가 물었다.
비서 겸 첩보관인 그녀의 이름은 엘리슨.
B+급 직업 ‘죽으면 다음 날 부활하는 사령술사’였다.
죽을 때마다 최대 체력이 깎이고 다음 날 5층 어디선가 부활한다.
엘리슨은 워잭 및 정의 길드 본부 테러 사건을 수사할 책임자이기도 했다.
“누가 이런 짓을 했는지는 모르지. 그걸 수사하는 게 정의 길드 역할 아님?”
빌은 졸린 눈으로 말했고, 엘리슨은 인정했다.
“좋습니다. 특수 수사 본부를 설치하죠. 다만…….”
“엑토플라즘 역탐지 장치나, 수사 장비 정도는 지원해주지.”
“감사합니다. 빌 길드장님.”
“뭘, 서로 돕는 거지. 대신에 이 피눈물 샘플은 좀 더 많이 챙겨간다?”
“물론입니다. 저어, 그보다…….”
“아, 저스티스를 깨우는 일에는 동의할 수 없어. 미안.”
정의 길드의 길드장, 저스티스는 현재 스스로를 봉인한 상태였다.
그리고 저스티스는 기묘하게도, 자신의 봉인을 풀고 싶다면, ‘정의 길드가 아닌 다른 길드의 길드장을 통해서만 봉인을 해제할 것’이라고 말해둔 상태다.
문제는 현재 활동 중인 길드장이 극소수이고, 대부분 휴식 중이거나 5층을 떠난 상태라는 점이다.
“너무 염려 말라고. 에드몽 로카르가 말했듯이, 모든 범죄는 흔적을 남기니까.”
빌은 그렇게 엘리슨을 격려한 뒤 떠났다.
‘책임이 막중하네.’
주로 음지에서 활동하던 비서 겸 첩보관인 엘리슨은 일을 시작했다.
“수사를 시작합시다!”
안 그래도 정의 길드 1군은 던전 공략대보다는 특수 수사관에 가까웠다.
그들의 첫 번째 취조 대상은 물론…….
“캬악! 차라리 날 죽여라!”
진실의 도끼에 속박된 엑토플라즘이었다.
* * *
정의 길드 뒤편의 무기 상점가 NPC들이 수군거렸다.
“맙소사, 워잭 님은 어떻대?”
“천만다행으로 구출되셨다는군.”
“어? 그럼 다행이구만!”
“하지만 피눈물의 성모가 흘린 피눈물은 워낙 지독한 독극물이라서 해독제도 없다는구먼.”
“아하, 성좌의 본체가 흘린 피눈물이라 그렇구만.”
“그럼 워잭 님은 돌아가시는 건가?”
“평화 병원 1인실에 입원하셨다는군. 다른 이도 아니고 부길드장이니 견디실 거야.”
워잭은 그나마 인망이 높은 부길드장이었기에 다른 길드에서도 도움의 손길을 보내왔다.
평화 길드의 치유 특화 길드원들 다수가 나서서 [영체 치유] 스킬로 워잭의 몸을 치유하고 있었고, 자유시장 길드의 부길드장 테일러가 워잭의 몸이 더 망가지지 않게 유지시켜 주고 있었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행복 길드가 서서히 기지개를 켠 것이다.
“꼴 좋구만.”
“거, 잘난 척 오지더니만 정작 자기네 길드 건물 초토화됐죠~.”
“아무것도 못 하죠~ 우리가 깽판쳐도 부드을~ 부들~ 크크크.”
자기네 구역에서만 놀던 행복 길드원들이 양지로 흘러나온 것이다.
정의 길드원들은 화를 냈다.
정의 길드 본부 테러 사건 때문에 거점이 파괴되고, 수사 때문에 치안 유지가 어려웠다.
그 틈을 기다렸다는 듯이 행복 길드가 기어 나와 양아치 짓을 시작하니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의 길드보다 더 화가 난 쪽은 자유시장 길드였다.
행복 길드의 부길드장 시리우스와 자유시장 길드의 부길드장 테일러는 비공식 회동을 가졌다.
“안녕하십니까.”
카지노의 지배인 옷차림을 그대로 입은 시리우스가 먼저 인사했다.
“안녕하기 어려운 시기이구려.”
테일러가 무표정하게 입을 열고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요새 불법 약물을 팔던데.”
“불법 약물이라뇨?”
“행복 포션 말이오.”
행복 길드는 평소 행복 길드 뒷골목에서만 팔던 행복 포션을 대놓고 팔기 시작했다.
크게 몇 모금만 마셔도 매우 큰 행복감을 느끼게 하는 그것의 정체는 연구 길드도 성분 분석에 실패했다.
“허허, 길드연합국 법률에 포션류 규제에 관한 법률은 없습니다.”
“하지만 마약류 규제에 관한 법률은 있지.”
“귀하께서는 우리, 행복 길드가 제작 판매 중인 행복 포션이 마약이라고 대놓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건 좀 모욕적인데요.”
“정의 길드가 휘청거리니까 노골적으로 양지에서 활개 치는 이들이 모욕감을 느끼긴 하는 거요?”
“무슨 말씀을. 오히려 수치를 모르는 건 그쪽 아닌지요? 자유시장 길드야말로, 평소에 독점적으로 팔던 술과 담배 계통의 기호품 사업이 위축될 거 같으니까 견제하시는 거 아닙니까?”
“흥, 우리가 이익을 최우선으로 추구하는 집단인 건 맞지.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합법적인 물건만 판매하오. 그 행복 포션은……!”
“시끄럽고, 더 듣고 싶지도 않군요.”
“뭐요?”
“뒤 내용도 내로남불 아닙니까?”
시리우스는 상대 말을 끊고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가 행복 포션을 공개적으로 팔기 시작한 지 겨우 하루입니다, 하루! 그것 가지고 대뜸 나를 불러서 추궁하다니. 같은 7대 길드의 부길드장끼리 너무 하지 않습니까?”
시리우스는 화난 목소리로 말했지만, 테일러는 그 유도에 넘어가지 않았다.
만약 테일러가, ‘나는 나와 그쪽이 같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하는 식으로 대놓고 말할 경우, 시리우스는 그걸 빌미로 지저분한 말싸움을 이어가서 고의로 논점을 이탈시킬 터였다.
말싸움으로 문제의 핵심은 건드리지도 못하고 시간을 보내는 건 테일러 입장에서 그 자체로 손해였다.
테일러에게는 시간과 황금이 동일했으므로.
시리우스는 입을 다물고 노려보는 테일러를 보며 빙긋 웃었다.
“말다툼할 시간도 없다는 거 압니다. 그쪽이 굽히시죠. 그게 싫으시면 전쟁을 걸어보시든가.”
시리우스가 말하자, 그의 뒤편에 있던 행복 길드원들이 낄낄 웃었다.
‘악마의 제안이군.’
자유시장 길드가 행복 길드에게 먼저 선제공격을 가하는 경우, 길드 간의 전면전이 벌어진다.
그리고 전쟁은 돈이 안 되는 사업이다.
다른 길드끼리 전쟁할 때 보급품을 파는 건 좋은 사업이지만, 전쟁의 주체가 자유시장 길드가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승리 후에 행복 길드로부터 전리품을 취한다면 이득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 경우에는 승리도 불투명하거니와 이기더라도 입을 피해가 더 크다는 계산이었다.
“그런 식으로 나오면 나도 확실히 말해두겠소.”
테일러도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처음부터 다시 협상합시다. [시간 되감기].”
-이 방 안의 시간이 되감겨집니다!
테일러의 눈에만 보이는 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협상 장소인 밀실의 시간만이 과거로 되돌아갔다.
슈우우우우……!
‘6분 정도면 되겠지.’
물론, 테일러 입장에서는 대출혈이었다.
시간을 되감는 장소와 그 안의 플레이어 숫자에 따라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므로.
그나마도 전 세계의 시간을 되감는 게 아니라, 이 방과 방에 있는 플레이어들의 시간만 되감을 뿐이었다.
우뚝…….
다시 시간이 정상적으로 흘렀다.
“안녕하십니까.”
시리우스가 두 번째로 인사했다.
카지노의 지배인 옷차림을 그대로 입은 그는 뭔가가 바뀌었음을 깨달았다.
“안녕하기 어려운 시기이구려.”
테일러는 처음과 달리 히죽 웃으며 같은 대사를 읊었다.
“……방금 시간을 되감은 겁니까?”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테일러는 능청을 떨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을 되감은 이유는? 얼마나 시간을 되감은 겁니까?”
시리우스가 민감하게 굴었다.
사실, 테일러를 상대하는 부길드장이라면 누구라도 마찬가지였다.
“낭비할 시간 없소.”
테일러는 그렇게 승자의 미소를 지으며 떠났다.
시리우스는 테일러가 어떤 의도로 시간을 되감았는지 의심하느라 돌발 행동에 나서진 못할 터였다.
‘엄청난 돈과 시간 낭비였어.’
그래도 행복 길드 부길드장의 속마음을 알아냈다.
‘싸움도 각오하고 덤비는 거였어. 건방진 놈. 정의 길드가 무너졌으니 견제 안 받는다 이거지?’
테일러는 시리우스의 행복 포션 사업에 깽판 칠 궁리를 했다.
당사자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당사자들의 노력 하나하나가 제2차 길드 대전의 도화선을 만들고 있는 중이었다.
만약 정의 길드가 빠르게 회복되지 않는다면, 본래 역사보다 빨리 터질 수도 있었다.
* * *
“은혁아, 일어나.”
“으으.”
은혁은 인사불성이었다.
맥주 때문은 아니었다.
휴식 없이 브라이언과 싸우느라 쌓인 피로와 그걸 견디기 위해 마셨던 농축 커피의 후유증이 뒤늦게 몰려온 탓이다.
“벌써 이틀 넘게 잤어. 일수로는 사흘째야. 일어나.”
이틀하고도 몇 시간 전의 밤, 11시까지 치킨 맥주를 즐기고, 자정 전에 숙소인 행운 테번으로 돌아왔다.
그 입구서부터 은혁은 휘청거렸다.
염훈은 그런 은혁을 객실에 던져 준 뒤 고개를 갸웃했다.
‘난 왜 멀쩡하지?’
2차 각성을 한 불패불굴의 성기사인 데다가, 환골탈퇴의 근육과 내장 기관을 지니고 있었기에 농축 커피의 부작용에 면역이었다.
“그동안 일 엄청 많이 터졌다고. 얼른 일어나!”
염훈은 지난 며칠간 테번 1층에 머무르며, 은혁에게 상승 길드원들이 복수하러 오나 안 오나 감시했다.
그러는 한편 소문도 많이 들었다.
정의 길드 본부 파괴라는 초유의 사건 때문에 나머지 길드들이 안 하던 짓들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으으. 너무 시끄럽게 말하지 좀 마라, 염훈.”
평소에 늘 냉철하고 태연했던 은혁은 비틀거리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일단 커피나 한잔하자.”
두 사람은 밖으로 나가서, 광장 근처의 카페로 나갔다.
평소보다 바닥에 쓰레기가 많고, 행인은 줄었다.
5층에 적응한 플레이어들도 모두 무기를 겉으로 드러낸 채 걷고 있었고, 게이트로 가기 전에는 각자 자기 등 뒤를 살폈다.
“분위기가 묘해졌구만.”
은혁이 졸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치? 겨우 2, 3일 동안 온갖 일이 일어났대도.”
두 사람은 카페 야외 테이블에 자리 잡은 뒤 커피를 시켰다.
커피가 나오는 동안, 은혁은 멍한 머리로 생각했다.
‘음, 워잭 암살 사건은 본래 역사대로 발생했구만.’
표면적으로는 정의 길드 파괴였지만, 암살 지령을 내린 자의 본래 목적은 워잭을 죽이는 일이었다.
‘그래야 사회 불안감이 조성되니까.’
워잭 암살을 시도한 자의 목적이 그것이므로.
‘구원 길드 놈들 잠잠하더니만. 결국 회귀 전 역사대로 일을 저지르는군.’
은혁은 범인이 누군지 이미 알고 있었기에, 결말을 알고 추리소설을 읽는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은혁과 염훈이 진한 커피와 크루아상으로 아침 식사를 할 무렵.
“여어, 용감하시네, 두 분.”
노란 조끼를 입은 청년들이 다가왔다.
“커피 맛 쓰죠? 근데 이 행복 포션을 한 방울만 넣으면 맛이 무척 좋아집니다.”
“한 병에 단돈 60골드!”
“샘플로 몇 방울은 공짜로 드릴게.”
“자자, 돈 꺼내시라!”
노란 조끼 청년들은 행복 길드의 말단 길드원이었고, 행복 포션을 강매할 기세였다.
“……요즘 며칠 사이에 치안이 이렇다, 은혁아.”
염훈은 침통한 얼굴로 말했지만 은혁은 히죽 웃었다.